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남풍경
- 박판식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 시집 『밤의 피치카토』(천년의시작, 2004)
― 박판식 :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동서문학>을 통해 시 등단. 시집으로 『밤의 피치카토』(천년의시작, 2004)와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민음사, 2013)가 있음.
얼마 전에 박판식 시인이 상을 받았다. 수상 기사를 접하자마자 ‘화남풍경’이 떠올랐다. 시인의 첫 시집,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시인이 무언가를 자신의 첫 시집, 첫 페이지에 놓았다는 것은 운명이고 총체라는 의미다. 시인이 그 시를 고른 것이 아니라 그 시가 시인을 선택해 찾아왔다는 말이다.
이 아름다운 시를 사랑하여 추천한 이들이 많다. 처음에는 문태준 시인이, 그 다음에는 이영광 시인과 이은규 시인이 좋은 시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시인들도 좋아하고 인정한 시라는 말이다. 나도 그 뒷줄에 서 본다.
오래전, 병원에서 너는 엄마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돌아오는 길 서점에서 이 시를 만났다. 길바닥에서 울었던 것 같다. 온몸으로 채찍 받더라도 아이 지키는 어미가 되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울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자식이다. 엄마들이 가장 많이 웃게 되는 원인도 자식이다. 내 한 몸 부서져도 자식 편안하길 바라는 마음이 부모 마음이다. 그 인연이 위대하고 소중하니 엄마도 자식도 다치지, 죽지, 아프지 말자.
나민애 문학평론가 / 동아일보 2023. 10. 27.
박판식의 시 <화남풍경>을 읽은 독자가 ‘화남’이 어디냐고 물었다. 물론 우리나라 경북 상주에 ‘화남면’이 있다. 그런데 당나귀와 상인이란 어휘로 보아 중국의 회수이남, 즉 삼국지에서 손권이 할거했던 지역으로 봐도 된다. 즉 시인이 중국 여행을 하며 들렀던 화남지역에서 본 풍경을 되살려 낸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는 데에는 굳이 ‘화남’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를 따지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공간으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당나귀의 뱃속에 든 새끼이다. 화남 지역 어딘가에서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고 있다. 채찍을 내려치기도 할 것이고 고삐를 바짝 당기기도 할 것이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 제목처럼 한 폭의 ‘화남 풍경’이다.
그러나 시인의 초점은 당나귀나 상인이 아니라 당나귀 뱃속에 든 새끼에 맞춰져 있다. ‘세상으로 가는 길’은 상인의 채찍을 받으며 파란 달빛이 비추는 어두운 길을 어미 당나귀가 타박타박 걷는 길이기도 하지만 실은 어미 뱃속에서 새끼가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을 일컫는 것이다. 여기서 첫 행을 마지막 행과 이어 읽으면 된다.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이라 했다. 바로 어미 당나귀의 뱃속, 새끼가 자라나고 있는 ‘양수’이다. 그 양수 안에서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있는 것이다.
어미의 뱃속, 그것도 양수 안에 웅크린 새끼에게 그처럼 편한 곳이 어디 있을까. 더위나 추위를 조절해 주고 탯줄을 통해 양분을 공급해준다. 나아가 상인이 내리치는 채찍까지 어미가 막아준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더위와 추위, 먼지와 바람 그리고 채찍이 기다릴 것이리라. 그러니 태어난다는 것은 어쩌면 고난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니 시는 이 세상 모든 새끼들에게 가장 편한 곳, 바로 어미 뱃속의 양수를 배경으로 이제 태어날 생명의 험난한 길을 예고한다. 어쩌면 시인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머물렀던 어머니의 뱃속 양수,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본향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 바로 어머니 뱃속 양수가 있는 자궁, 바로 우리들의 고향이다.
이병렬 소설가 / 이병렬 소설가 블로그 <玄山書齋> 2018. 11. 15.
모든 생명체의 탄생은 모태(母胎)의 양수(羊水)가 밀어올린 부력에 의해 일어난 아름다운 기적의 하나인 게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은 과장되거나 지나치게 비극적인 생의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의 세계가 산모인 어머니마저 일터로 몰기를 마다하지 않는 상인들의 제왕처럼 군림하며 지배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미처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채 새도 깨어나지 않은 밤길을 당나귀처럼 채찍 맞으며 걸어가는 제 어미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그런 세계가 결코 도래하지 않기를 기원해볼 따름이다.
임동확 시인
이것은 세상의 모든 풍경이다. 어미는 새 생명의 태(胎)를 품고 달을 채운다. 달이 찰수록 어미의 몸은 둥글어진다. 세상이 어미를 후려칠 때조차 어미는 제 몸으로 큰 울을 만든다. 새끼는 끝내 그 울안이 '슬픈 평화'의 처소였음을 기억하지 못하겠지. 다시는 그 품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문태준 시인
중국 어느 오지의 풍경 같기도 흐릿한 꿈속 같기도 하다. 하지만 왠지 어떤 힘겨운 탄생의 비유로도 보인다. 채찍을 받는 어미 당나귀의 모습에 인간 어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세상은 상인의 목적지이자 새끼 당나귀가, 또한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이 태어나는 장소 같다. 하지만 단 한 번 안락하였을 탄생 이전의 그곳, 어머니 양수 속.
이영광 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우리는 오늘 ‘화남’으로 떠납니다. 그예 ‘화남풍경’이 되어볼까요. 사실 이 시공간은 실제 지명이기보다 심상지리(心象地理)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시 속에는 상인과 어미 당나귀, 새끼가 등장합니다. “상인은/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어요.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말입니다.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고요. 과거시제는 곧 아득한 시원(始原), “세상으로 가는 길”로 열려있습니다. 아껴두었던 첫 구절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은 결구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와 비로소 만납니다. 참조점이 되어줄 시인의 산문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언제부턴가 나는 인생을, 얇은 물의 막에 갇혀 있는 차가운 환상이라고 생각해왔다. 새끼들은 태어나는 족족 생기 넘치는 세모꼴의 대가리들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외출이 그들을 영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박판식,『밤의 피치카토』, 표4글)
이은규 시인 / 용인신문 201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