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사커
- 김선오
축구를 멈출 수 없었다 맨발로 공을 찼다 골대가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가로등에 흰 양말이 걸려 있었다
운동장으로 끊임없이 공책이 날아왔다 끊임없이 발목이 꺾였다
창문에서 붕대가 쏟아져 내렸다
너를 넘어뜨리고
공을 높게 찼다 공 맞은 가로등에 불이 꺼졌다 고개를 꺾고 하늘을 보고
공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발등 위로 새가 떨어졌다
톡톡 새를 찼다 얼룩무늬 새는 나의 발동작대로 힘없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발등에 머무르기를 반복했다 공은 어딨니 공을 데려와 새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프니 눈 좀 떠 봐
공책이 날아오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네가 달려오고 육각형이 굴러오고 잔디가 들썩이고
발등에서 툭
굴러떨어지는 새
이 정도 부상이면 충분한 것 같다
우리 그만하자
어느 새 터진 공 속에 새를 넣고, 어디에 묻지, 두리번거리면 등 뒤에서 여기라고, 이쪽으로 패스하라고
— 시집 『나이트 사커』(아침달, 2020)
* 김선오 : 본명 김선아.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20년 시집 『나이트 사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나이트 사커」의 ‘나’는 가로등 불빛에 기대 축구를 하다가 “너를 넘어뜨리고”, 공을 차올렸을 때 불은 꺼진다. 사방은 암흑이고, 너도 차올린 공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떨어질 공을 기다리고, 그 자리엔 ‘새’가 떨어진다. 그리고 진짜 ‘나이트 사커’가 시작된다. 불 꺼진 밤, ‘너’도 보이지 않고, 공도 보이지 않고, 자꾸 발등으로 돌아오는 새만 겨우 보일 뿐, 선명한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밤의 축구에는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을 가진 새가 공이 된다. 찰 때마다 아파하고 날아갈 수 있으면서도 되돌아오는 새를 ‘나’는 더 차지 못하고 “우리 그만하자”라고 말하며 “터진 공 속에 새를 넣”고 두리번거릴 때 “이쪽으로 패스하라고”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너’일 것이고, ‘우리’의 축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느 면에서도 둥글고, 구를 때는 검고 흰 무늬들이 모두 뒤섞여 보이는 공은 터진 후에야 제가 갖고 있던 무늬를 다시 갖고, 찌그러진 구가 된다. 매끄럽게 잘 굴러가지는 않아도, 제멋대로의 모양이어도, 그제야 구로 보이는 공 속에 ‘새’를 넣고 축구는 계속될 것이다. ‘나이트 사커’는 분명 축구의 비주류다. 낮이 아닌 밤에, 공이 아닌 새를 차기 때문에. 그렇지만 또 분명한 것은, 이 축구에서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불이 켜져 있을 때 ‘나’는 자꾸 발목이 꺾이면서도 ‘너를 넘어뜨’렸다. 둘이 하는 축구는 각자가 공격수이자 수비수이다 보니, ‘나’는 ‘너’를 공격하고 골대에 골을 넣어 점수를 따야만 한다. 하지만 마침 골대는 부서졌고, 불이 꺼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사라진 공 대신 ‘새’를 만났고, ‘너’를 공격하지 않아도 된다. 얼굴을 마주보는 대신 목소리를 따라 ‘너’에게 새가 담긴 공을 패스하면서 ‘나이트 사커’가 시작된다.
김선오에게서 사랑을 읽어내는 것은, 결국 모든 건 사랑이 해결해준다는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한밤중의 축구처럼 누군가는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랑도 분명 여기 있다는 걸 읽어내는 것이다. 당연함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던 ‘나’에 대해서, 누군가는 그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사랑 없음’이라고 말할 그런 사랑에 대해서, 김선오는 말한다. 그런 비주류들의 ‘없는 사랑’이 이 시의 세계로 초대된다. 거절되거나 거부되거나 숨기거나 쫓겨나는 것들이 차곡차곡 밤의 축구장으로 들어서, 다 같이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무도 이기지 않고 지지도 않는 축구를 한다.
문혜연 시인 / <딩아돌하> 2022 봄호 「‘나’를 말하는 목소리들」 부분
1992년 제주 출생.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 졸업.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201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이미 불타버린 사랑밤에 축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생각하게 된다. 이 캄캄한 밤에 저토록 환한 빛을 켜두고, 사람도 공도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저곳에서 저토록 열심이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고,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며, 이 운동은 영원히 끝이 없겠구나. 이 시집의 제목이 『나이트 사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시집 역시 이처럼 하염없이 어둠 속을 오가는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집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집을 읽으며 계속한 생각이다. 김선오의 시는 사랑이 끝났다고 집요하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의 불가능을 파괴하려 하는 것 같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이미 불타버린 사랑, 그리하여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랑. 그러나 그러한 사랑을 ‘나’만이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또한 ‘나’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사라지거나 훼손되지 않는 진실이 되리라. 시집 속에 등장하는 여러 ‘너’들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읽히는 것도 그런 까닭 아닐까. ‘너’는 존재한 적 없으나 ‘너’는 영원히 존재한다. “나는 너를 부른다. 너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나는 너를 부른다. 너는 오랫동안 발생한다.”(「실낙원」) 이 시집은 존재하지 않는 ‘너’를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집요한 고투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저한 사랑의 (불가능의) 기록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가운데 하나는 ‘우리’라고 말하는 순간에 있다. 이 시에서 ‘우리’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을 잘 살펴보라.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마치 허공에 발을 딛고 곧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위치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 ‘우리’가 “아직 없는 우리”(「사랑 없음 입장하세요」)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라고 말하면서도 좀처럼 ‘우리’가 보이지 않는 이 세계가 내게는 처절하고도 가슴 아프게 읽힌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너’를 찾을 수 있고, 또 ‘우리’의 향방을 헤아릴 수도 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고, 또 이 시집이 그려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황인찬 시인 / 시집 추천사
첫댓글 시인은 축구를 보면서 기발한 시어를 끌어냈군요
축구 경기를 볼 때 마다
사람이 공을 가지고 노는지
공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지. 눈을 뗄수 없이 재미있는 경기인것 만큼은 확실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