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전당 시인선 158
고정관념이 개똥벌레에게 끼치는 영향
윤명수 시집
두두물물(頭頭物物)과 물활적(物活的) 상상력
[약력]
윤명수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시를 배웠다. 월간 『문학세계』로 등단하여 시집 『풀꽃 만찬』 『청개구리가 뛴다』를 펴냈다. 한국문인협회 경기지부 공로상을 수상했다.
[시인의 말]
시는 결코 맨살로 찾아오지 않았다
시는 늘 너무 멀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더 멀리 있었다
사막에서 샘물을 찾을 때까지
시에서 뼛국물이 나올 때까지
아마도 더 긴 여행을 해야 할 것 같다
따뜻한 이 봄, 지인들과 술 한잔 나누고 싶다
[해설]
시인이란 뚜렷이 존재하는 모든 물상(物象)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다. 희미하게 존재하는 것들조차 언어의 그물 속에 포착하는 관계론적 사고는 시인의 거의 유일한 전략이자 신념이다. 윤명수 역시 존재자들의 ‘맞닿아 있음’에 깊이 천착하여 이를 시적 원리로 구현한다. 시인의 눈에 홀로 존재하거나 무관한 사물들은 결코 없으며, 이는 윤명수 시의 상상력의 모태가 되고 있는 불교적 세계관이나 연기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윤명수의 불교적 세계관을 시의 구성 원리로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물활적(物活的) 상상력’이다. 그의 시에서 자연물이나 유기체는 물론이거니와 생명력을 이미 소진하거나 혹은 지니지 않은 무기물들 역시 시적 소재로서 당당히 호명된다.
칠성무당벌레 한 마리가
손바닥 위에서 괘를 살피고 있다
등짝을 잔뜩 웅크린 채
더듬이를 세워 찬찬히 손금을 살피고 있다
놈은 이미 천도(天道)를 알고 있다는 듯
내 손바닥을 읽어가며
제 발바닥으로 내 운명을 점치고 있다
지금 놈에겐 점괘가 나와 있을 터
우주 빅뱅의 비밀을 알려주려는 건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로막힌
길을 찾아주려는 건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손바닥 끝이 곧 지구의 끝이라는 것일까
지구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곧 화려한 굿판이 벌어질 것이다
―「칠성무당벌레」 전문
여기에서 시적 모티프로 착상된 것은, ‘수상(手相 : 손금 보기)’이라는 어찌 보면, 별반 대수로울 것 없는 단순한 행위이다. 하지만 그 범상한 행위가 고도의 시적 이미저리로 창출되는 것은 자연물인 ‘칠성무당벌레’를 통해서이다. 벌레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물론 화자라 하겠으나,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 손금의 괘를 미물인 벌레가 점침으로써 시적 주체의 자리는 여기서 역전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우주의 원리(‘우주 빅뱅의 비밀’)와 하늘의 운행(‘천도’)마저 알아챈 눈치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가 진리의 담지자로 올라선다. 칠성무당벌레의 등짝에 자연의 이법(理法)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별자리’(七星)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한편 ‘하늘과 땅 사이’라는 표현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의 거리를 나타낸다.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은 파괴되었고 인간과 신의 관계는 두절되었다.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 신 사이의 원환적 총체성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다시금, 무당벌레-벌레무당이다. 이쯤에서 무당벌레는 진리의 담지자를 넘어 신탁(神託)을 관장하는 사제(司祭)에 방불한다 할 것이다. 인간적 질서의 원리인 중력(‘지구의 무게’)을 박차고 올라, 무당벌레는 이승길과 저승길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다. 상승하는 무당벌레의 이미지는 땅을 구르고 도약하는 무당의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굿 장면을 내부로 도입함으로써 마침내 시적 완결을 갈무리한다. 무당벌레를 벌레무당으로 전치시키는 물활적 상상력을 통해, 두두물물의 불교적 진리를 표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윤명수 시작술의 핵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달의 뒷면을 보았다
칠성무당벌레
달의 뒷면을 보았다
별똥별
바퀴도 없이 굴렀다
민화 1
민화 2
알타리 총각들
보석사 은행나무
까라
먹감나무 비밀
민들레
남국에서 온 애기풀꽃
부대찌개
참 힘도 좋은 아버지
부석사 선묘
제2부 애기똥풀꽃에 대한 보고서
호박꽃
애기똥풀꽃에 대한 보고서
단속
상수리나무 어머니
초검(草檢)
탱자나무집 참새들
아우내 장터
볕 들 날
외등
이팝꽃 그 여자
철없이 피운 배추꽃―미혼모 서영에게 바침
어처구니
난곡동
하루
소주병의 항변
홀아비 새
제3부 어린 왕자의 죽음
내가 루브르에 간 까닭은
어린 왕자의 죽음
오월의 꽃뱀―장미
자본의 힘
수작(手作)
이브의 경고
고정관념이 개똥벌레에게 끼치는 영향
고려 왕족발 보쌈
절규
파꽃
119 구급대
개미탑
장수 건강원
낙지의 하소연
종
제4부 불멸을 보다
종이의 뼈
한낮의 고요
설상사(雪上寺)
소란
굴뚝새
금당벽화에 빠지다
불멸을 보다
개심지(開心池) 잔물결
고려장 3
소록도에 핀 수양매
汝自灣의 女子
팔공산 돛대바위
그 먼 마을에 가서
내 인생의 순환선
아름다운 비문
해설 두두물물(頭頭物物)과 물활적(物活的) 상상력―이도연(문학평론가)
[추천글]
윤명수 시를 관통하는 주요 정신은 능청과 해학이다. 주로 자연물을 통해 인물(상황)의 한 전형을 찾아내고 풍자적인 언술로 그 인물의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웃음 짓게 만든다. 그 웃음 속에는 에로티시즘도 있고 세태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그의 시는 첨예하거나 날카로운 미학적 이해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열려 있다. 말로 치면 ‘설화’ 같고, 그림으로 치면 ‘민화’ 같은 푸근함과 친근함이 배어 있다. 이는 모진 세파(가난)를 겪으며 살아온 시인이 스스로 터득한 말법이기도 할 터이다. “나는 행복했다/구르고 구르다 보니/지구마저도 다 닳아 있었다”(「바퀴도 없이 굴렀다」 부분). 마냥 웃고 있는 듯하지만 간혹 눈물이 얼비칠 때, 시인은 잠시 정색을 하고 우리의 안색을 살핀다. “곱게 늙은 외등 하나가/키 낮은 대문 앞에 서서/집 나간 어린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외등」 부분). 더러 풍자적인 언사가 거칠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의 시편들은 잘 정제된 여백을 밀도 높게 압축하고 있는 만만치 않은 시적 경지를 보여준다. 짧은 시 한 편을 보자.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가장 더럽게 사는 새들//다만 굴뚝새에게 미안할 뿐이다”(「굴뚝새」 전문).
―정병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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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수 시집/ 고정관념이 개똥벌레에게 끼치는 영향/ 문학(시)/ 신사륙판(B6)/ 108쪽/ 2013년 6월 14일 출간/ 정가 8,000원
ISBN 978-89-98096-33-5 03810/ 바코드 9788998096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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