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 박참새
"파이드로스,
글에는 그림처럼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네.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
하지만 자네가 어떠한 질문을 해도 그들은 무겁게 침묵만 지킨다네.
글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글이 지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자네가 그 내용이 알고 싶어 물어보면, 글은 매번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들려줄 뿐이지."
ㅡ 플라톤, 「파이드로스」
너는 생각한다. 너는 집을 짓고 싶다. 너는 집을 짓는다는 일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너는 아주 기본적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너에게 부족
한 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곧 결여된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배우기 시
작한 것이다. 너에게는 자본이 없다. 너에게는 땅이 없다. 너에게는 실리적인 재료
도, 그것을 활용할 능력이나 재능도, 미적인 감각도 없다. 너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집이 결여되어 있다는, 그 감각뿐이다. 너에게 유일한 것은 집을 갈망하는 욕망뿐이
다. 너는 집이 필요하다. 너는 집이 갖고 싶다. 너는 하지만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없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 가능성 ㅡ 동시에 불가능성 ㅡ이 유일한 재산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있는 이곳은 광활한 동시에 협소하고, 구체적이면서
도 모호하여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네가 자리한 이곳은 발이 닿을 것 같다가도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그 깊이가 더욱 깊어져 허우적대기 십상이고, 도움 구할 주
변도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너는 혼자가 아니지만 절대로 같이일 수는
없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은 있지만 그것을 경험한 적은 없다. 너는 이 사건들
의 모든 총체이며, 과거이자 기억인 이 시간들은 너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너는 집에서 살 것이다. 너는 집을 짓게 될 것이다. 네가 가진 유일한 재료이자 소재
인 것으로. 너에게는 말이 있다. 오로지 언어일 뿐인, 너에게만 머무를 뿐인, 그저 그
뿐인, 동시에 전부라 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때로는 연결을 위한 유일한 수단
이면서 단절을 초래하는 단 하나의 종말이기도 한, 오로지 말. 그리하여 너는 말로
써 지은, 말의 집에서, 살 것이다. 너는 너만의 말로 지은 말의 집에서 홀로 살 것이
다. 너는 갇히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상태로, 탈출도 방생도 못 한 채로, 이동도 거주
도 불편한 상황을 자초하며, 아름다우며 기괴한 말의 집에서, 그것에 의지하고 외면
당하며, 그곳에서, 홀로 살 것이다. 너는 홀로 살며 늙을 것이고 끝을 볼 때까지 늙
을 것이고 이따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서 발버둥칠 것이다. 네게 주어진 유일한
집을 저주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너는 극단적이라고 느끼는 일은 단
하나도, 시도해 보지도 성취해 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 집에 있는 너는 그 집에 있을
뿐이며 영원히 그 안에서만 머물게 될 것이다. 네가 오로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유일한 작업은 그 집을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다. 너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때
로는 선택하고 떠넘기며 이 집을 지었다. 너는 집을 갖고 싶었다. 너는 집을 가졌다.
너는 매일매일 보수한다. 너는 오늘도 새로이 짓는다. 이제 너에게는 집이 있다. 너
는 꿈을 꿀 수 있다,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무수한 인물이 등장하는 곳에서, 종료됨
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음 편안히, 집에서, 자면서, 꿈을 꿀 수 있다.
길을 잃지 마세요……. 출구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에요…….
― 2023년 제4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 시집 『정신머리』(민음사, 2023)
* 박참새 : 1995 부산 출생. 부일외고,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2023년 제42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가상실재서점 ‘모이(moi)’의 북 큐레이터이자 팟캐스트 ‘참새책책’의 진행자, 여성 창작자와의 대담을 엮은 책 『출발선 뒤의 초조함』(세미콜론, 2022)의 저자, 시와 산문을 발행하는 독립 창작자 등 책과 관련한 여러 일을 하고 있다.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인 첫 시집 『정신머리』(민음사, 2023)가 있다.
[수상 소감]
and I fiddled with the poem.
나는 시를 조물락거리게 됐다.
부코스키의 말이다. 요즘 다시 부코스키를 읽는다. 깡패 새끼. 좋았겠다. 그의 깡패스러운 면을 닮고 싶다. 시에 직면하는, 투우 같다. 정말 그렇게 생기기도 했고……. 인쇄 맡긴 시집이 오늘 아침 일찍 도착해서 정신이 번쩍 뜨였다. 오후께나 올 줄 알았는데. 이번엔 기도를 하면서 중얼거렸다. 나의 출구는 이것뿐이라고. 제발. 제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땀이 뻘뻘 나는 날씨에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촉촉해진 내 등에 얹힌 원고 더미들 내 시들. 생각하면 실실 웃음이 나는가, 싶기도 해서 조금 웃어도 보고. 내게 남은 시간은 딱 두 달. 간절한 마음이 더 진해진다. 이 책을 만들다가 정말 시인이 되고 싶다. (2023년 9월 4일 투고 직후의 일기)
시라는 말이, 언어라는 족쇄가
내 안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놓아주지 않고 평생 놀려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딴에는 침을 뱉는다고 생각했지만 침을 뱉기는커녕 튀기지도 못한 거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인제야 해 봅니다. 더 끓이고 끓일걸.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다 뱉어 놓은 말들의 침이고, 그것에 찔리거나 말거나 할 것이고, 그게 나일 수도 내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나는 더 감질나게 말맛을 굴려 보다가 이리에다 저리에다 또 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헛소리다! 헛소리다! 이렇게 외치며 한 줄 한 줄 쌓아 가다 보면 언제나 내 안에서는 헛스러운 참말이 되고, 시이면서 시가 아닌 것이 만들어지고, 나는 그렇게 간헐적으로 숨통을 트면서 시인 흉내를 내고 싶어 했습니다. 막상 이 지경이 되니 그게 무엇인가 싶고 알아서도 안 될 것만 같습니다.
나 사실은 깡패로 살고 싶습니다. 실상은 안 그러하니 더더욱 건달이고 싶습니다. 규율과 규칙이 지겹습니다. 매일 아침 눈뜨면 새로이 정의된 윤리를 이해하느라 진이 다 빠집니다. 나는 그냥 혼자 썩어 가며 허락된 범위의 구역에서 나 혼자 깡패이고 싶습니다. 시…… 시 자체가 깡패스러운 면이 있지요. 아무튼지 간에 이제는 누가 시 왜 쓰냐고 하면은, 내 깡패 되려고 그렇소,라고 답하면 되겠습니다. 그 말 들을 표정 상상하니 통쾌하군요. 제 식대로 침을 뱉어 보자면 그렇습니다.
이제 내 글은 나의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해석되고 통용되고 전이될 테지만 나는 전혀 상관 않고 지금껏 그래 왔듯이, 내가 나의 눈을 가리면서, 내가 쓰는 것이 당최 무엇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규정할 필요도 정리할 필요도, 받아들여질 필요는 더더욱 없으리라 다짐하고 또 외치면서 단 하나의 진실만을 향해 간다면, 그런다면 그 이상의 다행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나더러 쓰지 않으면 죽을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내심 기분 좋았다. 내 시를 읽는 동안 같이 죽고 싶단 마음이 차올랐다고 했을 때 이미 나는 약간 죽어 있었다. 마음에도 성기가 있다면 심장일 텐데, 언제나 그것을 꽉 쥐고서는 나는 절대로 흥분 같은 건 안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저 성실하자 성실하자 되뇌었지만 가끔은 쾌감에 절어서 미쳐 버릴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새로운 언어의 작용을 통해서 자유를 행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시의 양심”을 이행하지 않고 배반하는 것이리라. 김수영의 말입니다. 흰 종이라는 영토에서 구토가 일 것만 같을 때, 시의 독자는 시인이 아니고서야 될 수 없음을 다시금 외면서, 당신 역시도 시인일 것이라는 의심을 믿으면서, 내가 사랑한 죽은 사람들을 반드시 기억해 가면서, 그렇게 끝까지 끝까지, 끝장을 볼 때까지, 약간 알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모르는 채로, 나도 당신도 모르는 영원한 과오를 무책임하게 저지르면서, 영원히 미완인 채로 완성해 나가며, 완전한 침묵을 향해, 시를 조물락거릴 겁니다. 세상이 배반한 곳에서 영원히 거주하는 게걸스런 깡패처럼, 내가 사랑한 죽은 사람들, 죽은 당신을 평생 잊지 않고, 이렇게 잘만 써먹으면서, 우리 종이의 영혼에 새겨 가면서, 그렇게 제멋대로 쓰고 살렵니다.
박참새
[심사평]
투고된 많은 양의 시들은 전반적으로 우수했다. 앞부분만 읽고 배제할 만한 태작이 거의 없을 만큼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도를 지니고 있었다. 현대적인 감수성을 시적 언어에 정착시키는 능력과 실험적인 대담함으로 눈길을 끄는 시들이 다수였다. 물론 깊은 사유를 거치지 않고 너무 일찍 튀어나와 버린 말들의 향연이 시의 감성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경향도 눈에 띄었다. 청춘의 시들을 읽으며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마지막 본심에서 거론된 6인의 투고작은 모두 당선작이 될 만큼 놀라운 개성과 참신한 상상력과 완성도를 지닌 것들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론 끝에 만장일치로 박참새의 투고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박참새의 시는 난해한 듯하지만 꼭 필요한 이미지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질적인 언어들을 풍성하게 불러내 과감하게 한 화폭에 담아내는 언어적 배짱도 매력 있게 다가왔다. 얼핏 도전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 도전이 오히려 시의 정도를 강조하는 듯한 역설로 다가왔다.
한 편 한 편이 각기 다른 드라마처럼 읽히는 점도 좋았다. 박참새의 시는 편편이 다양한 경향, 음가, 감성, 메시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가진 게 많은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문 형식의 작품들보다는 짧은 작품들이 더 흡인력이 있었다. 수상을 축하하며 빛나는 세계들을 더 많이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허연(시인)
구애됨이 없이 얼마나 말을 풀어놓을 수 있을까,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직면하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시를 쓰는 것이 오히려 말을 가두는 과정이 될 수도 있음을 경험하는 까닭이다. 말의 해방을 원하지만 말을 한쪽으로, 시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때, 시가 시인에게 속하게 된다. 말을 풀어놓아서, 시가 시인에게로 흘러가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박참새 시인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방향에의 거절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시인에게뿐 아니라, 어떤 특정한 곳으로 흘러가게 하지 않는다. 의미나 사유의 윤곽이 형성되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윤곽을 따르지 않고, 방향을 버린 전면적인 언어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그토록 많은 나와 너와 우리들, 당신, 여자, 남자, 언니 들이 혼재한다. 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주어들은 무차별적으로 충돌하는, 모순된 행위를 살포한다. 그들의 행위는 반복과 부정, 순환, 회귀를 통해 눈앞에서 잉여를, 현재형으로 시현한다. 그토록 자주 실행되는 취소 역시 이 잉여를 부풀린다. 페이지를 뒤덮는 것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활화산 같은 언어이다. 그리고 이 흘러넘침을 통해서 말은 활성화되기에 이른다. 말이 살아 있는, 활성화된 말의 세계가 그의 시다. 결국 시인은 언어로 남는다. 시인이 어떤 말을 쓰느냐, 어떻게 언어를 구사하느냐가 시 세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수명(시인, 문학평론가)
(……) 당선작을 선정하기까지 짧지 않은 논의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건축」 외 51편은 처음부터 가장 눈에 띄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선은 다수를 차지하는 형식적 파격이 전면화된 작품들 사이 사이에 보이는 짧은 시편들의 단단함 때문이었다. 예컨대 「전부」와 같은 짤막한 시편에 담긴 반전은 문맥이 통하는 단계에서 작품이 되는 단계로의 8부 능선을 넘고 있었다. 시각적으로 실험을 전경화시킨 작품들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문장 역시 시적 리듬감과 말의 맛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단지 낱낱의 파격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시집 전체를 통독했을 때 그려지는 지향점이 명료하게 드러나 보였다. 확산적이지만 틀림없이 중심을 보유한 묶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묶음 안에서는 산문적으로 명기되지 않은 자신만의 시론을 지시하고 있다. 김수영이라는 이름의 상에 값하는 당선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조강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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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짜깁기되는 박참새의 ‘나’는 그 자신이 바로 말들의 경합 장소로서 출몰한다. 자신의 돌출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만드는 모든 보편적 금칙 자체를 우리가 다루어야 할 논쟁의 주제이자 대상으로 만든다. 박참새가 활보하는 고백으로부터 우리가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가 누비는 진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Sick House Syndrome’을 “새로움의 기표”이자 “변화의 예측”(「새집증후군」)으로 읽어 내라는 것. 이는 우리의 말, 우리의 토대를 함께 뒤흔들고 ‘나’ 자신의 장소를 바로 이곳에서 끝없이 구성해 내라는 종용이자 명령이다.
최가은 문학평론가/ 시집 뒤표지 글
첫댓글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 ''정신머리''
시집속에 있는
조금은 어렵게 느껴지는 시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