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아미 맨’이라는 해괴하고 실험적인 영화로 세간에 주목을 받았던 다니엘스 콤비가 두 번째 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이민자와 여성, 가족이라는 재료를 멀티버스라는 상자에 집어넣고 마구 굴려 뚜껑을 열기 전까지 어떤 물건인지 짐작도 안 가는 작품이 나왔다. 그들의 자양분이 되어준 쌓인 시네마라는 시공간을 통해 누가 봐도 각자가 내면에 다른 질문을 생성하게 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진부한 관용구를 인용해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에 관한 이야기로 함축될 수 있을 것이다. 증명과 결과만이 정답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당신의 가능성은 무엇을 잠재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가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현재를 만들어온 과거의 모든 순간들은 나의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다. 에블린의 삶 역시 그러하다. 그녀는 지금 자신 앞에 당도한 난관에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화목했던 때가 그리워 이혼이라는 강수를 두려는 남편과 자신의 사랑을 인정받고 싶은 레즈비언 딸에 아픈 아버지까지 자기 주장만 하는 가족들 문제는 차치하고 서라도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만 하는 세금 정산은 인생의 중대한 터닝 포인트로 보인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책상 앞에 놓인 수많은 영수증을 맞이하는 에블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종이엔 지나온 순간들의 궤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산 것인가로 세무 조사원인 디어드리를 설득해야만 한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중요한 주제 의식을 내 보인다. 나에게 주어졌던 무한한 선택지 중 이 생을 택한 스스로를 정산하고 증명해야 한다는 미션 앞에 놓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여기에 멀티버스라는 상상력을 더해 우리가 놓치고 지나간 모든 경우의 수를 다른 우주에 존재한다는 기발한 설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가 버렸던 ‘만약’들을 현실로 가져와 질문한다. 붕괴 되고 있는 건 당신인가? 당신을 둘러싼 세계관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이점이라면 빌런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조부 투파키라는 인물로부터 멀티버스 세상을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그 역시 베이글이라는 허무 속으로 사라지려 할 뿐이다.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 갈수록 관객들은 앞에 펼쳐지던 화려하고 복잡하며 과다하다 싶을 만큼 제공되던 장면의 정보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 속에서 꾸준히 제시되던 ‘0’의 의미를 곱씹어 볼 것이다. 원형의 거울, 영수증에 강요하며 그리던 동그라미와 세탁기의 투입구, 인형 눈알까지 모두가 0에 수렴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세계관에서 0은 존재 자체를 부정 함으로써 태초에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돌아가려는 지독한 허무주의에 맞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투쟁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다른 멀티 버스의 나에게서 능력을 빌려오는 ‘버스 점프’를 사용한다. 그 발동 조건은 지금 가장 엉뚱하고 무작위 한 행동을 하는 것이 그 조건이다. 예를 들어 립밤 씹어 먹기나 신발 양쪽 바꿔 신기, 항문에 트로피 끼우기 등을 통해 작동한다. 이런 요소들은 장르적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효율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는 영화적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들을 거치면 관객에게 0은 아무것도 없던 제로의 순간을 상징하는 베이글에서 극복해야 할 영수증에 표시된 동그란 표시로 다시 마주 보고 부딪혀 극복하려는 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무너지는 세계의 질서를, 누군가는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주제는 점차 ‘무엇으로부터’에서 ‘무엇을’이 되어간다. 그것은 에블린이 운영하는 빨래방의 cctv 화면과 직결이 된다. 여러 대의 카메라는 각자 다른 방향을 지켜보고 있지만 모두를 합치면 빨래방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나눠 담고 있을 뿐이다. 각자의 정의가 존재하는 멀티버스 속에서 우리는 개별의 인격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상대가 내미는 손으로 구원받는다. 커트 보네거트의 말처럼 ‘사랑은 가도 친절은 남는다.’ 버스 점프를 거치며 에블린이 체득한 무술의 극의는 제압이 아닌 다독임이었다. 내면을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은 나와 너를 구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구한다. 이 가볍고도 자명한 사실을 이토록 복잡한 방식으로 영화는 전달하고 있다. 서로가 허무와 과잉만큼 멀어진 지금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묻고 싶다.
첫댓글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제 이마에 눈 하나 붙여주신 것 같네요. ㅎ
덕분에 보고 막연하고 짧게 이해했던 부분들이 명확하게 정리되었습니다 :)
디귿 잘 지내죠?
@소대가리 기왕 살던거니 살고 있습니다 🤣
저도 가끔 베이글을 만들어버리고 싶지만 좋은 것들을 하면서 지내고 있지요.
그런 의미로다가 별거 없지만
얼마전에 본 동대문 성곽 낙조 사진 공유합니다. 허헣허헣ㅎㅎㅎ
방송에서 엄청 까여서 내심 좀 속상했었는데 소대가리님 글 읽고나니 또 다독임을 받은거 같네요.ㅎㅎ
그래 결심했어! 라는 이휘재의 옛방송처럼 그때그때의 선택들에 의해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인만큼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했으리라 믿고,
앞으로의 시간도 최선을 다해 최악을 피해 열심히 살아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흐아아아아앙♥︎
항상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팬이에요 ~~
감상평 제목 또한 너무 맘에 들어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여기 저기 화재가 많이 되다 보니 안 봤어도 왠지 본 거 같았는데.
소대님 글을 읽으니 더 깊이가 깊어지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