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소설 가여운 것들을 가져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원작의 액자식 구성과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들의 입장,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라는 지역적 특징 같은 것은 배제하고 벨라라는 인물의 내외면적 성장과 합리주의가 태동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종말을 함축적으로 그려낸다. 그의 필모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주제인 “통제”는 여전히 비슷한 형태로 그려지고 있지만 달라진 지점이 있다면 통제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몰락하거나 체념하는 인간 군상에 맞춰지던 그의 시선은 이제 수직으로 점철된 세상을 수평으로 극복하는 여성의 서사로 그려진다.
<가여운 것들>은 여인이 다리에서 투신하는 장면을 업 쇼트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추후에 벨라가 될 이 여자의 원래 이름은 빅토리아 블레싱턴이다. 빅토리아의 추락은 한 시대가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녀를 벨라 백스터로 다시 태어나게 한 사람은 의사이자 과학자인 갓윈이다. 그 역시 벨라를 통제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백지상태의 존재를 가르치고 개조하려 한다. 벨라는 새로운 자아가 생성되고 언어를 습득하면서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신체에 쾌락을 얻는 법도 익히고 욕망은 자라나 자신을 가두는 집이 아닌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마저 커진다. 벨라는 변호사인 던컨 웨더번과 함께 리스본과 알렉산드리아, 파리를 경유해 런던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떠난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요량으로 벨라를 데리고 떠난 던컨은 그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넘치는 호기심으로 모든 상황과 현상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벨라에게 상류사회의 룰을 가르치려 들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고 통제를 위해 납치에 가까운 방식으로 크루즈선에 태우지만 거기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지식에 대한 욕구마저 충족하게 된다. 에머슨의 시와 스피노자의 책을 읽으며 시대가 국한한 자신이 혹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인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제약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여행 중에 마주한 빈곤과 기아를 보고 자신 역시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벨라가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섹스와 계단이다.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벨라의 섹스는 카메라의 농밀한 시선도 그것을 감각하는 어떠한 장치도 동원되지 않는다. 마스터 샷으로 잡은 화면과 풀프레임 안에 벨라와 남성들은 마치 인간의 욕구가 어떻게 화폐로 만들어지는 가에 대한 실험처럼 비친다. 벨라는 화대를 지불하면서 까지 남성들이 얻으려는 것은 생의 증거이며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된다. 벨라가 뭔가를 깨닫고 이해하는 순간이 오면 그녀의 시선은 위를 향한다. 리스본에서 파두를 부르는 싱어를 마주할 때나 하늘을 나는 비행선을 볼 때 그랬다. 계단은 그런 의미에서 벨라의 내면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 싶다. 갓윈의 집에서 계단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접한 무너진 계단은 처음 절망이라는 감정을 느낀 자신을, 사창가의 계단은 스스로의 의지로 오르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낸다. 이때 카메라는 하이 앵글로 상승하는 듯한 모습을 담아내고 반면, 고통과 괴로움을 드러내는 장면들은 하강하는 듯한 로우 앵글로 잡아낸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던컨을 보는 시선과 투신하는 빅토리아, 알렉산드리아 빈민을 바라보는 연민의 벨라가 그렇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에서 춤은 항상 기존의 리듬을 깨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는 억압으로 만들어진 질서에 대한 저항이자, 제도에 대한 조롱으로 다가왔다. 벨라가 만난 모든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체득한 상식만을 강요한다. 밸라의 배우자가 될 맥캔들리스는 상류층의 어법을 강조하고 여행에서 만난 이들은 행동 양식에 대해 지적하며 예법에 맞지 않다고 핀잔을 준다. 계급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온갖 차별과 침탈된 권리는 연회장에서 벌어지는 소동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모두가 한껏 차려입고 우아한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음정 박자 따윈 무시하고 몸이 움직이는 따라가는 벨라의 춤사위는 던컨의 만류에도 춤은 엉망이 되고 설상가상 벨라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와 육탄전을 벌이는 던컨으로 인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는 품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허위의식이 깨지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촬영과 미술 역시 독특하다. 하이 앵글과 로우 앵글로 감정과 정신이 변화하는 지점들을 포착했다면 열쇠 구멍을 훔쳐보는 듯한 시점 샷과 어안랜즈로 찍은 화면들은 난감하기 그지없다. 내러티브 흐름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고 목적도 없어 보이는데 후반부에 가면 어렴풋이 짐작은 가능하다. 그것은 영화 도입부에 물에 빠진 빅토리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으나 아직 성장 중인 상태이고 아직 그녀는 자신이 투신한 템즈강에 있음을 관객 역시 물속에서 그녀를 관찰하는 실험의 동참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는 장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는 빅토리아시대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온전히 그 시대와 공간을 구현하지는 않는다. 벨라의 착장에서도 느껴지듯 어깨가 부푼 디자인의 상의는 그때의 것이 맞지만 섬유의 소재는 합성 소재로 만든 현대의 것처럼 보이고 버튼식 단추 역시 한참이 지나서야 만들어진 제품이다. 하의는 또 어떤가? 일반적인 당대의 복장은 길고 넓은 치마로 이동을 할 때 바닥이 다 쓸리거나 어딘가로 오른다면 손으로 잡고 다녀야 할 만큼 거추장스럽니다. 반면 벨라의 치마는 짧으면서도 활동에 무리가 가지 않는 편안한 착장이다. 여행을 다니며 도착한 리스본과 알렉산드리아 파리는 마치 화려하게 꾸며진 세트장처럼 느껴지며 시대 고증을 생각하면 비행선의 등장은 맞지 않은 미장센이다. 영화는 이질적인 미장센과 소품을 통해 특정한 시대를 구현하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이 이야기는 어떤 시대와 공간 인물도 보편타당한 존재는 있는 가를 묻는다.
아쉬운 지점은 결말이 요르고스 란티모스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늘 비틀고 조롱하되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라는 굴레에 대해 냉정한 시선을 보내왔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수직으로 드러나는 인간사를 수평으로 극복하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가져가야 할 찜찜한 여운과 생각할 거리를 가져갔다. 잘 다져온 기승전이 결에서 그 날카로운 맛을 잃었다는 것은 어느새 할리우드의 방식에 녹아든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영화가 개봉하고 호불호가 나뉜 지점은 매춘에 관한 시퀀스였다. 지성을 가지게 된 여성이 자신의 몸을 빌미로 생산 수단을 마련하는 표현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는 쪽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려와 일종의 인간 군상에 대한 도발적 실험이라는 무리의 대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성이 처한 강간과 임신 중단에 대한 위협 같은 현실적인 위험에서 동떨어진 설정이라는 비난과 고객을 직접 고르자는 발생에서 노동권 쟁취라는 측면의 옹호 역시도 납득이 간다. 어느 쪽이 옳다고는 판단하기 어려우며 그 기준 잣대는 어떻게 정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다만, 영화 속에서 벨라를 성장시킨 것은 누군가의 가르침도, 책을 읽으며 쌓아야 온 지식도 아닌 스스로 체득한 경험이다. 벨라가 실증적 경험을 통해 우리에 보여준 것은 유해한 남성성이다. (남자가 모두 유해하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그것은 오랜 시간 관례 혹은 사회적 수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해 왔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인가? 그건 관람자 스스로가 판단할 일이다.
첫댓글 I'll be back on Sunday
저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계속 생각하며 봤는데 엄마 빅토리아 라고 생각할 수 있네요. 수직적 사회를 수평으로 이겨낸다는 의견 멋집니다. 다만.
저도 란티모스 좋아하는데 한번 봐야 겠어요 난해하다는 평도 있긴 하더라구요
어안 렌즈 샷의 의도가 궁금했는데
이렇게 해석될수도있겠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에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 꼭 보고 싶네요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영화라는데 기대가 되네요 ㅎㅎ
👍 👍 👍 👍
영화 보기전 다시 정독하고 봐야겠어요.. ㅎㅎ
보고싶었지만 이젠 꼭 볼이 되게 만들어주신 글 잘 읽고갑니다~~~
안보실 꺼자나요 ㅋㅋㅋ
@족구왕 볼꺼거덩요~~!!!!! ㅋㅋㅋ
그로데스크한 설정이 딱 취향이긴하나 어쩐지 손이 안가는 영화였는데 소대가리님 리뷰를 읽고나니 책이 읽고 싶어집니다.
근무중 휘리릭~읽기엔 죄송스러버서..
나중에 의관정제후 정독하도록 하겠고요..
영화를 좋게보신건 알고 있어서..
저는 좋게 보신분들 '보다는' 실망했습니다
헐리우드와 손에 손잡고 서로 윈윈하는 영화를 성공적으로 만든건 사실인듯합니다
제일 걸리는건 촬영이었습니다
페이버릿 그 촬영감독인줄 첨부터 알겠던데
굳이 광각렌즈에 어안렌즈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었나..서사 자체가 왜곡된 부분이 많은데 저런 과장된
쇼트를 고집한건
관객들이 벨라를 실험체로 보길 원한건가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문제라고 생각함)
작은 자극에도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은 중산층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란티모스적 차가운 비극은 없고 발랄한 현대판 로라는 티타임으로 이 모든 어드벤쳐를 마무리하네요ㅠ
웰렘데포도 파격적? 얼굴분장에 비해선 밋밋한 캐릭터ㅎ
말씀에 100% 동의를 하면서도 견해가 다른 지점은 벨라를 실험체로 보는 시점이라고 봅니다. 관객의 시선 역시도 영화에 동참시키고 안과 밖(스크린 넘어)의 관념까지 그것이 옳은 것이냐는 질문은 유효하다 봤네요. ^^ 늘 깊이있는 분석에 감탄합니다. 왕자 저하 만세!!!
@소대가리 서사가 크게 중요하지 않는 영화들도 있지만
이 영화는 이야기따라가기도 중요축이라고 봤을때
주제의식을 주체적인 여성은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관음적인 시선이 굳이 왜 필요한것일까요?
저는 관찰보다는 몰래 엿보는 시선이라고 느꼈습니다
광각렌즈사용이 과한듯해서 신경써서 봤는데
챕터1(흑백부분~영화를 총3파트로 봤을때)
에서만 사용했더라면 그럴수 있다고 생각했을겁니다
하지만 광각~어안렌즈 사용은 이후 장면에서도 어떤
공통점이 없이 과시적인 측면에서만 사용되었다고
봤습니다.
덕분에 벨라의 움직임이 좀더 다이나믹하게 보이는 측면은 그나마 좋은점이겠습니다
란티모스 영화중 가장 표면적으로 모든게 드러나서
바닥이 궁금하지 않은 영화였어요
쉽고 헐리우드적이었습니다
분장 의상 촬영 무대셋팅 음악 연기까지
좋게 말해서 볼거리가 풍부하고 즐거웠지만
다르게 말해 모든 요소가 과했고
범람하는 듯한 느낌도 지울수 없네요
갑자기 생각났는데 크루즈선 바다에 떠 있을때
대놓고 인위적인 티를 팍팍냈던데 왜그랬는지
왜 그런 장면이 필요했는지 물어보고싶네요..
가여운것들이 누군지도...
(이 질문마저도 너무 안이하게 느껴집니다..)
@어린왕자 엠마스톤과 내리 세편을 찍은걸로 아는데
호사가들 사이에선 핑크빛 소문들이 돌고 있다네요
(믿거나 말거나ㅋㅋㅋ)
덧붙이자면..
란티모스 영화들이 늘 시대배경이 모호한 경향이 있긴하죠
빅토리아시대라 여겨지긴합니다만,
윗옷은 화려한 그 시대 의상이고 아랫도리로 벨라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 아동복이죠
그런 옷을 입을수 있는 사람은 그시절의 남자아이옇을겁니다
그점에서 감독의 어떤 의도가 엿보이기도 했습니다만 그 역시 저는 딱히 좋게보진 못했네요ㅠ
낮에 마야님이 소대가리님 리뷰글 극찬해서 너무 궁금해서 잠깐보고 퇴근하고 다시한번^^ 소작가님♡ 최고입니다.
전 영화볼때 감정이입만 하는데
어린왕자님 소작가님은 진정한 고수♡
전 벨라랑 변호사 장면에선 옛 첫사랑이 생각이났거든요ㅋ남자들은 소유하고 싶어하고 여잔 그게 사랑 받는다고 생각하고ㅎ
근데 앉은자리를 바꾸었더니 다른 풍경이 보이드라고요.벨라처럼
매춘부 내용은 충격이지만 벨라시각에선 매춘부가 그리 나쁜 의미는 아니였던거 같아요.
가여운것들 소싯적 제모습이 보여서
전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지금 제 모습은 변호사 던컨입니다😆
소대가리님 리뷰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