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갈이
안유환
명진 형이 일러준 새 주소로 찾아간 집은 지은 지 30년이 지난 낡은 5층 아파트였다. 마당 한쪽에 철봉대가 있고 텃밭도 보이는 조그만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그 옆에는 양쪽 차벽에 ‘칼의 부활’이란 광고를 페인팅한 주황색 다마스가 보였다. 칼의 부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큰 길을 등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주변은 조용했다. 평화롭다는 것은 초라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호는 형에게 도착했다는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마중 나온 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집은 두 번째 통로 1층에 있었다. 1층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층이지만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도 있었다.
“대련님, 어서 오세요. 집이 이렇습니다.”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며 인사를 하는 형수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하던 모습이 머리칼도 부수수하고 어느새 할머니 같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형수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명호는 들고 간 과일 바구니를 식탁위에 내려놓으며 그 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형수는 시동생에게 참으로 잘해주었다. 전방에서 군복무를 할 때는 형과 함께 두 차례나 면회를 왔고, 명호가 즐겨 읽던 월간『현대문학』을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었다.
“동서와 아이들은 잘 있습니까?”
“예, 교회 일 때문에 오늘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명호의 아내는 매주 목요일 교회 경로대학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형수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며 사과를 깎았다.
“중국에서는 언제 들어왔어?”
식탁의자에 마주 앉은 명진이 동생에게 물었다.
“한 달이 좀 지났습니다. 집안일 이것저것 좀 정리하다보니 늦어졌습니다. 형님 문안도 드리고 이번엔 아버님 묘소도 참배하려고 왔습니다.”
명호는 중국의 롯데마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한창 성업 중이던 롯데마트는 지난3월부터 중국 측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보복’으로 인해 99개 점포 중 67개가 소방시설점검 등을 통해 무기한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롯데는 현재 중국에서 약 120개의 유통계열사 점포(백화점5개, 마트99개, 슈퍼16개)를 운영하고 있다. 이 중 90개의 점포가 모두 한 달가량 영업을 하지 못하면서 입은 매출손실 규모는 약 1천161억 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명호는 두 달이 지나도 ‘사드 보복’ 규제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일단 귀국을 한 것이다.
“형님, 언제 이쪽으로 이사했습니까?”
3평도 안 되는 좁은 아파트 거실은 식탁에다 침대만한 소파까지 놓여있어 둘러설 자리가 없을 만큼 비좁았다. 주방은 뒤쪽 베란다의 좁은 공간을 이용하고 있었다.
“벌써 2년이 가까워오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어.”
명진은 동생에게 이집으로 이사 오게 된 경위를 다 털어놓을 수 없었다. 형은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하던 장남이었다. 5년 전 미수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2년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형은 P시에서 주거지로 가장 손꼽히던 동네의 45평형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18층 창문을 열면 단지 건너편으로 해맞이 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후 시간에는 부부가 함께 나란히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골프 연습장에서 운동을 하는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명호는 3남매 형제가족이 모여 집들이를 하며 즐거워하던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그런데 명호가 중국에서 일하는 3년 동안에 형의 집안 형편은 대궐에서 오두막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명호는 어쩌다 한 번씩 귀국 했어도 형 댁을 방문하지 못했고 명절에도 집에 올 수 없었다. 우리의 설과 추석이 중국의 명절과 같은 날이기 때문에 중국의 롯데마트는 쉬지 않았다. 중국의 최대 명절인 ‘춘절’은 우리나라의 ‘설날’과 같은 날인 음력1월1일이었다. 공식적으로 한국의 명절은 설날과 앞뒤 날을 합쳐 3일 연휴이다. 춘절의 지정휴일도 사흘간이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열흘에서 2주간, 길게는 한 달 가까이 쉬기도 한다. 4대 명절 중 두 번째인 원소절(原宵節-위안샤오제)은 한국의 정월 대보름인 1월 15일과 같고, 5월 5일 단오절(端午節-두안우제)과 중추절(仲秋節-중치우제)도 우리나라와 같은 기간이기 때문에 마트는 휴업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사드보복’으로 인한 롯데마트의 영업정지처분 기간이 길어지자 명호는 오랜만에 형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명호는 차를 마시며 토끼장만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형이 새집으로 이사하던 때를 떠올리면 15평 아파트에 형 내외가 초라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거실은 정돈된 공간이 아니라 짐짝을 아무렇게나 들여놓은 것 같았다. 좁은 공간에 놓인 침대 형 소파는 애쉬(물푸레나무)로 만들어진 이태리제이다. 넓은 거실에 품위 있게 놓여있어야 할 소파는 제자리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형수는 특히 가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장롱과 침대, 식탁과 서랍장 모두가 월넛이나 오크, 티크 등 수입제품이었다. 다행히 안방이 커서 장롱과 서랍장은 들여놓을 수 있었고, 침대와 협탁, 골프가방 등은 작은 방에 들여놓고 사용하지 않았다. 큰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 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마당에서 내실이 들여다보여 커튼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명진이 벽스위치를 올리자 제자리를 찾지 못한 가구들이 자기존재를 알리듯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방안은 3면이 가구들로 가득 채워지고 베란다 쪽만 비워져 있었다. 안쪽 벽면 서랍장 위에는 부모님의 사진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 위로 벽면을 가득 메운 대형 사진은 몰아치는 파도위에 갈매기 떼가 막 날아오르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때만 해도 좋은 시절이었는데−.”
형은 국전에서 은상을 받은 그 작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대형 호텔 로비나 큰 회의장 벽면에 걸어야 어울릴 귀한 사진이 골방 같은 서민 아파트 벽에 붙어있다. 명진은 H회사 자재과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틈틈이 사진에 취미를 붙여 부지런히 작품 활동도 했었다. 한때 문화의 불모지라 일컬어지던 P시가 사진 문화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그의 수상이 계기가 되었다. 명진은 1981년 6월 제30회 국전에서 출품작 ‘노도 위의 해조’로 은상을 받았고, 제2회 제물포 사진대전에서는 ‘꽃과 벌’로 최우수상인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또한 제18회 신라문화제에서는 ‘승자들의 환호’로 금상을 수상했다. 명진으로 인해 한국예총 P시 사진지부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형은 ‘여명 사진회’란 이름으로 12명의 동호인을 모아 강의와 현장 출사 지도를 해왔고 그들 대부분이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명진은 경북 도전에 입상·특선한 작품도록을 펼쳐 보이며 지난날 화려했던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명호 생각에는 형의 그러한 태도가 오늘의 초라한 삶을 호도하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오늘처럼 어렵게 된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때 명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알겠습니다.”
명진은 전화를 받자마자 하던 얘기를 멈추고 일어섰다.
“나 좀 다녀올게, 쉬어라.”
형은 점퍼를 입으며 말했다.
“어디 가시는데요?”
명호도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칼을 갈아주는 내 고객이야.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해. 자기들의 시간에 맞춰야 하니까.”
명진은 요즘 식당들을 찾아 칼을 갈아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주차할 때 옆에 있던 다마스가 형님 차입니까?”
“그래, 내가 이 일을 한지가 벌써 1년이 훨씬 넘었어.”
명진은 작업복 차림에 골프캡을 푹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명호도 형이 하는 일이 궁금해 벗어놓았던 윗저고리를 입고 따라나섰다. 어느새 해가 지고 가로등이 시가지를 밝히고 있었다. 명호는 다마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길을 가늠해보고 싶었으나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10분쯤 후에 도착한 곳은 대형 음식점들이 줄지어 들어선 식당 골목이었다. 간판의 조명등은 ‘마장동 뒷 고기’란 글자를 크게 드러내고 있었다. 칼을 많이 쓰는 집은 주로 고기집인 것 같았다. 식당 뒤쪽 좁은 길에 주차를 하고 형은 차의 시동을 걸지 않고 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전기코드를 끌어내어 식당 집 콘센트에 길게 연결했다. 주인이 갖고 나온 칼은 두 자루였다. 명진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차에 장착된 연마기를 작동시켰다. 옛날에 칼갈이들이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칼을 갈아주던 것과는 달랐다.
‘샤르르, 샤르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형은 칼을 갈고 있었다. 명호는 ‘손재주가 좋으면 어려운 때도 살아가는 길이 열린다’는 생각을 했다. 형은 어릴 때부터 고장난 장난감을 비롯해 부서진 주방기구나 라디오 등을 고치기를 잘했다. 국전 사진수상 작가가 천 원짜리 몇 장씩을 받고 칼을 갈아주며 생계를 유지해 간다는 것이 명호는 대단한 용기로 보였다. 보다 젊은 시절에 형은 사교댄스로 많은 여인들을 끌고 다니던 멋쟁이였다. 뿐만 아니라 당구를 500이나 치고, 골프에도 상당한 실력을 보였다. 칼 두 자루를 가는 데는 약 30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7,000원을 받았다. 큰칼은 4,000원, 보통 식칼은 3,000원이었다. 요즘 아이들의 과자 값도 안 되는 돈이지만 형은 정성들여 열심히 칼을 갈았다. 명호는 중국의 롯데마트가 완전히 문을 닫는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아파트에는 조촐한 저녁식탁이 두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련님, 시장하시겠습니다.”
형수가 그릇에 국을 뜨며 말했다.
“나보다 형님이 더 배가 고프겠습니다. 나는 옆에서 구경만 했는데 형님은 애써 일을 했잖아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아무것도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식탁이 이렇게 가득 한데요. 하하하.”
명호는 숟가락을 들어 된장국을 맛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입에 맞는 떡’이었다. 지난날 부모님의 생신에나 명절에 올 때면 언제나 형수의 음식 솜씨에 감탄했다. 형수는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 같았다. 명호는 집에서는 한 번도 그런 맛을 볼 수가 없었다. 적당한 국물이 있는 소고기 국이나 된장국, 미역국을 명호는 좋아했다. 그래서 부모님 댁을 한번 다녀가면 “고향 식으로 하면 안 될까?”하고 주문을 해보지만 아내는 어머니와 형수가 만들어주던 맛은 내지 못했다. 그러나 형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옛 맛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형님, 요즘도 사진촬영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명호는 아까 형이 열을 올려 하던 사진얘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사진을 접어둔 지가 몇 년은 되었어. 삶의 터전을 잃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판에 한가하게 사진을 생각할 겨를이 있어야지−.”
명진은 아내를 쳐다보며 말을 끊었다. 명호가 중국에 나가있는 동안 명진은 세 차례나 이사를 하고 마침내 15평의 좁은 집에 거처하게 된 것이다.
“다 내 잘못입니다. 이런 처지에 감춰둘 얘기가 뭐 있겠어요.”
형수는 시동생 앞에서 남편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담담하게 지난 얘기를 털어놓았다. 형수는 그 음식 솜씨로 인해 교회에서도 칭송을 받았고, 대단지 아파트에서 친구들도 잘 사귀었다. 그들이 집에서 손님을 대접할 일이 있으면 형수를 ‘주방장’으로 초대했다. 친구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멀리 다른 아파트 까지도 조리원정을 갔었다. 그때 만났던 한 친구로부터 또 다른 친구 집으로 초대되어 갔을 때였다. 그 집에서는 특별히 수고비도 두둑이 봉투에 넣어주었다. 그 후 어느 날 우연히 시장에서 그 여인을 만났다.
“시간 나시면 우리 집에 한번 놀러오세요.”
그 여인의 말은 단지 지나가는 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초대로 보였다. 명진이 출사여행을 떠나면 돌아오기까지 3~4일이 걸릴 때도 있었다. 형수는 무료함을 달래려 친구들과 함께 그 여인의 집에 가서 수다도 떨고 점심밥도 지어먹으며 한 지가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갈 때마다 화장품이나 주방 세제 등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소개했다. 한번은 화장품 얘기를 하다 ‘나눔의 사무실’에 한번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나눔의 사무실이 뭐하는 곳입니까?”
형수는 그 이름이 너무도 친근하게 들려서 ‘나눔의 교회’를 연상했다. 나눔의 교회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종종 들어왔다. 그 나눔의 사무실도 무언가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았다. 형수는 처음에는 그곳이 자원봉사를 하는 곳으로 알았다. 이웃을 돌아보는 일은 교회에서도 많이 권장하고 여전도회가 앞장을 서기도 한다. 그 여인이 소개한 회사의 정식 이름은 ‘나눔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계신다면 가장 먼저 누구를 찾아가실까요? 아마 가난하고 병들고 버려진 분들일 것입니다. 이천년 전처럼 지금도 그늘진 곳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영혼들을 찾아가셔서 사랑으로 품어주시며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나눔의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 곧 강도만난 자를 섬기고자 설립된 복지재단입니다.
나눔의 사람들이 꿈꾸는 사업목적은 강도만난 자에게 단순한 재활이나 일시적인 도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나 주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아직은 미약한 시작단계에 불과하지만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갚을 길 없어 겸손히 섬김의 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귀한 사역을 위해 많은 동역의 손길을 찾고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필요합니다.······ 나눔의 사람들 올림.」
이것은 인터넷에 떠있는 ‘사단법인 나눔의 사람들’에 대한 안내 글이다. 어느 날 출사여행에서 돌아온 명진이 아내의 얘기를 듣고 ‘나눔의 사람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알아본 것이었다. 그러나 형수가 소개받은 나눔의 사람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이름이지만 교회와는 다른 다단계회사였다.
“형님이 사진에 빠져있으니까 내가 혼자 집에 있을 때가 많았어요. 뭔가 여가를 선용하고 보람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지요.”
어느 날 그 여인이 자기가 일하고 있는 회사에 와서 하루만 일을 좀 도와달라고 말한 것이 형수를 다단계회사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의 시작이었다. 그 여인이 다닌다는 회사는 죽전동 로터리에 있는 5층 빌딩 2층에 있었다. 널찍한 사무실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금빛 나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작은 테이블에 3~4명씩 둘러앉아 무언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형수는 음식솜씨 외에 다른 것을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었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끌렸다. 잠시 후에는 모두가 그 옆 강의실로 들어가 앉았다.
한 남자 직원이 나와 화장품, 세제 등 명품 생활용품을 싼값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것을 판매한 사람들은 월 수익이 200만원, 300만원을 쉽게 올릴 수 있었다고 자기의 체험담을 털어놓았다.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제품을 소개하고 파는 일은 그렇게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5만원이나 10만 원짜리 물건을 같은 값으로 팔고나면 회사에서 그 마진을 판 사람의 통장으로 바로 넣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그 일을 시작하려면 제품을 받아오기 위한 3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했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친절했다. 형수는 그 모임에 참여해 친교를 나누면서 조금씩 그들과 가까워졌다.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때 비싼 값을 주는 것은 제품의 원가보다는 막대한 광고비용 때문이란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몇 단계 유통과정을 거치면서 물건 값이 올라가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눔의 사람들’은 이런 광고비용과 여러 유통단계를 과감히 줄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을 회원들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 일에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대로 부지런히 지인들을 찾아 발품을 팔기만하면 일정 소득은 그저 굴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어떤 이가 혹, 그즈음 신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다단계회사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말로 설득했다. 형수가 그들의 모임에 참여할 때마다 그 일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교회에서 전도훈련을 받을 때처럼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형수는 처음 그곳을 소개한 사람과는 찜질방에도 함께 갈 정도로 가까워졌고, 얼마 후에는 ‘오너’라는 분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영광(?)도 누리면서 그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을 굳혔다. 처음 기초자금 300만원을 만드는 것은 어려웠지만 꼭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마을금고를 통해 대출을 받는 길도 열어주었다. 받아온 제품은 시중에서보다 싼값이기에 쉽게 잘 팔렸고 수익금은 통장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다단계 자체가 단순소비 만으로도 수당이 발생하는 구조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의 의욕은 더 큰 희망으로 자라났고 한 단계 씩 승급을 하면서 거기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수익이 재미가 있었다. 매일 모여서 세미나처럼 갖는 것은 다른 이의 성공담을 통해 배우는 것이었다. 타 지역에서 ‘강사’가 오기도 하고 지역별로 자체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간증처럼 늘어놓았다. 형수는 마치 교회 일을 할 때처럼 그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그들과 2년 동안 함께 하면서 로얄, 크라운 등 상위 직급으로 올라갔고 수익도 월 200~300만원을 곧 달성할 것 같았다. 한 두 단계만 더 올라가면 고액의 연금을 받는 위치에 다다를 수 있었다. 거기까지 승급을 하려면 1천만 원의 자금이 더 필요했고 일정 수의 사람을 나눔의 자리로 이끌어 들여야 했다. 직급이 오르면서 투자액수도 2,000만원, 3,000만원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단체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만큼의 대우를 받았다.
나눔의 사람들이 부산 해운대에서 전국총회를 개최할 때였다. P시 지부의 사람들은 두 대의 버스로 총동원되었고 회원들은 모두 유니폼을 갖춰 입었다. 그 옷은 시중에서 5만 원정도면 살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나중에 청구된 금액은 20만원씩이었다. L호텔 컨벤션 장에 모인 인원은 2,000 여명이었다. 좌석은 직급에 따라 배치되었고 형수의 자리는 맨 앞줄 안락의자에 앉은 15명에 포함되었다. 그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파트를 담보로 융자를 받은 2억 5천만 원의 돈이 남편 몰래 들어갔다. 그날의 음식은 최고급 시푸드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식이었다. 그동안 실패는 없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집을 설정하여 투자를 했고 그 대가로 최상위 급에 가까운 다이아몬드 직급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한동안 상당한 수익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명진은 아내에게 가정경제를 모두 맡기게 되었다.
그즈음 중국인들도(화교) ‘나눔의 사람들’에 참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최초 300만원으로 시작한 중국인 한 사람이 제품이 잘 팔리지 않자 회사 측에 반품을 요구했다. 그를 소개한 사람과 함께 힘을 모아 제품을 소비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국인은 ‘나눔의 사람들’을 고발했고, 마침내 그 단체가 다단계 회사의 일종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명진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줄이고 작은 집으로 이사하여 버티었으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은행이자를 견딜 수 없었다. 가진 것을 다 털고 쫓겨 온 곳이 지은 지 30년이 넘는 15평 아파트였다. 진작 손을 떼지 못한 것은 직급에 대한 매력도 있었지만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그들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50여명의 회원들이 빈소를 찾아 문상을 했고, ‘오너’란 분은 따로 부의금을 보냈던 것을 명호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단계회사의 종말은 멀리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제기된 고발로 인해 마침내 오너가 구속되고 ‘나눔의 사람들’은 빈손으로 흩어졌습니다.”
때로는 울먹이면서 털어놓는 형수의 지난 얘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웠다.
“이제 그만 자도록 하지. 아버님 성묘는 내일 몇 시쯤 갈까?”
“형님 시간에 맞추면 되겠습니다.”
명호는 거실 소파에서 머리를 서로 반대쪽으로 두고 누워 자고 있는 형과 형수를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명호가 혼자 그 소파에서 자려고 했으나 명진은 막무가내로 동생을 안방으로 밀어 넣고 형수와 함께 소파에 잠자리 채비를 했다. 안방은 세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이지만 명호 한사람만 잘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해놓았다.
“형님, 함께 자면서 옛날 얘기나 더 나누어봅시다.”
명호는 혼자서 큰방을 차지하기가 미안해서 제안했지만 형은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의 잠자리가 편하도록 배려를 한 것이었다. 삼남매 가운데 누나는 대전으로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고 막내인 명호는 부산에 살고 있다. 명호는 언제 보아도 형은 부모님의 마음처럼 너그러웠다. 모시고 함께 살면서 알게 모르게 부모님의 심성을 많이 본받은 것 같았다. 중앙동 옛집에 명호가 다니러 올 때면 아버지는 아내와 명호 내외가 함께 자도록 큰방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옥상에 있던 조립식 방으로 올라가셨다. 그곳은 아버지가 서예를 배워 사군자를 치던 방으로 여름이면 너무 더웠고 겨울이면 너무 춥고 외풍이 심했다. 겨울에는 사방에 병풍을 두르고 전기난로를 켜놓고 그 방에서 주무셨다. 형은 오랜만에 찾아온 막내를 아버지처럼 사랑했다. 명호는 집에서도 한 번씩 지난날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며 벽에 걸린 부모님의 사진을 쳐다본다. 일흔이 넘은 명진은 생애에서 처음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동생에 대한 마음은 아버지를 꼭 닮았다.
명호는 자리에 누워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노도위의 해조’를 쳐다보고 있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윗돌에서 갈매기 떼가 먹이를 찾기 위해 서로 날개를 부딪치며 날고 있다. 명호는 그 사진에 ‘삶’이라는 제목을 붙이면 어떨까 생각했다. 명호는 서랍장 위에 세워진 부모님의 사진에서 아버지의 치열했던 삶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젊을 때 화물차 운전을 하며 차츰 차를 늘리고 나중에는 운수업 사주가 되었다. 명호는 학창시절에 한차례씩 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남들이 다 쉬는 날 쉬지 못할 때도 있었고, 남들이 놀거나 잘 때 잘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행복은 없었다고 말했다. 화물차에 짐을 실을 동안 잠깐 대기하는 시간에 토막잠을 자고, 일이 없거나 휴무 때는 자녀들의 요구도 무시한 채 한나절 내내 잠을 자는 것이 전부일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약속 시간을 맞추려고 하루에 잠을 세 시간, 네 시간 자면서 위험한 운전을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잠을 줄이며 운전하는 것만큼 젊을 때 열심히 공부를 했더라면 뭔가 더 좋은 것을 이루어 내었을 것이라는 후회의 말씀도 있었다. 그렇게 일에 매달리다보니 친구들은 어쩌다 좋은 모임이 있어도 연락해봐야 못 올 거라 면서 아버지를 따돌리기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에도 빠질 때가 있었고 가족 친지들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특별히 운이 좋은 날이었다.
아버지의 삶은 정말 노도위의 해조와 같은 삶이었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아버지는 꼬박꼬박 저축을 늘려나갔고 마침내 관광버스와 화물차를 겸해 운수회사를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호가 부지런히 공부했던 것은 틈틈이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말씀이 큰 교훈이 되었다. 이번에 형님 댁을 방문한 것은 3년이 넘게 한 번도 참배하지 못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기 위함이었다. 명진의 작품사진은 마치 아버지의 치열한 삶을 얘기하는 것 같았고 명호 자신이 중국에서 일하던 모습을 되새겨보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명문대학을 나왔고 정년퇴직 후에는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형이 칼 한 자루를 갈아주고 3천원을 받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 간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잠이 오지 않았다.
‘명호는 잠이 들었을까?’ 명진은 ‘사드보복’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동생을 생각하며 소파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리를 반대쪽으로 하여 누운 아내는 조용히 코를 골고 있었다. 명진은 그와 함께 근무했던 회사동료의 동생을 통해 칼 가는 일을 소개받았다. ‘칼의 부활’이란 회사는 경기도 광주시 변두리 양자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가와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시설은 2층 컨테이너 박스 한 동과 부속 건물인 판잣집 같은 식당 하나가 전부였다. 컨테이너 2층은 교육생의 숙소이며 1층에는 칼 연마기 3대가 놓여있었다. 70세 이하로 규정된 지원생이 소정의 입학절차를 거치면 칼갈이 비디오를 통해 그 방법과 성공담을 들으며 교육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칼갈이로 월수 500~600만원을 올리며 ‘서민 갑부’로 불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먼저 입학한 사람이 칼 가는 것을 하루 이틀 지켜보고는 바로 실습에 들어갔다. 교육교본도 없고 이론 강의 시간도 더 이상 없었다. 다만 교육 관리자란 사람이 수강생들이 간 칼의 상태를 점검해보며 기술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명수는 73세였지만 지원서에 69세로 나이를 내려 기록하고 입학을 했다. 교육과정은 본인의 숙련정도에 따라 3주간의 교육기간을 며칠 앞당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숙련이 늦어지면 실습기간은 한 주간씩 더 늘어나는 것이었다. 아침·저녁 식사는 식당에서 수강생들이 각자 자취를 했고 점심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배달식이었다.
교육 시간은 따로 정해진 것은 없었다. 일과 시작시간은 오전 9시지만 마치는 시간도 따로 없고, 새벽이나 한밤중이라도 자기가 하고 싶으면 연마실습을 할 수 있었다. 교육용 칼은 폭이 7센티 정도 되는 대전식도(大田食刀)였다. 쉬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 갈면 저녁때엔 칼의 폭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까지 했다. 함께 교육받는 수강생들 6명 가운데 명진은 최 연장자였지만 손재주가 있는 그를 보고 동료들은 ‘제일먼저 졸업을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명진이 관리자에게 간 칼을 보이면 번번이 불합격 판정을 받아 수료를 하기 까지는 한 달이 넘는 35일이 걸렸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나이 탓이었다. 경기도의 11월은 제법 추웠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단조롭고 힘 드는 일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진은 그것이 생계를 유지하는 마지막 남은 길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빨리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기술을 연마한다는 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요령터득이었다. 어떤 때는 연마하는 칼의 폭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이 하루 2~3개나 되기도 할 정도였다. 졸업이 가까워오자 선임자를 따라 현장실습을 나가 운영방법도 익혔다. 기술을 익혀 돌아와서도 고객을 찾아다니며 일을 해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사진촬영에 빠져들면서도 생활의 어려움은 모르고 살았다. 명진은 ‘삶은 언제나 치열하다’는 것을 뒤늦게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한번은 흥해 ‘족발·보삼 집’ 앞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로 얘기를 주고 받으며 젊은 여인들 한 무리가 점심식사를 하고 식당에서 몰려나오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들은 그가 가르친 사진동호회 여명회 회원들이었다. 출사를 나왔다가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들린 것 같았다. 명진은 작업할 때는 열어두는 차문을 얼른 닫았다. 스승의 발자국을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던 그들과의 대면을 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러웠다. 칼갈이로서 떳떳하게 설 수 있을 때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기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처럼 치열한 것이었다.
“하루 종일 이리저리 대상을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결정적인 순간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배경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지나가면서 만들어지는 찰나적 결과물들을 발견해야 한다.” “사진가는 자신의 머리를 옆으로 약간 움직이고 무릎을 조금 굽히거나 발꿈치를 살짝만 들어도 전혀 새로운 상황과 만나게 된다. 완전히 다른 관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카메라를 가까이 혹은 멀리 위치만 바꿔도 주제가 매혹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체적인 풍경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상황을 잡아낼 수도 있다.”
명진이 동호회 제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던 아베돈의 말이다. 사진작가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에게는 그를 칭송하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세계 최고의 패션 사진가, 천재적인 인물 사진가, 아버지의 죽음을 촬영한 사진가, 80세가 넘을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일했던 사진가 등등. 아베돈에게는 그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몰려왔으나 뜻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그는 어느 날 그의 조수가 되기를 열망하며 일본에서 건너온 히로 에게 구두 한 켤레를 건네면서 “100컷만 찍어봐라.”고 말했다. 히로는 그날 밤을 새워 신발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다음날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에도 아베돈은 똑같은 과제를 히로에게 주고서는 아무 말 없이 스튜디오를 떠났다. 이런 씩으로 아베돈은 한동안 신발을, 그다음에는 다른 종류의 정물들을 100컷씩 촬영해오라는 과제를 꾸준히 내주었다. 물론 히로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그의 노력으로 나중에는 아베돈의 정식 조수로 채용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사진이야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찍어봐야 알 수 있었다.
명진은 사진공부를 하면서 아베돈의 이론에 많은 영향을 입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한 달에 두 번 영덕까지 칼갈이를 나갈 때면 제자들을 데리고 출사실습을 나갔던 7번국도의 강구, 송라 등 바다 풍경들을 지난다. 명진은 취미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여유로운 생활이라는 것을 부모님 생전에는 알지 못했다. 그때는 그의 탄탄한 직장과 아버지의 신뢰가 모든 것을 뒷받침해주었던 것이다.
“형님은 참 대단하십니다. 그런 명예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어떻게 현재의 삶을 지탱해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아침식사 때 명호는 형의 사진이력을 생각하며 물었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사람들이 잘 못이지. 남에게 한푼 두푼 얻어 쓰는 것보다 깨끗한 돈을 스스로 벌어 쓰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이 아닐까? ‘나눔의 사람들’에게 홀려서 갖고 있던 것 다 털고 집까지 날리고 보니 참으로 막막하데.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계속 손을 벌일 수도 없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자라나면서 무슨 고생을 해보았나. 네 형수도 마찬가지지. 곱게 자라 나만 믿고 시집을 왔는데 늘그막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돌아보면 다 욕심 때문이야. 직급만 올라가면 땀 흘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고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헛된 마음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어!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닌데도 승급 때문에 유혹을 당했다고 할까? 다 내 책임이야! 네 형수가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무슨 일을 못하겠나? 저것 좀 봐.”
명진은 식탁 옆 벽면에 달력처럼 붙어있는 표를 가리켰다.
「노인 일자리 근무일자 (5월)−1조」 달력 형태를 그대로 옮긴 표에는 월, 수, 토요일이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고 날짜 아래는 ‘근무’라 표기되어 있었다. 맨 아래 여백에는 작은 글씨로 「※근무일 : 월30시간(1일 3시간 09:00~12:00, 월 10일 근무」라는 글자도 보였다.
“네 형수가 하루3시간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쓰레기 줍는 일을 하고 일당 22,000원을 받잖아. 그나마 한 달이면 220,000원으로 도움이 되지.”
명진은 미안한 눈길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집에 있으니 답답해서 동사무소에 가서 일거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노인 일자리’를 소개해주었어요. 처음 모집할 때 관내 노인들 140여명이 왔었는데 건강상태를 기준으로 그 가운데서 80명을 선발했어요. 아직 다리도 아픈데 행운이라면 행운이지요. 하루 3시간이지만 한 시간쯤 일하면 별로 할 것도 없고 이리저리 어정거리면 돌려보내주지요. 바람도 쇠고 힘 드는 것도 아니어서 괜찮아요.”
형수가 하는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형도 지난 일을 들려주었다.
“재작년말 처음 이쪽으로 이사 왔을 때에는 아무 할 일이 없었어. 일하고 싶은데 할 일이 주어지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이야. 그러다 ‘참가자미 낚싯줄’ 매는 일이 있었어. 1톤 트럭에 싣고 온 일감을 원하는 집에 나눠주는데, ‘한통’에 낚싯줄이 150개, 오후에 일감을 받아 저녁 늦게 까지 낚시를 매달아도 한통을 더할 수는 없었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손재주가 있는데도 말이야. 그리고 단돈 6,000원을 받았지. 네 형수는 손가락이 아프다면서 아예 한통도 만들어내지 못했어.
그러다 연초에는 해맞이 공원 일대 산불방지 요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어. 닥치니 못할 일이 없더구나. 하루8시간 씩 주5일 근무하며 일당 45,000원씩을 받았어. 그 일도 5월 중순에 끝이 났으니까 좀 더 지속적인 일감을 수소문 해보다가 칼갈이 일을 알게 되었지. 처음 교육을 받고 왔을 때는 의욕적으로 뛰어서 월수 최고 200만원까지 올린 적도 있었어. 그때는 네 형수도 동행하며 일을 도왔지. 적절한 곳을 찾아 광고스티커를 붙이고, 식당을 돌며 칼을 거두어 오고, 전화도 받아주고. 언젠가 좁은 골목길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릴 때 네 형수가 하수구에 발을 헛디뎌 다리를 다치고 아직도 완치가 되지 않았어. 의사가 1년쯤 있어야 철심을 뺀다고 하더구나. 보다시피 아직도 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잖아.······.”
명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형은 ‘오후 2시쯤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님 산소로 들어가는 입구인 흥해 <민하네 식당>, 한 주일에 한 번씩 칼을 갈아주는 집이야.”
그 집은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방문을 했지만 얼마 후에 2주에 1회, 그러다가 매주 화요일 마다 칼을 갈기로 했다는 것이다. 잘 드는 칼을 써보기 시작하면 습관처럼 칼을 갈아야 했다. 이런 단골집이 많으면 작업일정도 짤 수 있고 수입도 고정적으로 되는 것이었다. 영덕에는 2주에 1회씩 작업을 나가는 식당이 세 곳이 있다고 했다.
“아버님 묘소로 출발을 해볼까? 가면서 또 얘기를 하지.”
명진은 작업복대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명호의 승용차를 타고 형제는 아버지 산소로 향했다. 흥해를 벗어나 호리 저수지를 지나자 비학산(飛鶴山)이 동서로 길게 날개를 펴고 있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학이 날개를 펴는 산세의 명당자리 묘터를 잡으면서 ‘훗날 손주놈들이 훌륭하게 되어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하러 오기를 기다려보자!’ 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님이 장남인 내게는 유달리 큰 기대를 걸고 계셨는데−.”
명진은 동생과 함께 물끄러미 맞은편 비학산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형이 K대학 법학과에 수석으로 입학 했을 때부터 사법고시를 거쳐 법관이 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형의 자유분방한 삶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명진은 이제라도 남은 생이 부끄럽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