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를 따르는 사람
- 김동균
창가에 앉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그것을 따르고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 둘러맨 앞치마가 하얗고 당신의 얼굴이 희고 빛이 나는 곳은 밝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우유를 따르고
우연한 기회에 인사를 건네고 거기에서 우유를 따르고 다음 날에도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는 그런 사람에게 매일 우유를 따르는 게 지겹진 않나요, 그곳은 고요하고 그곳에서 당신을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어떤 날엔 TV를 켰는데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한다. 책에서도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이 앉아있는 지면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서가가 빛나고 읽던 것을 덮어도 빛나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고 열 번을 쳐다보면 열 잔이 되는 우유가 있다. 실내는 눈부시고 새하얗게 차오르는 잔이 가득해지고
그런데 누가 우유를 옮겨요, 지켜봐도 우유를 옮기는 사람이 없는데 우유를 가져다준 적이 없는데, 당신도 환하고 실내도 환하고 당신이 우유를 계속 따라서 그런 거잖아요. 문밖에서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치고
우유가 흐르는 골목이 차갑고 당신은 계속 따를 수 있겠어요, 당신의 손이 새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 김동균 : 1983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등단.
● 당선소감 / 더 많은 사람과 어딘가로 향한다… 거기에는 꽃도 새도 있다
지하철이었다. 거기서 이름을 들었다.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처음 듣는 목소리로부터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다. 어제는 호명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렇게 되었다. 이것도 삶이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시가 꼭 내 것만 같았다. 어느 날부터는 시가 나보다 나았다. 시를 쓰고 거기서부터 떠나는 게 좋았다. 또 어느 날엔 시가 나보다 훨씬 더 나았다. 노란 옥스퍼드 노트에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거기에 살고 있는 기분 같은 게 있었다. 더 이상 노트에 적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느 순간에는 손가락에서 무언가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거기에 삶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상관이 없다. 초대 받은 시도 그렇게 나왔다. 앞으로도 즐겁고 외롭고 무지한 일들이 펼쳐질 거다.
문을 열어준 김혜순·조강석 선생님께 감사를 표한다. 이승하 선생님께 각별한 마음을 전한다. 천변을 함께 걸었던 그날의 이수명 선생님은 사랑하는 시인이다. 김근 선생님,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작인(作人)이 있다. 더 아득한 곳에 윤한로 선생님도 있다. 예쁘기만 했던 학창 시절의 그 이름을 다 부르지 못해 미안하다. 반드시 불러야 하는 이름도 있다. 하형은 거의 모든 시를 함께 읽어주었다. 그리고 수영과 신지도 있다. 울고 싶지만 울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처럼, 부르고 싶지만 부를 수 없는 이름도 있다. 이런 것도 삶이다.
무궁한 세계에 사는 엄마 아빠. 그 둘 아래서 나는 자랐다. 함께 자란 동생도 있다. 더 많은 선생, 더 많은 사람과 어딘가로 향한다. 거기에는 꽃도 있고 새도 있다. 나는 이게 진짜 삶이라고 말해본다.
김동균
● 심사평 / 일상을 이야기로 벼리고 재기 담아… 무늬 짜는 솜씨가 일품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일별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개성적인 목소리가 드물다는 것이었다. 동화적 상상력에 기대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지만 매력적인 문장을 찾기 어려운 작품이 다수 있었다. 공들여 말들을 조직해 놓았지만 그 이음매만 불거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쉽게 몇몇 기성 시인의 영향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당선권에 든 몇몇 작품의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숙고를 거듭해야 했다.
‘말이 간다’외 5편은 동화적 상상력에 기대고 있지만 풍부한 이미지가 사용되었고 이미지들이 겹치면서 오히려 뜻이 투명해지는 신선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고른 수준의 말끔한 작품들 중 당선작이 될 만한 개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없었다는 게 아쉽다. ‘무너진 그늘을 건너는 동안 어깨에 수북해진 새들’ 외 5편은 장점과 단점이 같은 지점에서 발견됐다. 개성 있는 자기만의 문장이 돋보였으나 이로 인해 때로는 어설프고 작위적인 문장이 돌출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짧지 않은 논의 끝에 결국 ‘우유를 따르는 사람’을 당선작으로 고르기로 결정했다. 일상을 이야기로 벼리고 여기에 재기를 담아 삶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흔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었다. 가상과 가정의 세계를 덧붙여 무늬를 짜는 솜씨가 일품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사로워 보이는 비범함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큰 성취를 기원한다.
김혜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조강석 연세대 교수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른다.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는 당신의 모습이다. 우유도 하얗고, 앞치마도 하얗고, 당신도 흰 얼굴을 하고 있다. 여기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진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 한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우유를 따르는 당신의 모습이 전부가 되는 사람이 있다. 아름다움에 끌리면 아름다움이 전부가 된다. 그래서 TV를 켜도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하고, “책에서도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등장한다.” 어디에나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있게 된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 “우유를 옮기는 사람들”도 없는데, 당신은 우유를 따르는 것을, 그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한다. 그리하여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치고”, 길은 “우유가 흐르는 골목”이 된다. 창가에서 당신이 우유를 따르는 한 장면에서 출발해 이제 우유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채우게 된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것이다. 우유는 당신을 영원에 결합시키는 살아있는 영원이다.
이수명 시인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2023-03-16
"노란 옥스퍼드 노트에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거기에 살고 있는 기분 같은 게 있었다. 더 이상 노트에 적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느 순간에는 손가락에서 무언가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동균 시인의 당선소감을 타이핑해본다. 타이핑을 하다 보면 나의 손가락에서도 무언가 흘러나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시인 지망생들은 필사의 경험을 갖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며 필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 일상 속 비슷한 행동들을 떠올려 본다. 칠판 글씨를 옮겨 적는 것은 절대 닮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도, 복사를 해 하얀 복사물을 만들어 내는 것도, 백김치를 담는 것도 하나도 필사와 닮은 행동이 아니다. 필사는 인간의 행동에서 어떤 모습을 가장 닮았을까. 아마도 목장에 있는 가축의 젖을 짜는 자세와 마음이 가장 닮은 듯하다. 방목하며 키운 소의 젖이 퉁퉁 불지 않도록 너와 나를 위해 젖을 짠다. 필사는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사는 양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젖을 짤 때, 사실 한 번도 동물의 젖을 짜 본적은 없지만, 젖을 짤 때 그 젖은 남의 젖이 아니다. 필사를 할 때 저 시는 남의 시가 아니다. 필사를 당하는 시는 나에게 젖을 준다. 필사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젖을 짜며 “시인이시여, 감개무량한 식량을 만들어 나에게 선물해 주시다니요” 라고 식사 앞에서 기도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필사를 한다. 나의 첫 시집에 필사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있다. 「너를 만난 적 없지만 너의 목소리가 궁금해」라는 시다. 어떤 시를 만나면 필사를 하게 된다. 그런 시들은 심장이 쿵 내려앉게 만드는 시가 아니라 심장을 붕 떠오르게 한다. 심장이 몸속에서 조금 낮게 비행하는 기분이랄까. 그런 기분을 풍차가 심장에서 태어나는 경계라고 쓴 적 있다. “풍차가 태어나는 경계가 있다 목소리 없는 생을 글씨체로 받아 적는 대륙에서 세계의 풍차들은 날아오른다. 풍차를 기록하며, 풍차가 사라지는 것은 흰 천이 이마까지 닿은 경계에서 귀만 남아 여덟 시간을 더 듣는 일과 비슷하다” 아무리 필사를 해도, 그 뜻과 의미를 다 알 것만 같아도, 시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필사를 하다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나 궁금한 경우도 있다. 백 년 전에 태어나 이미 죽은 여자 시인 같은 경우는 정말 꿈에서라도 만나 깊은 밤 수다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절절할 때도 있었다.
‘우유를 따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시 속 우유는 하얗고 차갑지만 새 것처럼 빛나고 있다. 우유는 침착하다. 우유는 빛이 없는 곳에서도, 그 곳이 고요해도, 열 번을 쳐다보면 열 잔이 되는 우유가 실내를 눈부시게 하고 잔을 차오르게 한다. 이 시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심사위원들은 “일상을 이야기로 벼리고 여기에 재기를 담아 삶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흔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었다.” 라고 평가한다. 정말로 흔한 우유 따르기의 과정을 읽으며 우리는 철학적인 사유를 한 것 같다. 우유를 따르는 일과 우유를 마시는 일, 우유가 있다는 그 사실 자체는 다 무슨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까.
나는 우유를 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 시는 책을 읽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책이란 우유처럼 하얀 종이 위에 글씨는 인쇄한다. 우유 빛깔처럼 하얀 종이에 인쇄된 책들은 많이 없어, 라고 따질지 모르지만 이 시는 천천히 책을 펼치고 책을 읽는 사람이 쓴 글인 것만 같다. 책을 만든 작가는 우유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시 속 화자는 작가가 따른 우유를 마시는 중인 것이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동물은 포유류다. 지능이 높다. 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낳으며 정온동물이다. 알을 낳는 포유류도 있는데 오리너구리와 바늘두더지가 대표적이다. 이런 단공류 어미들은 복부에 있는 샘에서 젖이 분비되지만 젖꼭지가 없어서 새끼들은 어미의 털이나 젖을 빨아 먹는다고 한다. 나는 찾아 본 김에 젖을 먹이는 동물들 이름을 하얀 공책에 나열하기 시작했다. 말 젖, 양 젖, 낙타 젖. 순록 젖, 사슴 젖, 나귀 젖, 늑대 젖, 고양이, 개 , 곰, 원숭이……. 세상에는 엄청난 포유류가 존재한다. 그렇게 젖을 먹이는 동물을 나열하다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한 번도 책 읽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인데도 말이다. 학창시절에는 책 살돈이 없으니 이 서점에서 한 시간, 그리고 다음 서점에서 한 시간, 다음 서점에서 한 시간씩 서서 책을 읽어 하루에 한 권을 읽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는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 보자. 책을 읽는 행동은 다른 행동들에 비해 무척 침착한 편이다.
우유가 누군가의 젖이었다는 것은 그토록 책을 읽으면서도, 책 읽는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나의 모습처럼 너무 생경하다. 사실 밸런타인데이 이후로 나는 우유를 먹지 못하고 있다. 그 날 동물권 행동 커뮤니티 DxE 코리아가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착유당하는 동물과 연대하는 '고통의 연대' 시위를 했다. 가슴에 붉은 물감을 칠하고 시위를 한 여성들의 사진을 본 후로 우유를 먹지 못하고 있다. 나 하나 먹지 못한다고 하여, 우유에 대한 생산구조가 변할까 싶으면서도 우유를 먹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유가 목을 넘어가는 부드러운 기분에 대해, 커피를 마시는 것과는 다른 그 부드러운 촉감을 잃어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두유를 마신다.
탈레스는 세상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 했다. 별을 보느라 웅덩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걷다 가 넘어지는 바보 탈레스. 사실 별자리만 보고도 포도 농사가 잘 될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천재 탈레스였다. 비가 와 강이 흐르고, 들판의 풀이 자란다. 풀이 자라면 염소가 뜯고, 염소가 풀을 먹으며 자라, 새끼를 낳고, 새끼들은 어미의 젖을 먹으며 자란다. 탈레스는 물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생각한 것일까. 분명히 포유류의 젖까지 물의 범위로 포함시켰을 것이다. 여기 침착하게 우유를 마시 듯, 시를 읽고, 시를 타이핑해 온 사람이 있다. 그는 왜 시를 읽고 시를 옮겨 썼을까. 그는 왜 책을 읽고, 우유를 왜 마셨을까. 뼈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식사 대신, 빛깔이 좋아서, 무럭무럭 자라려고, 여기 침착한 어조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시인이 있다. 풀밭이 자라 염소의 젖이 되는 것은 마법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참 마법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반강제적으로 우유를 마셨다. 한라산 부근에 큰 목장이 있었다. 우유를 실은 차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키가 훌쩍 크거나 먼 숲을 그리워했다. 소년소녀 중에는 우유를 마시고 시인이 되었다. 맛이 없어서 맛있는 우유. 몇은 배탈이 났고, 지금도 가끔 우유가 두렵다. 여기 일상을 흔들지도 않으면서 마법 같은 글을 쓰는 시인이 있다. 그 시인이 건넬 많은 우유를 줄 서서 마실 것 같다. 책을 찾아 읽는 행동은 나를 통과한 삶들이 정의롭도록 멸균하는 작업이다. 시를 찾아 읽는 행동은 나를 통과한 삶들이 젖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길 우유 앞에 선 사람의 마음으로 기도한다.
김신숙 시인 / 시로 읽는 제주 2020-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