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로마까지 호송되는 긴 항해 여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누가는 뱃사람이 아니라 조금은 어설픈 표현을 사용했지만, 현장에 없던 사람은 절대 꾸며낼 수 없는 상세한 표현으로 이 과정을 기록했다(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1절). 이 여정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했다(2절). 그는 에베소 폭동 때 극장에 끌려간 성도로(행 19:29; 20:4), 바울의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누가는 배에 필요한 주치의로 함께 했을 것이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은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겨져 배를 두 번 타는데, 첫 배는 시돈에서 무라까지 가는 연안선이었고 아무 문제 없이 항해했다. 하지만 두 번째 배는 무라에서 로마까지 가는 큰 배였으나 폭풍을 만나 파선했다.
21세기에도 배가 침몰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진다. 아무리 구명조끼 및 안전 도구가 잘 구비되어 있어도 깊이를 알 수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하면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천 년 전 항해는 더더욱 안전과 거리가 멀었다. 수시로 부는 광풍과 폭풍 때문인데, 10월 중순에서 3월 중순까지는 항해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 항해술도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이어서 나침반도 없이 별을 보며 운항해야 했다.
한달이 넘게 표류하는 배에서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떨 때, 자유로운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모두 영혼의 파멸을 피부로 느낄 때 영혼의 안전함을 확신했던 사람, 바울이다. 어떻게 바울은 침몰하는 배 안에서 평안을 느낄 수 있었을까?
긴 항해를 종종 인생에 비유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시로 부는 광풍과 폭풍을 만난다. 오래 표류하기도 하고 심지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딤전 1:19). 어떻게 우리는 험악한 바닷길 같은 인생에서 ‘내 영혼이 안전하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영혼 평안해’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
1. 바울의 여정(1-20)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육로를 통해 시돈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해변을 순항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탔다(2절). 백부장 율리오의 호의로 시돈 성도에게 대접을 받은 바울 일행은 곧 거기서 떠나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렀다(4-5절). 서방 사본에 따르면 이 여정은 약 2주를 소요했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일행은 이달리야 행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다(6절). 로마의 주된 곡식을 운송하는 큰 배로 많은 양의 곡물과 사람(276명, 37절)을 태울 수 있었다. 이때부터 풍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틀이면 도착할 니도에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도달했지만 더 이상 갈 수 없어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하기로 했다(7절). 일단 그레데 섬 라새아 부근 미항에 멈췄다(8절).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가는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다고 했는데, 많은 학자가 지지하는 59년에 이 일이 있었다면 유대인의 금식하는 대 속죄일인 10월 5일이 지난 시점 즉 항해가 불가능한 시점이 된 것이다(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9절: 짧은 낮, 긴 밤, 조악한 시야, 구름, 폭풍, 폭우, 폭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절). 수년간 전도를 위해 여러 번 지중해를 항해한 경험에 의하면 미항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 백번 옳았다. 하지만 바울이 선장인가? 선주인가? 한 죄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대로 미항보다 겨울을 나기 좋은 항구 뵈닉스까지 가기로 했다(11-12절). 하루면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였다. 마침 순한 남풍이 불어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안심한 그때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타이푼)이 크게 불어닥쳤다(14절).
이때부터 배는 통제 불능이 됐다(15절). 하루만 이동해서 겨울을 편안하게 보내려고 했던 계획은 순식간에 망가졌고 거의 한 달간 불안과 공포에 벌벌 떨며 혼동하는 표류에 빠졌다.
그래도 한 달을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서 긴급 조치할 틈을 얻었기 때문이다(16절). 그들은 1)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2) 줄로 선체를 둘러 감고(배를 꼭 잡아 맴), 3) 연장을 내렸고(큰 돛대의 하활을 내림), 4) 짐과 기구를 내버렸다(16-19절). 파도와 폭풍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배를 가볍게 하여 더 떠오르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절). 아무 소용이 없었다. 희망의 마지막 불씨까지 모두 꺼져버렸다.
2. 바울의 확신(21-26)
타고 있던 비행기 양 날개의 엔진이 멈춰버렸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인생이란 항해에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위기를 종종 겪는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모든 노력과 수고가 소용 없을 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이제 끝이구나’ 자포자기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사람들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절). ‘내가 뭐랬어’라는 타박이 아니다. 그들을 동정하고 마음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자기 말의 신뢰성을 높이는 말이다. 그가 하는 다음 말을 믿어 주길 바랐다.
모두가 구원의 소망이 전무하다고 느꼈던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안심하라고? 혼자 다른 배에 타고 있는건가? 큰 풍랑이 그대로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안심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바울은 평안한가? 무슨 근거로 모두 안전할 거라고 확신하는가?
여기 바울이 확신했던 근거가 나온다. 그의 영혼이 폭풍 중에 평온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4절)
바울도 폭풍 중에 크게 흔들리는 배 위에 있었다. 눈앞엔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질 것 같은 기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 하는 말이나 그 상황에 압도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염려와 근심으로 자기 영혼이 내는 소리도 안 믿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다.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종종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와 같은 믿음을 발견하기 원하신다. 그럴 수 없을 때에 하나님 말씀을 붙들기를, 말씀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들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신다(롬 4:18).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믿음대로 이루신다.
그분은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군대가 에워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서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폭풍을 만난 배 안에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주무시다가 일어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타이르신다.
결국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내면의 소리가 내는 소리가 무엇이든 상관 없다. 우리 믿음을 하나님께 두면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는 평안하다. 결혼, 출산, 양육, 취업, 건강, 구원, 사업 등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두 세세히 말씀해주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다음을 확신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롬 8:3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9).
하나님이 우리 삶에 두신 뜻을 온전히 이룰 그 날까지 그 무엇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 바울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까지 반드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당신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가?
3. 바울의 구원(27-44)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게 하셨을까? 바울의 믿음대로 됐을까? 벌써 열 나흘째가 됐다(27절). 여전히 배는 파도와 폭풍에 따라 정신없이 이리 저리 쫓겨가기를 자정까지 계속했다. 그런데 보니까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물 깊이를 재어 보니 스무 길(37m)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27m), 점점 뭍을 향해 가는 게 분명했다(28절). 하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암초에 부딪힐 위험이 컸다. 그래서 일단 네 닻을 내려 배를 고정하고 날이 밝으면 뭍으로 가기로 했다(29절).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몇몇 사공들은 도망하려고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몰래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울이 이를 알고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했고, 이에 군인들이 거룻 줄을 끊어 거룻배를 떼어 버렸다(31-2절). 바울이 그만큼 신뢰받는 상황이었고 또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그가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어 가자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음식을 권했다. 그들은 혼돈과 공포 속에 음식을 잘 챙겨 먹지 못한지 십사일이나 됐다(33절). 그들의 원기 회복을 위해(구원, 34절) 음식이 분명 필요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너희 중 머리 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절).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배에 있는 이백칠십 육명의 사람들도 바울의 확신에 찬 말에 안심했고 음식을 먹었다(36절). 폭풍 치는 바다 위에서 하나님 말씀에 확신에 찬 바울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대표로 하나님께 축사 기도하는 장면은 참 아름답다.
식사 후 남은 모든 곡물(밀)을 바다에 버렸다(38절). 배를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배를 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의논하여 결정한 후(39절), 닻을 끊고 키를 풀어 배가 육지를 향하게 하고, 돛을 올려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갔다(40절).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이 한 번의 기회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배는 그만 바다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형성되는 끈끈한 진창, 모래톱에 처박혔다. 이물 곧 배의 앞부분은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됐고, 뒤쪽에서 부딪치는 거대한 파도가 배를 점점 부서뜨리기 시작했다(41절).
바울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배는 손상됐다. 하지만 배에 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생명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다(42절). 이 틈을 노려 뭍으로 도망쳐 사라지면 군인들이 그 죄수가 당할 형벌을 대신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백부장을 통해 바울을 보호하셨다(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43절).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은 헤엄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널조각이나 배 물건을 의지하여 육지에 나가게 했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다 상륙하여 구조됐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된 것이다(44절).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일들, 조바심 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상세히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쉽게 믿을 텐데. 어쩌면 이런 마음 깊은 곳엔 얕은 해안 주변을 다니며 아주 작은 믿음만 가지고 살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인생의 긴 항해, 망망대해를 지날 때 어떤 위험과 환난이 불어닥칠지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을 배운다. 조롱과 핍박, 무거운 죄의 짐과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고통 중에도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을 믿으셨다(믿음의 주, 히 12:2).
기독교의 믿음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막연한 믿음에 ‘예수님’ 이름만 차용하는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나의 하나님이 반드시 말씀하신 그대로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가? 주님은 언제나 그것을 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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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말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사이에 큰 다툼이 생겼던 날 밤, 천부장의 명령에 따라 군영에 있던 바울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행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에서와 같이 로마에서도 주님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는 사명은 마치 그를 단숨에 로마로 이끌어 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를 피해 단숨에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미결수의 신분이었음에도, 그는 자그마치 2년의 세월을 갇혀 지내야만 했습니다(행 24:27).
감옥에서의 2년을 하루 같이 여긴 바울에게 마침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작 된 항해: 가이사랴에서 미항까지(1-8)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은 바울과 죄수들을 이탈리아로 이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송의 책임은 황제의 직속 부대인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에게 맡겼습니다.
미결수였던 바울과 달리 당시 이탈리아로 보내지는 죄수들은 이미 사형이 선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중의 유희를 위해 원형 경기장에서 비참히 죽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율리오는 지체 없이 해상을 통한 이송을 시작했습니다.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아드라뭇데노는 소아시아 북서쪽 끝에 있던 항구도시였습니다. 아드라뭇데노 배는 그 지역에서 건조되어 그 도시를 출항지로 삼았던 선박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이 배는 수리아와 소아시아를 항해하는 무역선으로서 필요에 따라 여러 곳에 기항했습니다.
율리오는 바울과 죄수들을 이 배에 태웠고, 정확히 어떤 신분으로 동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의 동역자 아리스다고도 승선했습니다.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이튿날 배는 시돈에 도착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대표적인 항구였던 시돈에 정박한 배는 화물을 싣고 내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율리오는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어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하역을 마친 배는 다시 출항했습니다.
(4-5)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시돈에서 소아시아까지의 항로는 구브로 남쪽 해안을 따르는 것이 최단거리였고 일반적이었습니다. 시돈을 떠난 아드라뭇데노 배 역시 이 항로를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불어 닥치는 거센 맞바람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내 바람을 피해 구브로 섬의 동북쪽을 끼고 돌아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해안을 지나는 행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는 2주 만에 겨우 무라에 정박했습니다, 무라에서는 좋은 소식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때마침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난 율리오는 죄수들과 함께 곧장 배를 갈아탔습니다. 이 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까지 애굽의 곡물을 운반하는 대형 곡물 운반선이었습니다. 승선한 인원이 276명이었다는 사실(행 27:37)을 통해, 우리는 그 배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일반적인 항로는 그레데 남방을 거쳐 가는 것이 최단거리였고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여의치 않을 때는 우회 항로를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아드라뭇데노 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대형 선박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배도 몰아치는 북서풍을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는 곧 출항했습니다.
(7-8)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알렉산드리아 배는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순풍을 타면 이틀이면 도착할 거리를 여러 날이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이마저도 더욱 매서워진 바람으로 인해 더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더는 거센 바람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알렉산드리아 배는 그레데 섬을 바람막이 삼아 남쪽으로 돌아 간신히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고된 여정에 지친 이들은 미항에서 잠시 숨을 돌렸지만, 예상보다 지체된 일정 탓에 이송 책임자였던 율리오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광풍 유라굴로(9-26)
(9-10)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인들의 대속죄일로 양력 9월 말이었습니다. 당시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계속 이어지는 돌풍으로 인해 항해가 거의 불가능한 시기였습니다. 과거 난파의 경험(고후 11:25)을 지닌 바울은 배와 짐 뿐 만 아니라, 자칫 생명까지도 위험할 수 있음을 경고하며 미항에 머물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11-13)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선장과 선주는 미항이 겨울을 나기에는 많은 불편이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뵈닉스 항으로의 이동할 것을 추천했습니다. 이곳은 겨울을 나기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한쪽은 서남쪽을 다른 한쪽은 서북쪽을 향해 있어 바람의 방향을 파악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는 할 수만 있다면 속히 로마에 도착하고 싶었던 율리오에게 솔깃한 이야기였습니다. 때마침 불기 시작한 순한 남풍에 율리오는 주저 없이 닻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14-17)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순풍을 맞으며 누렸던 출항의 기쁨은 잠깐이었습니다. 섬 가운데서 일어난 광풍 유라굴로는 순식간에 거대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마구 뒤흔들었습니다. 이전에 만났던 맞바람은 미약하게나마 방향을 잡아갈 수 있었지만, 유라굴로는 방향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매서웠습니다. 이들은 해안선에서 밀려나 어디론가 떠밀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레데 섬의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인 가우다 아래를 지날 때, 이들은 간신히 거루(거룻배)를 갑판 위로 끌어 올렸고, 밧줄로 선체를 동여 맬 수 있었습니다. 배가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고 있음을 눈치 챈 이들은, 북아프리카의 모래톱 스르디스에 걸려 파선될까 싶어 조금이라도 떠밀려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닻(σκεῦος)을 내렸습니다. 유라굴로는 여전히 기세등등했습니다.
(18-20)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광풍이 이틀째 계속되자 선원들은 생존을 위해 바다 위로 짐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흘 째 되는 날에는 없어서는 안 될 배의 기구들까지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더이상 배에 탄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그저 버티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제아무리 무서운 광풍이라 할지라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지나가기 마련인데, 유라굴로는 여타 광풍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여기서 기자는 당시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 여러 날 동안에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뱃사람들에게 해와 별은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또 그것들은 망망대해 칠흑 같은 어둠을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기준점을 잃고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은 이내 절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때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21-26)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바울은 굶주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상황과 환경으로 인해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선 바울은 지쳐 쓰러져 있는 사람들에게 배는 파손되겠지만, 생명에는 손상이 없을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간밤에 자신을 찾아 온 하나님의 사자의 메시지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광풍 유라굴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절망했습니다.
반면 동일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바울만은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약속의 말씀을 모든 것 위에 두고 있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가 가이사랴의 감옥에서 2년을 하루 같이 여길 수 있었던 이유도 이와 같았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미결수의 신분으로 감옥에서 2년을 보내게 하시고, 광풍 유라굴로를 경험하게 하신 이유는, 그가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각 성과 각 마을을 다니셨던 것과 같은 이유였습니다(눅 13:22). 바울에게 이와 같이 고된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276명(바울 포함)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행 27:44). 바울을 로마로 이끌어 가시는 이유도 이와 같았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는 무엇을 기준 삼아 하루하루를 해석해 가고 있는지 돌아 보면 좋겠습니다. 유라굴로와 같은 상황과 환경입니까? 약속의 말씀입니까?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유라굴로와 같은 상황과 환경을 마주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지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바울과 같이 말씀을 기준 삼아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결단하는 우리의 오늘은,
틀림없이 누군가로 하여금 변질 된 삶을 청산하고 변화의 삶으로 이끄는 주님의 부르심이 될 것입니다.
표류에서 상륙으로(27-44절)
바울이 탄 배는 열나흘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아드리아 바다를 표류해왔습니다. 바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앞선 26절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는 바울의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27-29)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27절에 보면 사공들이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했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중인데 어떻게 육지가 가까워진 것을 알았을까요? 본문에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아마도 사공들은 해안가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듣고 육지가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28절에 사공들은 물을 재어 보았다고 하는데, 이는 바다 아래로 납덩이를 던져 수심을 측량한 것입니다. 처음에 길이는 이십길(36미터), 조금 가서 다시 잴 때는 열다섯길(27미터)이었습니다. 수심이 급격하게 얕아진 것은 배가 육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항구가 조성되어 있지 않는 해안에 정박을 시도할 때는 암초와의 충돌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그들은 전진하지 않고, 날이 밝아져서 육안으로 해안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을 때까지, 고물(배의 뒷부분)에 있는 네 개의 닻을 내리고 기다렸습니다.
아마도 육지가 가까워졌다는 소식에 배에 탄 사람들은 흥분과 기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도 아드리아 바다 같은 고난 가운데서 이리 쫒기고 저리 쫒기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바다에서 언제 건짐을 받을지 기대하며, 혹여나 고난의 깊이가 줄지는 않았는지, 재어보기도 합니다. 한편으론 고난의 파도에 더 이상 휩쓸러 가지 않기 위해, 닻을 내리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어서 이 암흑이 그치고, 광명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오늘 본문과도 같습니다.
(30-32)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0-32절을 보면, 사공들은 도망가려고 이물(배 앞머리)의 닻을 내리는 척을 하다, 거룻배(lift boat, 구명정)를 바다에 내려놓습니다. 거룻배는 주로 돛이 없는 작은 배를 칭하는데, 사공들은 이를 타고 몰래 도망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이 사람들이 배에 있어야 너희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여 그들의 도주를 막았습니다. 현 상황에서 선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날이 밝은 후 항구가 아닌 암초가 많은 육지에 대기 위해서는 선원들의 노련한 경험과 기술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군인들은 거룻줄을 끊어 거룻배를 바다에 버렸습니다. 이제 이 배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암초를 피해 배를 육지로 안전하게 정박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닫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내 안의 거룻배를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룻배는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은 탈출구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가 힘들 때면, 거룻배를 타고 신앙의 바깥으로,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서, 또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내 안의 거룻배를 꺼내어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배 안에서의 내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있는 자리에서 맡겨주신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고, 배는 정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연결된, 죄와 연결된, 내 안의 거룻줄을 끊으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골3:1-3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3-38절을 보면 날이 새는 상황에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오랜 풍랑 속에서 두려움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탈진해 있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기력을 차리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의 양식입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영의 양식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입니다. 우리가 그 <어루만지심>을 간절히 사모할 때, 우리는 위로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세벨 왕비의 위협을 받아 심적으로 큰 낙심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광야로 도망가서 심지어 죽기를 원했습니다. 즉 그에게 큰 영적침체가 찾아 온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힘이 없고, 가슴 속 소망과 열정이 사라져, 무엇도 꿈꿀 수 없을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온도는 영적 침체의 신호입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재차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시고, 음식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원어를 문자적으로 하면 “그 길이 너보다 크기 때문이다”로 직역됩니다. 맞습니다! 우리 삶의 길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큽니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고, 일으켜주심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 보다 더 큰 삶의 길을 넉넉히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위로를 받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40일이나 걸리는 광야길을 걸어서 목적지인 하나님의 산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것! 내 고난과 문제를 내 경험과 상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해석하고 말씀으로 답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내가 회복되는 것이고, 본문에서 배 안에 있는 276명이 34절의 말씀대로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정도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39-40)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39절, 날이 새자,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고대했던 이름 모를 육지였습니다. 본문에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라고 얘기했는데, 이는 ‘모래사장으로 된 포구’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배를 댈 수 있는지 논의하였습니다. 이후 배를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닻을 끊고, 돛을 달아 천천히 해안을 향하여 진입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나 했는데, 그들에게 큰 위기가 또 찾아왔습니다.
(41-44)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배가 두 물살이 합치는 곳을 만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그만 모래톱에 좌초되었습니다. 뱃머리는 움직이지 않고, 배 뒷부분은 거센 파도에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혼비백산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인들은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갈지 모르니 모두 죽이자는 제안을 합니다. 당시 로마법은 군인이 담당하는 죄수가 도망갈 경우, 그 죄수가 받을 형벌을 담당 군인이 대신 처벌받았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죄수들을 놓치느니, 자신들을 위해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백부장을 통해 바울을 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3절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먼저 육지에 나가게 했다‘고 합니다.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이 말이 마음에 참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살리시기 위해 군인들의 뜻을 막으셨습니다. 군인들의 제안은 그들의 관점에서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 악한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모든 악한 뜻을 막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우리가 피값으로 사신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온전하게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내 삶에서 문제의 소용돌이로 인해 앞으로 못 나가는 상황, 문제의 파도로 내 마음을 깨뜨리고 부서지게 하는 악한 뜻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계획이, 악한 뜻을 막으시고, 우리 삶을 이끄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 새벽기도가 끝난 후, 각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는 평안의 발걸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변질의 삶을 청산하고 변화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란, 주님의 시선이 우리 삶에 전염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상황과 형편이, 나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으니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으로 나의 상황, 나의 형편, 내 인생의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세상에 무릎을 꿇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울면, 세상 앞에서 울지 않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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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첫 절, 27장 1절에 우리라고 표기된, 사도 바울과 누가는 이제 배편으로 로마로 향하게 되며, 백부장 율리오가 그들과 다른 죄수들의 호송 책임을 맡게 됩니다. 아마도 의사였던 누가가 노쇠하고 병약한 바울의 곁에 필요했기에 누가가 동행했을 것입니다만 이 길고 어려운 항해의 길에 두 사람 외에도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게 되었음을 2절이 기록해 줍니다. 감사하게도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고, 이후 몇 개의 항구를 거쳐 로마로 가기 위해 미항이라는 곳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당시 9월이나 10월에 있는 금식하는 절기라고 표기된, 유대인의 속죄일이 이미 지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백부장 율리오에게 권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이미 여러 번의 파선 경험을 가진 바울은 당시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바람과 파도가 거세어 지고, 항해 가운데 큰 폭풍을 만날 수 있는 것을 알았기에 무리한 항해의 위태함을 알아 백부장에게 10절의 말씀으로 권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부장은 바울의 권고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11절입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이 머물렀다가 겨울이 지나면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한 항구는 겨울을 지내기에 비교적 작은 항구라 불편했고, 뵈닉스라는 그레데의 항구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임박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남풍이 순하게 불어 순조로운 항해가 시작됩니다. 이 배는 곡식을 가득 실은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배로 추정되기에 제법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이후 37절 말씀에 보면 276명이나 탄, 커다란 규모의 배입니다. 커다란 배가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크게 일어납니다. 배의 크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파도와 광풍으로 위기 가운데 처하고, 선원들은 배 곁이나 뒤에 매달던 거루라고 하는 작은 거룻배 형태의 구조선을 간신히 끌어 올립니다. 그리고 풍랑에 깨져 버릴 것 같은 배를 밧줄로 감고, 스르디스라고 하는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장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 다닙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어도 풍랑은 잠잠해 지지 않아, 사공들은 이제 배의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까지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니 더욱 악화되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도 여전해, 구원의 남은 소망마저 없어져 기진맥진한 상황이 됩니다.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뿐 아니라, 풍랑에 따라 이리 저리 구르며 탈진하였기에 이제 아마 배에 탄 어느 누구도 살아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바울이 사람들 가운데에 일어납니다. 광풍 가운데, 한치 앞도 볼 수 없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사로잡혀 소망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바울은 안심과 소망의 말을 전합니다.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은 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이 반대했던 시기에 무리해서 항해를 진행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얘기를 하며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울이 낙관론자이거나 긍정적인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죽음의 풍랑 속에 바울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독대하였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계시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통해 위로와 믿음과 평안을 회복한 것입니다. 23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모두가 두려워하는 가운데 담대함을 소유한 삶은, 오직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독대를 통해서만 우리는 오늘도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 앞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걸음을 주님과 함께 바르게 해석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허락하신 고난 속에 하나님을 깊이 만난 바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의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안심시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셔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까지도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깊이 만날 기회를 허락해 주십니다. 두려움 가운데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와 독대 속에 우리는 비로소 풍랑 속에서도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만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열 나흘째 되는 밤입니다. 순하게 불던 남풍을 맞으며 출발했을 때만해도 우리의 꿈을 향해 밀어주는 것 같았는데(13절),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었습니다(14절).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이백칠십육 명의 생명은 그저 숫자로 부르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37절). 배에 탄 모든 이의 꿈이 흔들렸고, 생명의 존엄은 광풍 앞에서 비틀거렸습니다. 18절은 항해를 시작한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고, 사흘째 되는 날 배의 기구를 자신들의 손으로 내버렸다고 기록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바람 속에서 사람의 능력과 희망이란 하루도 견딜 수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자수성가를 꿈꾸며 담았던 곡식과 상품들이 하나 둘 버려졌습니다. 급한 마음에 어떤 상품인지 확인할 시간도 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선물들도 던졌습니다. 무겁다고 생각되는 것은 배의 기구라 할지라도 사공들의 손에 던져졌습니다. 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구들을 떼어 버릴 때 깊은 무력감과 상실감을 경험했을 터입니다. 그 이후에도 열하루 동안이나 더 흔들렸습니다. 27절에서 누가는 이 상황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 갔다고’ 기록합니다. 휘청거리는 인생들이 그렇게 열한 번의 낮과 밤을 보냈습니다.
자정쯤 되었을 때, 파도의 철썩임 소리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사공들은 육지에 가까워진 것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물을 재어 보니 36미터였고, 조금 지나 다시 살피니 27미터였습니다. 수심이 얕아지는 것은 좋은 소식이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심이 얕아지며 배가 암초에 걸려 침몰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공들은 급한 물살에 이끌리다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지 않도록 후미에 닻 네 개를 내려 중심을 뒤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배가 천천히 해변으로 향하길 바라며 선두의 상황을 살핍니다.
자정 즈음부터 동이 트는 몇 시간은 열나흘 동안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균열시킵니다. 누구보다 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공들이 도망을 치려고 작은 배를 바다에 내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지켜야 했던 군인들은 죄수가 도망칠까봐 죽여 버리자고 합니다. 찰나의 희망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도망치려 하고, 지켜야 할 사람일수록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암초에 배가 반파될 확률이 높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무서웠고, 죄수들이 도망친다면 자신들의 목숨으로 갚아야 했기에 죽이려 한 것입니다. 내 생명 앞에 너의 생명은 존엄을 잃고, 우리라는 울타리 밖에 예외가 존재하게 됩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찰나의 희망이었음에도 누군가를 버리려 하고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 바울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버렸다 고백했던 그에게 더 이상 버릴 것은 없었습니다. 버린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 안에 있던 모두가 상실의 아픔에 지쳐 쓰러졌음에도 그는 아직도 배 너머 로마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선두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며 거룻배를 내리던 사공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황 너머의 소명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열나흘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써 무죄하다는 것을 검증하는 시간이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로마에 가게 될 것이란 확신을 되새김질하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리였습니다.
31절에서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와 군인들에게 사공들을 붙잡아야만 모두 살 수 있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마지막 남은 희망일 수도 있는 거룻배 줄을 끊어 떼어 버립니다. 일부를 위해 살던 배 위의 사람들을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합니다. 37절은 이러한 바울의 생각이 누가에게까지 확산되어 우리는 모두 이백칠십육 명이라고 적게 합니다. 나아가 백부장 율리오 또한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모두가 사는 방법을 찾게 합니다. 상관의 말에 복종해야 했던 자들이 죄수의 말을 따르고 있습니다. 환경이나 처한 입장이 신앙 앞에서 굴복하게 됩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위한 삶, 나와 관계 맺은 세상의 일부만을 위한 행동방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로마를 향한 여정을 하나님 앞에서 내가 구원 받을 정당성을 얻기 위해, 혹은 역사에 족적을 남기려고 가려 했다면, 바울이 사공들과 함께 배를 타고 도망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과 가까운 누가, 2절에서 등장하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에게 슬쩍 다가가 귀띔해 사공들과 거래를 해도 괜찮았을지 모릅니다. 어차피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11절), 그것 보라고 냉소하며 저주해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더 낮은 확률, 더 어려운 방법, 더 긴 기다림을 택합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음은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장사를 하려던 자도, 가족과 만나려던 이도, 심지어 바울을 잡아가는 군인들도 생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 또한 흔들리는 배 안에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정치와 경제, 직장과 가족 안에서 이리 저리 뒤척입니다. 광풍 속에서 꿈도, 재능도, 돈도, 관계도 버려집니다. 열나흘이라는 낮과 밤이 지나고 희망마저 버리진 않았습니까. 구원의 빛줄기가 보이려 할 때마다 아는 사람들이 먼저 도망치고 지켜야 할 사람들이 먼저 죽이는 것을 보며 속에서 쓴물만 나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변명하기 바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런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받은 사명을 굳게 믿고 변함없이 앞을 바라보는 신앙인이라고 전합니다. 그는 자정임에도 떠오르게 될 태양을, 폭풍 속에서도 육지를 보는 사람입니다. 일부가 아닌 모두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따라 생명까지 버리겠다는 순종이 그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괴로움 속에서 음식 먹을 여력조차 없던 절망자들에게 살아날 수 있다고 외쳐야만 합니다. 포기하는 마음을 버리고 스스로 음식을 떼어 먹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33절의 여러 사람이라고 번역된 하파스란 단어는 사실 모든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백칠십오 명에게 일일이 다가가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을 것이라 외쳐야 합니다. 나 살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사명에 대한 순종뿐이며, 이렇게 모두를 위해 살아가는 이로 인해 생명이 이어집니다.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오늘의 양식을 떼어 먹어야 합니다. 비록 표류하는 배 안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희망자들을 통해 이백칠십육 명이 다함께 우리라는 단어 속에 들어와 안심하고 각자 먹어야 할 것들을 떼어 먹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모험을 위해 남은 밀을 기꺼이 버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새 날을 고대할 것입니다. 동이 트고(39절) 알지 못하는 항만으로 가기 위해 의논하며 닻을 끊습니다. 폭풍에 꺾일까봐 올려두었던 키를 다시 아래로 내려 믿음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토록 자신들을 괴롭히던 바람임에도 운명을 맡깁니다. 두 물이 합하여 흐르던 곳에 앞이 막히고 뒤는 물결에 부딪쳐 깨어져가도, 함께 살아갑니다. 헤엄칠 수 있는 자는 물에 뛰어들고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과 배 물건에 의지해 나갑니다. 마침내 모두 상륙하여 구조됩니다. 이어지는 28장 1절은 이곳이 16절에 나오는 가우다라는 작은 섬으로부터 767km 떨어져 있던 멜리데라는 이름의 섬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하지만 변함없이 하나님만이 주인 되시던 여정. 이것을 바로 사도행전이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