<시편이 초청한 시인_ 박소란 신작시>
낭독회
박소란
난로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차례로 이야기한다
검은 종이 사이사이 흰 문장 같은 것 깊이 간직해온
진심 같은 것
서로의 열중한 얼굴을 공들여 살피며
어딘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선한 마음이 으레 그렇게 하듯
투명하게 부푼
금방이라도 깨질 듯 떨리는 목소리
그리운 ○○에게, 로 시작되는 편지를 읽기도 한다
편지가 끝나면
눅눅한 가슴은 더 눅눅해지고 기도하는 사람처럼
고요히 두 손을 모아 박수를 치고
매캐한 어둠이 피어날수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엇을 털어놔야 하나 어떤 진심을
나는 고민하게 되는데
오기로 한 누군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아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따뜻하다,
한 사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모두 일제히 불을 바라보는데
불타고 있는 것
그게 뭔지는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바깥에 누가 서 있는 것 같아 나는 자꾸 문 쪽을 힐끔거리고
왜 그러냐고 거기 뭐가 있냐고
한 번쯤 물어봐 주기를 은근히 바랐을지도
이따 집에 어떻게 가세요?
옆에 앉은 사람에게 뜻 없는 귓속말을 건네 보고도 싶은데
조금 더 가까이 의자를 당겨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또 다른 사람이 고개를 숙여 천천히 흐느끼기 시작한다
바깥에 웅크린 누군가, 나는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고
그는 손짓한다
어서 나오라고, 어서
거기서 대체 뭘 하는 거냐고
나는 잠시 함께 울 수 있게 된다
<시편이 초청한 시인_ 박소란 대표시>
서해
박소란
주먹을 불끈거리듯 한 움큼 모래를 움켜쥐면
스르르 빠져나가 버린다
잘리고 잘린 비닐 조각만 남는다
주머니에 두고 꼬깃대다 이따금 꺼내 멍하니 들여다보곤 할 그런 것
수평선은 흐릿하고
어떤 기도로도 잡히지 않고
‘삶은 여행’이라는 말,
‘여행’이 꼭 ‘미행’ 같아 지금껏 몰래 누군가의 뒤를 밟아온 것만 같아
그래서일까
이토록 죄지은 기분
바다는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데
온갖 신비가 부신 지느러미를 흔들며 산호 틈 곳곳에 숨어 있다는데
해변에 앉아 생각한다
젖어 할딱이는 발과 그 발을 닮은 무수한 발자국
무수한 모래성
무너졌거나 이제 곧 한숨으로 무너질
언젠가 딱 한 번
육지에 정박한 향유고래를 본 적이 있다
밧줄에 친친 감겨 진득한 신음을 토해내던 고래
찢긴 살갗으로 솟구치던 피 너울처럼 퍼렇게 벌겋게 일렁이던
하늘
영화에서였다
길고 긴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어느새 물과 흙이 구분되지 않을 때
나조차 나를 알아채지 못할 때
캄캄한 해변에 앉아 생각한다
여기는 해변이 맞는지
바다가 맞는지 진짜
바다는 살아 있는지 아직 그 아름다운 바다는
귓가에 넘실대는 파도 소리
지직 거리며 재생되는 울음소리
일어나 천천히 걷는다
걸으며 생각한다 내가 어느 쪽을 향해 걷는지
아득히 먼 심해로, 아니면
인간이 흉내 낸 빛 여기 오래된 펜션으로
박소란 시인
2009년 『문학수첩』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