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영남수필>
바람이 불면
최 상 대
날이 갈수록 뜨거워져만 가는 폭염의 지루함에 가을이 더욱 기다려진다. 달갑지도 않은 가을태풍은 역대 급 폭우 강풍으로 휩쓸고 자나가는 무자비한 폭력이다. 가을결실을 한차례 휩쓸고 갔지만 태풍예보는 연이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태풍은 한반도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TV화면의 피해현장 상처는 참혹함 그대로이다. 벽이 붕괴되고 지붕이 날아가 버린 주택과 공장은 집 안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을뒷산 언덕은 산사태 붉은 토사로 집들이 무너져 내렸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지상의 옷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벗겨 버린 것 같다.
태풍이 지나고 난 뒤, 아파트 주변 하천변 산책길이 궁금해서 나섰다. 채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도 못한 천변 산책로의 많은 나무들이 강한 비바람에 쓰러져 버렸다. 한여름 매미소리 울창하던 벚나무들도, 치렁치렁 가지를 드리우던 수양버들도 누워 버렸다. 흙 속 내밀한 뿌리 속살은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어서 시들시들해져가고 있었다. 어찌하나 염려 속에 몇 주를 지나서 보니, 새로 심은 듯이 작아진 몸짓의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몸뚱이만 남기고 여름동안 키운 곁가지를 말끔히 잘라버린 것이다.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린 나목(裸木) 아래에는 그늘들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내보이기를 꺼린다. 체면과 명예와 신분상승을 위해서 학력 경력 위장의 옷을 입는다. 적나라(赤裸裸)한 그대로 모습이 사람의 체면(體面)인데도 사회적 체면을 내새우느라 체면 위에 겉옷을 입는다. 목욕탕에 불이 나면 옷으로 얼굴만 가리고 급히 뛰쳐나온다고 한다. 태풍이 지나가고 불이 나고 나면 그때에서야 적나라한 체면이 드러나는 것일까.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하여서 나체를 표현하고 몸을 드러내왔다. 유럽 중세도시의 광장 분수대 공공건축물 성스럽고도 근엄한 성당에도 나체의 조각상들이 공공연히 세워져 있다. 인간의 몸을 빌어서 신의 세상을 표현한 작품들이기에 비도덕과 외설에서도 면죄부를 가질 수가 있었다.
로마의 성 시스터나 성당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천정화만 올려보다 보면 관람객들에 떠밀려서 지나가게 된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장면을 그린 ‘최후의 심판’에는 391명의 인물상이 등장한다. 신성한 성당 천정을 가득 메운 알몸 천정화를 교황 율리오 3세가 수정을 요구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거절했다. 그가 죽은 후에서야 트리엔트 공회의 결정으로 주요장면을 옷자락으로 가린 지금의 천정화로 수정할 수 있었다. 27세 때에 제작한 다비드 상은 생식기를 그대로 드러낸 이상형의 청년 조각상이다. 다비드 상은 후일 복제품으로 제작되어 세계의 뮤지엄에 소장되었다. 영국 빅토리아여왕 시대에 런던 뮤지엄에서는 나체작품을 전시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결국 작품의 생식기를 가리는 무화과 잎을 만들어 씌우고서야 전시되었다. 당연히 지금은 적나라한 원래의 모습이다. 미켈란젤로가 살아 있었다면 가려지지 않은 적나라한 그대로 모습이었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가리고 있는 것은 사과나무 잎 또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표현되어 있다. 뱀의 유혹으로 따먹은 선악과는 사과가 아니라 무화과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나체를 가리는 것은 왜 무화과 잎일까? 무화과 잎은 마치 손바닥의 다섯 손가락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일까? 무화과 잎은 창세기 인류 조상에서부터 불후의 명작 은밀한 부위의 밀착을 전담하는 영예(?)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無花果)는 ‘꽃이 없는 과일’ 이름 그대로 무정란이다. 꽃도 피지 않으니 벌 나비도 날아들지 않고 암 수 수정 없이 열매를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열매로 알고 있는 무화과는 과일이 아니라 꽃의 움츠림이다. 세상 밖으로 꽃을 활짝 피워 자랑하지도 벌 나비를 유혹하지도 않고 가슴 안으로만 움츠린 꽃의 결정체이다. 활짝 핀 붉은 꽃은 적나라(赤裸裸)하다. 벗을 라(裸)는 옷 의(衣)에 실과 과(果)이다. 인간의 나체를 옷을 벗은 붉은 과일로 표현하는 것일까? 태풍에도 견뎌서 가을햇살에 빨갛게 익은 감, 발갛게 익은 사과는 바로 적나라하다.
채 이루지 못한 몰래 한 사랑,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채 가슴 안으로 익어버린 무화과의 계절이다. 큰바람(颱風)은 가을을 휩쓸고 간 한차례 폭력이었다. 그래도 가을은 코스모스 흔들리는 산들바람의 계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