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에는 미야자기 하야오라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녹아있다. 원문의 뜻은 사하라에 부는 열풍을 뜻하는 'ghibli'로 시작해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전투기를 뜻하기도 한다. 비행기를 만드는 그의 선친의 영향이 있기도 했거니와 하늘을 나는 우아한 모습을 동경했던 그의 어린 시절 꿈은 파일럿이었다. 비행을 통해 그가 바라는 간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이었다. 하나, 하야오가 동경하고 선망하던 아버지의 비행기는 전장에서 살아있는 것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하늘에서 보는 세계를 목표물로 만들었다. 역사의 과도기를 몸으로 느끼면서 자라온 그는 동경과 혐오를 동시에 품은 어른으로 자랐고 인간과 자연이라는 상반되고도 유사한 이 아리송한 물음을 탐구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예술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번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야오와 지브리에 있어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첫 작품인 동시에 유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은 지브리가 추구하는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러하듯, 소중한 것을 상실하는 소년이 나오고 조력자의 도움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로 건너가 잃었던 자아를 찾고 현실의 모순을 극복이라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달라진 지점이 있다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짜 자신을 투영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유년기를 비슷하게 투영한 마히로라는 소년의 시선으로 본 세계는 번듯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쟁의 물자를 공급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존재이고, 늘 병마에 시달려 병원 신세를 지지만 누구보다 강인했던 아머니는 그가 작품 속에서 추구하는 여장부의 전형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브리를 통해 선보인 작품들은 자신의 근간을 극복하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참극에 대한 비판의식은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히메>에서 자본주의와 계급주의가 비극을 금전과 바꾸는 추악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고발하는 <미래소년 코난>과 <천공의 성 라퓨타>가 있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장하며 발견하라는 메시지를 동화적인 형태로 전달했던 <이웃의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간 쌓여온 (다 언급하지 못한 작품들까지 포함해) 필모들을 여기에 녹여낸다. 시대가 갈구하는 타의에 의한 목소리 대신 진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번 작품에서 전하려는 이야기는 큰 줄기 몇 가지로 읽힌다. “자신이 쌓아온 시간의 더께는 함께 해온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과 “미래세대를 이어갈 그대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불과 비행의 눈높이 같은 주제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전자의 경우는 캐릭터로 설명될 것이다. 우선 주인공인 마히토는 하야오 본인을 그려낸 것이고 그를 이세계로 이끄는 왜가리는 하야오의 오랜 파트너인 프로듀서이자 지브리 스튜디오 대표인 스즈키 토시오다. 서로의 길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밀고 당기는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은 왜가리와 마히토가 서로에게 조금씩 의지해가는 과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거기에 마히토의 조상 격인 큰할아버지는 그의 선배이자 애니메이션이라는 영역으로 불러들인 다카하다 이사오를 반영하고 있다. 하야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실사 영화에서 구현될 법한 내러티브와 미장센을 절묘하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브리라는 세계를 함께 구축하다가 어느새 자신의 자리를 잃고 하야오와 멀어졌지만 작품을 통해 당신이 세운 자장 안에서 나는 성장하고 작가가 되었다가 이제 소년의 눈높이로 세상을 마주 보려 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 밖에도 그에게 작화를 가르쳐준 오오츠카 야스오 감독 역시 낯선 세계에서 방황하는 마히토를 이끌어주는 젊은 키리코로 그려진다. 이 인물들은 이 이상한 시공간에서 길을 잃은 마히토에게 길잡이가, 때로는 명분과 이유가 어떤 누구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한 인간으로서, 세상의 이면을 자신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예술가로 만들어준 존재들이었다.
두 번째는 자신의 뒤를 이어갈 이들과 젊은 세대들을 향한 질문으로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 시골 저택으로 이사를 오고 만난 왜가리와 그를 이세계로 이끄는 탑과 이상한 경험들은 애니메이션이라는 본질적인 상징으로 해석된다. 마히토는 실종된 나츠코를 찾아 탑 안으로 들아오게 되고 거기서 죽은 자들이 탄 배가 항해를 하는 신비한 곳으로 떨어지게 된다. 거기서 처음 마주한 금색 문에는 ” 나를 배우려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것은 애니메이션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암시가 녹아있다. 거기서 마히토는 말을 하는 펠리컨들을 만나게 된다. 위협적으로 마히토를 몰아붙이는 그들은 이제 일본 밖이라는 세상은 상상도 못 하는 갇혀버린 존재들로 읽힌다. 먹이를 찾지만 구하지 못해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야 할 와라와라들을 잡아먹다가 히미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된다. 펠리컨은 죽어가면서 말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마히토가 죽은 펠레컨을 묻어주는 것은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며 살아갔던 이들에 대한 존중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 후 왜가리와 함께 나츠코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이들은 앵무새였다. 그들은 사람을 식량으로 삼고 그 세계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드려고 한다. 그들은 군국주의 열병식을 흉내 내며 집단 광끼에 빠진 집단처럼 보인다. 그들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존재에게서 무엇이든 빼앗아 자신의 방식으로 취하려는 이들처럼 비친다. 마히토는 그들에게서 자신과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여겼던 나츠코를 구한다. 그 와중에 자신을 위해 희생해 준 왜가리와 히미, 내 안에 악의를 솔직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이탑의 주인이 아닌 자신의 탑을 새롭게 쌓을 수 있을 거라 말해주는 큰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는다. 마히토는 그곳에서 엄마의 과거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운명은 어떻게 바꾸느냐가 아닌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로 바뀐다는 사실을 배운다. 마히토는 펠리컨처럼 약한 것을 먹이 삼지도 앵무새처럼 만들어진 세계를 욕심내지 않았다. 결국 세계와 세계는 문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들어오는 것일 수도 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부당한 현실을 도피하고 그 세계에 안주하려 하지 마라. 애니메이션은 결국 작금을 또 다른 방식으로 보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전달하고 있다.
마히토는 극 중에서 두 가지의 불을 만나게 된다. 극 초반에 도쿄대공습으로 마을을 집어삼키는 화마,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태워버린 불과 후반부 이세계에서 경험한 히미가 다루는 불로 나타난다. 불은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히미를 통해 새들로부터 구해지고 나츠코를 찾게 되는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불은 영화 속에서 절망이었다가 희망이 된다. 불은 정신이고 어떻게 마음을 먹는 가에 따라 모든 것을 태울수도 의지를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불과 마찬가지로 비행이라는 행위 역시 양가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지브리의 작품들 속에서 하늘을 난다는 것은 현실과 멀어지고 싶은 욕망과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고자 하는 시선에 대한 감각을 동시에 충족하려고 한다. 이때 멀어지려는 것은 폭력과 혐오로 얼룩진 지상이었다. 하늘과 바다를 날아서 보면 작아진 세계만큼 마음에 짊어진 무게 역시 작아졌을 것이다. 하나, 그 수단은 극복보다는 도피에 가까워 보였기에 아무리 좋은 명분을 붙여도 어딘가 석연찮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역시 왜가리와 펠리컨과 앵무새가 날아다닌다. 이 영화에서 비행이 기존 작품들과 가지는 차별점이라면 날아 ‘가’는 것이 아닌 날아 ‘오’는데 방점이 찍힌다는 것이다. 시작하려는 존재를 짓밟듯 잡아먹는 날갯짓도 흉내로 얻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 안착이라는 목적을 위한 활강이 여기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전투기 유리를 공장에서 집으로 가져와 보관하는 장면은 그 비겁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설정인 동시에 전쟁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묵직한 질문에는 조사 뒤에 붙는 목적어로서의 삶이 아닌 몸으로써의 말, 체언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녹아있다. 마히토는 이제 나츠코를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규정하지 않는다. 엄마의 자리를 채운들 엄마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운명은 그들을 몇 번이고 모자 관계로 만들어 준다. 탑은 무너질 때 비로소 다시 쌓인다. 긴 세월, 애니메이션을 통해 걱정하고 안타까운 심경으로 세상을 바라봤지만 내 안에 나에게 말을 걸 용기가 이제야 생긴 듯하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몇 작품이 더 나올지 알 길은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는 보이지 않는 포스트잇 하나가 있다 그걸 때면 보이는 문장이 보인다.
“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
첫댓글 5252 믿고 있다구요
단순이는 삐뚤어질 뻔한 질풍노도 초딩이가 새 가족을 받아들이는 성장 정도로만 보게 되는 ㅎㅎ
서로 다른 문을 고를 때의 찡함이 제일 기억에 남았어요
앵무새들의 열병식이 존재하는데 전시에 군수공장 아들로 안락함을 누리는 모순은 모종의 반성같기도 하고
후계자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믿고 맡기는 것은 아니메나 지브리도 내려놓고 맡기려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제게 하야오가 그리는 10살 전후 아이 얼굴은 대체불가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 얼굴이 하야오 할배의 심상인 것 같고 그것은 늘 아름답습니다.
역시 영화를 보고 읽으면
또 다른 해석으로 다층적으로 볼수있게 해주시는 리뷰 군요. ㅎㅎ 감사합니다.
저는 보여주는것에만 집중하다보니
이세계로 갈때 바닥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을
내면의 세계로 간다 생각하고
마히또(하야오)의 살아온 여정을 담았다 보았어요.
돌들은 우리가 온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거부반응을 보일때
꺼내기 어려운 자신의 내밀함과 마주하고 그때서야 새엄마에게 엄마라 호칭하며
받아들이지 못했던 자신의 어느 부분과 화해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들과
죽어가는 펠리컨이 한 말
큰할아버지가 한 이야기등과 연결지어 저만의 해석을 못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ㅜㅜ
말씀하신 첫번째 이야기의 지브리와 연결은 못지었구요. ㅎㅎ
듣고보니 딱 떨어지는 해석이시네요.
덕분에 영화평점이 하나 더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볼라켓는데 보고싶게 만드네
어제 보고나서 오늘 다시 생각해봐도 어려워요.
저는 그냥 제목이랑 내용이랑 맞춰서 하나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대들은 각자의 손에 쥐어진 돌을 어떻게 쌓아가며 살것인가
이런 의미였네요 그대들 어떻게 살것인가가 하야오 감독님이 답을주는게 아니라 각자들 세상에 나가서 부딪혀 보라고 소대님글보니 영화 한번더봐야 하나 싶네요 감사합니다
심오한 예술 영화같다는 생각에 아이와 영화관 가기가 망설여지네요..ㅎ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평소 많이 읽고, 많이 보셔서 아는 만큼 더 잘 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작가의 의도는 물론, 작품의 숨겨진 함의,
그리고 본인의 생각까지 표현할 수 있는 소대가리님의 경지가 부럽네요. ^^
소대가리님, 엘리스님의 글을 읽으니 영화 꼭 다시 한 번 더 보고싶어집니다.
감사드립니다. ^^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것인가 . 앞문장 하나 추가로 영화가 말하는것이 무엇인지가 한눈에 들어오네요. 오늘도 후기 잘봤습니다. 소대가리님 리뷰를 보고 보는 영화는 더 많은게 보이겠네요
거장들이 나이를 잡수시면 자전적영화하나쯤 만들고 싶어지나봅니다
스필버그옹도
알마도바르옹도
햐야오옹도
모두들 자전적자전적하시길래..
전 그냥 형식이나 영화적으로 감상했어요
왜가리 앵무새 펠리칸들에 대해
왜 새인가에 대해
도형들에 대해
측은해보이시는 영화속 아인슈타인비슷한 할부지에 대해
그리고 아리갓또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제 청춘?을 함께해온 지브리)
이제 그냥 편안하시기를...
영화를 아직 못봤어요 보고 다시 올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