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스
이수명
도시가스
안녕하세요
이곳에서
안녕하세요
밤과 낮이 교대해요
안정이 되었나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스를 열었다가 잠그고
잠갔다가 연다.
밸브에서 가스가 새는지 확인한다.
밸브를 잠그고 생각한다.
환기를 시키고
여기에 남아 있으렵니다.
잠이 오면 어떻게 하지?
하품을 하고 나서
잠이 달아나버리면 어찌할 것인가?
바닥에는 배관이 잔뜩 매립되어 있다.
배관 교체를 해야 한다고 한다.
어떤 배관이 좋은지 문의한다.
모든 제품이 최신형이고 다 좋다고 한다.
그것으로 충분해요.
오늘은 모형 자동차 굿즈를 구입한 날이다.
도시가스
짐을 가지고 오지 마
짐을 항상 너무 많이 가지고 오잖아
짐을 둘 데도 없잖아
거리를 걸어가다 말고 같은 시간 같은 길
짐을 내려놓고 우리는 또 말다툼을 한다.
장소부터 말해봐
어느 국수집으로 가는 건지
아까 본 베트남 쌀국수는 사거리 번화가에 있고
베트남 쌀국수는 어디에도 있다. 다음 골목에도
베트남 쌀국수 계속 베트남 쌀국수
어느 집으로 갈 건지
베트남 쌀국수 집엔 사람이 많아
항상 많잖아
테이블이 몇 개 붙어 있는 좁은 집인데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잖아
너는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
여기저기 가장 가까운 데를 검색해보자
네가 좋아하는 숙주나물을 잔뜩 얹어주는 곳
우리는 설익은 나물을 씹으며 평소의 표정을 지을 거야
먼 곳을 바라보며 가능하면 보편적인 표정을
보편적인 나물 앞에서
근데 거기는 자주 갔던 곳이야
자주 만나지도 않았잖아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길에서 맞춰지지 않는 말을 계속한다.
번갈아 대화를 놓친다. 대화가 아니라 애원을 한다.
내일 가자고 했잖아
거기는 아름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잖아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가스통을 싣고 달려간다.
하나 둘 셋 넷
가스통을 너무 많이 싣고 간다.
위험한 오토바이 위험한 가스통
서울은 거의 모든 가구에서 도시가스를 사용한다.
도시가스
썩은 광장을 따라 걸었지
썩은 낙엽 썩은 사과가 굴러다니고
게임을 난 할 줄 모르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너는 말한다. 나는 배워야 한다. 두드리고 계속 두드리는 것을 새로운 공격을 하는 것을 그래. 각오를 다진다.
장갑을 벗고 흰 장갑을 벗고 장갑을 치우고 손을 치우고 배워야 한다.
바닥에 한 사람이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다.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몇 장은 둥근 맨홀 뚜껑으로 굴러가서 뒹군다.
맨홀 뚜껑에는 도시가스라 씌어져 있다. 뚜껑을 열지는 않는다.
가스가 있다. 우리에게는 가스가 있다. 가스는 색깔이 없고 냄새가 없고 무게가 없고 가스는 소리가 없고 보이지도 않고 그러나 가스는 부드럽고 가스는 온화하고 가스는 은은하게 순조롭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가스는 우리를 어루만지고 우리의 생각은 온통 가스로 가득 차있다. 도시가스 보급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산책 같은 건 필요 없다. 산책길에 해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소용없다. 해는 우리가 인사도 하기 전에 빨리 떨어지고
저기 광장의 끝이 벌써 보인다. 끝을 향해 제대로 나 있는 길 반듯한 길을 따라 걷는다. 썩은 광장에 당신은 서 있어요 입에서는 태만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너는 반듯한 이마를 들고 이번에는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화면을 두드리지 말라고 썩은 손가락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사용하지 않는다. 새로 나온 게임을 배우지 않는다.
도시가스
바람 좀 쐬고 올게
무를 사 온다. 뭇국을 끓이자
무를 씻고 자른다. 작은 네모로 잘린 무의 조각들
똑같고 분별하기 힘들고 한입에 먹기가 쉽고
이 집에서 무슨 무를 자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물구나무서기를 5분 더 하고
집 안에 들어온 벌레들이 돌아다니게 내버려두자
발에 밟히는 벌레들 문틈으로 계속 들어와도 신경 쓰지 말자
어디선가 낮은 허밍 소리가 들려오고
시간이 충분하니
응 충분해
올라오는 거품들을 국자로 조금씩 걷어낼 시간
미처 다 보지 못할 시간
무에 난 작은 구멍들을
뭇국이 끓는다.
이 집에서 무슨 무를 끓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가스레인지에서 푸른 불꽃이 올라온다.
가스 불을 세게 했다가 서서히 줄인다.
국이 끓어 넘치지 않도록
무턱대고 이 낮은
단조로운 허밍을 따라가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허밍을 시작하는 거야
허밍에서 허밍으로 스러져 가는 거야
바람 좀 쐬고 올게 가스 불을 약하게 켜두고
식사를 차리는 것을 미루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올게
나무 아래로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여러 앉아 있고
한 환자는 처음 듣는 노래를 부른다
도시가스
평일에는 외출을 해야 해서 안전 점검을 할 수 없어요
평일에는 마트에 가서 커다란 무를 사야 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무를 들고 와서 무를 잘라서 물을 넣은 유리병에 세워 놓느라고 점검을 할 수 없어요
물에 잠긴 무를 보고 있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평일에는 쇼핑 카트를 끌고 외출을 해야 해서 안전 점검을 할 수 없어요
평일에는 점포 이전 후 새로 단장한 마트에 가서 입구 쪽에 커다란 무들 사이를 헤집고 다녀야 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새로 사 온 무 옆에 유리병들을 늘어놓고 어떤 유리병이 적당한지 고르느러고 점검을 할 수 없어요
무를 새로운 형태로 잘라서 물을 넣은 둥근 유리병에 세워놓느라고 점검을 할 수 없어요
어제 물에 잠긴 무 옆에 오늘 물에 잠긴 무를 보고 있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평일에는 아침부터 물에 잠긴 무를 보고 있어서 무에 매달려 있는 짧고 푸른 잎들을 보고 있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도시가스
이제 나는 혼자서 시간을 보낸다.
주머니에는 도시가스 사용 고지서가 들어 있다. 핸드폰은 무음 모드
버스 정류장을 지나간다,
무를 나르는 사람을 본다.
그는 낮에 트럭에서 무를 내려 박스에 담았다가
밤에 박스에서 무를 꺼내 다시 트럭에 싣는다.
낮에 트럭에서 밤을 내려 박스에 담았다가
밤에 무에서 낮을 꺼내 다시 트럭에 싣는다.
길은 낙엽으로 덮여 있다.
은행잎 단풍잎 벚나무잎 미루나무잎 떡갈나무잎을 밟고 지나간다.
썩을 때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아 있어서
가을 잎들이 이곳저곳으로 뒹글고 있다.
낙엽에 발을 빠뜨리지 않고 걸어간다.
오늘은 더 멀리 가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 도시가스공사 고객 센터가 저기 보인다.
그 앞에 멈춰 설 것이다.
잠깐 쉬는 것처럼 서 있다.
이제야 같은 장소에 몸이 놓이면 쉬는 흉내를 낼 수 있다.
가스공사 앞에서 생각한다. 둥글고 매끈한 무
한 다발씩 묶여 있던 무
낮에 무에서 밤을 꺼내 걸어간다.
이 구역에서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좋은 날씨는 아니다.
바람이 나를 쓰러뜨린다.
어디서 불어온 바람인지 모르겠다.
무슨 바람인지도
흑맥주 마시러 가는 오후
흑맥주나 마시러 간다. 수영하는 법을 몰라
기도하는 법을 몰라 머리를 빗다 말고 나가는 오후
단숨에 마시다가
조금씩 홀짝거리러 간다. 구석에 남는 테이블이 있을 거다.
고양이를 데리러 나가면 고양이가 사라지고
인도 가득 뒤뚱거리는 비둘기들을 따라간다.
비둘기가 뒤뚱거렸던 곳에서 비슷하게 뒤뚱거리며
흑맥주나 마시러 간다
메뉴판을 살펴볼 필요도 없을 거다.
기네스가 병째로 나올 거고
귀찮지만 여기 잔이 필요하다고 말해야겠지
오늘은 내내 알 수 없는 나뭇잎들이 근거리에서 따라 오고 나뭇잎들이 모든 각도에서 말라비틀어진다. 오늘이 벌써 지나간 것처럼
실성한 사람을 본다. 모퉁이에 서 있는 사람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을 하고 있다. 여긴 우리 동네가 아니야
우리 동네 다녀왔어요
그는 이상한 유니폼을 입고 있고 즐거운 것처럼 보이고
파란 유니폼을 입어서 즐거운 말을 안 할 수 없고
누구에겐지 또박또박 말하고 있다, 우리 동네는 오랜만에 아주 넓어
그를 지나칠 때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아서
금이 가지 않아서
또렷하게 들린다. 우리 동네에서 뭐 하니
그의 말에 박자를 맞춰 걷는다
그래 우리 동네 호프집에 가서 흑맥주를 마실 거다.
흑맥주를 마시기에 좋은 오후
아무 자리나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성큼 걸어 들어가
혼자 커다란 홀에 앉아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