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버리는 법
-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
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
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
자주 소멸을 꿈꾸며
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
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
생각조차 희박해지고
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
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 시집 『이상한 야유회』(창비 2010)
* 김혜수 :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졸업. 1988년 <세계의문학>에 '동시상영' 외 3편을, <문학정신>에 '약속'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404호』(민음사, 1992) 『이상한 야유회』(창비 2010)가 있다.
그렇다. 그녀의 말대로 삶이란 대절버스를 타고 홀로 떠난 이상한 야유회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 길에서 그녀가 본 어느 나뭇가지에 ‘나무껍질인 척 붙어사는 얼룩대장 노린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돌인 척, 모래인 척, 숨 참고 시치미 떼고 아슬아슬 붙어사는 강변메뚜기’ 같은 건지도 모른다. 일컬어 ‘것’들이라 명명된 존재들. 살아남기 위해 “나뭇잎에서 나무껍질로 모래로 돌로” 거처를 옮기는 동안 이 “새빨간 거짓말이 참말이 되면 어쩌나” “시치미 떼고 딴청 부리다 온통 들켜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다 끝내는 들통이 나고 마는 한편의 블랙코미디인지도 모른다. “3분짜리 한 컷을 찍기 위해” 분장한 채 종일 기다리다 지쳐 죽음의 연기가 진짜 죽음에게 KO패당한 채 ‘NG’로 끝나고 마는 어느 서투른 스턴트맨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대책없는 드라마에 대하여 누가 반박할 수 있으랴. 그저 그녀처럼 “까짓것” 중얼거리며 짐짓 태연한 척 고개 돌릴 일밖에.
그렇다. 그녀의 말대로 삶이란 교도소 담장 안에서 “사형수, 장기수, 무기수들”이 담배 한 갑, 초코파이 하나 걸고 ‘사생결단하는 내기 축구’ 같은 것!
달빛이 자꾸 새끼를 쳐서 수없이 많은 달빛을 낳고 담장 밖에서 불운의 가지 하나가 음흉스레 안쪽을 기웃거리고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생로병사하든 말든, 내게 날아오는 공은 풍선보다 가볍게 뻥 차올려야 하는 일!
이경림 시인 / 시집 뒤표지 ‘추천글’
제 방의 책장 상단에는 몇 개의 상자가 있습니다. 이사를 오며 올려두고 아직 열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상자 속에는 과거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소용과 쓸모를 다한 것이고요. 아울러 이 상자 속에는 아픈 기억이 담긴 물건도 들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 견딜 만해진 것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고민도 이런 방식으로 지워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답을 구해 단번에 해결하는 편이 가장 좋지만 이게 어렵다면 한쪽 구석으로 치워두고 나의 고민이 바래고 삭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고이는 것은 고이는 대로 흐르는 것은 또 흐르는 대로.
박준 시인 / 중앙SUNDAY 2023.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