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이 열리니 선물처럼 도라지꽃이 벙글기 시작합니다. 이른 아침 산책길 비탈진 언덕에 가꾸어 놓은 다랑이 밭에서 올해 처음으로 도라지꽃을 만났습니다. 햇살이 아직은 눈이 부신 듯 한, 한쪽 귀퉁이는 채 벌리지 못한 보랏빛 꽃에 이슬이 함초롬히 맺혀 있었습니다.
심심산천의 백도라지를 노래한 민요가 저절로 흥얼거려집니다. 저만치에는 손끝만 갖다대도 '퐁' 소리를 내며 툭 터질 것처럼 부푼 봉오리가 보였습니다. 다가가서 사진을 찍고 냄새를 맡고 장난 걸고 싶은 친구라도 되는 양 살짝 건드려 보기도 했습니다.
도라지꽃을 보면 어쩐지 슬픕니다. 흰도라지꽃은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보라 도라지는 파리한 소녀 같습니다. 황순원이 쓴 소나기의 주인공처럼 가녀린 소녀가 환생한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런 생각은 저만 하는 것이 아니네요. 수필가 손광성은 '도라지꽃'이란 작품에 보랏빛 도라지는 지상의 꽃은 아닌 듯싶다고까지 했어요.
'이름 없는 외로운 무덤가 잔디밭에 홀로 피어 있을 때, 그리고 철 늦은 흰 나비라도 한 마리 앉아 있을 때, 도라지꽃은 더없이 슬퍼 보인다. 슬프다 못해 아주 우리들로부터 멀리 떠나 버리는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 이런 때의 도라지꽃은 아무래도 이 지상의 꽃이 아닌 듯싶다. 이승이 아니라 저승이고, 저승하고도 한참 저 편이지 싶을 만한, 영혼의 세계에서 잠시 얼굴을 내민 그런 꽃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하냥 슬퍼보이지만 하도 맑아서 감히 누구도 손대지 못할 것 같아요. 살짝 건들리기만 해도 때가 탈 것 같은 고고한 느낌. 그래서 가까이는 가더라도 같이 수다떨며 손잡고 뛰어놀지는 못할 것 같은 세상 구경 나온 막내 천사 같은 꽃. 그래서 어떤 시인은 도라지꽃을 '들에 홀로 서 있는 여승같다'고 노래했나 봅니다.
어쩌면 저는 오래 전에 봤던 보랏빛 천지 도라지 밭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할머니를 천상으로 보내던 날이었습니다. 황토흙 파 헤쳐진 그곳에 할머니를 묻고 넋놓아 울고 돌아서던 그 길에 끝없이 펼쳐져 있던 도라지꽃 무리. 아, 저승에서 할머니를 맞으러 나온 요정들이 틀림없었습니다. 한여름 볕에 바랜 꽃 하나 없이 그리 많이 모여있었지만 바람소리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흔들리던 가는 꽃모가지들은 저처럼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쓸쓸한 미소로 저승길을 안내하고 있는 듯 했지요.
그 후로 몇 년 간 한여름에 할머니를 뵈러 가지 못하다 어느 해엔가 별러서 할머니께 갔습니다. 어쩌면 그 언덕의 도라지가 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도라지꽃은 한 송이도 없었습니다. 그렇네요. 누가 해마다 같은 자리에 도라지를 심겠어요. 또한 도라지는 삼 년 이상 자라기가 어렵다는데요. 물론 몇십 년 묵은 뿌리도 간혹 있다곤 하지만 그건 예외고요. 그 해에 그 자리엔 들깻잎이 무성했답니다. 언젠가 마당이 넓은 집에 살게 된다면 한 켠에 도라지를 심고 싶어요. 제가 사랑했던 떠난 사람들이 꽃으로 핀 양 바라보며 먼 그리움을 부르고 싶어서요.
도라지에는 인삼처럼 사포닌 성분이 많아요. 쌉싸름한 맛을 내는 게 사포닌 성분인데 기관지에 좋은 식물이죠. 담배를 피우는 남편을 위해 식탁에 도라지무침을 잘 올리는데 그 맛은 제가 더 즐긴답니다. 데쳐서 볶은 도라지나물은 제삿상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음식이죠.
도라지꽃은 파리한 청보라 색처럼 전설도 슬퍼요. 상사병에 걸린 도라지라는 처녀가 혼사를 앞두고 홀로 마음에 두고 있던 총각을 잊지 못 해 죽어가며 그 총각이 사는 뒷산 길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죠. 도라지가 묻힌 자리에 그해 가을에 피어난 보랏빛 꽃을 도라지라고 부르게 되었고요.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에요. 도라지 처녀의 사랑이 꽃말처럼 저승길에 가서는 꼭 이루어졌기를 간곡한 마음으로 빌어봅니다.
고운 우리말 곳간 같은 시인 백석의 '여승'이란 시에도 도라지꽃이 나오죠.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돌무덤으로 갔다
아비 없이 자란 어린 딸은 하필이면 도라지꽃을 좋아하고 그 꽃이 보고 싶어서 돌무덤으로 가네요. 나이 어린 딸을 데리고 가을밤같이 차게 울며 세상살이를 하고 있는 시 속의 여인이 돌무덤 앞의 보랏빛 도라지꽃 한 송이로 피어난 건지도 모르지요. 기다림과 회한과 쓸쓸함에 고독까지 품은 도라지꽃의 신비롭고 슬픈 빛깔 자체가 산골에서 지아비를 기다리며 홀로 살아가는 슬픈 삶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니까요.
도라지꽃을 자세히 들여다 본 적 있나요. 이 꽃과 저 꽃의 꽃술이 서로 달라서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요. 도라지는 암술과 수술이 한꽃에 있습니다.
제꽃가루받이를 막으려고 도라지꽃이 피어날 땐 암술은 닫혀서 나옵니다. 그리고 곤충들이 수술이 다른 꽃의 암술과 수정을 끝냈을 무렵이면 암술이 꽃처럼 피어서 다른 꽃과 수정을 하게 되는 고도의 전략술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변화가 많은 환경에서 생존을 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혈통과 섞어서 생존가능성을 높이는 자손을 얻으려고 그렇게 진화를 한 것입니다. 그런 덕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순백과 신비로운 보랏빛깔 꽃을 보고 맛있는 도라지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거겠지요. 쌉싸름하고 알싸한 도라지무침이 먹고 싶어지네요. 오늘은 저녁 식탁에 새콤 달콤 매콤 쌉쌀한 도라지 무침을 내야겠어요.
(2007년)
첫댓글 선생님의 풀꽃 이야기는
주입식으로 외워야 하는 지식이 아닌
조곤조곤 들려주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관심이 생기고
더 관찰하고 사랑하게 되는
힘이 있어요. 오래 묵어도 그 힘과
맛은 더 짙어지니 참 좋습니다.
보라색 접사 사진은 올해 화분에 핀 꽃이랍니다.
꽃술의 비밀이 재미있어요.
긴 글 읽어주시고 칭찬 말씀 내려 놓으시니
선생님은 어디에나 피어있는
예쁜 꽃이십니다.
도라지 꽃에 보라빛 향기가
있을거 같지는 않던데
읽고 있는 내내 송재옥
선생님의 고고한듯
차거운듯 도라지꽃
향기를 읽습니다
최근에 쓰신 글인줄
알았는데 2007년이면
17년전 글이란 거네요
묵힐수록
좋은 글이란거는 만무 하지만
도라지의 모든 얘기가
소중하게 귀하게 담겨있네요
참 잘 읽었습니다~
시보다 수필! ㅋ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익은 글도 아니면서
내 놓았습니다.
세상에!!
도라지꽃 하나에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담다니ᆢ
여승같은 꽃
보랏빛 도라지꽃이 새삼 더 고결하게 느껴집니다
도라지처녀의 전설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도ᆢ
암술과 수술 이야기도ᆢ
공부 많이 했습니다
앞으로 도라지꽃이 더 좋아질 거 같아요~
도라지꽃은
문학의 소재가 잘 되더라고요^^
별도로 꽃이야기만 가지고도 재미있고 감동적인 두꺼운 책이 되겠습니다
그 해에 풀꽃 이야기를
묶으려고 하다가 사정상 미뤘어요.
도라지 꽃에 얽힌 사연들이 한결같이 슬프네요
우선 외모부터가 ..
송선생님의 '풀꽃이야기' 잘 읽어보았습니다.
한 편의 포토 에세이가 되네요
선생님의 수필 정말 맛깔납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군더더기가 좀 많지요?
17년 글이군요. 꽃에 대해 이리 관심이 있었으니 꽃 박사가 되었겠지요.
지난 주말에 텃밭에 가다기 지성엄마가 도라지 꽃을 보더니
글 쓴 지가
벌써 17년이나 되었네요^^
묵은 글을 중랑디카시인협회 카페 덕에
가끔 꺼내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