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식탁에 흐르는 풍류정신
1. 서시
캄캄한 대숲 속 오래된 집 부뚜막엔 언제나 앵병이 놓여있지요 앵병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가전비법으로 전해져 오는 식초 눈이 살아 있어 들척지근* 혀끝이 오그라붙기도 하지요 남도 사람들은 이 맛을 두고 앵병이 운다고 합니다 봄바람 불어 한 번 가을바람 불어 또 한 번 그래서 앵병을 아예 왱병이라고 부르는데 그 병 모가지만 보아도 눈이 절로 감겨오고 황새목처럼 목이 찔룩 거려 옵니다. 봄은 주꾸미 철이고 가을은 전어 철이지요 부뚜막 왱병이 한 자리 얌전히 있지 못하고 오도방정 떠는 통에 잠자리 구들장 들썩거려 빙초산 초파리들처럼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어집니다
앞대 개포 주꾸미 배 들었나 전어 배 들었나 한겨울 밤에도 허리가 쑤시고 늙은이는 아리고 쓰린 가슴 잠 못 듭니다 죽을 때도 허공에 마지막 깎지 손 얹고 왱병 모가지 잡는 시늉하며 손 무덤 짓습니다
그래서 남도 사람 소리는 왱병 모가지 비트는 소리로 통성도 되고 수리성이 됩니다 또 이것을 시김새* 소리라고도 하지요 시김새 붙은 소리는 왱병 속에서 왔기에 소리 중에서도 땅을 밟는 뱃소리 하다못해 한바탕 바가지로 설움을 떠내는 큰 소리꾼이 되고 명창이 되는 것이지요.
*들척지근 : 달고 신 맛(달새콤한 맛)
*시김새 : 삭임새, 삭임새는 `곰삭다'라는 음식에서 온 말.
`개미' 또는 `그늘'로도 쓴다.
또 시김새(그늘)가 붙은 목소리를 천구성이 아닌
수리성이라 부른다.
-송수권, 「앵병」 (미발표작)
오늘날 국어학자들은 멋은 맛에서 왔다고들 풀이한다. 멋은 파격(破格)에서 온다고도 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격식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여유에서 온다고 한다. 그래서 여유의 미학(美學)쯤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한자어로 풍(風)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최남선은 우리의 멋을 국풍(國風)으로 풀기도 한다. 또한 우리 고유의 멋을 가리켜 선풍(仙風)이라고도 한다. 멋과 맛과 가락의 어우러짐, 이것이 『난랑기』에서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風流道)라면, 이 풍류도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멋이다. 이것을 최치원은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라 했고 유‘불‘선 삼합으로 풀었다. 이것을 육당은 국풍으로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남도의 멋은 무엇일까? 이것을 맛과 말 가락, 멋에서 볼 때 남도풍(南道風)으로 풀면 어떨까? 남도의 멋과 맛과 가락, 이 어우러짐! 그것은 오랜 역사의 생활패턴과 문화양식에서 생겨난 남도만이 지닌 특성이다.
불교의식에서 다비식을 치르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죽음은 정말 죽음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도 희나리(장작)시대가 가고 기름 땔감 시대가 온다면 죽음이 무슨 고구마튀김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몇 달만에 외국에서 돌아온 자식이 큰절은 않고 까딱 “안녕하셨어요.” 이것이 요즘 인사법이라면 참 멋없는 삶이다. 청학동에 가보면 그곳 사람들은 형식과 멋이란 말을 즐겨 쓴다. 동쪽을 상징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청복(靑服)과 알상투에 갓을 쓰고 세월이 좀 먹느냐, 왜들 그리 바빠, 왜들 질식사를 그렇게들 많이 해, 흰 고무신을 신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살아가는 그들이 여유롭게 보인다. 배짱도 이만하면 그건 확실히 멋이다. 불교에서 보면 이건 자비요, 무소유의 삶이다. 무소유란 갖지 않음의 뜻이 아니요, 베품의 뜻이다. 유교에서 보면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로서 곧 청빈이요, 가장 여유 있는 삶이다. 관조며 달관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만이 진정한 멋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병들고 시궁창 같은 이 시대를 가장 확실하게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이 멋을 빼놓고는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멋은 곧 민족을 세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다. 이것을 민족의 도(道)라 해두자.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남도의 멋은 첫째로 우선 음식문화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서는 최남단의 해안선을 거느리며, 평야권 문화로 그 생활패턴을 지녀왔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대숲이 빛나고, 들머리 낮게 낮게 깔리는 연기는 독특한 남도의 정서를 자아낸다.
마을마다 몇 백 년 묵은 사당나무가 서 있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원형문화가 있어 대쪽 같은 마을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다. 광주(광산)의 향약, 구림의 대동계, 금안동의 향약 등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금욕과 절제 정신 밑에서 다양한 음식 맛이 나왔고 풍물과 풍류가 넘쳐흘렀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식담(食談)만 보아도 “한 해 농사는 장맛에 있다”는 전제 아래, 그 집의 장맛이나 된장맛을 보고 일꾼들이 모여 들었으며, “쌀독 밑에서 인심난다”는 말처럼 인심 또는 인정(人情)을 중요시하는 풍습으로 생활문화가 발전해 왔다. 이것이 검약과 절제의 선풍이며 음식으로 가면 예가 아니면 먹지도 않는다는 비례물식(非禮勿食)의 공양과 자비정신이다.
지금은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올게심니”란 풍습도 잊혀졌고 “파문(破門)”이란 말도 안 쓰인 지가 오래며 “곳집”이나 “당골네” “기러기집” 등도 없어진 지가 오래다. 어디 그뿐이랴, 두레나 농악, 고싸움, 집장(什醬)맛도 시들해졌으며, 국토와 인심도 피폐해졌다. 영산강, 섬진강, 탐진강 줄기가 오염되므로 해서 철 따라 오르던 해산물도 끊기고, 서해안 시대를 겨냥하면서 막아대는 간척지 때문에 개펄이 병든 탓에 비브리오균이 득실거려 이제 맛을 잃어버린 시대가 왔다.
아무리 중앙방송국들이 내려와 “팔도 맛자랑 멋자랑”을 카메라에 담아 봐도 전통 고유의 맛을 담은 음식이 아니라, 그저 겉포장된 상품들뿐이다. 나주곰탕이 그렇고 대물림해 온 애저탕이 그렇다.
봄바람이 불고 살구꽃이 흩날리면 슬슬 입맛도 살아나 향긋한 봄나물이 그리운데, 요즘은 중국산에 밀리고 즐겨먹었던 “우렁회와 죽순나물”도 양식이 아니면 거의 중국산이다. 고사리 철에 “고사리 꺾는데 칠산바다 참조기 따른다.”는 말처럼 고사리 철이 와도 참조기가 없어 궁합이 맞지 않는다. 진달래 철이 와도 몽탄강의 그 복바위에는 황복이 오르지 않는다. 진달래꽃에 나비가 날아들고 그 나비를 황복이 튀어 올라 벼랑에서 채어먹는다. 그 나비를 채먹는 황복을 낚아 먹으면 즉사한다는 전설만이 지금 그 황복바위에 묻어있을 뿐이다. 이는 황복이나 참복이 그 바위 밑의 뻘을 뒹굴며 복점을 받아서 독이 든다는 말이다. 숭어가 오르지 못하니 영암의 어란젓이 없고, 자연산 은어가 오르지 못하니 은어구이 점심이 드물다.
남도의 음식 중에는 유일하게 두엄벼늘에 삭혀 먹는 별미가 있다. 그것이 `홍탁'이라고 하는 흑산도 홍어요, 집장(什醬)이다. 눈 내리는 한 겨울의 목포의 삼합에는 남도 서민들의 애환이 질퍽하게 배어 있다.
홍어회의 쏘는 맛과 돼지편육의 고소한 맛, 잘 익은 배추김치의 시원한 맛을 일러 삼합이라 한다. 삼합에서 값비싼 홍어가 빠지면 `보쌈'이라 해서 요즘은 보쌈집이 유행이기도 한다. 또 홍어창에다 끓인 이른 봄의 보릿잎국이나 쑥국은 토속음식의 별미에 든다. 알싸하고 칼칼한 그 맛에다 세발낙지까지 합하면 남도인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맛이 되는데, 대개 서울 사람들은 이 맛에 처음에는 질겁하고 달아난다. 남도인의 입맛은 평야권에서 길러진 보수정신과 함께 이렇게 유별나다.
그렇다면 이 맛을 찾아 지금부터 천년고도 목사골인 나주벌로 내려가 보자. 전통적으로 내려온 나주 집장과 함께 어팔진미(漁八眞味), 소팔진미(蔬八眞味)를 떠받치는 `나주 소반상'도 명맥이 시들하지만 그러나 이 맛들은 지금도 이 지방 사람들의 식담(食談)이나 식요(食謠)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나주 영산 도내기 새암에
상추 씻는 저 큰아야
상추를 씻을라거든
상춧대를 거꾸로 잡아 훨훨 씻소
민족 정서를 잘 갈무리하고 있는 나주 「초벌매기」 들노래 속에 숨어 있는 가사(무형문화재 51호)이지만, 바로 나주 나합이 처녀시절 도내기샘에서 상추 씻던 모습을 상징한 노래다.
일제 식민지 시대만 해도 영산포구에서 배를 타면 배삯은 25전이었고, 목포까지의 긴 물목을 지나는데는 6시간이 걸렸다. 이 긴 물골을 따라온 대표적인 맛을 나타내는 말에 “서울 사람들은 돔배젓은 알아도 홍어맛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얼큰하고 알싸한 맛 때문이겠지만 적어도 이 맛에 길들어져 있지 않은 사람은 남도인이 아니다. 어디 생선뿐이랴, 채소 맛 또한 다양해서 여덟 가지로 분류된다. 소팔진미란 바로 그것이다.
동문안의 미나리, 새월(신월)의 마늘, 흥룡두부, 사매기 녹두묵, 솔개의 참기름, 보리마당(금계)의 얼갈이, 전행의 마늘, 복암의 열무를 이름이다. 또는 조선조 진상품이었던 `월화시' 즉 토종감 홍시를 들기도 한다. 아직도 이 식요는 할머니들 입속에 살아서 “열무김치 들어간다. 아구리 딱딱 벌려라”라고 그 향수를 더한다.
어팔진미로서는 “조금물 뜨랑게” “몽탄숭어” “구진포웅어” “황룡잉어(또는 자라)” “복바위 복어”를 일컫는다. 뱅어는 한겨울 미나리와 만나 “미나리 강회”가 되고 특히 미수(眉첤) 허목(許穆)이 좋아해서 “미수어(眉첤魚)”라고 칭하는 기록도 보인다.
둥띄기 돌띄기 뜯어봐라
청창 황창 배띄기 누비띄기
대족이 이족이 소족이 팔족이
천상목이 걸음걸이 가로걸이
코침이 잘잘……
중중모리 8박자로 이 노래는 영산강 유역에 널리 퍼진 게(蟹)의 노래인데,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 최용호씨에게서 구술받은 것이다. 게의 발은 10개란 것, 눈은 천상목(天上目)이요, 걸음은 가로걸음인데 등때기(껍질)를 까면 맛깔 좋은 청창, 황창이 입맛을 돋군다. 교육적으로도 좋은 식요(食謠)들은 이 지방에 이처럼 널려 있다. 그래서 게는 창자가 없다해서 내황후(內皇后)라고도 부르며 가로걸음이라서 횡횡거사(橫橫居士), 뻘밭을 지킨다해서 서호판관 등으로 불리지만 충청도 지방에 가면 천것의 음식이라해서 송시열(우암) 집안에서는 안 먹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렇지만 CM(commercial)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하고 유행했던 것처럼 게통에 밥 말아먹는 습속이 퍼져나간 것은 남도 음식의 전통이고 `무젓'이라고 해서 충청도에선 게살을 버무려 먹는 것으로 밥도둑이라 했다. 남도에서 홍어가 잔치마당의 일판을 쳤다면 무젓은 충청도 청풍명월로 일판을 쳤던 음식이다.
식담만 해도 “여름 숭어는 개도 안 먹는다.” “겨울 숭어 앉았다 나간 자리 뻘만 훔쳐 먹어도 달디 달다.” “숭어껍질에 밥 싸먹다가 논판다.” “숭어가 뛰니까 전라도 빗자루도 뛴다.” 등은 우리 고유의 식탁에서 흘러나온 얘기들이다. 같은 숭어만 놓고 보더라도 무안지방에서는 1년생부터 6년생까지를 “모치-참동애-댕기리-묵시리-소승애-숭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런 전통 속의 식담이나 음식 노래는 모두 맥이 끊겼고, 조촐하고 맛깔스럽던 어제의 그 맛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3백리 길 영산강 물목이 아닌 섬진강 쪽의 `참게젓' 담그는 법도 그 맥이 끊긴 지 오래다. 지금 참게 한 마리 값은 5천원, 어느 방송사 PD의 고백에 따르면 “멋자랑 맛자랑을 찍고 나서 참게 몇 마리를 사다가 `게젓'을 담갔는데 못 먹고 버렸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이 고을에서 전해오는 가전비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선 참게를 항아리 속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뚜껑을 덮는다. 하룻밤 자고나서 참게들이 토해낸 찌꺼기를 물을 부어 다시 씻어내고 조선간장을 진하게 끓인다. 장이 끓는 동안 쇠고기 적당량을 잘게 썰어 참게들에게 뿌려주면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그 위에다 간장을 퍼붓는다. 이렇게 하여 몇 번이고 장을 떼내어 다시 끓였다 식힌 다음, 다음해 여름에 꺼내 먹는다. 통마늘을 참게와 함께 넣어도 맛있다.
도시락에 참게 한 마리면 거뜬하고 또한 매실(우메보시)을 밥속에 넣으면 도시락이 쉬지 않는다.
이는 다 우리 선인들이 터득한 지혜의 소산이다.
요즘 신세들은 젓가락 대신 포크를 사용하고 맥도날드 햄버거나 피자에 맛이 길들어간다. 민족의 청결성에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 냄새가 푹푹 풍겨야 진짜 한국인의 맛깔이 아닐까.
추자도의 멸치젓‘돔배젓, 고흥의 진석화젓, 흑산도의 홍어젓, 영암의 어란젓, 함평의 엽삭젓, 영광의 굴비젓, 황새기(황시리)젓과 함께 나주 소반에 오르던 20여 가지의 젓갈 맛이 재검토 되어야 하고 참다운 민족의 맛깔이 멋으로 갈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우리 식탁을 개조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이따금 나주에 내려가 나주곰탕을 들 때가 있는데, 그 식탁에서 한담을 나누다 보면 “왜 이리 시끄러워, 영산포구에 젓배 들어왔나!”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때가 있다. 이처럼 삭혀먹는 음식 중 대표적인 것이 `젓갈류'며, 이는 남도 음식 특징 중의 하나며 별미에 든다. 짭짤하고 비릿하고 시큼하고 새콤한 그 맛을 나타내는 형용사만도 20여 가지가 넘는다.
이 맛으로 볼진대 동양에서만도 어찌 중국 음식이나 일본 음식 맛이 우리의 곰삭은 젓갈류를 따라올 수 있겠는가? 또한 곰삭힌 대표적인 조미료로는 간장과 된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 사대부집에 가보면 지금도 이런 장독과 된장항아리, 젓갈단지가 얼마나 정갈하게 장꽝(장독대)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요즘 국토를 여행하면서 내가 만난 새로운 느낌 하나는, 경주 흥륜사 절터 어느 구석진 땅 밑을 파면 그 때 그 절의 스님들이 사전비법(寺傳秘法)으로 대물림 하면서 담갔을 된장항아리나 장독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것이다. 그 된장에다 열목어(熱目魚) 생살을 발라 먹어봤으면 여한이 없다 싶은 것이다.
또 열목어야 서유구가 쓴 『전어지(佃魚志)』 기록대로라면, 백두산 기슭 사람의 출입이 드문 폭포수 아래에는 아직도 그 씨가 마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왜 하필이면 흥륜사 된장에다 열목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흥륜사 된장이 삼국유사의 「김현감호(金現減號)」편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김현과 간통한 처녀가 하룻밤을 자도 내 낭군이라고 그 처녀성을 고집하면서 호랑이로 변신해, 오늘밤 자기의 이빨에 부내(경주) 사람들이 많이 상할 것이니 그 상처에 흥륜사 된장을 발라 주라고 비방을 일러 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김현이 흥륜사 된장을 발라줌으로써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다.
또 1992년 여름, 휴전선 일대를 탐사하다 `두타연' 동굴의 연못에서 1미터나 되는 열목어를 발견, 아직도 이 국토 안에 씨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실로 놀라운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열목어'에 대한 감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봄에 얼음 풀리면 가리라
물 맑은 백담사 계곡
골짝마다 소마다 열목어들이 몰려
소란 피는 광경
그물을 치지 않아도 지팡이로 쳐서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는 열목어
구혼 활동으로 쫓기고 쫓는 대활극
우리 산천 물방울 절로 살아 튀는 소리
들리는 듯 싶다.
눈에는 사혈이 차서 20도 수온에서는
살 수 없다는 열목어
줄기차게 폭포를 뛰어 넘는 모습
봄에 얼음 풀리면 가리라
정선군 남면 낙동리 지장천변
오늘같이 고혈압에 쪄서 눈이 감기는 날은
천년 묵은 흥륜사 된장 한 사발 약으로 차고 가서
골수에 미친 병(炳), 내 고혈압도 끄리라.
-「열목 2」 (1992년 『향장』 권두시)
그런데 불행하게도 열목어는 남도의 산천어가 아니다. 그래서 열목어의 서식지는 낙동강 수계의 상류까지라고 하지만, 우리 산천어(山川魚)의 씨가 말라가는 국토의 효율적 보존은 우리 삶, 즉 음식맛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로 추자도로 헤매는 20년 조력을 가진 나의 낚시도 산천어의 낚시질로 바뀐다면 얼마나 살맛 나겠는가. 다행이 이 처방전으로 요즘 찾아낸 책들이 『토정비결』, 『전어지』, 『자산어보』 등이다.
50년 분단 반세기가 물려준 땅, 열목어가 살아있는 휴전선은 이처럼 싱싱하다. 그곳은 온갖 철새의 보고며 산야초를 비롯한 금강초롱이 철조망에 연등(燃燈)을 켠다. 그리고 멧돼지들이 휴전선에서 이동할 때 겨울 아침에도 천둥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아니 철원평야가 통째로 흔들린다. 그런데도 남북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그곳을 갈아엎어 남북합작 고용창출을 위한 봉제공장을 세우자고 발설했던 한 지도자의 철없음은 얼마나 개탄할 만한 사건인가.
111. 통풍에 얼음이 녹으니 마른 나무에도 꽃이 핀다.
112. 두둥실 보름달이 좋으나 세월에 닳고 나면 손톱 길다.
113. 버들개아지에 앉아우는 저 꾀꼬리, 털깃마다 황금빛이네.
이 괘들은 알다시피 『토정비결』의 감결문이다. 이 말들이 요즘의 어떤 설교나 연설보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살맛나게 한다. 80년대는 삶의 지주가 빠진 시대였으므로 2천년대야말로 이 고전의 문풍이 살아나고 멋과 선을 되살려야 할 시기다. 즉 민족 교양시대, 신고전주의를 부활시켜가야 할 교육입안이 있어야 할 줄 믿는다.
『토정비결』엔 가야할 방위, 먹어야 할 고기, 먹지 말아야 할 고기 등 금기식과 금욕주의의 절제미가 가득 차 흐른다. 여기까지를 아울러야 남도 식탁을 흐르는 풍류의 맥이 될 것이다.
지렁이탕까지 먹고, 피자나 햄버거, 오렌지 문화에 배꼽까지 내놓아서야 되겠는가. 민족 정서와 카페 정서는 구별되어야 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선조 때 간행된 『구황촬요』를 보면, 구황식물로 `쑥'이 나온다. 쑥밭이 된 강토에서 임진해전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쑥'이 곧 구황식이 되어 연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화란 무국적화란 말과는 다르다. 상고시대 흉년을 견뎌내게 했던 이 `쑥물'이 세계 음료인 콜라와 다르듯이 말이다.
지금도 제주도에 가보면 토박이들이 육지인을 나무라는 소리를 듣는다. 겉돌고 간다는 것이다. 즉 자리물회, 옥돔구이, 오분작뚝배기, 토종돼지고기 등에다 3바리를 먹고 가야 제주관광을 제대로 한 것이라고 자랑삼는다. 우선 `자리물회'만 하더라도 그렇다. 시원한 통물에다 날된장을 풀고 자리를 숭숭 썰어서 띄운 다음 미나리, 부추 등 야채란 야채는 다 썰어 넣는다. 이는 모두 가족 협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밥을 말아서 거의 한 옹배기씩이나 먹는다. 이것이 곧 무더위 여름과 흉년을 넘기게 한 구황식품이었음은 두말할 여지없다. 농촌에서 소가 더위를 먹거나 앓다가 넘어졌을 때 날된장을 한 옹배기 풀어먹이면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본 사람은 아마 이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일찍이 최치원은 국유현묘지도로서 풍류정신을 말한 바 있다. 이 풍류도가 곧 민족의 멋이며, 맛은 멋에서 왔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이 풍류도가 로고스적인 측면에 와서 실천적 윤리관으로 나타나고, 파토스적인 면에서는 오늘까지 한국인의 심미적 정서의 표상인 `멋과 한'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민족의 도(道)를 세우는데 있어서, 또 심리적 정서에서 볼 때 자라와 가물치, 노루, 사슴, 호랑이, 여우 등은 분명히 금기식으로 되어 있다.
가물치만 해도 도교신자나 무당들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도홍경』엔 사두어(蛇頭魚)라 기록되어 뱀과 교미한다고 했고, 등판에 일곱 개의 별이 떠있어 밤이면 물가의 버드나무에 올라가 북두칠성을 보고 요배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물풀을 얽어매어 집을 짓고, 반드시 그 물 위의 떠도는 둥지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그래서 봄철이면 이 가물치집을 보고 꾼들이 몰려들어 낚시로 떼죽음을 시킨다. 그리고 1미터가 넘는 것은 `왕치'라고도 하는데 이쯤되면 사나운 물고기로 변신한다고도 한다. 노루, 사슴, 거북 등도 전부 민간 신앙에 깊이 뿌리박은 전설적인 동물들이다.
그래서 우리 밥상은 정갈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것은 곧 민족의 정서고 도(道)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주정신이 깃들어 있고 버릇없는 이 시대와는 달리 까다로운 절제와 검약의 선풍(仙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된장 무침에 통박나물이 나오고, 밥상 가운데 우주의 중심을 떠받드는 고유의 장종지가 나오는 식탁풍경은 분명 남도의 전통적인 뼈대 있는 가문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Ⅱ. 춘설차
- 검약과 절제의 정신
무등산의 정기(正氣)를 머금고 뿌리박은 음식물로는 단연 무등차라고 하는 `춘설차'가 있고 무등산 수박이라고 하는 `푸랭이'가 있다. 둘 다 산의 맑은 기운과 찬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 음식의 꾸미감들이다. 때문에 그 맛은 청랭하며 검약과 절제의 선풍(仙風, 禪風)을 드러내는 향토 미각을 자랑하는 특산품이라고 할 것이다.
천고의 무등산이 수박으로
유명터니
홀연히 `증심춘설'새로
고개 쳐들었네
이 백성 흐린 정신을
행여 밝혀주소서
육당의 시에 드러나 있듯이 무등산이 본적인 무등차는 ‘증심춘설’ 그러니까 입석대와 서석대에 `희끗한 눈이 아직도 남아있을 때' 따낸 순을 말한다. 참새 혓바닥같이 혀를 내민다 해서 보통은 작설차라고 부른다. 춘설차를 얘기하면서 무등산 수박 ‘푸랭이’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궁금할 듯 하여 그냥 몇 줄 요약하며 춘설원으로 발길을 돌리려 한다.
원효계곡 일대인 충효동과 청옥동 일대에서 나는 것이 푸랭이다. 큰 것은 35kg에 달하고 보통은 4∼5kg이며, 당도는 일반 수박이 13∼14도인데 비해 약간 떨어진다. 다 익고 나서도 그 씨가 하얗고, 머리 부분의 양 눈만이 검어 종자가 구별된다. 이를 두고 “흰 씨에 검은 귀가 달렸다”고 한다. 이처럼 속씨를 보고 구분하는 방법 외에 줄무늬와 청록색깔 민무늬를 보고도 구별한다. 그러나 만숙종과 달리 무등산 푸랭이로서의 제 맛을 내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당도면에서 볼 때 14도 이상이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 수준을 못 따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진상품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의 문제에 있어서도 『지봉유설』 『연려실기술』 『도문대작』 『동의보감』 등 그 어느 곳에서도 밝혀져 있지 않고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인 동국 팔도의 소산품에서도 충주를 들고 나주와 광주의 수박도 유명할 뿐이라고만 되어 있다. 일설에는 홍다구가 몽고군을 이끌고 왔을 때 수입되었다고도 하지만, 아프리카가 원산지로 북방경로를 거쳐 전해되었기에 서과(西瓜)란 이름으로 불렀지 전통 토종과일은 아니다. 그러나 유전자 감식으로 `흰 씨에 검은 귀가 달린 수박'으로 고정시켰으니 무등산의 명물 즉 남과(南瓜)의 대표적 과일은 될 법은 하다.
이와 함께 증심계곡의 춘설헌(春雪軒)의 남화(南華)를 개척한 의재 허백련(許百鍊)이 그 화풍을 전수하며, 후학들을 길렀던 곳으로 사시장철 차의 향기가 계곡 물소리에 섞이어 마르지 않는 곳이다. 이름하여 춘설차, 그 향기가 그렇듯이 남도의 미감(味感) 곧 광주인의 심성 또한 그 알맞은 절제와 함축된 단순함, 그리고 그 투명한 맑음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그러움에 있다 할 것이다.
남화의 개척은 허소치(許小痴) 3대로부터 획을 그었는데 소치 허유(許維)―미산(米山) 허영(許濚)―남농(南農) 허건(許楗)으로 이어져 이를 `운림산방'의 맥으로 본다. 소치는 대둔사(대흥사)의 초의선사(草衣禪師) 문하에서 그림을 익혔다. 초의는 무안의 삼향면 출신으로 15세(1800년)에 출가하여 1824년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하고 쇠퇴해 가는 차맥(茶脈)을 중흥시켰다. 50세 되던 해에는 소치가 일지암을 찾아와서는 시, 서, 화, 차를 3년간 익혔다. 초의는 다시 교분이 두터운 추사 김정희에게 소치를 소개시키고, 남종화의 선구자가 되는데 기여했다. 81세(1856년)를 일기로 입적하기까지 『동다송』 『다신전(茶神傳)』 『일지암시』 『일지암 문집』 『진묵조사 유적고』와 백파선사와의 선논쟁(禪論爭)으로 항변한 『사변만어』 등을 써서 남도의 선맥을 바로 잡은 대흥사의 마지막 대종사다.
그는 『동다송』에서 “중국 육안(陸安)의 차는 맛으로, 몽정산(蒙頂山)의 차는 약효로 이름 높다. 그런데 우리나라 차는 두 가지를 다 겸비했다”고 했으며, “늙은이가 젊어지고, 마른 나뭇가지가 되살아나듯이 신험이 일고, 여든 살 노인의 뺨이 홍도처럼 붉어진다”고 그 효능을 말했다.
소치 3대의 방계로 그 화풍과 차의 맥을 증심사계곡으로 옮긴이가 바로 의재 허백련이다. 그래서 광주는 어디를 가나 예향답게 묵향과 전통차의 향이 물씬한 고장이다.
허백련은 1922년 9월 제1회 선전(鮮展)에서 「하경산수」와 「추경산수」 2점을 출품하여 입선과 1등 없는 2등상 등 첫 수상으로 각광받고 중앙 화단에 오른다. 그 후 서울과 광주에서 미술전을 갖고 진주, 거창, 전주, 평양, 신의주, 함흥, 금강산 등지로 유람하면서 한국 자연의 체험을 넓히고, 1928년 금동에 정착하여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하였다. 연진회는 당시 서울에서 이당 김은호를 중심으로 형성된 후소회(後素會)와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해방이 되면서 삼애학원을 설립하고 증심사 기슭에 오늘과 같은 춘설헌을 마련하는데 이어 농업기술학교를 설립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춘설헌이란 당호는 “한 사발 춘설이 더위를 쫓는 한약인 제호탕보다 낫다(一區春雪勝醍胡)”에서 따온 것으로 그 차밭에서 딴 게눈 같은 차를 `춘설차'라고 했다. 그는 수많은 제자를 기르면서 40대 중반에서 50대까지는 의재산인(毅齋散人), 60대에서 말기까지는 의도인(毅道人), 의옹(毅翁)이라는 호를 썼다. 그의 화풍은 전통미의 깐깐한 간결미로 초월적 감동을 주는 데 있다.
지금도 연진회는 맥을 이어 회원만도 70여명이고, 춘설헌 시음장에선 곡우 무렵의 순만을 따서 우전차를 값싸게 제공하고 있다.
음식물이 육체의 기를 괴는 영양을 주로 한다면 차는 정신의 기운을 맑게 씻어서 활력을 주는데 그 참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는 선미(禪味)나 선경(仙境)을 타는 맛과 멋의 운치로서 즐기는 기호식품이다. 그러므로 이는 탁기(濁氣)가 아닌 청기(淸氣)를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차를 드는 격식 또한 까다롭다. 요즘은 기름진 식탁에서 찻잔을 굴리다 보니 오히려 선풍을 타지 못하고 게걸스럽다. 오히려 찬품(饌品)으로 취급하거나 보약 그릇에 받쳐 드는 정도이다.
일본의 낭인(浪人) 정신에 찻잔이 흘러들면 빳빳할 수밖에 없고, 우리처럼 흥바람(선풍)을 타는 민족에게 찻잔이 흘러들면 멋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호떡집에서 찻잔이 흘러들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인은 시끄럽다.
원통법 수사(圓筒法修師)가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서 말했다.
눈이 내리면 세 종류의 승려가 구별된다. 가장 우수한 승려는 승당 안에서 좌선을 하고, 중간쯤 되는 승려는 먹을 갈아 붓을 들고 시를 지으며, 가장 못난 승려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고 떠든다.
아무래도 세 번째 분위에서는 차를 들 수 없을 것 같다. 초발심자경문에도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고 했는데, 이는 타고난 성품 곧 천성이 그만큼 중요함을 이르는 말이다. 차를 대중화시킨다고 우우 몰려다니지만 세속화에 앞서 이 근기(根기)를 먼저 일으키는 것이 참으로 소중하다.
나는 불교 설화에 나오는 금시조(金翅鳥) 알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찻잔을 보면 꼭 금시로 알이 생각난다. 더구나 단정하게 생긴 사람이 둥그스름한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손 안에서 그 금시조 알이 금방 깨질까 다칠까 싶어 조심스러운 모습∼
제석천의 군사가 아수라 군사에게 대패하여 북으로 달려 천궁으로 들어가려 했다. 수미산 밑에 우거진 숲이 있고, 숲속에 금시조 둥우리가 있는데 그 속에는 새끼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제석천은 수레와 말이 지나면서 그 새끼들을 밟아 죽일 것이 걱정스러워 마부에게 말했다. “수레를 돌려라, 어린새끼들을 죽이지 말라.”
그 둥지에는 미처 깨어나지 못한 알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찻잔을 보면 이 희거나 푸르슴한 알이 생각난다. 선정(禪定)이 없이 비린내 나는 식탁이나 다방에서 함부로 전통 찻잔을 굴리는 게 싫고, 내가 지금 이 찻잔을 들 자신이 있나 없나 싶어 대뜸 커피를 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차를,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하나의 음식이라고 말하고 싶은 개념과는 다르다. 차는 게눈이나 작설(雀舌)같은 순을 얻기도 힘들지만 차를 끓이는 물 또한 얻기 힘들다. 『동의보감』에서는 우리 국토의 생명수를 서른세 가지로 분류한 것을 볼 수 있다. 음식에 관한 한 쇠고기의 육질을 분류하거나 맛을 분류하는 섬세함은 어느 민족도 이를 따라올 수 없을 것 같다. 정화수나 바위틈의 솔뿌리를 돌아 나오는 물이 좋은 물이란 기록도 보인다. 차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운남성의 다이족 마을에 가면 환영의 뜻으로 마을사람들이 나와 물을 뿌려댄다. 그리고 나서 먼저 차를 낸다.
①대나무 통에 차를 넣어 불에 굽는다. ②다시 다져서 굽는다. ③차가 다 되면 대를 쪼갠다. ④대나무 물과 찻잎이 엉겨 있는 것을 우려낸다.
이름하여 `죽통차(竹筒茶)'다. 또 댓잎에 솔솔 내리는 이슬을 따서 우려낸 차를 `죽엽차(竹葉茶)'라고 한다. 아예 대나무 잔을 사용하여 끓이면 청죽차(靑竹茶)라 하고, 처음부터 찻잔째 끓여 물 우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으면 `향뢰차'라고 한다. 최초로 유럽의 차인이 된 사람은 영국의 캐더린 여왕이다. 중국에서 가져간 차 잎을 발효로 뜬 것이 홍차였다. 우리는 신라의 선덕여왕이나 또는 흥덕왕 때 대렴이 쌍계사 골짜기에 차 씨를 심었다고도 하고, 남도의 차 선맥은 선승 마라난타의 붉은 지팡이 끝에서 피었다는 설도 있다. 또 백제의 불교 전래지를 따라 들어왔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야고분에서 나온 다기 등을 볼 때, 불교 전래 이전일 것도 같다. 고구려의 고국원왕 때 사무랑 제도는 그 이전의 『양서(梁書)』에 보이는 바 조의선인(?衣仙人)이라는 무리가 산 속에서 집을 짓고, 산신령 체험을 한 것을 보면 불교 이전의 절 같은 선당(仙堂)도 있었던 듯하다. 고려 시대만해도 차를 나르는 담군이 있었고 오늘날 주막집같이 차를 파는 차 마을이 있었던 듯하다. 이규보의 시에서도 다소(茶所)에 다기(茶旗)가 바람에 펄럭거렸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리산 천왕봉인 남악제(南岳祭)의 선도성모제(仙桃聖母祭 : 혁거세 어머니)만 해도 거자수 물을 따 바쳤는데 이는 차 공양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더 깊이 참구해보자면 진다례(進茶禮)에서 그냥 차를 올렸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차를 드는 격식에서 꼭 한 가지가 빠진 듯 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기록에 자주 보이는 매향의식(埋香儀式) 때문이다.
천 년 세월이 가고 또
천 년 세월이 저물어도 썩지 않고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있다
몸도 향기도 고스란히 물에 젖어서
돌아오는 것이 있다
누가 이르기를 땅 속에 묻지 말고
물 속에 묻어라
참귀목 하나가 우물 깊숙이 묻혀서
불타고 남은 진신사리(眞身舍利)
침향(沈香)이어, 침향이어
고요한 시간에 손을 씻고
극락강에 지는 노을 보며 찻잔을 들면
노을도 그새 삼십 년인가 사십 년인가
저 노을도 지고 나면 이 세상 무엇이 남는가
우리 육신 꽃이 되는가 별이 되는가
날로 떡갈나무 잎새들 그림자 엷어지니
타는 듯 끓는 절벽 위에 영혼의 불 켜고 앉아
나는 한밤중 홀로 바위에 칼을 가노라
이는 「매향비(埋香碑)」란 나의 시다.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영산강 하류에 내려가 철암산 지맥에 서 있는 매향비를 보고 깜짝 놀라 쓴 시다.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하여 바닷물과 영암천이 합수진 그 물 속에 참귀목을 묻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금도 중국의 어느 촌락에선 천 년 전에 파 놓은 우물 속에서 이 침향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물을 팠던 사람들은 목질이 단단한 참나무 귀목을 잘라 그 우물 벽을 정(井)자로 쌓았을 것이다. 이 참귀목이나 토막을 물 속에 절여서 향을 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당대도 아닌 천년 후 내세의 복을 벌기 위하여 이런 매향의식을 치렀던 것이라. 아들 딸 손자도 아니고,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를 위해서라니!
참으로 남도인의 지혜가 가상하고 가상하지 아니한가. 또 『세종실록』 4년 2월 병진조에는 나주목사 권극화(權克和)가 팔금도에 들렀다가 고려 목종 5년(1002년)으로 추정되는 석비편(石碑片)을 발견했는데 `위침수향사(爲沈水香事)'라는 글자가 있는 것을 보았고 `향도(香徒) 3백여인'이란 글자가 있는 것을 보면 신안 팔금도에도 신앙결사단체가 있었고 향을 물에 묻는 매향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태종이 천극화를 시켜 침향목을 캐어 오도록 지시한 사실은 조선 초기까지도 이 매향의식이 행해져 왔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팔관회나 연등회에서도 사치를 극한 사람들이 침향을 쪼개어 손을 씻고 향을 사루었을 거라는 뜻이다. 물론 향을 함부로 누출하지 말라는 기록도 보이지만 사치를 극한 고려 무신들에게 이 말이 통할 리도 없었고, 일반 여염집에서도 진다례에 손을 씻는 습속이 있을 것만 같다. 위고금용(爲古今用)이란 옛 것을 오늘 그대로 살려 씀을 이른다. 또 옛 일을 들어서 오늘을 경계한다는 뜻의 `차고풍금(借古諷今)'이란 말도 있다. 맛과 멋의 선풍을 되려면 이만한 격식도 살려 놓음이 필요하리라.
연 잎에 밥 싸두고 반찬일랑 장만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삿갓은 썼다마는 도롱이는 갖고 오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좇나 네가 좇나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40수 중 여름 노래의 한 구절이다. 이런 풍류의 멋,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어찌 한 잔의 차를 논할 수 있으랴.
고즈넉한 가을밤은 춘설원의 찻잎에 이를 괴는 소리를 들으며 무등산 천제봉이라도 한번 올라 볼 일이다. 한 자루의 촛불을 저 천심(天心)에 묻고 침향 한 조각에 손을 씻어 꿇어 엎드린 다음 이 복된 땅이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검약과 절제의 선풍(仙風)으로 다스리는 국토신앙 없이는 오늘을 사는 일이나 미래를 향해 가는 교육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도 명심할 일이다.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가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무등산록에서 호를 아예 다형(茶兄)이라 이름 짓고 시를 썼던 김현승 시인의 「무등차」 전문이다. 누군가 차의 고향 `춘설헌'을 지키며 다손(茶孫)이란 호를 짓고 이제 참다운 차의 길을 걷는 이 시대의 다인이 나올 법도 하다.
송수권 1940년 전남 고흥 출생/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 수상/시집 『산문에 기대어』 『아도』 『우리들의 땅』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언 땅에 조선 매화 한 그루 심고』, 저서 『시창작 체험적 실기론』 등/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본지 편집고문.
첫댓글 고맙습니다... 글 올려 주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