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송아지 숭배냐,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냐!
32장부터 34장에 기록된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성막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와(25~31장) 성막 건축(35~40장) 사이에 기록된 것은 성막이 왜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는 것이 더딤을 보고, 백성들은 초조해하고 안달한 나머지 모여서 불평했고, 아론에게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신상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합니다. 시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르다, 더디다고 판단함으로써 범죄합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기준 대신, 인간들의 요구에 순응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범죄했습니다. 이들이 만든 송아지 신은 율법도, 순종도 요구하지 않는 신입니다. 이 신은 인간을 향하여 죄를 말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죄가 용서받을 필요가 없으며, 인간에 대한 심판과 진노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이들 자신이 원하는 신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예배의 타락을 가져옵니다. 번제와 화목제 등의 형식은 갖추었고, 금송아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고 했고,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까지 했지만, 이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타락의 극치였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도 온갖 종교적인 행위와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내가 원한 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산 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타락상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진노하여 진멸하실 계획을 말씀하십니다(10). 그러나 중보자로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예를 주장하며, 하나님께 용서해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내리지 않기로 하셨습니다(14). 하지만 이것은 모세를 하나님의 행하실 일에 대한 의논 상대로 여기신다는 의미도 아니고, 자비로운 모세의 간청 때문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가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명확한 사실을 본문은 계시합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써주신 두 개의 돌판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 돌판 두 개를 던져서 깨뜨렸는데 이것은 단순히 모세의 개인적 분노가 아닙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이 대면해야 했던 것은 모세가 아니라 두 돌판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돌판을 던져 깨뜨린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할 가치가 없는 백성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이 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사르고 부수어서 가루를 만들고, 가루를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그들이 우상숭배의 결과를 직접 감당해야 함을 보여줍니다(20).
범죄의 배후에 지도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핑계를 대는 지도자 아론을 책망합니다. 백성이 방자한 배후에는 진리의 기준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지도자들의 범죄가 있습니다. 백성의 범죄는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결과를 맺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시대의 교회가 겪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지도자가 말씀에서 벗어나면 지도자의 양들도 벗어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 분별해야 합니다.
범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편에 선 자는 자기 앞으로 나서라고 했고 놀랍게도 레위 자손이 그에게 모여왔습니다. 이들은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범죄한 자기 친구, 자기 이웃들을 살육하였고 그날에 살육당한 자의 수는 3000명이었습니다. 이것은 크고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행해지는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심판하여 죽이는 대신, 삼천 명을 제외한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살리셨습니다. 이 심판을 대행한 레위 사람들은 자기들의 친구, 가족, 이웃을 죽여야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이런 어려운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 다시 공의의 기틀이 세워집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이런 심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사람의 육신을 죽일 수 있는 칼을 주시는 대신, 말씀의 칼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의 칼로 교회는 자신의 거룩을 지켜야 합니다. 죄는 광야교회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언제나 다루어져야 하는데, 다만 물리적 칼이 아니라 말씀의 칼로써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편에서 서 있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십시오. 그리고 말씀의 칼을 분명하게 드십시오. 그 칼로 상대를 치기 전에 자신을 치고, 나로부터 시작해서 공동체의 거룩을 세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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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딤을 보고(1a절)
시내 산 위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과 그 성막에 들어갈 도구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며 그것들을 만드는 재료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에 기록하신 증거판을 모세에게 주셨고, 모세는 그 돌판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시내 산 위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성막을 바로 지을 수 없었습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선포되는 동안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 산에 머무르자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소리가 들렸고, 연기가 가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세에게 부탁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말고, 모세 당신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산 위에 있었고, 산 아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가져오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산 아래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디게 느껴졌습니다. '더디다, 지연되다'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부쉬'는 '부끄러워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표현된 '더딤'은 지나치게 그리고 오랫동안 어떠한 일이 지체되었을 때에 기다리는 사람이 느끼는 '당혹감'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끼는 당혹감이란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시간 내에 내려오지 않았기에 생긴 마음입니다. 앞서 출애굽기 24장 18절에서는 모세가 산 위에 있었던 기간을 ‘사십 일 사십 야’라고 증거합니다. 40일이라는 시간이 백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당혹감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아래에서 해야 하는 믿음의 행위는 '기다림'이었습니다. 산 위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기 위한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기다리려 하지 않습니다. 40일이라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긴 시간으로 느껴졌으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40일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닙니다. 그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며, 먹을 음식과 물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만약 그들이 40일이라는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더라면, 모세가 직접 들고 온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돌판을 기쁨으로 마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0일이라는 시간의 기다림이 백성들에게는 힘겨운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마주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늘 늦게 반응하셔서 당혹한 마음으로 나만의 대책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와 기도하는 것은 참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로 우리의 믿음의 행동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다면 이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내려오기까지 기다리는 믿음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다리는 것에 참 부족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 여유롭게 생각하시며, 한 발짝 늦게 움직이시는 분이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40일 동안 시내 산 위에서 성실하게,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을 모세에게 해주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향해 성실하게,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하는 믿음의 행동이 기다림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기다림’은 참 중요합니다. ‘기다림’은 '순종'의 다른 이름입니다.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우리의 시간에서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위에서 지금도 성실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기다리십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더딤’은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살며, 그 시간을 기다리며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1b-4절)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조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모세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아론에게 찾아갑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백성들의 부탁이 참 당혹스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사람이 만들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까? 아니면 그토록 의지했던 모세가 자신들 앞에 보이지 않아 패닉에 빠져 헛말이 나온 것입니까? 백성들은 모세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 모세가 산 위에서 죽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모세가 산 위에서 죽었기에 깊은 불안함이 그들에게 엄습해 왔고, 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론에게 우리 앞에 보이는 신을 만들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보이는 신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아론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2-4)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은 백성에게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내어 가져오라 말합니다. 우상숭배와 금 귀고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금 귀고리의 상당수가 다름 아닌 우상의 형태로 조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손에서 금 귀고리를 받은 아론은 자신의 손으로 그것들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 조각칼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주권, 리더쉽, 넘치는 에너지와 다산의 상징이었던 송아지 형상으로 만듭니다. 아론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든 것은 당시 근동에 팽배했던 신에 대한 관념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론에 의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찮은 금 송아지로 표현되어 버렸습니다.
시편 106편에서 시인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06:20, 새번역)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이 되신 분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영광이 되시는 분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 아론은 더나아가 백성에게 금으로 된 송아지를 보여주며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선포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하찮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여기도록 하는 죄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는 백성의 요구도 문제였지만,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금송아지를 만든 아론의 행위가 더 심각해 보입니다. 무한하시고 초월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두 눈에 보이도록, 그리고 자신들의 손 위에 두려는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손 위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돌판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고 써주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들어 그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질투하게 하는 행위, 즉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로 표현한 죄악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그의 아들과 자손을 영원한 제사장으로 임명하셨지만, 이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그들이 처음부터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섬길만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론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성막에서 평생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성막에서, 특히 지성소에서 무한하시고 초월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할 때마다 아론은 영광이 되시는 분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어 자신의 손 위에 하나님을 두려 했으며, 자신의 손으로 만든 형상을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 소개한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의 통로 역할을 했던 아론을 은혜의 통로인 제사장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손 위에 두려는 죄를 조심하십시다. 우리의 짧은 경험과 얕은 지식과 좁은 이해의 수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쉽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생각 안에, 우리의 지식 안에, 우리의 손 안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과 내 이해의 수준으로, 내 두 손에 담으려 했던 교만함을 내려놓고, 하나님 손 위에 우리의 인생을 맡겨드리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무안하시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삶에 펼쳐질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다듬던 아론의 두 손을,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두 손으로 바꾸어 주신 것처럼, 죄의 통로가 아닌 은혜의 통로로 주님은 우리를 다루어가실 것입니다.
뛰놀더라(5-6절)
(5-6)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보고 백성은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백성에게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로 지키며 축제를 벌이자'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온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기뻐 뛰놀았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분노하셨습니다. 이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백성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백성의 요구사항은 분명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며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을 추구했고,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펼치는 향락의 축제가 마치 그토록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만족으로부터 얻는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기다려야 하는 기쁨은 이 땅에서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며, 영원한 만족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이 기쁜 소식, 이 은총 아래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출애굽기 32-34장은 성막의 준비와 실행 사이에 있었던 사건으로 이스라엘 자손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가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예배를 받으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언제나 함께하심을 나타내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내산 위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성막과 기구들을 제작하도록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셨으나 산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신을 제작하도록 요청하였고 이에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절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산 위의 상황과 산 아래의 상황이 이루는 대조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구하기 보다 자신들을 위한 신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7-10)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모세와 대면하고 계셨지만,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시고 진노하셨고 모세에게 산에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가 잘못을 바로잡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 이스라엘 자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파기 되었기에 이스라엘 자손은 잘 못 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기다리는 것은 언약을 파기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뿐이었습니다. 이제 언약은 파기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모세의 백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7절 하반절은 ‘네가(모세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모세)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출애굽기 32장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자손의 고통을 보셨고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의 고통을 보았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여러 민족 중에 하나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셨기에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놀라운 신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자유와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로 금송아지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삶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셨지만,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의식이 없었기에 지도자 모세의 부재 속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꼈고 우상을 만들어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부패하였다’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사람을 보내 주시고 좋은 지도자와 동역자를 붙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주셨음에도 이스라엘 자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는 모세를 의지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영적 부패가 진행되어 생명의 활력은 사라지고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8-9)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영적 타락은 세 가지 증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8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을 떠났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시도는 아담으로부터 모든 아담의 후예들에게 나타나는 영적 부패의 증상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위해 예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목적삼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목적삼아 예배하는 공동체로 변질 되었음을 발견합니다. 셋째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태도입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표현은 ‘멍에를 거부하는 황소의 반항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까지 가고 하나님께서 멈추시는 곳에서는 기다리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습관을 기르고 하나님의 군대로서 대장 되시는 하나님의 구령에 맞춰 행군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산 위로 올라간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이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더라도 인내해야 했으나 그들은 기어코 자기들을 위한 신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우리를 부추기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세상은 결코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의 지배를 받고 권력의 지배를 받으며 쾌락의 지배를 받으면서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치워버리면 그 자리가 텅 비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반드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왕 노릇합니다.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로를 제압하셨고 이제 금송아지를 왕으로 삼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내가 하는 대로 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나를 홀로 있게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하셨고 그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우상숭배는 마치 하나님께 ‘우리가하는대로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마치 땅에서 뿌리째 뽑힌 나무처럼 겉으로 보기에 얼마 동안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생명도 소망도 미래도 없습니다. 부패한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뿌리째 뽑힌 나무와 같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 죽음에 이르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다시 민족을 이루고 큰 나라가 되게하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모세의 기도(11-13)
(11-13)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모세의 백성’이라고 표현했는데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주의 백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봐서라도 이스라엘 자손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중재자로서 모세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의 관계의 회복이 중심에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중보기도에 적용해 보면 부모는 단순히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며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기보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간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교우님들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를 드릴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간구할 때 힘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어서 이스라엘 자손이 진멸을 당하게 되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거두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초월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스라엘 자손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중보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 복을 이웃들에게로 흘려보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근거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교우님들과 교우님들이 기도하시는 분들이 이 땅에서 잘 되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은 복은 우리가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복은 그 자체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주시길 기도합니다.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여러 세대를 관통하여 오랜 세월에도 전혀 변질 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하고 썩어 냄새나는 모습이지만, 오랜 시간에도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임을 스스로 맹세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실 것과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이 언약은 대등한 쌍방의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시작되었기에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중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다(14)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시려는 뜻을 돌이키셨고 이스라엘 자손은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보자 모세의 탁월함이 아니라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타락한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보시고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로 아무런 소망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하늘의 지붕을 뚫고 우리에게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시온산에서 그저 말씀만으로 우리의 죄를 탕감해 주신 것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참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그분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도 없지만, 성령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주님을 목적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 보다 앞서지 않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시길 기원합니다.
모세는 시내 산 위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율법과 계명을 기록하신 돌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네 백성이 부패하였으니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로 그들을 멸하겠다는 뜻을 돌이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죄에 따른 결과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산에서 돌아와 증거판을 깨뜨리고 아론을 꾸짖는 내용을 다룹니다.
모세의 귀환과 분노(15-20)
(15-16)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모세는 시내산에서 두 증거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신명기 9장에서는 이 두 증거판을 언약의 두 돌판(신 9:11)이라고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에 들어서심을 증거하는 돌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근동에서 언약을 맺는 두 당사자 간에 약조한 내용을 비석에 새겼던 관습과 유사합니다. 증거판의 크기를 생각해 보자면, 언약궤 안에 넣어야 했기 때문에 언약궤보다는 작아야 했을 것입니다. 언약궤는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와 높이 모두 한 규빗 반, 즉 가로가 대략 114cm에, 세로와 높이는 대략 68cm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모세가 두 개를 한 번에 들고 하산할 정도였으니 아주 크거나 무겁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이 증거판은 하나님이 직접 제작해서 인간에게 주셨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만들어서 주신 물건은 아마도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주신 가죽옷과 이 증거판 외에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판 양면에는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을 쓰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육체로 보내셔서 그 삶으로 하나님의 글을 쓰시게 하기 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함께 하시며 사람과 연결되셨음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이 신비를 들고 산을 내려오는 모세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백성이 함께 목격했는데 그들이 부패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준행하리라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아론은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하나님이 노하셨는가? 온갖 생각이 끊이지 않는 채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17-18)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모세는 산 정상 아래에서 기다리던 여호수아를 만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진중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싸우는 소리라고 합니다. 여호수아 역시 모세를 기다리면서 진중에서 나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분란이 일어나 다투게 되었든지, 누군가가 습격을 해서 전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승리해서 외치는 소리도 아니고 패하여 슬퍼하는 소리도 아니며 노래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고등학생 때 한 번은 친구와 플레이오프전이 벌어지는 잠실 야구장에 갔었습니다. 시작하는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야구장 바깥으로 엄청난 환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홈런을 친 것 같은데 어느 편인지 너무 궁금하고 설레며 야구장에 들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모세는 정반대의 심리로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갔을 터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환호하며 노래하는 소리임을 깨닫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략 짐작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대신에 다른 어떤 대상을 두고 저리 소리를 높이고 있는지 궁금하고 그 부패한 모습이 어떤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19-20)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급한 마음으로 내려와 진에 가까이 오니 금 송아지가 보입니다. 더욱이 그 주위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이 나간 듯 춤을 추고 있습니다. 모세의 분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왔고, 셋째 날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셨습니다. 이후 열두 기둥을 세우고 언약서를 낭독하며 언약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시내산에 올라 사십일을 머물렀습니다. 영광스러운 출애굽 뒤 몇 달도 지나지 않았고, 본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최초의 언약 비문을 품고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언약 대상자인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과 새로운 언약을 맺고 놀자판을 벌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는데 그 놀라운 은혜를 제발로 걷어차 버린 셈이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인근이라는 공간에 함께 있었지만, 이들의 차이는 극명합니다. 누군가는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며 교제하지만, 누군가는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거짓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며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그들이 번제와 화물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노는 모습은 이미 출애굽기 24장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 체결 과정과 외관은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와를 예배한다고 하며 그 절일을 축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섬긴 송아지는 하나님이 아니었고 그들은 결국 자기를 예배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현상이 같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믿는 우리 각자의 예배 현장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배당에 나와서도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내가 믿고 싶은 예수님, 내가 고집하는 믿음 생활,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나를 인도해 줘야 한다는 관념에 빠져버리면 손쉽게 자신을 위한 우상으로 하나님을 대체하게 됩니다. 그 우상은 정말로 다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우선하게 되고 찾고 음미하는 대상이 있다면 아무리 선한 것이어도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즉시 그 증거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립니다. 증거판이 깨졌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백성이 부패하였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오는 동안에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꼭 붙들고 있던 돌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약이 파기 되었음을 확인한 모세는 극도로 분노하여 돌판을 던져버립니다. 거룩한 분노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여기에는 아직 십계명을 받지 않은 상태였던 그들이 그 언약 조건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꾸중하지 않으시고, 이후 출애굽기 34장에서 돌판을 준비해 오라고 하시며 증거판을 다시 만들어 주십니다.
모세는 이제 그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워 버리고 부수어 가루를 만듭니다. 그리고 물에 뿌려 마시게 합니다. 신명기 9장 21절을 보면 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고 합니다. 그 가루를 마시는 형상은 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감을 뜻합니다.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대상이 소화기관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보며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덧없고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얼마나 더럽혔는지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죄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원죄처럼 남아 이후에도 나타납니다. 오백 년도 지난 후에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고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거기에 경배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죄악의 무서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또 금송아지 우상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 우상을 분별하고 끊어내기 위해서는 철저하고 처절한 자기 반성과 자기 부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모세는 아론을 꾸짖습니다.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라고 묻습니다. 아론이 주도적으로 이 죄악을 이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떻게 그 큰 죄에 빠지기까지 가만히 있었느냐는 무서운 힐난입니다. 출애굽기 24장 1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모세는 아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이스라엘은 불과 사십 일만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똑같이 물으실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이 세상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죄악상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아론은 다음과 같이 변명합니다.
아론의 변명(22-24)
(22-24)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아론은 모세를 내 주인이라 칭하며 변명합니다. 이 백성의 악함을 아시오니 노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한 말을 그대로 읊습니다. 백성이 당신을 이 모세라고 경멸적으로 말했다고 고자질하며 그들이 사람 대신 신을 만들라 하기에 금을 빼라 했고, 그저 불에 던졌을뿐인데 송아지가 나왔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했던 변명 그대로입니다. 자신은 책임이 없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핑계를 대는데 선수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악함을 아십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나 혼자 깨끗하고 잘난 척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댈 수 있는 변명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냐는 근본적인 반론으로 귀결됩니다.
부패하였다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지 않는 삶,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정처 없이 거기에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삶은 영적으로 살아 세속적인 가치관의 파도를 거슬러 헤엄치고 다닙니다. 오늘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다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 말입니다.
신명기 9장 19-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듣고 백성도 살리시고 아론도 살리셨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인입니다. 유한 속에서 헤매는 자들을 구할 수 있는 존재는 영원에 잇대어 진리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 뿐입니다. 오늘도 진리의 성령님 가운데 거하며 그 인도를 받아 이 세상의 조류를 거스르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삼천 명의 죽음(25-29절)
모세는 시내산 위에서 40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과 독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었습니다. 그 40일은 모세에게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간이었고, 하나님께 처절하게 매달린 날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써 주신 증거판을 받는 감격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 위로 올라갈 때, 내가 40일 동안 산에 가 있을 것이라든지, 내가 달포가 지나기 전에 내려오리라는 것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있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산 위와 산 아래는 전화 연결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들이 출애굽할 때에 가지고 나온 금붙이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섬겼던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광란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형이자 제사장의 역할을 했던 아론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답변이 이러하였습니다.
(32: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금을 불에 던졌더니 곧바로 송아지 모양으로 나왔다”라고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들으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아론이 자신의 말이 곧이들릴 것으로 생각하고 말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말이라고 여기며 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바르지 못한 것에 미혹되고 나면, 자기 모순에 빠지고서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이 또렷하게 드러남에도 정작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보이스 피싱, 전화금융사기에 걸려 넘어가는 것도 같은 연유인 경우가 많습니다.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방자하다’는 ‘풀어놓다’, ‘내버려 두다’ 등의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도 ‘통제를 벗어나다(get out of control)’, ‘해이해지다(break loose)’ 등으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문란하게 광란의 축제를 벌였고, 그 모습이 다른 민족의 입방아에 올랐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며 출애굽하고서, 스스로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는 어쩔 수 없이 우상을 섬겼다면, 지금은 자원해서 우상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신들을 출애굽하게 해 준 하나님이라며,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습은 마치 줄이 끊어진 연(鳶)과 같았습니다.
바람이 잘 부는 날이면 연이 더욱 높이 날았습니다. 그러면 얼레에 감긴 줄(실)을 풀었다가 감기를 반복하며 연의 높이를 조정하곤 했습니다. 만약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 연이 생각하기를 더 높이 나르고 싶다며, 스스로 연줄을 자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주 짧은 시간 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이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입니다. 연은 그 줄이 얼레에 연결되어 있고, 그 얼레를 잘 다루어야 높이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반드시 연결되어야 바른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끊어진 인생은 궁극적으로 줄이 끊어진 연과 같습니다. 지금 광란의 축제를 벌인 이스라엘 자손은 연줄이 끊어진 연과 같이 하나님 연결될 줄이 끊어진 상태에 있었고, 그럼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지금 자기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인하고,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편에 있는 사람’은 송아지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과 비록 순간적인 실수로 우상숭배에 동참했을지라도 돌이키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27-28)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당시 이스라엘 자손은 시내산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고정된 주거시설의 집이 없었고, 더욱이 마을이나 도시를 형성하는 성문은 더욱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에서 저 문까지’는 ‘한쪽 진에서 다른 쪽 진까지’의 뜻으로, 당시 우상숭배자를 찾아내는 일이 철저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시내산 아래에 머물던 이스라엘 자손, 장정 60만 명, 전체로는 최소한 200만 명 중, 태반이 우상숭배에 동참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3000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했고, 모세의 책망에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했음을 의미합니다.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헌신하게 되다’는 ‘가득 차게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레위 자손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자기 동족을 친 일은 잘못된 감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행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행한 일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런 일을 행한 레위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축복대로 레위 자손이 하나님께 받은 복은 하나님의 집,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사실 레위 자손은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기 전까지는 그렇게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4장에 보면, 레위의 여동생 디나가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세겜성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잘 거동하지 못할 때, 레위는 그의 형 시므온과 함께 세겜성의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후에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유언의 축복을 할 때, 레위는 그 후손을 이스라엘 중에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흩어짐은 이때 하나님의 편에서 서서 행함으로 복이 되어서, 레위 지파는 흩어져서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를 섬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영원한 패배로 가는 길이지만,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은 영원한 승리로 가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기도(30-35절)
모세는 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을 일단락 짓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큰 죄를 범하다’에서 ‘죄’가 히브리어로 ‘하타아’인데, 이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하마르티아’로, ‘과녁에서 벗어나다’입니다.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 삼지 않고, 하나님 대용품(우상)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을 목적 삼는 것입니다. 궁수(弓手)가 쏜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은 화살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화살을 쏜 궁수가 조준을 잘못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탄식하며 말한 것은, 그들이 금붙이로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며, 광란의 축제를 벌인 것도 문제지만, 그런 일을 벌이기 전에 이미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목적 삼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목적 삼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31-32)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슬프도소이다”는 “제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의 의미입니다.
사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이 기도는 우상숭배했던 이스라엘 자손이 드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어버이의 마음이고, 지도자의 태도이며,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가정과 공동체의 어버이이고, 지도자이며, 믿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나이도 상관없고, 배움의 정도도 상관없으며, 소유나 지위도 상관없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왕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온 동생 하나니와 함께 온 사람들로부터 예루살렘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을 불에 탔으며, 사람들은 환난과 능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울고,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느 1: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는 모세와 동일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유다 백성이 귀국한 때와 느헤미야 시대에는 약 10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상황과 느헤미야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기도를 드렸던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영적인 어버이요, 지도자였으며,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느헤미야를 통해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단 52일 만에 완공하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면,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법칙입니다. 유한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질 수도 없고,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만 주님의 보혈을 통해 속죄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해서 속죄의 기도를 드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며,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응하다’는 ‘찾아가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공동번역성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잘못을 따질 날이 반드시 오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만들다(아사)’에는 ‘만들다’ 외에 ‘행하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이 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눈감아 주시지 않고 징계하셨습니다.
자녀가 실수하고, 행동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때 부모는 자녀를 충분히 품어 줄 수 있습니다. 또 자녀가 잘못한 것을 기꺼이 보상도 해 줍니다. 그러나 자녀가 이웃집에 사는 사람을 향해 내 아버지, 내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품어 줄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우상숭배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하는 사람을 징계하셔서라도 돌이켜 세우십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이 송아지 우상숭배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던 것은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셨고, 그들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령님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실지라도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우리도 우리 눈에 보기에 좋은 것, 세속적인 가치관이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눈을 들어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목적 삼고 살아가십니다. 그러면 날마다 성령강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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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장 1-14절은 모세가 산 올라간 이후 시간이 지연되자, 불안해진 백성들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백성들의 허무맹랑한 요청에 아론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2절)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세가 돌아오지 않아 불안과 초조함에 빠져 있던 상황에서 백성들이 불안감을 호소하자 아론은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게 합니다. 아론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든 것입니다. 이는 분명 십계명에서 절대로 하지 말라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되는 일입니다.
(출20:4-5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의 주도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 제단을 쌓고, 그 다음날을 여호와의 절일로 지정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백성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다 같이 축제를 벌입니다.
(7-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불안 속에 있던 백성들의 요청으로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위로하려 했습니다. 성일을 정하고,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과 축제를 버리며 위로합니다. 동시에 모세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모세는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시에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게 예배하고 금송아지가 너희의 신이라”
더 끔찍한 사실은, 그 주동을 다른 이도 아닌 아론이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우상숭배를 주도했습니다. 얼마나 놀랄 일이었겠습니까?
이어 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9-10절)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표현이 있다면, 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던 하나님께서 ‘네 백성’이라 부르셨습니다.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3인칭 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거리를 두신 표현입니다.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 피우는 동물에게 쓰는 표현입니다. 고집으로 인해 불통하게 된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의 관계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 말씀 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 고집불통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11-13절)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정리해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3가지 사실을 확인 시켜 드리며, 중보 하는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신 ’주의 백성‘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로 출애굽한 ’주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애굽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자손‘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실이었습니다. 그로인해 ’나의 백성‘에서 ’너의 백성‘으로, ’너의 백성‘에서 ’이 백성‘으로 멀어져 버리고 깨져버린 관계에서,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14절)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통해 1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에 왜 그토록 분노하셨던 것일까?”
이는 십계명중 제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① 너를 위해 새긴 우상도 만들지 말고
② 피존물 중 그 어떤 것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성경에 약 4차례 나오는 이 표현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보다 앞선 무언가가 있을 때 하나님의 성품을 소개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수아24:19-2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와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마지막으로 한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질투하시는 분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여기서 ‘질투하다’는 의미는 깊은 관심과 뜨거운 열정을 표현 한 것입니다. 불의한 질투가 아닙니다. 한번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새긴 우상’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의 금송아지’인가?
한번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사랑을 식게 하는 ‘나의 금송아지’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 나만의 금송아지를 붙들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잊지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나의 금송아지’를 단호히 부서 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욕망과 미신의 미몽’에서 벗어나 모세처럼 존귀한 인생, 말씀으로 다듬어져 가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금송아지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중보 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불안과 욕망만을 호소하는 기도에서 도리어 그들을 위해 중보 하는 모세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40일간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독대했습니다. 모세는 독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24장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칠 율법과 계명을 내리시겠다는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구체적으로 24장부터 31장에 이르기까지, 증거궤와 성막, 제단과 제사장의 의복 등의 제작방법과 번제와 안식일을 지킬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는 독대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교제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 핵심이 모세의 가슴에 안겨있는, 두 돌판에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하나님을 교제하게 하는 끈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동시간,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금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성일을 선포하고, 번제를 드립니다. 다른 말로, 헌금과 봉사, 예배를 자신들의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열정적인 예배처럼 보였지만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예배 행위가 있어도 예배의 주인,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상은 보이고 들리며 만질 수 있어 예배자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우상은 예배자의 욕망을 부추기고 예배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금송아지의 우람한 힘과 금빛은 이스라엘이 꿈꾸는 이상향이었습니다. 이들의 예배는 온 열정을 다했지만, 이 예배는 아름답지도 감동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욕망의 도가니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여호수아와 모세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 따르면, 여호수아는 전쟁이 난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이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에 익숙했던 여호수아가 농담조로 한 말이 아닙니다. 모세가 승전가나 패전가도 아닌, 우상숭배를 하는 노랫소리로 정리했습니다(18절). 이스라엘의 온 힘을 다했다고 믿는 예배현장의 소리는 전쟁터의 장송곡, 죽음의 비명과 사망의 냄새가 가득한 곳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예배는 생명을 살릴 수 없고, 생명을 죽이는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현장, 아니 전쟁의 현장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던졌습니다. 두 돌판과 금송아지, 두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금송아지는 이스라엘 내면의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두 돌판은 겉으로 보기에 보잘것없으며 거칠고 흠모할 부분이 없습니다. 반면, 금송아지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위용을 자랑합니다. 교우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휘황찬란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굳이 포장하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체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흠모할 만한 무엇도 지니고 있지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상은 말씀 앞에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위용도 화려함도 쓰레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의 권위 앞에 금송아지는 가루가 되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몸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들이 섬긴 금송아지가 몸에 들어가 배설물이 되는 과정은 우상숭배가 덧없는지 알게 되는 특별한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대제사장 아론을 심문하는데, 아론은 잘못을 회개하기보다 이스라엘 백성의 탓을 합니다. 백성이 모아온 금붙이를 불 속에 넣었더니 금송아지가 되어 나왔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합니다. 명실공히 대제사장인 아론이 여전히 미몽 가운데 있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에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25~27절입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심판명령이 시행되었습니다. 성막을 돌보기 위해 부름 받은 레위 자손은 칼을 차고, 자신의 피붙이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는 종교전쟁을 정당화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안에 우상숭배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며, 뿌리 깊은 우상숭배의 잔재를 뽑으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의 사건입니다. 신약시대, 초대공동체가 헌금과 관련하여 죽음을 맞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엄중한 메시지를 받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 내면에도 여전히 죄의 잔재가 남아있기에 성도는 이를 주님과 함께 뿌리 뽑아야합니다.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속죄를 위해 모세는 시내산에 다시 오릅니다. 모세의 발걸음과 기도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31, 32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노령의 모세는 시내산의 한기를 이겨내며, 하나님과 독대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모두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독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사람은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놓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마치 예수님의 기도를 연상시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성도의 기도의 모형이고 목표여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전쟁터와 같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가정, 사회에 전쟁터 같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오늘 이 땅의 현실이 참 아픕니다. 마치 전쟁터 같습니다. 사람들의 내면이 전쟁을 벌이고, 가정과 사회에서 모두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쟁의 피해가 사회 곳곳에 가득하고,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을 종결할 방법은, 모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독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불편한 두 돌판을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나의 가족을 위해, 나의 직장동료와 조국과 전세계와 위정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전쟁이 아닌 주님이 주신 평화가 이 시대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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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집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지지대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책임져 줄 눈에 보이는 어떤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1절 후반부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합니다. 즉, 우상을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은 금을 가지고 송아지 형상으로 우상을 만듭니다.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섬기던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이 송아지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자 그들이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4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우상을 만든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아. 이것은 우상이다. 우리 다 같이 우상을 섬기자’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6절을 보십시오. 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신앙의 형식은 전부 다 갖추었습니다. 헌금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상을 세워 놓고 그 앞에서 한 것입니다. 무서운 것이 우상 앞에 절하면서 우상을 섬기자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앞에서 전부 종교적인 형식은 다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 귀신을 섬기자. 우리 마귀를 섬기자. 우리 우상을 섬기자. 우리 하나님을 섬기지 말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거짓된 것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만듭니다. 자기들의 삶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을 만듭니다.
그것에 대해 7절 후반부를 보면 네 백성이 부패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백성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잊어 버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애굽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누군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자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절일에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립니다. 이것은 주일성수를 말하고 헌금을 드렸고 헌신서약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그냥 화내시는 정도가 아니라 10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멸해 버리겠다는 것은 완전히 파괴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끝을 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백성임을 압니다.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었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헌신도 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진멸해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엉뚱한 것을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인 형식을 빼먹었다든지, 어떤 모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 대상에게 예배하고 헌금하고 찬송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그들이 우상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저지르고 싶을 때는 ‘하나님 저리가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모른 척 해주세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제거시켜 버립니다. 하나님 내가 교회가서 봉사할께요. 예배 드리고 헌금할께요. 설교 듣는 것 동의해 드린다니깐요.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나머지 부분은 모른 척 해주세요. 저리가 계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제거가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자기 마음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알아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자기 욕심대로 자기 성질대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기 입맞에 맞추어서, 자기 성질대로 하면서, 자기는 하나도 변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하나님을 만듭니다.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고 단정짓고 하나님을 더 이상 알아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우상이며 오늘날 성도들이 섬기는 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상을 만드는 이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뇌물로 어떻게 설득이 안됩니다. 내가 이렇게 해 줄테니 당신도 이렇게 해주세요. 이것이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 그 부분만을 뽑아올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보기 싫을때는 우상을 치워 놓아 버릴 수 있습니다. 사업의 번영과 가족들의 건강,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하고 빌고 나머지 자신의 삶에는 우상이 관여하지 않게 합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들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인간들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소나 말이나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단순히 소나 말이나 달과 같은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어떤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나는 우상을 섬긴다’ 라고 말하면서 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절에서 불상에 삼천배를 올리는 사람도 자신이 우상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적을 지갑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우상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인들 동상에 절하고 고개 숙이고 그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우상을 섬긴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이나 명예를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우상을 섬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정당성과 합리화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는 사람도 자신이 우상을 섬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도 전부 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당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큰 신 섬기는 사람들’ 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도 신을 섬기고 우리도 신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난 하나님을 섬겨’ , ‘난 참 신을 섬기고 예배하고 찬송해’ 말로만 이런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대외적으로는 전부 하나님을 섬기고 찬송한다고 합니다. 우상을 섬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실제 내용을 까보니까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심을 오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를 누를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그런 죄악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바른 신앙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해답도 오늘 본문이 가르쳐 줍니다.
7절부터 14절 까지를 보면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바꾸었다. 모세는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화를 내리지 아니하셨다. 이런 해석과 적용은 일부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해석은 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위대한 모세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그의 기도와 간청에 의해 왔다 갔다 한다면 그 하나님의 진노와 화는 너무 가벼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민족 차제를 진멸해 버리려고 했던 하나님의 계획을 모세 한 사람의 간구로 바꾼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과 행하심이 인간의 반응에 따라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하나님께서 한 민족에게 행하실 것을 바꾸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신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가 기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멸당할 것을 피했다. 이렇게 보기 힘듭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내면에서 그런 믿음을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들의 삶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조차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의 내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민족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에 모세의 항변과 기도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14절의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모세의 기도가 엄청나다.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도 바꾼다. 이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어떤 내용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느냐 이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제가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이 백성들을 잘 다독이고 잘 가르쳐서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 이런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기도에는 모세가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 아닙니까’ ‘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하신 하나님 아닙니까’ 이런 내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어기실 수 없으며, 하나님은 실패가 없으신 분 아니십니까? 이것을 모세의 기도를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청난 범죄와 어리석음에도 그 진노를 거두시고 인내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영혼 하나조차 책임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에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죄악을 만약 우리가 뉘우치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용서 받을 수 있다면 왜 예수님께서 죽으셨겠습니까? 우리의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화를 누를 있는 분은 오직 성자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를 수 있는 것도 동일하게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끝까지 인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다양한 질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나의 삶에 하나님을 끼워 맞출 수 있습니다. 불편해진 나의 삶의 모습에 하나님을 내가 소유한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서 우상처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죄악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온 몸을 뒤덮는 두려움에 쌓일 때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저 멀리 던져버리실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내가 잘 나서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아서, 내가 의지가 강해서 나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지 않으십니까? 오직 성자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주셔서 그것으로 나를 하나님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유 없이 나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 아니십니까? 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안 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앎으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약속과 그분의 행하심에 의지해서 우리는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을 변개치 않으시며 인자가 아니시므로 후회함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안 다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함의 결국은 하나님을 빙자한 우상을 만들게 될 뿐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약속과 그분의 행하심에 의지해서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신앙의 광란을 보고 노하여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을 던져 깨뜨립니다. 모세는 범죄 한 이스라엘을 징계합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를 만들어 마시게 하였으며, 백성들을 그릇되게 인도한 아론을 호되게 책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서기로 한 레위자손들과 함께 범죄 한 백성들을 죽입니다. 이렇게 겉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퍼 부었지만,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중보자였습니다.
모세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0)
모세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과 만약 그것이 어려우면 자신의 이름을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주실 것을 요청하는 기도였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1-32)
모세는 목숨을 걸고 자신과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을 맞바꾸고자 합니다. 그의 이러한 자기희생의 간구는 용서의 통로가 됩니다.
모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보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그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변명할 여지는 더 이상 어느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립니다. 그의 이 기도는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이 거나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위한 부모의 마음이었습니다.
남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 특히 심각한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건 기도가 요구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 때 비로소 가능하며, 그 결국은 생명을 살리는 기도가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그 깊은 속마음을 모세는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보낸 시간, 하나님 앞에 머물며 그분과의 깊은 사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멈추고 40일 40야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 말씀 가운데 머물러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전제해야 합니다. 아무리 영적이고 선한 것일 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며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앞에 머물며 그 음성을 듣지 않고 움직일 때 우리는 실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아론이 그랬습니다. 그것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든지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신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을 멈추는 그 날 우리는 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한 것 처럼 하나님 앞에 머무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중보기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생명과 이웃을 살리는 기도가 아니라 욕망의 기도, 분노와 저주의 기도가 되어 오히려 하나님의 참 뜻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두신 이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을 중보기도자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이를 찾으십니다. 가까이는 우리의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 지역공동체, 국가와 온 세계... 온갖 부조리와 죄악으로 무너져 내리는 곳을 막아서서 중보 하는 그 기도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으로부터 시작 되는 것이기에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잃지 말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