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룸펜들의 밤
- 양안다
방구석에 구겨져 있다. 약봉지처럼.
물약을 쏟고 누워 있다.
팔다리 달린 알약처럼.
숨을 쉬고.
참다가.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새의 활강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석유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 입김이 번지고
온수에서 녹는
가루.
쏟아집니다. 창밖으로 눈보라.
창밖에는
눈 덮인 골목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나는 아무것도 못 해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고 매일 밤 혼자 쏟아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장작 대신 나를 던져줘요. 불덩이야. 사랑에 금지당한 사람이야. 살아야 해. 살아야지. 아무렴, 신기루. 친구들이 보고 싶어……
가느다랗고 길게 펼쳐지는 오로라 속에서.
내가 너를 찾아가도 돼?
저는 조금씩 기억을 잃고 있습니다.
눈앞에 사물을 두고도 인지하는 데에 오래 걸려요.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선생님, 제가 병에 걸린 걸까요?
“우리에겐 수많은 가면이 있다네.
오늘은 웃는 가면.
내일은 우는 가면. 하지만 밤마다
나는 녹는 가면을 쓰지요.“
내가 죄인의 심정을 이해한 걸까.
낡은 골목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정까지 기다릴게.
지옥이라는 곳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얼굴이 어떤가요?
바보.
바보.
바보.
세 번 되뇌었습니다.
내가 꿈을 꾸는 걸까. 5분 간격으로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괜찮아요. 호르몬이 균형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나의 집이 너무 멀다……
*
“눈이 그쳤나요?”
대답하는 이도 없는데.
왜인지 나는 자꾸 녹는다.
일어날 의지도 없이.
신기해.
내가 사라져요.
입김보다 빠른 속도로.
— 시집 『몽상과 거울』( 아침달, 2023)
* 양안다 :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대학 4학년 때인 2014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 대전대학교 문예창작 전공. 동국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 창작 동인 ‘뿔’로 활동 중. 첫 책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18/ 개정판, 2022)을 시작으로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민음사, 2018), 『숲의 소실점을 향해』(민음사, 2020), 시선집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全2권』(도서출판 아시아, 2020),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문학동네, 2023) 『몽상과 거울』(아침달, 2023)과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아침달, 2019)가 있다.
시 속 한 사람은 지금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앓고 있다. 혼자만의 방에 누워 구겨진 “약봉지처럼” 간신히 숨을 쉬고 있다. 바깥에는 마침 눈이 온다.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그는 하필 “새의 활강”을 떠올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날기 위한 연습을 하는 걸지도. 끓는 주전자에서 피어나는 허연 기체로부터 “입김”을, 아주 어렴풋이나마 삶의 기운을 감지하듯이. 어쩌면…….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듯 위태로운 몸과 마음, 그럼에도 쏟아지는 눈을 가루약처럼 음미하며 찬찬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 해의 끝, 쓸쓸한 사람은 더 쓸쓸해지는 시간. 어둠 속으로 아프게 침잠하는 시간. 그러나 너무 오래 자책하지는 않기를. 가루약 같은 눈이 오는 밤이면, 근심을 멈추고 잠시 쉬기를.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살아지는 일을, 일어서는 일을 끝내 생각하기를.
박소란 시인 / 세계일보 2023.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