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 우연에서 발견하는 행운
최 상 대 (崔 相 大)
가을이 오면 문득 영화 한 편이 그리워진다. 가을의 계절에 감상하는 음악 한곡이나 영화 한 편은 여느 때와 달리 유난히도 서늘한 감성으로 다가온다. 늦은 밤 무심코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맞닥뜨린 TV영화 한 편에도 우연한 감동으로 잠을 설치기도 한다. 가을에 떠나는 여행 또한 그러하다. 마음대로 일상을 떠날 수가 없을 때, 업무나 행사 일로 떠나는 길에서도 우연히 계절의 애틋함을 만나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계절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낼 여유가 없다 보면 그 우연함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번 건축행사 일정은 경주에서 열린 건축문화제와 인근 사찰 견학이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드넓은 황룡사 터를 지나는 길목에서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진 가을 들판을 만났다. 이른 단풍이 들기 시작한 덕동 댐을 지나는 굽이굽이 길에서는 가을 하늘이 비친 짙은 에메랄드 물빛을 보기도 했다. 건축을 보러 가는 길에 가을을 덤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우연하게도 행사의 특강에서는 10여 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세렌디피티'의 줄거리를 20여분 짧은 시간 동안 감상하는 기회가 있었다. 개봉 당시에 관람 기회를 놓친 영화였기에 뜻밖의 작은 행운이라고 생각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뉴욕의 혼잡한 백화점에서 두 남녀는 우연히 만나게 된다. 각각 약혼자가 있는 그들이었지만 우연한 만남에서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임을 눈빛으로 직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없다. 지금껏 그들이 살아온 이성적 논리를 포기한 채, 본능적인 이끌림을 쫓겨 가는 것이 불안하다. 그러나 그 불안은 운명이란 이름 아래 합리화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는 흔들린다. 5달러짜리 지폐에 날려 쓴 남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책의 첫 장에 써 준 여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이 소중하고도 유일한 단서를 혼잡한 도시 속에 내 던져버리고는 그들 본연의 세계로 돌아간다. 시간이 흐른 뒤, 운명적인 계시와도 같은 우연한 사건들이 주변에서 맴돌며 10년 후, 그들은 우연하게도 재회하게 된다. 운명적 만남으로 시작된 두 남여의 특별한 사랑에 대한 영화는 해피엔드로 막을 내린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말은 생각하지 못한 행운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과학에서 실험 도중에 실패로 얻어진 결과에서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플레밍이 실험 실패로 연구실 창가에 내버려둔 배양균 접시에 먼지가 날아들며 생겨난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명한 것도 바로 우연함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아무렇게나 물감 통을 이리저리 쏟아 뿌려 제작한 듯한 액션 페인팅의 화가 잭슨 폴록의 작품은 우연의 결과로 사람들에게 쉽게 보인다.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화가는 오랜 시간을 심사숙고 결과를 계산하며 작품을 제작한다고 한다. 우연함으로 보이는 이면에는 또 다른 노력과 보이지 않는 고뇌가 숨어 있는 것이다.
가끔씩 돌이켜 보게 된다. 나의 삶은 나의 계획대로 순조로웠는가? 그러나 삶의 과정은 상식과 체계화된 논리, 이상과 경험만으로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우연한 기회에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선회하기도 하고 추락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설명하기 힘든 일이나 합리화를 위해서는‘행운’이나 ‘운명’이란 단어를 가끔 사용하였을 것이다. 과연 나에게 세렌디피티와 같은 생각하지도 못한 행운이 우연히도 나타나기는 했을까?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행운의 여신은 나의 곁을 우연히 스쳐서 지나갔었을까? 우연한 행운을 감사히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지나쳐 흘려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행운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기적 같이 느껴지는 우연한 행운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노력과 준비에 대한 결과인 셈일 것이라고.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며 기원하는 것도, 새해 첫 해를 맞이하며 염원하는 일도, 일상 가운데에서 우연한 행운을 항시 기대하는 마음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행운과 우연을 기대하는 일상은 설레는 마음이다. 세렌디피티의 행운은 바로 나의 주변 가까이에서 항상 머물고 있을 것이며 곧 우연히 조우하게 되리라.
첫댓글 하기사 내 만났것도 .... 바람이지요.. 꽃은 없지만..
역시 사공님다운 수필입니다. 반듯하고 논리정연하고 깊이도 있고 문학성도 있네요. 행운은 기적이 아니라 노력의 끝에서
얻은 선물 아닐까요? 절대로 공짜는 없으니까요. 사공님! 중간중간 영어가 있는데 삭제하면 더 깔끔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없으면 작품에 오롯이 몰입이 될 것 같은데요.
이상하게도 내 컴 화면에는 괜찮은데 글자오류가 발생합니다, 즉각 즉각 신고를 바랍니다.
아이구 한결 낫습니다. 다시 한 번 정독하겠사옵니다. 영남수필에서도 인기 짱인 대표님 생각이 납니다.
내 곁에 있던 행운 발견하지 못하고 ..곧 우연히 만나게 되리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건축가의 내면에 꼭꼭 숨겨진 또 다른 감성을 봅니다. 문득, 영화 한 편 보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