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이야기(1) >
중고교시절, 나는 영어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영어소설 대역본에 흥미를 느껴 즐겨 읽었다.
그 때 당시 어렵다는 두꺼운 토플책도 혼자서 풀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며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래서 대학원 입학과 대학원 영어시험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가장 큰 난관은 일본 유학시절이긴 했지만 다른 유학생들은 영어 때문에 2년이나 3년 공부해야 하는데도
나는 단 한 번에 패스할 정도로 나름대로 영어에 대한 자신감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 원서로 된 언어학 책도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해 읽기도 했고 인용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로 말은 잘 못해도 영어에 대한 커다란 어려움이나 공포증 없이 40대까지 잘 보냈다.
더구나 40대중반이 되어 해외여행도 자주 하게 되었고 국제학회에 참석해 발표도 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권의 나라에 가면 3개월 정도만 열심히 하면 유창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좋은 부분을 잘 섞어서 사용하는
캐나다의 밴쿠버로 가족과 함께 안식년을 보내러 오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내가 언어학을 전공한 교수이고 일본어교육 전문가이니 만큼 아는 단어도 많고 자신감도 있고 해서
몇 달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영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다.
처음 한 달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더라도 대충 말하고 아는 단어를 몇 개만 연결해도 그런대로 잘 통했다.
잘 못 알아들으면 “parden?” 하면 상냥하게 천천히 말해주곤 하여 알기 쉬었다.
모든 사람들이 친절해서 여자는 천사같고 남자는 젠틀했다. 어떤 면에서는 일본 사람들보다 더 친절한 것 같았다.
어떻게든 영어가 통하는 것 같아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다음 달에는 훨씬 더 나아지겠지 하는 사이에 두 달 세 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 두 달 세 달은 매일 매일이 힘들고 험한 스트레스의 나날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표현을 제대로 하고 싶었으나 잘 못하게 되니 말을 더듬게 되고, 상대방이 답답해하는 것 같으면
좀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상대방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정말 미칠 것 만 같았다.
3개월이면 어느 정도 되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어리석고 미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괴로운 나날이 5개월하고도 10일이 지났다. 그동안 영어는 그다지 는 것 같지 않은데 눈치는 상당히 늘었다.
5개월이 지났으니 아마도 눈치 5단쯤은 된 것 같다. 지금은 상대방의 말을 잘 못 알아듣거나
길 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혼자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더라도 걱정이 별로 안 된다.
쇼핑몰에 들어가 혼자 쇼핑도 하고 음식도 주문해 먹어보고 외국인과 함께 골프도 치는 등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거의 다 할 수 있다. 비록 영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치와 통밥(?)으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을까하다가 밴쿠버교육청(vancouver school board)에서 하는 영어강좌도 들어보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내가 한 이야기와 들은 이야기는 대부분 자기소개, 취미, 나라소개, 전공이야기, 가족,
좋아하는 스포츠 등등으로 어느 정도 틀에 박힌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반 이상이 대충 얼버무리는 눈치영어였다.
그래서 UBC대학의 인터내셔널 하우스(I-house)에서 하는 영어강좌도 들어 보았다.
외국인과 만나 이야기도 해보고 모임도 가져보고 그들과 운동도 같이 하곤 해 보았다.
그래도 영어 실력은 마찬가지였다.
영어가 더 이상 진전이 안 되니 혼자서 침묵으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궁금한 것에 관해 많은 정보도 공유하고 싶어 말을 걸곤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몇 마디하고 나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어 썰렁한 적이 한 두 번 이 아니었다.
말이 안 되니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다.
영어가 느는 것 같지도 않아 세미나도 참석하고 공연도 가보곤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알아듣는 것 같은데 중간이나 뒷부분에서는 항상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안걱정, 애들 걱정, 번역연구회 걱정(?), 골프, 탁구, 친구들 등등......
때문에 무슨 이야기인지 잘 연결이 되지 않곤 했다.
이런 시련과 좌절을 여러 번 겪고 나니 자연히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지기 일쑤였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밴쿠버에는 계속해서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려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외국인들을 만나도 항상 먼저 인사하며 웃는 얼굴로 대하던 내가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며 얌전해지고 점잖아졌다.
자연히 한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고 한국말이나 일본말이 편하니 영어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나이에 이제 영어공부를 해서 무엇 하나? 일본어만 잘 하면 되지 뭐?’ 하면서 스스로 위로도 해 본다.
지금 나는 늘지 않는 영어 때문에 상당한 갈등과 기로에 서 있다.
요즈음 시간이 날 때면 논문도 쓰고 방송대 교재도 새로이 쓰고 있다.
논문 쓸 때와 방송대 교재를 쓸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이 나서 연구하고 집필을 한다.
그러나 영어공부를 시작하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벌써 잡념이 생기고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밴쿠버에 헌 책방인 BOOK OFF가 생겼다고 해서 다운타운 시내에 버스를 타고 나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서 3시간가량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 던 중 눈에 띄는 책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ass-sa·하고 환호를 지르고 말았다.
그 책은 일본의 중학교 1학년들이 배우는 영어책 정도의 수준인데 그림을 통하여 대화를 주고받는 내용이었다.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보어)를 익히는 책으로 동사에 초점을 둔 책이었다.
내 전공이 일본어동사인데도 영어로 말할 때 나는 가끔 동사를 사용하지 않거나 동사를 엉터리로 사용할 경우가 많았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이 책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동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항상 동사를 염두에 두었다.
외국인과 말을 할 때도 내 수준에 맞게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의 대답도 천천히 말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랬더니 동사가 살아나면서 영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아, 그동안 내가 너무 어려운 책으로 너무 복잡하게 공부했구나, 너무 빨리 말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니 마음이 편하고 영어가 다시 재미있어진다.
그리고 외국어를 6개월 또는 1년 이내에 유창하게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렸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먹고 천천히 말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서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장기적 계획을 세우니 여유가 생긴다.
단기간에 영어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깨달으니 아니 마음을 비우니 날아갈 것 만 같다.
5개월이 지나서 터득한 것이 외국어는 절대로 단기간에 정복할 수 없으니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고,
자기 실력에 맞는 교재나 공부스타일을 파악해 꾸준히 매일 반복 사용해야 한다는 다 아는 진리이다.
영어도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항상 가까이 하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되면 영어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고
폭을 넓혀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은 옛날에 일본어를 시작할 때와 같이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조금씩 계속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다시 테이프도 듣고 텔레비전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초등학생과 중학생인 우리 아이들이 보는 책을 같이 보고 있다.
지금 나는 영어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나의 실력을 알게 되고 마음을 비우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른다.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어 행복이 충만한 지금
이곳에서의 이런 시간들을 소중하게 보내고 싶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밴쿠버가 동양인인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많아 별로 영어환경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한국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니 환경을 탓하기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과연 내가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밴쿠버는 한국인이 많아 영어가 잘 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환경을 탓하는 사람들이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대 자신이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어차피 우리는 캐나다에서는 외국인이니 그들처럼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니 절대로 기가 죽을 필요가 없는데도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틀리면 어떻게 하나? 무시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그동안 기죽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 안하기로 했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생활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내 모국어도 아닌데 이만큼 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여기기로 했다.
여기 밴쿠버의 좋은 영어환경 두 가지만 소개하고 싶다. UBC대학 안에도 저렴하게 운영하는 영어강좌가 많다.
그 중에서도 추천할 만 한 것은 무료로 해주는 Writing centre라는 곳이다.
미리 예약만 해 두면 본인의 작문을 가지고 본인의 약한 부분을 중심으로 Writing을 친절하게 교정해 주고 상담해 주기도 한다.
이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그런데 이런 정보를 몰라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또 하나는 초중고생들에게 아주 유익한 `Reading town`이라는 곳도 있다.
이곳은 레벨테스트를 한 후에 학년과 상관없이 영어레벨에 맞는 반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반들이 모두 미국 동부의 명문 하버드, 공과대학의 최고의 명문 MIT, 서부의 명문 스텐포드, 영국의 명문 캠브리지 등 명문대학이름이다.
우리 딸은 하버드생이고 우리 아들은 MIT에 다닌다.
1주일에 4권의 책을 읽고 온 후 테스트를 하고 통과하면 또 4권을 읽어 와야 한다.
불합격하면 다시 읽어 와야 한다.
그리고 그 중에 읽은 책을 가지고 3명 내지 4명의 학생들이 선생님과 내용과 단어 문법 등을 확인하고 넘어간다.
이렇게 하면 1달에 16권의 책을 읽게 되는 셈이니 엄청난 독서양인 것이다.
10달이면 160권, 12달이면 약 200권정도의 책을 읽는 것이다.
초중고생 때 영어원작을 1년에 200권정도 읽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1년 후의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1년이라는 안식년이 다 끝난 뒤 아빠만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다 해도, 아이들이 영어로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영어소설책도 많이 읽고 영어로 편지 쓰고 메일 보내고 일기를 쓸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내가 용기가 생겨서 외국인에게 질문을 하기도 한다.
물론 말이 너무 빨라 나는 잘 못 알아듣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듣기를 가장 잘하는 아들이 알아듣고는 통역해준다.
그러면 그 말을 받아서 딸이 영어로 이야기 하는 그야말로 온 가족이 하나가 되는 영어를 하고 있다.
일본 속담에 있는 「三人よれば文殊の知恵」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느 나라 외국인을 만나더라도 우리 가족만 있으면 걱정이 없고 전혀 무섭지도 않다.
첫댓글 교수님.. 어딜 계시더라도 멋지시고 당당하신 교수님!! 교수님 글을 읽고 나면 저도 같이 힘이 생기는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더욱 가족애가 느껴지는 모습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교수님
이제 정말 교수님께서 캐다다에 안착(?)하신 느낌이시겠어요. 늘 지치지 않으시고 공격적이고 열정적인 삶의 모습들을 저희들이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틀리면 어떻게 하나, 무시당하면 어떻게 하나' 이것이 아직도 일본어에 있어 제겐 풀어야 할 화두랍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반복'하면 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터득하면 될까요?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빌겠습니다.
언제나 저희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교수님 교수님의 고군분투 영어와의 사투 체험기가 지금 저희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진솔하게 몸소 가르침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영원한 우리의 호프 이경수 교수님 ^^
자랑스럽고 멋지신 교수님...진솔하고 꾸밈없는 교수님의 글에서...작문하는 법도 배웁니다....제자들 앞에서 그리 솔직하시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그렇게 말씀해 주시니..저희들은 얼마나 큰 힘을 얻는지 모릅니다....또한 교수님의 큰 사랑을 느낄수도 있구요저희들도 교수님을 모델링으로 하여 장기전으로 들어갈께요....콩나물시루에 물은 다 흘러내려도 콩나물은 쑤욱 쑥 자라듯이요....존경하는 교수님 ....
교수님 대단한 용기에 갈채를 보냅니다. 늘 연구하시는 교수님 건강하십시요 입니다.
교수님, 대단하세요.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본받아 열심히 살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도 명심하구요.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그동안 댓글 다시는 분들이 많이 바뀌었네요. 새로운 분들의 댓글 항상 기대가 됩니다. 연구회의 여왕, 댓글의 `카미사마`최경순 부회장이 안보여 걱정했는데 코 수술을 하셨다니 기대가 되곤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말입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코수술 했다해서 깜짝 놀랬습니다. 저 또한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싶었는데...이궁...고생하셨네요...이제 좋아지셨나요
교수님 이글을 읽고 공감합니다. 지는 학교에 들어 오기전에 기초를 조금안다고 등안시하고 지내다보니 학교 들어오기전에 가졌든 것만큼만 알고 제자리걸음 입니다.노력해야 되는 것을 알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5년이나 지나가버렸습니다. 교수님 존경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구요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