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 이창수
아버지 참나무 베어다
어머니 목욕물 데운다
더운물에 찬물 붓는 소리
더운물에 손 담그는 소리
다시 한 바가지 찬물 붓는 소리
손으로 물 휘젓는 소리
치매 앓는 어머니 안아다
아버지가 목욕시키는데
머리 감기는 소리
물 끼얹는 소리
침묵은 참나무보다 무겁고
산불 지나간 자리
연둣빛 고사리 돋는 소리
― 시집 『횡천』(문학세계사, 2022)
* 이창수 : 1970년 전남 보성 출생. 1985년 광주진흥고등학교에 입학, 문학동아리 <가문비> 가입.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창과 박사 수료. 시 전문지 2000년 봄 <시안> 신인상에 「겨울 물오리」 등 5편이 당선되어 등단. 첫 시집 『물오리사냥』(천년의시작, 2005)을 냈다. 두 번째 시집 『귓속에서 운다』(실천문학사, 2011), 세 번째 시집『횡천』(문학세계사, 2022)이 있다. 10년에 걸쳐 광주대, 중앙대, 목포대, 협성대 등에서 강의. 2015년 고향 보성에서 인문학 학교인 <(사)시가흐르는행복학교>를 만들어 이사장을 맡았다. 2016년 보성 예총 초대 회장. 광주 남구청의 지원을 받아 인문학 학교인 <남구대학>을 개설 운영했다.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청 홍보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침묵은 모든 언어의 뿌리. 모든 말은 뿌리로 돌아가면 뜨거운 침묵에 닿는다. 그것은 어느 유행가에 따르면 ‘메마른 입술’을 만들고 더 들어가면 모든 오해를 풀어 주고 투명한 의미를 비춘다.
이 운(?)이 없는 아버지는 어머니의 침묵에 또한 뜨거운 침묵으로 복무해야만 한다. 운이 없다고 하니 가볍디가벼운 입술의 말이지만 실은 무겁고 깊은 사랑의 침묵이다. 모든 남정네는 부인의 손에 주검을 맡겨야 운이 좋은 셈인데 남편에게 자신의 최후를 부탁하는 부인의 운세는 또 어떤 것일까? 결론은 나쁘지 않음!
어느 날 옆방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목욕시키는 소리를 듣는다. 단번에 맞춰지지 않는 물 온도…. 서로의 살아온 내력도 그랬을 것이다. 순전한 ‘소리’의 기별로만 짐작하는 먹먹한 ‘씻김’의 영상이다.
젊은 한 시절 뜨겁던 마찰의 기억은 휘발되어 없고 대지에 가까워진 어머니의 몸뚱이에 물을 얹는 아버지의 소리는 그러나 처음 들어 보는 속 깊은 소리다. ‘산불 지나간 자리’에만 ‘고사리 돋는 소리’가 나는 법! 그대로 회한이고 뭐고 미뤄 두고 어여쁜 소리로만 듣고 옷소매 잡아끌어 눈가를 훔치자!
장석남 시인 / 서울신문 2022. 10. 21.
참 좋은 시는 시 바깥의 모든 말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시가 그렇다. 도대체 이 시에다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겠는가. 한 행 한 행 더해질 때마다 경건해지고 웅숭깊어지는 소리들이 마침내 도달한 곳은 "참나무보다" 무거운 "침묵"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그 "침묵"은 필멸할 생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장엄한 적멸이면서 동시에 "연둣빛 고사리 돋는 소리"를 품고 있다. 소리로 시작했으되 소리를 지워 궁극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니 궁극에 궁극을 더한 셈이다. 한마디로 지극한 시다.
채상우 시인 / 아시아경제 2018.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