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셔
- 문보영
계산을 하고 집에 가려는데 음식값이 도합 일억 삼천만원이라는 것이다. "네?" 체구가 작고 머리가 곱슬한 캐셔가 계산서를 내 쪽으로 건네며 말했다. "토마토 오믈렛이랑 오렌지주스 주문하신 거 맞으시죠?" "맞아요." "일억 삼천만원 맞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캐셔는 두 손을 공손히 포개고, 혹시 식당이 처음이냐고 물었다. 마치 예민한 주제인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식당에 처음 와보냐니. 그럼 내가 평생 집구석에서만 밥을 먹었단 말인가. 그런데 집이 아닌 곳에서 식사를 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캐셔는 내 두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손님들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그리고 포크로 스파게티를 돌돌 말며 힐끔거렸다. 나는 일단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캐셔는 더 깍듯해져서는 카운터의 작은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려 "이 테이블은 이천백칠십만원, 이 테이블은 칠억 사천만원, 이 테이블은 팔백삼십이만원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계산대 구석에 놓은 메뉴판을 펼쳐 내가 주문한 음식과 가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토마토 오믈렛은 만이천원, 오렌지주스는 삼천원이네요." 캐셔는 어린아이를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는 왠지 그런 취급이 싫지 않았고 심지어 보호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네, 맞아요. 다만, 손님. 그런 계산은 과거의 유산과 같아서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계산하지 않는답니다. 손님은 토마토 오믈렛과 오렌지주스를 주문하셨어요. 그런데 그 대신 바질 스파게티를 주문할 수도 있었죠. 아니면 크림 리소토나 루콜라 피자를 주문할 수도 있었고요." 캐셔는 메뉴판 속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을 하나씩 짚었다. "게다가," 캐셔가 말을 이었다. "다른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었겠죠. 그곳에서 아보카도 샌드위치나 옥수수 수프를 주문할 수도 있었어요. 그것들은 우리 식당에서 팔지 않는 음식이죠. 경우의 수는 늘어나는 나뭇가지처럼 무수해요. 수백억, 수천억 개의 별이 모여 은하가 되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런 은하가 우주 어딘가에 또 있는 것처럼요. 그렇게 가능성은 흘러가는 강의 모양이 되지요. 식당은 당신이 가지 않은 길을 음식값에 반영해요." "와우!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어요." 나는 나무 손잡이를 당겼다. 그때, 캐셔가 내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이 외쳤다. "당신이 가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있거든."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를 박고 흐느끼는 것이다. "젠장, 나는 우는 사람이 싫어." 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캐셔에게 다가갔다. 그때, 식사를 마친 한 부부가 카운터로 오더니 나를 흘끗 보고는 카드를 내밀었다. 캐셔는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며 검은 모자를 쓴 여인이 내민 카드를 받았다. "삼억 사천이백구십만원입니다." 캐셔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나에게도 들리게 말했다. 그리고 여인의 일행인 나비넥타이를 한 신사는 요즘에도 저런 놈이 있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검은 모자의 여인이 말했다. "당신이 방문하지 않은 그곳을 미래라고 해야 할지 과거라고 해야 할지, 밟지 않고 지나친 현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은 당신이 주문할 수도 있었을 음식을 차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세상은 노동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해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랍니다. 젊은 친구." 검은 모자의 여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저들은 자신이 무얼 부담해야 하는지 알면서 음식을 처먹고 있는 거요?" 나는 한쪽 팔꿈치를 카운터에 걸치고 테이블의 손님들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이분 것도 계산해줘요." 검은 모자의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캐셔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 바람에 나는 한순간에 보잘것없는 지푸라기가 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꼭 싫지만은 않았고 심지어 보호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큰돈을 가진 사람들이 식당을 나가고 홀은 고요해졌다. 나는 곰 얼굴이 그려진 내 지갑에서 밥값인 만오천원을 꺼내 캐셔에게 내밀고 말했다. "난 당신과 당신이 하는 일을 용서할 수 없어." 그러고 이번에는 진짜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황량했다. 눈앞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고 식당은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에 식당은 없어. 사람들은 죄다 집에서 밥을 지어 먹지. 그게 이 세상의 룰이라고." 나는 내 말을 믿으며 광장을 휙휙 가로질러 집으로 갔다.
― 월간 <현대시> 2021년 3월호 / 시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학동네, 2023)
* 문보영: 1992년 제주 출생.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201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책기둥』으로 제36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책기둥』(민음사, 2017) 『배틀그라운드』(현대문학, 2019)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학동네, 2023)과 산문집 『준최선의 롱런』(비사이드, 2019)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쌤앤파커스, 2019)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웨일북, 2020) 『일기시대』(민음사, 2021), 소설집 『하품의 언덕』(알마, 2021)이 있다.
시인 문보영(31)의 신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은 그런 서점을 무대로 삼은 시집이다. 엉뚱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 공간은 언제나 문보영 시 세계의 중심이었다. 등단 1년 만에 제36회 김수영문학상을 받게 한 첫 시집 '책기둥'(2017)은 도서관을, 두 번째 시집 '배틀그라운드'(2019)는 전쟁이 벌어지는 온라인 게임 속의 섬을 중심으로 전위적 세계를 펼쳐냈던 그다. 이번 세 번째 시집에는 시인의 별칭인 '기기묘묘 나라의 명랑 스토리텔러'(박상수 시인 겸 문학평론가)에 충실하게 써 내려간 시 47편을 수록했다.
문보영이 지어내는 세상은, 그러니까 시는, 통상의 이치(理致)를 깨는 데서 쾌감을 준다. 가령 표제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에서는 제목을 안다고 책을 찾을 수가 없다. 모든 책이 "모래에 쓸려 제목이 지워지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제목이 없다는 건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고, 무제의 책이 둘러싸인 곳은 꽤 근사한 공간일 수 있겠다. 또 서시인 '방한 나무' 속 세상에는 난방이라는 개념이 없다. 열을 내는 '방한 나무'를 껴안는 걸로 온기를 나눈다.
"식당은 당신이 가지 않은 길(음식 혹은 식당)을 음식값에 반영해요. (중략) 당신이 가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있거든. (중략)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해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랍니다." 토마토 오믈렛과 오렌지주스값이 '일억 삼천만 원'인 '캐셔'의 세계도 흥미롭다. 터무니없는 값의 이유는 그럴싸하다. 세 쪽짜리 긴 시를 거듭 읽고 읽다 보면 혹하는 순간이 온다. 시인의 세상이 집요한 관찰로 찾아낸 현실의 틈 사이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계속살기의 어려움'이라는 동명의 시 2편은 '바나나 걸이에 걸린 바나나가 자신이 죽은 줄 몰라서 더 오래 산다'는 얘기를 바탕으로 한다. 시적 화자는 실제로는 걸이에 걸어둔 바나나의 썩는 속도가 느리지 않지만 "바나나가 상상하는 쪽을 응원한다"며 바나나 걸이를 사용한다. 겉으론 바뀌는 게 없을지라도 그 편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을 키울 수 있기에. 별난 세상(시)을 유랑하다 보면 이런 다정함을 종종 만난다. "내가 절대로 나 자신에게 적응할 수 없는"('적응을 이해하다') 인간을 보며 "조금 더 느리게 살 필요가 있다"고 바라는 시인이 썼으니까.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만들고 그 간극을 통해 삶의 속도를 늦추는, 시인의 일에 그는 전념했다. 덕분에 독자는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즐긴다.
마지막에 실린 '역자 후기'는 이 시집의 엉뚱함을 배가 시킨다. 시집의 해설이자 일종의 산문이고, 장시(長詩)처럼 읽히기도 한다. 한국 시인이 한국어로 쓴 시집에 역자의 등장이라니. 이는 문보영의 시집을 번역한 '역자 문보영'의 후기를 또 다른 번역가가 2차 번역했다는 설정 아래 작성됐다. 본문의 시들과 충돌하는 내용들도 재미를 더한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이 이어지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즐기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문보영의 신작을 이리저리 뜯어봤다. 그런데 사실 모두 거짓이다. 과감한 설계로 세워진 이 (시)집은 불가해하다. 기존의 논리로 풀기에는. 독자 개개인의 직관적 이해로 더 깊이 가닿을 수 있을 세계다. '역자 후기'의 '번역가 문보영'이 말했듯 ""시의 결미(結尾)는 만회야"라는 올리비아 페레이라의 말을 참고하면, 그(시인 문보영)는 한 번도 만회에 성공한 적이 없"다. 닫히지 못한 시는 무한히 열려 있다. "사고실험하며 지내요" 시집을 여는 페이지에 쓰인 이 문장을 모래 서점의 안내도처럼 움켜쥐고 책장을 천천히 그리고 무심히 넘기는 것만이 진실일지 모르겠다.
진달래 기자 / 한국일보 2023. 7. 7. 시집 소개 기사 ‘모래 서점, 방한 나무…엉뚱한 상상력으로 지어낸 詩 세상’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