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 <월간중앙> 1969년 / 시집 『성북동 비둘기』(범우사, 1969) / 시선집 『겨울날』(창비, 1975) / 『이산 김광섭 시전집』(문학과지성사, 2005)
* 김광섭(金珖燮 1904 ~ 1977) : 1904년 함경북도 경성군 출생. 1917년 경성공립보통학교 졸업, 1920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중동학교로 옮겨 1924년에 졸업.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어영문학과에 입학, 1927년 와세다대학의 우리나라 학생 동창회지 『R』에 시 「모기장」을 발표하며 등단. 1932년 대학졸업 후 귀국하여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하여, 1941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재판 과정까지 합치면 3년 9개월 10일 동안 옥고를 치렀다. 언론사 사장과 경희대학교 교수 역임.
시집 『동경(憧憬)』(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이삭을 주을 때』(1965) 『성북동 비둘기』(범우사, 1969/ 세계시인선41권으로 재간행, 민음사, 1975/ 재간, 자유문학사, 1987) 『반응(反應)』(1971), 시선집 『겨울날』(창비, 1975) 『성북동 비둘기』(미래사, 2003), 시전집 『김광섭 시전집』(일지사, 1974) 『이산 김광섭 시전집』(문학과지성사, 2005)이 있다. 초기에는 꿈과 관념, 허무의 세계를 노래하였고, 이후에는 인생 · 자연 · 문명에 관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내면적 성찰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고 있는 작품이다. 1연에서는 저녁 밤하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과 화자인 ‘나’가 서로 만나 교감을 나누고 있다. 2연에서는 어둠 속에서 빛나다가 새벽이 되면 사라질 별의 모습과, 세월이 흐름에 따라 홀로 쓸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대조적으로 제시되면서, ‘별’과 ‘나’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는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3연에서 화자는 친밀한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 ‘별’과 ‘나’가 정다운 사이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정다움이 존재하는 한 ‘별’과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노래한다.
『해법문학 현대시 고등』, 천재교육 편집부, 천재학습백과
운명은 하늘로부터 뻗어오는가? 별 하나와 내가 눈이 마주친다는 것은 인연이 맺어진다는 뜻일 것이다. 운명의 여신이 잣는 실에 이끌려 마주친 두 눈길 속엔 놀람, 기쁨, 슬픔 등이 운명의 인력에 끝없이 당겨져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비로소 이 세상의 빛나는 별들이 된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으로’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인연의 쓸쓸한 결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노래한다. 운명은 반드시 이 우주를 가르고, 삼생을 넘어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 운명의 끈은 곧장 이어지고 팽팽해져 한 생애의 의미로 살아난다는 것을. 참으로 애틋하고 아련한 신비다.
김경복 문학평론가 / 부산일보 2023-07-11
설명이 필요 없는 좋은 시. 서울에 살면서 별 보기가 힘들다. 밤하늘이 탁해 별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하거니와, 세상 살기에 급급해 ‘별’을 딱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별은 기를 쓰고 본다. 얼마 전, 미국의 항공우주국이 소행성 다이모르포스에 우주선을 충돌시켜 소행성의 궤도를 바꾸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인류 최초로 천체의 움직임을 바꾸었다, 지구 방어 실험에 성공했다고 환호하는 과학자들을 보며 걱정이 앞섰다. 우주의 질서를 바꾸다니. 인류가 못하는 게 없구나. 인간 이성의 위대함에 감탄하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가슴이 허전했다.
별 하나와 사랑에 빠져 새벽의 밝음 속에 사라지는 별을 안타까이 쳐다보며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순정을 우리 뒤 세대는 기억이나 할까.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 조선일보 2022.10.24.
화가 김환기는 1970년 평소 좋아했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린다. 완성된 그림의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작품은 그해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받는다. 그로부터 10년 후 인기 듀엣 유심초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래를 발표해 큰 인기를 얻는다.
이 시는 청정한 영혼에서 길어올린 맑고 깨끗한 시다. 별과의 교감을 통해 인간의 사랑과 인연을 표현했는데 단정하면서도 담백하다.
아무리 들어도 식상하지 않은 단어가 '별'이다. 오늘 밤부터라도 별 좀 보며 살자.
허연 시인·문화선임기자 / 매일경제 2022. 7. 18.
이 시는 1969년에 발표되었다. 밤하늘 뭇별들 가운데 단 하나의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지상의 군중 속의 단 하나의 존재인 나는 그 별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빛에 둘러싸이면 별은 사라지고, 나는 어둠이 깊어지면 사라진다. 그리고 별과 나와의 만남을 미래에 기약할 수도 없다. 이 시는 높은 고독과 애틋한 그리움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짧은 만남과 아득하게 긴 이별을 생각하게 한다.
김환기는 시의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따서 작품의 제목으로 삼고, 외롭고 푸르고 작은 점들을 캔버스에 총총히 무수하게 많이 별들처럼 찍어 거대한 우주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알려진 대로 유심초는 가요로 불러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 불교신문(3384호) 2018년4월14일자
우리 인간은 별에서 왔다. 별에서 떨어져 나온 별똥별이 식어서 바위가 되고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불이 되고 바람이 되었다. 또 그것이 합쳐져서 미미한 생명체가 되고 진화 성장하여 인간이 되어 이 지구에서 머물고 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밤이 되면 별을 바라보며 전생의 동화 같은 윤회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이다. 시인이 미쳐서 밤마다 별을 바라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발광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별과 깊이 교감이 되어
의미 두고 이름 붙여줄 때
별도 ‘나의 별’이 되어 응답
너와 내가 만나는 인연은 거의 불가사의한 확률이고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불교경전에 겨자겁, 반석겁, 맹귀우목의 비유가 있다. 돌고 돌아 억겁을 돌아 다시 친구별을 찾아간다. 시인은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고 읊고 있다. 내 가족 내 친구이던 별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인간 가운데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다시 또 만난다. 인연이 있더라도 무정(無情)한 사람과는 만나도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정(의식)을 나누지 않으면 서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없다.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인식 밖의 존재물이다. 내가 별과 교감이 되어 내가 그 별에 의미를 두고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 별 또한 ‘나의 별’이 되어 비로소 응답한다.
김광섭(1905~1977) 시인은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하다. ‘저녁에’는 1975년에 발표되었고, 2년 뒤에 뇌졸중에 시달리다 작고하였다. 시인은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며 인간은 별처럼 언젠가는 사라지는 존재임을 노래한다. 고독과 서글픈 인생의 단면이 나타나 있다.
마지막 3연에서는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고 갈무리하여, 생의 소멸의 슬픔을 승화시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펼치고 있다.
김환기 화가의 1970년 작품인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는 미술경매시장에서 우리나라 현대작가 가운데에서 최고가 49억원에 매매된 작품이다.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는 김환기의 작품에서 시사 받은 바가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가수 유심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의 노랫말 가사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이다. 세상에서 가장 내 마음을 매혹시킨 가사이다.
불가에서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만남도 사라진다는 ‘인연생 인연사’라는 말이 있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모래알보다 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기적이다. 중중무진한 인연으로 상호 연결되어 연기(緣起)하고 있다.
며칠 전 성남아트센터에서 전시하고 있는 한국화가 임효의 ‘연기(緣起)’ 작품을 감상하였다. 우주가 하나의 커다란 그물코요, 인간세계가 서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연기적 삶임을 표현한 작품이다. 장지 위에 한지를 이겨서 무수히 크고 작은 많은 공간(영역)을 만들어서 바르고 옻칠하고 말리고 또 바르기를 6개월 동안 작업하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은하세계가 엉키고 연결되어 하나의 장엄한 우주와 인간세계의 인드라망이 나타나 있었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 법보신문(1349호) 2016년 6월 29일자
밤하늘의 별은 이 세상을 비추기엔 너무 연약합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면 그것은 항상 내게 빛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아 서로 눈을 맞출 때 빛을 주고받습니다. 태양같이 환하고 뜨겁지는 않아도 그 은은한 눈빛은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것일 테지요.
박상익 기자 / 한국경제 2015.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