農舞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계간 <창작과비평> 1971년 가을호 / 시집 『農舞』(자비출판초간, 月刊文學社, 1973/ 증보재간, 創作과批評社, 1975)
* 신경림(申庚林, 1935~2024) :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2024년 5월 22일 지병으로 별세. 향년 89세. 동국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는 『농무』(자비출판초간, 月刊文學社, 1973/ 증보재간, 創作과批評社, 1975) 『새재』(창비, 1979) 『달 넘세』(창비, 1985) 『남한강』(창비, 1987) 『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 1988/ 개정판, 2013) 『길』(창비, 1991) 『쓰러진 자의 꿈』(창비, 199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비, 1998) 『뿔』(창비, 2002) 『낙타』(창비, 2008)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등과, 시선집 『우리들의 북』(문학세계사, 1988) 『여름날』(미래사, 1991) 『갈대』(솔출판사, 1996) 『목계장터』(찾을모, 1999) 등, 시전집 『신경림 시전집 1ㆍ2』(창비, 2004) 외에 여러 저서가 있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석좌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역임.
[작품해설]
이 시는 산업화의 거센 물결로 인해 급속도로 와해되어 가던 1970년대 초반의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들의 한과 고뇌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농촌의 절망과 농민의 울분을 고발 ⸱ 토로하고 있으면서도, 그 울분이 선동적이거나 전투적인 느낌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그것은 ‘날라리를 불’고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끝나는 작품 구조에 의해서 교묘한 역설과 시적 운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울분돠 절망을 정반대의 ‘신명’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몸짓을 통해 그들의 아픔이 역설적으로 고양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연 구분이 없는 20행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농무가 끝난 뒤 농민들이 ‘소줏집’에서 답답하고 고달픈 심정을 술로 달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로 시작되는 1행은, 농무가 두렛일의 흥겨움보다는 농민들의 자조적인 한탄과 원한의 몸직임을 타타내기 위한 예고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농무가 끝난 뒤의 ‘텅 빈 운동장’이 주는 공허감은 이젠 더 이상 농무에 신명을 느낄 수 없는 농민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자, 이런 현실에 대한 공연자의 안타까움과 공허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한’ 그들은 텅 빈 마음과 고달픈 삶을 그저 술로 달랠 뿐이다.
2단락은 7~10행으로, 농악패에 대한 농민들의 냉담한 반응을 통해 예전과 달라진 농촌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들이 옛날의 풍습대로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보아도, 신명나게 놀아주던 어른들 대신, ‘조무래기들’만 악을 쓰며 따라붙거나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대는’ 처녀애들뿐이다.
3단락은 11~16행으로,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여편네이게나 맡겨 두고’ 나온 그들이 자신의 울분을 춤으로 삭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춤을 추는 그들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서림이처럼 해해대’며 즐거워하지만, 결국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하며 자신들의 삶을 자학하거나 체념하고 만다.
임꺽정과 서림은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이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한 까닭은 농민들의 한과 슬픔이 다만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함께 해 온 역사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배려로 볼 수 있다.
4단락은 17~20행으로, 자신의 한과 고뇌를 신명난 춤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이다.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이르렀을 때,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는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극에 달하지만, 오히려 ‘날라리를 불고’ 덩실덩실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바뀜으로써 그들의 비애가 그만큼 심화되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추는 춤은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강한 몸짓이며, 자신들의 고뇌와 한의 뜨거운 발산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생활 터전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농촌의 일상 언어를 통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농민들의 정취와 정감을 물씬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이 시는 농민들의 격학 감정을 직접적인 서술로 표출하면서도 농무의 동작이나 농악기의 소리로 적절히 제어함으로써 탄탄한 서정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가난과 절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과 소외된 농촌을 상기시켜 주는 뛰어난 문학성에 힘입어 이 시는 제1회 만해문학상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농무(農舞)’란 ‘농악무(農樂舞)’를 줄인 말로 쉽게 말해 풍물놀이에 맞추어 추는 춤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경림의 시 <농무(農舞)>에서는 풍악놀이보다는 그냥 농민들이 추는 춤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이 시 속에는 농민들의 춤과 함께 가락이 보인다. 그 춤과 가락은 시 속에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짓는 농민이 발버둥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농민들이 지닌 원통하고 답답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의 첫 행부터 상식을 뒤집는다. 막이 올랐다가 아니라 ‘막이 내렸다’로 시작하는데, 이 시가 농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 예를 들어 모내기나 추수 혹은 두렛일과 같은 것을 하며 느끼는 흥겨움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오히려 농민으로 살아가는 삶의 이면에 담긴 자조적인 한탄 그리고 원한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되고 있다.
막이 내렸다로 시작하였으니 막이 오르고 어떤 춤을 어떻게 추었는지, 춤을 추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에서 허탈함을, 화장도 지우지 못한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시는 행위에서 그 허탈함을 달래보려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는 농민의 삶 - 저 70년대 산업화의 시대 농민들의 삶은 그랬다. 그럼에도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농촌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농삿일이 천직이라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이 사회는 몰라준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봐야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이다. 제대로 구경을 해 주는 사람조차 없다.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대’기만 한다. 바로 농민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외쳐봐야 조무래기들의 구경꺼리만 될 뿐이다. 어떤 녀석은 울부짖고 어떤 녀석은 해해대지만 사실 ‘이까짓 /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 하나 할 수 없다. 그러니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가슴에 품은 원한과 울분을 토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토해냄은 ‘신명’으로 바뀐다.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을 치며 퍼부어도 시원찮을 울분을, 한을 오히려 신명으로 풀어버리는 행위 -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하는 춤사위는 정말로 흥겨워서 즐거워서 행복해서 추는 춤이 아니다. 농민의 한이 그렇게 신명으로 승화해버린 것이다. 이만한 항거가 있겠는가.
시 속 춤을 추는 농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든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같은 구절에 직설적으로 나타난다. 시창작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감정 토로는 직설적이고 산문적 느낌이어 부적절해 보이지만 이 시에서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가 살아난다. 바로 신명과 함께 날라리에 맞춰 한 다리를 들거나 고갯짓과 함께 어깨를 흔들 때에 어쩌면 그 신명은 그들의 분노의 감정이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섬뜩하게 내면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농민으로 살아가는 한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농무(農舞) - 농민들의 춤. 왜 춤을 보며 신난다거나 흥겹다거나 하는 기분보다 처절하다거나 분하다거나 아니면 한 맺힌 절규와 같은 느낌이 들까. 신경림의 시 <농무(農舞)>가 그러하다.
이병렬 소설가 / 이병렬 소설가 블로그 <玄山書齋> 2017. 4. 30.
'우리'라는 말은 참 오묘하다. '우리'라는 말에는 내가 들어있고 네가 들어있다. '지금-여기'라는 울 안에는 '너' 하나를 비롯해 무한한 '너'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그 '안'에는 널따란 품 같은 수평적 친밀함은 있지만 수직적 높낮이는 없고, '한솥밥'이라는 공모와 공유와 공감의 연대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뜨끈뜨끈한 끈기가 우리의 어깨를 감싸곤 한다. 신경림(72) 시인은 '우리'라는 시어를 우리의 시와 현실 속에 말뚝처럼 세워놓았다.
긴급조치가 발령되기 시작했던 197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시집 ≪농무≫는 '우리' 현실의 사실주의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시적 발견이었다. 이를테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이라며 민중의 삶과 민중들의 연대감을 살갑게 담아내곤 했다. 혹은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라며 농민들의 애환과 정서를 일체의 수식 없이 단숨에 끌어올리곤 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하나의 민중적 경사'로, 70년대 '민중시의 물꼬를 튼' 시집으로 평가되었다.
농무는 두렛일을 하며 두레패들과 함께 놀아야 하는 농악과 춤이다. 그러니 본래의 무대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농무는 운동장의 가설무대에서 분을 바르고 구경꾼들을 위한 볼거리로 전락해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비어가고 쇠락해가는 농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술과 노름과 빚과 주정과 싸움과 울음만 늘어나는 농촌의 현실이 답답하고 고달프고 원통해서 농사꾼인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 술잔이 돌고 술기운 취해서 걸립패의 후예인 '우리'는 보름달 아래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에 나선다.
소시장을 거쳐 도살장을 돌며, 임꺽정과 그의 배신자 서림이처럼 한패가 되어 놀아보지만, 쪼무래기 처녀애들이나 꼬일 뿐이다. 돌고 돌면서 점점 더해가는 '우리'의 신명에는 술기운과 분노와 원통이 묻어나고, 놀고 놀면서 점점 가벼워진 '우리'의 고갯짓에는 아직 흥과 신바람이 남아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필부필부(匹夫匹婦)인 '우리'의 고단한 삶을 신명 난 가락에 실어, 치고 빠지는 슬픔과 해학의 정조가 일품이다.
정끝별 시인 / 조선일보
첫댓글 유명한 `농무`
시를 올리셨군요 힘든 농민의
애환을 표현한 시
오랜만에 접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