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수국, 그리고 요람
- 김선우
금자동아 은자동아 우리애기 잘도잔다
금을준들 너를사며 은을준들 너를사랴
자장자장 우리애기 자장자장 잘도잔다
죽음은 자연스럽다
캄캄한 우주처럼
별들은 사랑스럽다
광대한 우주에 드문드문 떠 있는 꿈처럼
응, 꿈 같은 것
그게 삶이야
엄마가 고양이처럼 가릉거린다
얄브레한 엄마의 숨결이
저쪽으로 넓게 번져 있다
아빠가 천장에 나비 모빌을 단다
무엇이어도 좋은 시간이 당도했다
*
엄마는 많이 잔다
걸음마를 배우기 전 아기처럼
자다가 깨 배고프면 칭얼거리고
아기 새처럼 입 벌려 죽을 받아먹고
기저귀 가는 손길을 귀찮아하다가도
아기용 파우더 냄새가 퍼지면 기분좋아한다
아빠가 외출하면 악다구니를 쓰며 울고
아빠가 돌아와 손잡아주면 평온해진다
돌보는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가끔 축복을 전해주듯이 눈을 맞춘다
그리고 잔다
평생 잠이 모자랐던 사람처럼
자고자서 모은 힘으로 어느날 훌쩍 저쪽으로 건너가려는 듯이
*
우리는 이제 엄마의 저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르고 작고 가볍지만 무거운
아흔두 해를 살아온 육체―
해 진 뒤 지평선 너머에서 번지는 희미한 빛 같은 엄마를
만진다
바라본다
냄새 맡는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만지고 바라보고 냄새 맡듯이
어딘가를 향해 막 태어나려는
우리의 소중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이불귀를 여며준 동생이 엄마의 뺨에 뽀뽀하고 말한다
―언니, 엄마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다, 그치?
*
여든일곱 살에 엄마는 요양원에 갔다
여든일곱 살인 아빠가 울며 말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힘이 부치는구나
엄마를 보내놓고 아빠는 매일
요양원으로 산책을 갔다
요양원에서 엄마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아빠가 가면 엄마는 이 말부터 물었다
―식사는 자셨어?
자식들을 다 잊어먹고 오직 아빠만 기억하는 엄마를
우리는 사랑꾼여사라고 불렀다
평생 고생시킨 아빠가 여전히 저렇게나 좋을까?
진절머리나게
진절머리난다! 그거 엄마 십팔번이었지
결혼 전에 아빠를 딱 한 번 봤는데 맘에 쏙 들었다잖아
허접한 남자를 중신 선 거면 중매쟁이 발모가지를 분질러버리려고 했다며
엄마 성질이면 진짜로 발모가지 날아갔겠지
아빤 인물 덕에 엄마 사랑을 평생 받은거야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까르르거리는 딸들의 핀잔을 들으며 아빠는
엄마의 사랑을 평생 받는 유일한 남자로서 으쓱대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고
가족 방문조차 극도로 제한된 시간
요야원이 어떤 곳인지 적나라해졌다
펜데믹이 끝나갈 무렵
삼 년 사이 반쪽이 된 엄마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탈수 증상과 염증으로 한 달을 입원했다
아빠가 울며 말했다
―요양원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내가 잘못했다
임종은 집에서 해야지
내가 곁에 있어야지
내 곁에서 쓸쓸하지 않게 가야지
아흔두 살에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 여자의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아온 한 남자가
드디어 어른이 되기 시작했다
*
엄마는 무사히 봄을 넘겼고
여름을 건너고 있다
*
동생집 화단에 수국이 피었는데
열두 살 조카 서연이가 수국을 바라보다가 말했단다
―엄마, 이 꽃 할머니께 가져다드려야겠어
오늘은―
열두 살 소녀가 아흔두 살 여자와 놀고 있다
수국 한 송이, 꽃잎을 하나하나 뜯어
할머니 이마 위에 총총히 꽃 띠를 만들어준다
다시 수국 한 송이, 턱을 괴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기처럼 쌔근대는 할머니와 눈을 맞춘다
검버섯 가득한 손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엄마의 방안에 알 수 없는 투명함이 가득하다
―우리 열두 살 무렵엔 어땠을까?
그때 엄마의 나이가 지금 우리 나이네!
어느새 오십 대가 된 동생과 내가 웃는다
나뭇잎 한 장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온전히 들어있는
인생의 어떤 신비에 대해 생각하면서
엄마, 우리 모두의 소중하고 고마운 아기―
가만히 내 배꼽을 만져본다
가만히 엄마 배꼽을 만져본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우리애기 잘도잔다
지나가는 바람님아 발뒤꿈치 들고가렴
자장자장 우리애기 자장자장 잘도잔다
―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 김선우(金宣佑) :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지, 2007)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 『녹턴』(문지, 2016)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과, 청소년 시집 『댄스, 푸른푸른』(창비교육, 2018) 『아무것도 안 하는 날』(단비, 2018),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 개정판, 단비, 2012 / 재개정판, 2021)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미루나무, 2007)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새움, 2007)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청림출판, 2011) 『부상당한 천사에게』(한겨레출판, 2016) 『사랑, 어쩌면 그게 전부』(21세기북스, 2017), 그리고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물의 연인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외에 다수의 시 해설서를 출간.
한 해가 다 갔다. 연말에만 할 수 있는 이 특별한 말을 차곡차곡 쌓다 보면 어디에 도착할까. 우리는 분명 ‘한 생애가 다 갔다’는 말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갔다는 것은 끝이라는 말. 그러니까 연말은 죽음이라든가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때다. 한 해의 끝은 일종의 작은 죽음이고 한 해의 시작은 일종의 작은 탄생이다. 우리는 매해 달력의 마지막 날을 기점으로 상징적인 죽음과 탄생을 연습하게 된다.
오늘의 시는 김선우의 신작 시이자 아흔이 넘은 어머니와의 헤어짐을 기록한 작품이다. 지면상 앞부분만 소개하지만 문예지에는 장장 6페이지에 걸쳐 어머니의 삶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 시인은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자연스럽게 죽는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다. 축복 속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어머니를 시인은 뭉클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사실, 우리는 그렇지 않은 죽음들을 알고 있다. 죽지 않아야 할 때 가버리는 사람, 준비도 못 하고 떠나는 사람을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보았다. 그래서일까. 가족에게 보살핌 받으며 지구를 떠날 준비를 하는 시 속의 어머니는 부럽기까지 하다. 죽음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면 저렇게 가고 싶다. 훗날 어떻게 죽을지는 아직 결정할 수 없다고 해도 어떻게 한 해를 마무리할지는 결정할 수 있다. 꿈 같은 삶, 올해도 자연스럽게 잘 살았을까 생각해 보는 연말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 동아일보 2023. 12. 29.
첫댓글 수국의 꽃말이
처녀의 꿈이었군요.
두자매 그림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새해 福 다발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 후반 쯤에는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시고..
가정에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