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잘 살펴서 바르게 이해해야 잘못된 주관적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은성: 아버지, 오늘은 성경을 읽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더 읽을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 그래? 어디를 읽다가 그랬는데?
은성: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도마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라고 말했잖아요.
아버지: 그랬지. 그러다가 다음 주일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는 말씀을 들었지.
은성: 정말로 도마가 손가락을 내밀어 손을 만져 확인하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 보았을까요?
아버지: 어떤 분은 설교 시간에 그렇게 설교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것을 기록해 놓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그냥 믿음을 고백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성: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아버지: 그렇지. 그래서 어떤 분들은 도마가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엔 나중에 천국에 가서 확인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예수님이 도마가 말할 때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는데도 다음 주일에 만났을 때 도마의 말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도마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선명하게 드러난 주님 손의 상처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았을 것이고, 믿음을 고백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것까지 말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침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은성: 그 말씀이 참 좋네요.
아버지: 네 말을 들으니 성탄절이 가까우면 동방박사 세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과연 그 먼 길을 세 사람만 왔을까 궁금하다.
은성: 그러면 세 사람이 아니었나요?
아버지: 보통 그들이 드린 예물이 세 가지인 것을 근거로 세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이 모두 몇 사람이었는지 기록하지 않았으니까 이 정도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물론 몇 사람인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 먼 거리를 여행할 때에 세 사람만 떠났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함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동방에서는 12라는 숫자를 선호한다. 그러므로 세 명 대신 모두 열두 명이 왔을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이들이 왕과 같은 귀한 신분이라면 종자도 없이 혼자 그 먼 길을 왔을 리가 없다. 적어도 각자 1-2명의 종자 또는 수행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낙타를 여유 있게 데리고 다닌다. 그러므로 동방박사의 일행은 낙타를 포함하여 적어도 십여 명은 되었다고 본다.
은성: 인터넷에서 보니까 2명 혹은 4명, 혹은 8명이 왔던 것으로 그림을 그린 분들이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대요. “동방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마기의 수가 12명이며 서방 교회의 전승으로는 3명인데, 이는 아마도 그들이 아기 예수에게 드린 3가지 선물 ‘황금과 유향과 몰약’(마태 2:11)에 근거한 듯하다.”
아버지: 몇 사람이 왔는가가 중요하다면 반드시 밝혀서 기록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중요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붙들고 생사를 걸면서 다투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먼 곳에서 별의 인도를 받아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왔다는 것과,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것의 의미를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집중해야 할 진리다.
은성: 아버지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요. 더 중요한 진리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아버지: 가끔은 성경을 꼼꼼히 살피지 않다가 자기 선입견에 의한 성경 해석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으니 돈은 나쁜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For the love of money is a root of all kinds of evil. Some people, eager for money, have wandered from the faith and pierced themselves with many griefs”(딤전 6:10). 라고 해서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다. 돈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것이고, 돈을 사랑하고 탐내며, 의지하는 것이 문제이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선하게 사용하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바울 사도는 같은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은성: 어떤 목사님은 ‘청빈(淸貧)’이 좋다고 말하지만 ‘청부(淸富)’ 역시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던데 동감이 되더라고요.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함’의 위험에 대해서만 아니라 부자들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가르치셨네요. 항상 한 부분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겠어요.
아버지: 한 가지 더 볼까? 가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율법에서’가 아니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신 21:22-23).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받은 후에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바르게 지키는 힘을 얻어서 그 법의 온전한 뜻을 기쁘게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은성: 성경을 바르게 읽지 않으면 굉장한 오해를 하게 된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버지: 또 같이 생각해 보고 싶은 성경 구절은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롬 10:16)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10장-특히 18-21절-을 잘 읽어보면 사실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이 성경 구절에 대한 다른 성경 번역을 살펴보았더니 그 뜻이 분명해졌다.
But not all the Israelites accepted the good news.(NIV)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다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쉬운 성경)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좋은 소식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새번역)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Korean Living Bible)
은성: NIV성경 구절을 보니까 학교에서 배운 not all/every에 대한 ‘부분부정’이란 문법이 기억나네요. ‘모두가 ~한 것은 아니다’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이었지요.
아버지: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한 우리말 성경 번역이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지만, 여전히 개인이 읽고 공부하기에는 오해하거나 부분적인 이해만 할 수 있는 곳들이 많이 있어서 좋은 선생님이나 믿음직한 책의 도움이 필요하다.
은성: 제가 작년에 좀 기묘한 경험을 했는데 아직도 개역한글 성경을 고집하는 분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행 4:36)라는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여기 바나바는 ‘권위자’ 즉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그때 영어 성경을 보니까 “which means ‘son of encouragement’”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래서 개역개정을 보았더니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라고 되어 있었어요.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고 했고, 새번역에서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이라고 했으며, 쉬운성경에서는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격려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어요.
아버지: 네가 성경을 아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구나.
은성: 제가 모든 성경을 그렇게까지는 못해요. 하여간 이 성경 구절에서 ‘권위자’를 권위자(勸慰子)로 생각하지 않고 “권위자(權威者)”라고 생각하기 쉬워서 그 분도 순간적으로 잘못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개역개정판」은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바나바”라는 이름이 지닌 뜻을 “위로의 아들”이라고 고쳤다고 하니 앞으로는 그런 실수가 없겠네요.
아버지: 개역한글 성경에는 한자어로 된 말들이 너무 많아서 지금 읽으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더라. 특히 구약성경은 우리말이지만 너무 낯설어서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많이 보이니 자녀들이 읽으려고 할 때엔 더욱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은성: 문제는 그런 경우에 성경의 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짐작을 하거나 아예 성경을 덮어버리고 다시는 읽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 그렇지. 누구나 성경을 쉽게 읽고 배워서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데 성경 번역을 어렵게 해서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번역본들도 있고, 영어 성경도 있으니 힘을 내어서 함께 읽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은성: 영어 성경을 보니까 전후 관계를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것이 훨씬 잘 보이는 것 같던데요.
아버지: 하여간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성경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하기 쉬우니 정신을 차려서 바른 이해를 하도록 기도하고 선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런 일에 나부터 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겠다.
은성: 오늘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