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2004)
* 신용목 :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전공.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2004)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창비, 2007) 『아무 날의 도시』(문학과지성사, 2012)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 2017) 『나의 끝 거창』(현대문학, 2019)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문학동네, 2021)와 산문집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난다, 2016)를 냈다. 2020년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신용목은 바람과 햇살 사이를 떠도는 서정 시인이다. 그의 시는 풍경의 감각적 실감이 높고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는 비유의 문장들이 많다. 시적 자아는 자주 상처와 어둠을 마주하는데 바람 또는 햇살에 섞여 나타나기 때문에 암울한 느낌만을 주지는 않는다. 그의 초기 시에서 바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람은 주로 삶의 변화 주체로 등장하여 유동성, 운동성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일상의 정체된 시간들을 깨트리는 역할도 하고 고통과 슬픔의 대리물로도 사용된다. 바람의 발원지에 가 닿으려는 언어 표현은 근원을 추구하는 욕망의 몸짓이라는 점에서 그의 시는 기억으로의 회귀 시학, 성찰의 시학이라 할 수 있다.
간혹 바람이나 햇살과 대비되는 단단한 뼈 이미지들도 나타난다. 바람의 유동성과 뼈의 견고함이 하나의 몸으로 결합하여 미묘하고도 낯선 서정의 풍경이 태어난다. 바람 속에 꽉 박혀 허공을 깨무는 '바람의 어금니' 이미지가 그런 예에 해당된다. 이처럼 시인은 자연을 이질적 결합상태로 받아들인다. 이는 시인에게 자연이 감각의 결에 따라 매우 다양한 무늬로 변주되는 세계임을 암시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용목의 시에서 기존의 서경(敍景)은 파괴된다. 자연에 속한 인간과 인간의 삶 또한 훼손된 존재다. 즉 그의 시세계 심층에는 자연과 융화되지 못하고 균열하는 자의식이 앙금처럼 깔려 있다. 이 불화의식 때문에 농부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착취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망한 자의 시선을 가졌노라'고 시인은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시에 일몰의 장면,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 적막하고 고적한 겨울 산사, 갈대가 있는 강변 등의 풍경이 나타나는데 이는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시선 때문이며 이런 풍경들은 대부분 배후를 거느린다. 즉 대상과의 불화의식이 그의 시를 기존의 서정시와 다른 층위에 위치시킨다.
신용목의 시는 주체가 대상을 응시하는 과정(A), 그것을 언어적 풍경으로 재배열하는 과정(B), 재배치를 통해 삶을 성찰하고 사유하는 과정(C)을 단계적으로 거친다. 시각적 대상을 응시하는 과정은 대상과의 동화 또는 투사의 과정으로 시인은 대상이 품고 있는 기억과 상처, 통증과 연민 등을 섬세하게 읽어낸다. 표피적 관찰로 끝나지 않고 풍경의 배후까지 매우 면밀하게 탐색한다. 이 응시의 시선 속에 사회적 문제의식과 비판의식이 내재된다. 응시한 대상을 언어로 재배열하는 과정에서는 수사적 비유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 비유적 문장들 때문에 의미의 층은 넓어지고 감정의 세밀한 분화가 일어난다. 이런 의미의 확장과 감정의 분화가 시적 사유와 성찰을 유도한다.
그의 시는 망각된 시간 또는 기억으로의 회귀를 추구하며,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추구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귀환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시적 성찰의 공간으로 제시하여 그곳으로 모여드는 희망 잃은 자들의 실상을 목격하게 한다. 생 자체가 궁극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기의 시간'임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그에게 생은 미완의 형식이자 비극적 은유고 점점 퍼져가는 안개의 숲이고 늪지다. 그의 시에서 비유의 결들이 복잡하게 나타나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복합적 시선 때문이다. 그의 눈에 갈대의 들판은 대대로 누추한 삶을 사는 자들의 가계(家系)이다. 그들은 모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연민의 대상들이다. 부모로부터 피를 이어 내려오는 이들의 몸속을 흐르는 어둠을 시인은 웅숭깊고 따뜻하게 응시한다. 그것이 아름답고도 슬픈 연민의 서정을 낳고 성찰의 시학을 낳는다.
함기석 시인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가 갈대들이 통증처럼 새떼를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은 빈 강둑을 걷는 나를 흔들고 갈대를 흔든다. 갈대의 핏속에도 나의 계보에도 늘 흔들리고 일렁이는 바람이 유전되고 있다. 가을의 석양무렵이면 갈대는 바람에 일렁이는 통증이 더 깊어진다. 어느 세월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내 각오가 있었지만 바람에 울다 허리 꺽인 아버지의 뼈 속에 바람이 있으니 나는 그 바람을 걷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바람의 시인 신용목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결코 쉬운 시가 아니다. 그럼에도 과학의 첨단을 걷는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그의 시를 가장 사랑한다고 한다. 그 만큼 시인의 시가 바람에 늘 흔들리면서도 곧추서려는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해 주지 않나 싶다.
김광희 기자 / GBN 경북방송 2011년 11월 06일
젊은 시인 신용목은 ‘바람 교도(敎徒)’(시인 박형준의 말)다. 그의 시 곳곳에는 바람이 불어오고 멈추고 쌓이고 흐른다. 독특한 것은 그가 포착하는 바람의 속성인데, 그의 생각에 바람은 쌓이는 것이면서 강하게 ‘무는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바람이 비의 칼집을 잡고 서는 날”(「바람농군」)에서처럼 바람을 정지시켜 묶어 두거나,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 턱”(「새들의 페루」), 혹은 “나는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라고 써 바람의 ‘무는 힘’을 강조한다. 아무튼 ‘바람 교도’답게 그의 시집을 펼치면 바람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문장이 모 기업의 에어컨 광고 문구로 사용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이 시에도 바람이 등장한다. 시인은 폐염전을 걸어가고 있다. 저녁 무렵이었을 테고, 갈대가 있는 곳에서 멈추어 섰을 것이다. 바람 속에서 갈대는 갈대숲에 깃든 새들을 “통증처럼 뱉어 내”고 있었을 것이다. 늦가을이었으므로 갈꽃이 진 갈대는 “촉”처럼 “화살”처럼 서 있고 시인은 그 갈대들을 보면서 세월의 한 참극과 풍파를 기억해 냈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사에 해당될 사건들을.(그래서 제목이 ‘갈대 등본’ 아닌가. 우리가 동사무소에 가서 한 장씩 떼는 ‘주민등록등본’처럼.) 가족사 가운데서도 아버지와 관련된 과거의 일을 시인은 떠올렸을 것이다. 갈대처럼 누추를 입고, 뼛속까지 바람의 지층이 나 있고,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이제는 꺾인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지금 시인이 서 있는 공간, 즉 폐염전과 빈 둑과 꺾인 갈대와 바람이 부는 이 공간이 마치 아버지라는 존재의 영역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표현에는 개인적인 참회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결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나비 눈」의 대본을 쓰기도 한 신용목 시인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허기’를 돌본다. 이주 노동자, 구두 수선공, 시장통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시는 따뜻하고 서글서글하다.
신용목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젊은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시는 그런 평가에 대한 신의를 갖게 한다.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죄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죄가 나를 씻어 주겠다”(「별」).
문태준 시인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 문태준 해설, 민음사, 2008
첫댓글 '갈대는 갈대숲에 깃든 새들을 통증처럼 뱉어 내고 있을것이다'시어의 멋진 표현이 와 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