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토우는 고래만큼
- 이기현
우리 놀이터 가서 놀자 손잡고 두꺼비집을 짓자 누가 손 빼면 무너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그러나 우리 적요를 발설하진 말자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우리는 침묵에 대해 잘 아니까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을 모조리 소모하자 서로 구겨진 얼굴 사이사이에 낀 모래를 훔쳐 주자 샌드 아트처럼 훔친 모래만큼 표정이 생겨나도
슬프니? 묻진 말자 슬픔을 더 이상 기억으로 만들지 말자 우리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는 향유고래의 등 위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자 석고를 뜨는 기분으로 우리 절대 손 놓지 말자 우리 약속들이 기항지에 정박한 선박들처럼 목적지가 모두 다르더라도
혼자 흔들리고 있는 그네의 등을 조용히 밀어 주자 얼굴부터 입수하기 시작하는 고래만큼 부서지자 우리 잉여의 빛이 머무는 해변이 되어 온종일 섞여 있자 우리 그러고 있자
- 2019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 격월간 『현대시학』, 2019년 11/12월호
* 이기현 : 1992년 인천 출생.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9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독립잡지 ‘공통점’의 일원으로 활동.
시를 쓸 때도 그렇지만 주어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하는 강박으로 인해 이번 기획특집 주제인 ‘현대시 속에 날아든 새’라는 포괄적인 틀에서조차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나름의 궁리를 통해 나는 ‘날아든 새’를 현대시의 영역 밖에 있는 존재로부터 끌어오지 않고 ‘시인’이라는 문학적 영역에 속한 존재로부터 소환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하고 나니 우선 2020년대에 들어서서 새롭게 등장한 신인 시인(이하 신인으로 호칭) 몇몇이 어쩌면 ‘현대시 속에 날아든 새’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신인-새의 부리엔 시가 물려 있다.
거론할 신인을 떠올려 보다가 실제 ‘새’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가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의문이다. 대략 알아보니 대부분 새들의 나이는 20년 이내이고 20년 이상 사는 새도 꽤 있었다.(백조의 나이는 70년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선입견이지만 새는 언제나 젊고 생생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는 것이다. 실체를 본 적은 드물고 새소리만 듣다보니, 또 듣는 시간이 주로 새벽이나 아침이다 보니 그게 겹쳐져서 그런가 내게 새는 항상 젊고 청초한 존재이다. 새가 어리든 나이를 많이 먹었든 싱그러운 목소리를 들려주는 새는 언제나 청춘이다.
신인은 새의 그런 젊고도 청초한 감각을 가져다준다.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현대시가 일부 고인 물 현상에 처해있다고 보면 올해 날아든 젊은 새로서의 신인은 그 고인 물길을 터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로 먼저 살펴볼 신인은 이기현 시인이다.
시에서 보이는 지속적인 청유는 화자 스스로에게 대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 다짐은 슬픔 속에서도 담담하게 미래를 함께 하자는 의지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시에 진술된 모든 상황과 현실은 상상이다. 상상은 상징과 환유로 구체화되어 이미지를 형성한다. 나는 이 시가 신선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시는 매우 많이 퇴고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시의 문장마다 튀어나온 모서리가 없이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시가 창작된 시기가 꽤 오래 되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신인의 시에 일반적으로 바라는 신선함과 발랄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기현 시인은 신인으로서 이 시를 물고 날아든 새이다. 2020년 현대시의 한 복판에 이 시를 놓고 날아가 다른 시의 잎새를 부리로 다듬고 있을 새로서 이기현 시인은 젊은 신인이다. 실제 시인의 나이가 젊든 나이 들었든 신인은 모두 젊다는 점을 새삼 상기해 보면 이제 이 신인의 시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젊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위 시의 발화 방향이 바깥과 미래 시간을 향해 있다면 다음에 볼 시는 그 방향이 시인의 안쪽과 정지된 시간으로 향해 있다. 조윤재 시인의 시가 그것이다.
윤의섭 시인⋅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 계간 <문파문학> 2020년 여름호 ‘지저귀는 새의 나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