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추리와 능소화의 힘으로
– 신달자
무릎이 아픈데도 조금은 절룩거리면서
50분을 걸었다
무슨 힘으로?
추억의 힘으로
원추리가 아침 노을을 이야기하고
능소화가 여름 이야기를 줄줄이 타고 오르며
저녁 노을의 극점에서
숨을 몰아쉬는
원추리 한 송이 손에 쥐었는데 가슴에서 피어나고
능소화 주황빛 손길은
덮은 생의 그늘을 찬란하게 살아 나르게 하고
빛으로 솟구쳐 오르게 하고
마흔 속으로 젊은 혈기 속으로
나른하게 완결의 미소를 날리며 걷고 있네
딱50분이 아니라 그 이상
추억이라는 한 사람이
하늘의 힘으로 뜨겁게 손 잡아 주고……
―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민음사, 2023)
* 신달자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부산에서 고교 시절을 보내고 숙명여대와 동대학원 졸업. 평택대학교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와 숙명여대 명예교수를 역임,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거쳐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의 이사로 재직 중.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197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재등단. 『열애』, 『종이』, 『북촌』 등 다수의 시집이 있다.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서정시문학상, 만해대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추억은 정말 힘이 세다.아픈 무릎을 감내하면서 무려50분을 걷게 하니 말이다.
능소화와 원추리가 품고 있는 여름 이야기들을 읽어내며 시인은 자신의 생을 추억한다.때로는 슬펐고,때로는 찬란했을 그 생을 돌아본다.
이런저런 운명을 다 끌어안고 살아왔을 나이 든 시인의 외출 풍경이 그려진다.시인은 여전히 상큼하고 귀엽다.올여름도 그럴 것이다.
감각이 놀라운 시다.자꾸만 읽게 된다. "무슨 힘으로? 추억의 힘으로.“
허연 시인⋅문화선임기자 / 매일경제 2023.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