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현순애, 허이서,. 나태주, 이상국, 함민복, 엄원태, 최서림, 유종인, 정현우, 이서빈
곶감을 꿈꾸다
현순애
바람 넘나드는 문간방 처마
그늘에 매달려
아픔 말리고 있다
허공에 상처 부벼
껍질 만드는 일이다
흔들어댄 바람도 손 놓아버린 감나무 가지도 야속해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을 때
“괜찮다, 괜찮다”
제격인 찬 바람과 생각의 모서리에서 만난 햇살이
다독였다
배고픈 새도 염탐하는 곶감
벌써 일주일
눈물 빠져 자신을 추스르는 속내
서리 내린 하얀 분 피워올리며
뭉친 근육 주무르듯
상처난 속내 주무르고 있다
---애지 겨울호에서
말무덤
허이서
같이 달리던 말이 눈을 흐리게 한 것일까
길을 지날 때
말무덤이라는 글자를 보고
어느 눈 맑은 말이 묻혔을 것이라
어름어름 더듬으며 지나쳤는데,
되돌아 오는 길
안내판 '말무덤' 글자 아래 작은 글씨
언총,
입에서 태어난 말들을 묻었다니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말이 죽었으니
지금도 살아서 떠돌아 다니는 경구나 소음이 많은 걸까
독한 몸은 끝까지 살아 남아서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닌다
이 커다란 봉분 안에 묻혀 말들은
자신의 힘을 스스로 빼고 있었던 걸까
함께 달려온 말들을 무덤에 내어주고
흘리면 채워내는 고요한 시간
이제까지 달려온 나와 말들이
눈과 귀만 흐려졌다는 듯
바위 앞을 지나며 고요한 비명을 새긴다
말의 무덤에서 살아있는 말을 들었다
---애지 겨울호에서
그 때가 좋았다
나태주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
촛불이든 호롱불이든
저만치, 그렇지 저만치
거리를 두고 어둠을 사이에 두고
바느질하고 계신 어머니
일기를 쓰고 계신 아버지
그 모습이 좋았는데
그래도 그 때가 그립다
그분들에게도 저만치
거리를 두고
어둠과 밝음을 사이에 두고
책을 읽고 있는 아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들
서울서 실연당하고 돌아와
흐느껴 울던 아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너무도 밝고 환하고
분명해져서 걱정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인들 몸인들
숨길 데가 도무지 없다.
---애지 겨울호에서
과분(過分)
이상국
알지도 못하는데
커피콩을 외상으로 주는 동네 가게
어떻게 시 한 편 있는 줄 알고 용케 도착한 청탁서
괜히 마음이 언짢은 날 내리는 비
연립주택 화단의 애 머리통만 한 수국
점심은 먹고 왔는지
남해에서 하루 만에 달려온 택배
어디선가 사람을 낳는 사람들이 있고
마음 깊이 감춰둔 사람이 있다는 것
아무리 두꺼운 어둠을 만나더라도
어떡해서든지 오고야 마는 아침아
부모가 있다는 것
나무들이 있다는 것
통장에 찍힌 손톱만 한 원고료
해지면 기다리는 식구들
---애지 겨울호에서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듣다
함민복
목탑 아닌 석탑을 최초로 만들어봅시다
자- 자-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돌을 나무라 생각하면 됩니다
돌쟁이 나무쟁이 서로 배우며
다들 석목공, 목석공이 되어 봅시다
우리 돌에도 결이 있죠
옹이도 박혔는걸요
돌 쪼는 정질 소리에 나무 깎는 끌 소리가 배었네요
이참에 판석 끝을 들어 올려 돌송판도 만들어보지요
야- 이건 완전 배흘림기둥이네요
시력 나쁜 바람이 탑에 부딪히며
이 낯선 모양의 돌은 뭐지, 어리둥절
날던 매 잠시 탑에 앉아 톡톡 부리 다듬다가
자존심에 아프단 말은 못 하고 날아가며
발이 차, 절이당께!
딱따구리 스승 삼지 않고
낙수 물방울 스승 삼아
삼십 년 긴긴 세월
낮에는 돌먼지
밤에는 도깨비불 잔치였다니까
봐-
돌이 나무가 되고
목탑이 석탑이 되는데
머지않아 미륵님도 오시겠지
틀림없이 백제 땅에 미륵 세상 여실거여
---애지 겨울호에서
이 동물원을 위하여 · 1
엄원태
곰 농장이 기어이 문을 닫고
사슴 농장도 폐쇄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소식
웅담이나 녹용이 필요 없어져서는 아니다
우유 농가들도 폐업 직전이라고 아우성
사룟값과 원유가격 연동제 때문만도 아니라 한다
민간 동물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시립 동물원이 외곽의 대공원 안쪽으로 이전한다는 뉴스가 떠들썩했던지도 십 년이 넘게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보상 문제로 으르릉대는 현수막이 대로변에 널렸다
동물 학대 문제 때문만도 아니라지만
동물원이 인기를 잃었다는 건 자명한 사실
아이들조차 더는 동물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따로 동물원에 갈 필요가 없어져서이다
동물원은 우리 집에 있다
동물원이 이미 우리에게 와 있어서이다
거실과 식당 홀 TV에선 진종일 개 짖는 소리가
늑대와 승냥이와 여우의 사이좋은 삼중창 퍼포먼스가
왈왈대고 컹컹대며 낑낑거리고 캑캑거리며 앵앵거리지만
언제부터인지
그것이 익숙하고 친밀해진 것이었다
이 동물원을
과연 위해야 할 것인가?
---애지 겨울호에서
너의 이름
최서림
네가 내 이름을 자작나무 숲에다 묻고
눈으로 덮어버렸듯이,
이젠 나도 네 이름을 지운다.
네 이름을 냉동실에다 얼려도 보고
장작불에다 태워도 본다.
그래도 살아 꿈틀거리면
페루까지 날아가서 죽는다는 새에게
물려 보낸다. 그래도
네 이름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 돌아온다면
내가 삼켜버릴 테다.
이미 삼킨 바 있는 네 이름
한 번 더 삼켜버릴 테다.
내 염통 안에서
열두대문집을 짓고 있는 네게 돌려주마.
---애지 겨울호에서
찬란의 묵계
-성산포
유종인
아무리 둘러봐도 청(靑) 파도 에워싸는 유채꽃밭이다
조랑말에 귓속말하는 유채꽃들 귀이개로 파내느라
근동 파도들 사팔뜨기처럼 눈길이 모이는 화투판이다
고개 들면 아직도 설문대할망이 엉덩이로 지긋이 누르고 앉은 성산 봉우리,
언뜻 언뜻 초록의 분화구 안에 사슴의 관(冠)이 높고
그 사슴 잔등에 오뉴월에도 흰 잔설이 푸르러
땀 들이는 동안 수수억 광년 햇살이 발등에 솜다리꽃 그리메로 흔들린다
몬스테라처럼
늘어진 망사모자의 여인은 성산에 들어 몸이 달랐다
멀구슬나무 넋을 만 평의 하늘 바다로 맘에 들였으니
엊그제까진 장삼이사라도
오늘은 거진거진 세간에 껴둘만한 신선의 방계 직속들,
대구 장모의 발뒤꿈치 낮꿈의 각질을 밀어볼까
기념품점 부석을 들면
기분 호탕한 날엔 돌이 공중에 뜬다
좋이 성산을 바라 바람 속에 캉캉춤을 추다 내려앉는 곳
오지랖이 싱싱한 다시마 미역내음 바람이
성산포 성당에 들러 사방 성호를 긋듯
성산포 절간에 들어 시방 천 배를 모시듯
아닌 곳이 없는 다솜들 아닌 데가 없는 자비들
비바람치는 캄캄하니 궂은 날
성산 같은 한 사람을 들여 그대 찬란이다
이마가 새파라니 영원으로부터 미리내를 예 끌어다
한 사람으로 온천지 사람을 여는 끌림의
한낮에도 은하(銀河)ㅅ물에 목젖이 푸르게 젖는 찬란의 묵계 속이다
---애지 겨울호에서
이글루
정현우
장례식 다음 날 한밤의 눈, 우리 둥그렇게 앉아 이야기 할까
이상도 해
너는 내게 사랑을 고백하는 중이어서
죽이고 싶은 게 많아지는 계절이라고
우리는 무얼 하지
안녕은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동사하지 않는 밤과 식물과
나를 재우려고 속눈썹부터 분명해지는
빛, 주검은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시작 되었다고 눈을 감는
개,
둥근 마음으로 시작하는
안녕은
퍼붓는 눈 속에 있다.
엉망과 둥근 마음으로 끝나는 시간으로부터
겨울 숲의 천장은 반쯤 열린 창으로부터
비스듬히 부서지는 버찌들,
그 사이를 노래하는 새들의 맹목적인 마음,
뒷걸음치는 언 그림자와
다만 기다리는 것으로 증명 된다고
짖는 개, 개라니,
줄을 끊고 가는
개,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돌아온 집은 언제나 비어있고 새의 눈매에 걸린 둥근 겨울이 고드름으로 자라 자라있다.
검은 서랍에 넣어두는 바깥은 벼랑을 너무 많이 버린,
너무 먼 것은 쏟아져버린, 단숨에 지워져버린
죽었나, 살아있나 끼는
성에,
눈을 비비고 나온 천사들이 가끔 창 안을 엿보고 간다.
---애지 겨울호에서
올챙이를 산란하는 비요일
이 서 빈
비요일
유리창에서 올챙이가 끊임없이 태어난다
한 마리 두 마리
끝없이 줄지어
눈썹 휘날리며 곤두박질치며 헤엄치는 올챙이
다리는 뱃속에서 속도를 굴린다
볼록한비밀에 싸여있던
앞다리 뒷다리
뿅알 뿅알 뿅알 뿅알
우주 깨고 밖으로 나오면
전생을 까맣게 잊는 순간이다
뱀눈알 냄새가 번지는지
체온보다 뜨거운 속도로
휘릭휘릭 유리창 거침없이 질주하는 올챙이
겨우내 땅속에서 어미 젖꼭지 빨면
촉촉한 휘파람 조용히 불어주던 아비 정이 아니라
올챙이는
뱃속에 두고온
다리를 찾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투명한 헤엄은 올챙이 울음이었다
마음심지 낮추고 보니
개구리는 눈속에 붓다의 염주알 굴리며
올챙이의 무사함을 비는게 보였다
올챙이국수가 되지 말고
---애지 겨울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