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박사의 제삼의 팔
– 김누누
두 팔로 안으면 팔이 없어지니까 빅토르 박사는 오른쪽
어깨에 팔을 하나 더 달았다
이제 너를 안고도 책을 넘길 수 있어
그것도 어느새 사십 년 전이다
빅토르 박사의 제삼의 팔에는 눈이 달려 있다
눈에서는 일직선의 레이저가 나간다 일곱 번째에게서
얻어 왔다
애인을 끌어안고 애인의 머리를 만진다 제삼의 팔에 달
려 있는 눈을 통해 애인의 정수리를 본다
사랑해
그는 기계음이 섞인 선명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빅토르 박사는 얼마 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금은 소파에 앉아 있다
그는 이제 너무나 늙었고 그의 눈은 총기를 잃은 지 오래다
기계 팔은 늙지 않고
녹이 슨다
그는 그것으로 안심한다
빅토르 박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애인 또한 그 사실을 안다 애인이 두 손을 얼굴에 묻는다
빅토르 박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애인을 끈다
빅토르 박사의 제삼의 팔은 삼백육십 도로 돌아가므로
그에게는 사각이 없다
눈이 닿는 모든 것을 본다
빠짐없이
전부 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방문을 연다 겨우 몸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아주 조금만
연다
오래되어 낡은 나무문이 삐걱거리고
경첩에 걸린 문은 한차례 세게 눌러야 비로소 닫힌다
다 끝이 났구나
빅토르 박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을 감고 제삼의 팔
을 돌려 창밖을 봤다
제삼의 팔에 달린 눈은 감기지 않는다
그는 쪼그려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 눈을 감은 채로 아
무것도 사라지지 않은 풍경과
불이 꺼진 채 굳은 그의 애인
그것이 이 모든 것의 마지막 장면이다
― 시집 『일요일은 쉽니다』(시용, 2022)
* 김누누 : 1991 출생. 2014년까지 김보섭으로 활동하다가, 2014년부터 김누누라는 이름으로 활동. 2019년 독립문예지 [베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착각물』(파란, 2020) 『일요일은 쉽니다』(시용, 2022)가 있다.
해설 / 폐허에서 계속 생겨나는 시 - 진송(비평가)
특이하게도 시인의 말 앞에 자리 잡은 첫 시, 「빅토르 박사의 제삼의 팔」이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이 시집의 첫 번째 장면은 어떤 이야기 혹은 세계의 "마지막 장면"(「빅토르 박사의 제삼의 팔」)이다. 온라인 비디오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의 캐릭터 빅토르 박사와 동명이인(同名異人) 혹은 동명이물(同名異物)처럼 보이는 이 시 속의 빅토르 박사는 착잡한 마음 속에서 오래된 기계 애인의 시스템을 제 손으로 종료한다. 그러나 사랑과 생명, 그리고 한 사물의 역사가 모두 소멸하는 것 같아 보이는 이 장면에서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흔히 이야기의 결말에서 기대되는 것과 같은 명확하게 드러난 진실이나 가능성의 종결이 아니다.
박사의 녹슬어버린 기계 팔, 소파, 낡은 나무문 등 이 장면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힘을 쭉 뺀 긴장이 풀린 몸으로 무엇도 숨기려 하지 않으면서 그 사물들의 오래된 물질성만으로 시의 곳곳에 비밀스러운 힘을 보존한다. 사물들이 지닌 역사성은 사랑의 역사를 종결시키려는 박사의 의지를 압도하며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차례 세게 눌러야 비로소 닫"히는 낡은 문과 "감기지 않"는 녹슨 기계 눈은 문을 닫고 눈을 감으며 모든 것을 끝내려는 박사의 움직임에 반하여 끝을 지연시킨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끝난 장소에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은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끝난 장소에 사물들이 남아 있다는 묵직한 사실은 고요함 속에서 묵묵히 힘을 간직한다.
『일요일은 쉽니다』에서는 이처럼 모든 것이 끝나가는 세계,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뭔가가 잔여물처럼 남아 있는 세계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엿보인다. "이야기가 끝나도 주인공이 죽지 않고 방파제 위를 위험하게 걸으며 삶을 이어가는 영화"(「Under water」)가 등장하고, 미세 기생충에게 "내장이 죄다 갉아먹힌" "몸속이 텅 빈" 사람들이 그 텅 빈 몸을 가지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미세미세」). 전 세계적인 폭설이 내려 세상의 모든 것이 파묻힌 이후에도 "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기묘한 재앙이 이어지기도 한다(「눈×10」). 재앙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재앙도 그 재앙 속에서 살아가는 삶도, 둘 중 어느 것도 쉽게 끝나주지 않는다는 사실일 테다. 어떤 상황이 와도 "사실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고/당신은 한참을 울다가도/내일 아침이면 또 출근을 해야"(「당신이 말한 것과 당신이 말하려던 것」)하며, 잔인하게도 "우리는 모두 죽기 직전까지 살아 있을 것이다."(「오세요 핀란드」) 끝났거나 끝나가는 세계에서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은 불가피하게 생존자가 된다.
「그날의 생존자들 향우회」에서 엿볼 수 있는 이 생존자들의 모습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몸이 젤라틴으로 이루어진 '젤라틴 인간'과 '인간기계'가 된 '기계인간' 제이슨은 삭막한 모래바람이 불고 다 무너진 편의점이 있는 폐허에서 척박한 생존기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이 시집에는 온전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인간기계 호박나이트 (「진조」)와 뜨레세(「이어서 말하자면」)와 고인석(「메탈릭」), 좀비에 가까운 미세 기생충 감염자들(「미세미세」), 액체괴물(「액체괴물」)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날 저녁 텔레비전에서는 일일 드라마 대신
아직 준비되지 않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버린 기계화 시대
라는 주제로 긴급 토론이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토론은 결국 반대 측에 선 기계인간 중 한 사람이 귀에서 레이저를 쏘는 바람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지만
물과 믿음
인간기계들은 모두 평화를 사랑합니다
국내 최초로 주민등록 절차를 밟는 데에 성공한 인간기계 고인석 씨는 이후 여러 차례 인터뷰와 공익 광고를 찍었다
그는 인간기계도 감정이 있으며 불안과 공포 또한 느끼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내뱉어야 했다
「메탈릭」 일부
그들은 「메탈릭」에 등장하는 인간기계 고인석처럼 자신들이 인간들과 살아가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내야만 하는, '인간들의 세상'에 부적합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도 인간 아닌 것도 아닌 이 모호한 존재들은 달리 말해 계속 모호한 채로 자신의 모호함을 유지하고 견뎌낼 수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아닌 채로도, 또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로도 삶을 계속해나가는 힘을 지닌 존재들이며 더는 인간조차 살아갈 수 없다고 끝을 선고받은 세상에서도 그 마지막 장면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면서 세상의 끝을 지연시킨다. 인간 아닌 것들과 사물들이 남아 있는 그곳에서 세계는 계속된다. 그리고 계속되는 그 세계 속에서 시가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
지속되는 세계 속에서 계속 만들어지는 시와 관련하여, 김동진 평론가가 김누누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착각물』을 다룬 평론에서 짚었던 "종국에는 작품들이 생산한 의미를 없던 것으로 되돌리"는 김누누 시의 특징을 돌이켜 보아도 좋겠다. 『착각물』에 이어 『일요일은 쉽니다』에서도 이와 같은 "'무화(無化)'에의 시도"*가 종종 드러난다. 예컨대 「욕망과 겸허의 항아리」는 인간기계 호박나이트를 창조한 박사가 지옥에 갔다가 다시 살아나 핵 전쟁을 준비하게 된 사연을 길게 늘어놓다가 돌연 "형 엄마가 그만하고 밥 먹으러 오래"라는 목소리를 시의 말미에 삽입함으로써 그 모든 이야기가 방문을 걸어 잠근 한 소년의 상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한편 「교수의 심경」은 제목처럼 교수의 심경을 길게 제시하다가 "교수의 생각은 아니었지만"이라는 구절로 앞의 내용을 모두 부정하며 시를 마무리한다.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살상 레이저」에서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기계 뜨레세가 허구의 인물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허망하게 밝혀지기도 한다("물론 그는 허구의 인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의 구조가 "작품들이 생산한 의미를 없던 것으로 되돌"리는, 즉 이미 만들어진 세계를 없애는 기능을 하기보다 우리가 여태껏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황급히 창조된-창조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읽혔다. (아직) 없는 것을 파괴할 수는 없다. 시는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그저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화자의 읊조림으로 가득 차기 이전의 헐벗은 세상을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허상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 이 세계를, 모든 것이 거짓 또는 착각으로 밝혀진 후에 당혹감만이 남은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대신, 「숨길 수 없어요」를 통해 그 당혹감이 단지 시를 읽는 사람의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여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숨길 수 없어요」에서 화자는 공원 산책을 하다가 조난을 당한 상황 설정으로부터 시작하는 심리 테스트를 만든다. 이 시에도 마찬가지로 읽는 이가 심리 테스트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며 심리 테스트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목소리가 삽입되어 있다("여기까지 만들었어"). 그러나 시의 마지막까지 차곡차곡 쌓인 내용을 단번에 뒤집어 시가 허구임을 폭로하는 것으로 끝나는 다른 시들과 다르게, 이 시는 시가 허구임을 밝히고 난 후에도 폭로된 공허함 안에서 계속 시를 만들어 나가며 그 과정의 머뭇거림을 그대로 노출한다.
너는 계속해서 심리 테스트를 만드는 일에 빠져 있다
고양이가 납득이 안 된다면서
그렇다면 강아지를 넣어볼까?
나에게 네 가지 항목 중 한 가지를 선택해보라고 말한다
고양이, 고양이가 좋아 고양이가 귀엽잖아
고양이를 선택한 당신!
운을 띄웠지만 더 이어나갈 말이 없는 너는 말을 멈춘다
고양이가 무엇인지 몰라서 강아지로 대체해도 여전히 잘 모르겠어서
「숨길 수 없어요」 일부
그러니 시는 텅 빈 세계를 일시적으로 가리고 있는 벗겨지기 위한 가림막이 아니다. 그보다 "여전히 잘 모르겠"는 마음을 품은 채, 그 마음과 대면하며 시 속에서 뭔가를 만들어 나가는 움직임에 가깝다. 텅 빈 세계와 그것을 가리기(폭로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시가 분리되지 않고, 시는 만들어진 것이 "여기까지"라는 당혹감을 견디며 다름 아닌 헐벗은 우리의 세계 속에서 시를 만들어 나간다.
모든 것이 망해버렸다고 믿어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마지막을 선언한 장면에서 시작되는 시가 있다. 나에게는 이 두 문장이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죽지 못해서 생존자가 되어버린 존재처럼, 살아남아서 거짓말이 된 유서처럼, 딱 그 정도의 유쾌함으로 이 시들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 한차례 세게 눌러야 비로소 닫히는 나무문과 녹슬어 제대로 감기지 않는 기계 눈이 종말의 장면을 지연시켰듯이(「빅토르 박사의 제삼의 팔」), 오래된 사물들의 힘이 그 마지막 장면에서 언제까지고 생동하며 영원하듯이, 『일요일은 쉽니다』를 읽을 때마다 폐허에서도 계속되는 삶과 세계를 이야기하는 시가 머뭇거리며, 부정하며,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하염없이 생겨날 것이다.
* 김동진 문학평론가, 「등단 말고 다른 거」, 『문학광장 문장웹진』, 2021년 6월호,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8569)
진송(비평가) / 시집 『일요일은 쉽니다』(시용, 2022) 해설 ‘폐허에서 계속 생겨나는 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