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된 아버지
- 박연준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2012)
* 박연준 : 1980년 서울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4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창비, 2007)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2012) 『베누스 푸디카』(창비, 2017) 『밤, 비, 뱀』(현대문학, 2019)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문학동네, 2024), 산문집 『소란』(북노마드, 2014/ 개정판, 난다, 2020)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장석주 공저, 난다, 2015)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장석주 공저, 난다, 2017)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알마, 2019)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달, 2019) 『모월모일』(문학동네, 2020) 『쓰는 기분』(현암사, 2021) 『고요한 포옹』(마음산책, 2023) 『듣는 사람』(난다, 2024), 장편소설 『여름과 루비』(은행나무, 2022)가 있다.
시인의 말
꽃은 자신이 왜 피는지 모른다.
모르고 핀다.
아버지는 戰場이었다.
나는 그가 뽑아 든 무딘 칼.
그는 나를 사용할 줄 몰랐으므로
나는 빛나려다, 말았다.
56년 동안 ‘蘭中日記’를 써오다
지난 가을 잠드신
나의 아버지께 삼가, 시집을 바친다.
2012년 가을
박연준
세상의 모든 딸은 다음의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딸,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 그리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사랑하는 딸. 그중에서도 이 시인은 어떤 딸이었을까 궁금하다가 결국 나는 어떤 딸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를 다 읽으면 저 아버지의 얼굴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연로한 아버지는 병원에 실려 가셨다. 육체와 정신이 같이 무너진 상태가 되어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신다. 병들고 아픈 아버지를 보면서 자식은 여러 감정에 휩싸인다. 아버지는 지금 어둠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시인은 ‘나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눈을 감으렴” 부탁했다고 표현했다. 나는 이것이 거짓이면서도 참이라는 사실에서 이 시적인 시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아버지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사랑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그렇지만 사랑이 없다면 또 무엇으로 살까.
나민애 문학평론가 / 동아일보 2024. 5. 17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에서 옮겼다. 질끈, 눈이 감긴다. 가슴 저 깊은 바닥에 한 마리 뱀이 스윽 지나가는 것 같다. 겁먹고 슬픈 눈으로 흘깃 돌아보면서. 대저 시인이라면 살면서 한 번은 고통의 '뻘'을 지나왔겠지만, 이리도 시리고 아린 시라니, 박연준은 대체 얼마나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삶을 뼈저리게 겪은 걸까.
아무 능력 없는 어린 딸 혼자서 아버지의 깊은 병환을 견뎌야 한다. 무능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에서 벗어나 '뱀이 된', 그러니까 괴물이 돼 버린 아버지. '차라리, 저 아버지 없이 나 혼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활활 털어버릴 수 있었으면!', 절규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질긴 인연. 버릴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너무도 험하고 높은 고개를 필사적으로 안간힘 쓰고 넘으면서, 넘어가야 하면서, 화자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기도할 수밖에 없다.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눈물, 아버지, 생의 난국.
황인숙 시인 / 동아일보 2013.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