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내 울음에 깨지는 않았나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보니 불안정한 호흡만 내쉴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기를 수십 번. 나는 겨우 서준후의 이마에 손을 내려놓는다. 예상했던 대로 이마가 불덩이 같다. 그 때 알았어야 했는데. 편안해 보이던 네 눈빛은 끝없는 싸움에 지쳐서 체념한 눈빛이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욕실로 가서 수건을 꺼내들고 찬물에 적신다. 꼭꼭 짜서 손에 쥐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니 아까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는 듯한 서준후. 대충 젖은 수건으로 팔과 목덜미를 닦아주고 수건을 이마에 올려놓는다. 집안이 건조하고 먼지가 많으면 병에 걸리기가 쉽다. 수건 몇 개를 더 적셔서 방이며 거실에 걸어두고 용케 빗자루를 찾아 빗질을 한다. 매사에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있는 것인지 청소 상태조차 양호하다. 공부 잘하고 노래 잘하고 학교일 잘하고 청소 잘하고 네가 왜 병이 났는지 알만하다. ……바보야. 청소를 끝내놓고 무언가 먹을 것이 없을까 냉장고를 뒤져보니 냉장고조차 청소상태가 양호하다. 즉,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깨끗하다는 뜻. 나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고 신발을 신는다. 신발장 앞에서 잠시 돌아다본 서준후는 아기자기한 소품들 속에서 자꾸만 혼자만 외롭고 서글프게 보인다……. 먼저 근처 마트에 들러 잣과 잡다한 음료들을 사들고 약국에 들러 해열제를 산다. 성큼성큼 두 개씩 계단을 짚으며 뛰어올라갔을 때 서준후 집의 현관문은 반쯤 열려있다. 여자 신발. 거실에서 발코니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는 사람. 그리 놀랄 것도 없다. 어차피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 안녕하세요. " 양손에 봉지 몇 개를 든 채 등장하는 날 보고 놀랐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소리 언니. " 너……. " 소리 언니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뭔가 아주 언밸런스한 행동이다. 주방으로 가서 조금 전에 사온 잣의 고깔을 떼어내고 있는 내 옆으로 소리 언니가 다가온다. 그 사이 나는 쌀을 빻고 물을 붓는다. 언니가 가만히 내 손목을 잡는다. " 정연아. " " 준후 오빠 많이 아파요. 언니 학교에서 웃고 있을 때 서준후 여기서 혼자 앓았어요. "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는 보통 때보다 한 톤이 높다. " 시간이 필요한 거야. " " 60일이 넘는 시간이 있었어요. 하루에 한 걸음씩만 노력했어도 이렇지는 않아요. " " 나하고 서준후 일이야. " 불린 쌀을 손으로 만져보는데 굉장히 부드럽다. 하지만 내 손은 그 부드러운 쌀을 우악스럽게 쥐고 있다. " 두 사람의 일이라구요? " 글썽글썽 내 눈에 맺혀 가는 눈물을 본 것인지 소리 언니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 언니가 그랬잖아……. 도와달라고. 도와주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만 안보이면 서준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 내 발 밑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료수 캔들이 떨어져 버리고. " 내가 왜 햇빛촌 포기했는데. 내가 왜 코피 쏟아가며 만든 내 곡 연주도 못하고 내려왔는 데. 내가 왜 죄지은 사람처럼 교실에만 처박혀 있어야 했는데! " 아무런 대꾸가 없다. 가파른 고함소리보다 더 위태위태한 침묵. 소리 언니의 가는 팔목이 부들부들 떨린다. " ……사실이야? " 낮은 목소리. 듣기 좋은 목소리지만 많이 쉬어버린 목소리. " 사실이냐고 묻잖아……. "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차마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바닥에 무너지듯 앉아버리는 소리 언니와 그런 소리 언니 앞에 한 쪽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서 있는 서준후. " 안녕히 계세요. " 감추려 해도 반쯤은 울음이 섞인 듯한 내 목소리. 신발이 제대로 신어지지 않아 한 쪽은 구겨 신은 채 급하게 서준후의 집을 나선다. " 거기 서. " 못 들은 척. 오늘 하루만 안 들은 척. 안 들리는 척. " 나 어지러워서 못 뛰어. 그러니까 거기 서라고……. " 32. 사람들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할 때의 그 마음을 절감하고 있는 나. 생각해보면 너무나 창피한 상황이다. 남의 집에 무단침입해서 한바탕 소란만 일으키고 그리고…… 환자를 여기까지 끌고 나오다니. " 이럴 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옆에 앉아 있는 내게도 잔뜩 열이 올라 뜨거운 서준후의 몸이 느껴지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말을 잇고 있다. " 나 때문이었다면 그럴 필요 없어. 너 하고싶은 대로 해. " 어린아이처럼 손을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서준후. 저 사람은 소리 언니를 대신해 내게 사과를 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분노가 스멀스멀 치밀어 오른다. " 오늘… 고맙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 서준후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무엇을 그러지 말라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돌아서는 서준후를 보며 아까부터 움찔움찔 뱉어내지 못한 말을 되뇌어본다. 입 속에서만 맴돌고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을 저버리고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 " 숨어 다니는 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니면 좋아하지 말라는 거예요……? " 웅얼웅얼 작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겠지만 서준후가 느리게 멈춰 선다. 너무 많이 모르는 척, 아닌 척 참고만 지내서 터져 버렸나보다. 물이 흘러 넘쳐 댐을 부수듯 내 속에 쌓여있던 마음들이 흘러서 입 밖으로 쏟아진다. 미처 내가 제어할 틈도 없이 쏟아져 내린다. " 많이 걱정했어요. 많이 보고 싶었구요. 선배님 많이 좋아해요. " 이런 상황에 어이없이 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고. " 많이 라는 말이 세 번이나 들어가네요. 되게 웃긴다. " 가로등 길다란 그림자. 내 얼굴을 가리고 선 까만 그림자. 표정도, 의미도, 감정도 없는 목소리. " 뭘 알아서? 뭘 보고? 너, 나에 대해서 알기나 해? " 냉랭한 말을 내뱉고 있으면서 하얗게 질린 눈가는 선명히 젖어있다. 나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 눈을 쏘아본다. 여기서 지면 안 돼. 너라는 사람 가까이 두는 일은 전쟁처럼 목숨을 거는 일이구나. " 허우대 멀쩡한 거? 햇빛촌 회장인 거? 노래 잘하는 거? 그것도 아니면 모의고사 점수? "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서준후의 말이 맞다. 난 서준후의 저런 모습을 좋아해. 뭐든지 완벽한 모습이 좋았어.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있어 서준후. " 시간 낭비하지 마라. 지금 네가 좋아하는 모습들 언제까지나 영원한 거 아니야. " 내 눈앞으로 훌쩍 멀어지는 그림자. 길다랗고 야위어 보이는 까만 그림자. " 거절을 해도 꼭 그렇게, 냉정하게 거절해요 선배는. " 이번에는 멈춰 서지 않는다. 이젠 작게 웅얼거리지 않을 거야. 나도 크게 말할 수 있어. 말하지 못해서 입 다문 건 아니야. " 그래요. 나 선배 그런 모습 좋아해요. 근사해 보였다구요. 그런데 선배가 모르는 게 있어 요― 내 말 들리죠― 듣고 있죠? " " …… " " 허우대 멀쩡한 거 10년만 지나면 변해요―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도 많아요― 공부 잘 하는 사람은 더 많아요― 하지만……. " " …… " " 먹지도 못할 얼음포도를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난생 처음 보는 아이 때문에 차 도로 뛰어드는 사람은 별로 없다구요―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대신 야단맞아줄 사람도 흔치 않아요― 그 사람 때문에 평생 무거운 누명 뒤집어 쓴 채 살려는 사람도 적어요. " " …… " " 힘들다는 내색 대신 더 열심히 사는 사람은 정말이지 그리 많지 않다구요―! " " …… " 점점 숨이 차 오른다.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혼자 야호∼를 외치듯 내 목소리만 크게 메아리 쳐오고. " 아프지 마세요―아프면 말해요. 소리 언니한테 말해도 되잖아요! " " …… " " 아프고 힘들 때마다 괜히 눈 찡그리지 마세요―버릇 돼서 예쁜 얼굴 다 구겨진단 말이에요!! " 돌아보지 않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먹 하나 하나 아프도록 세게 쥐고 있는 오빠가 보여요. 너무 오래 걸렸죠. 언니와 오빠, 그리고 지은초 사이의 상처. 혼자서 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터트려 소독해줄 의의도 있어요. 나는 깔끔하게 의사 역할만 해낼 자신도 있어요. 딱 그 것만 할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견뎌요. 좋아해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33. " 햇빛촌에 들어오고 싶습니다. " 거의 전 회원이 모인 자리였다. 서준후를 비롯한 낯이 익은 선배들과 내 친구들, 같은 1학년 동기들. " 그건 안 돼. " 은영 언니의 말투는 단호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므로 난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 여기 들어올 자격 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 내 말에 술렁이기 시작하는 이 곳. 고개를 처박고 있는 소리 언니를 곁눈질로 살펴보던 은영 언니가 다시 입을 연다. " 너만 특별 대우를 할 수는 없어. 지금껏 햇빛촌 활동 중간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어. " " 그럼 오늘 중간 입성자 하나 만들죠 뭐. " 겁도 없이 끼어 든 현빈이의 목소리는 명랑하다. 은영 언니가 힐끔 눈치를 주자 딴청을 피워대는 현빈이 녀석. " 넌 연주를 끝내지 않고 도망갔어. 설사 우리가 허락을 해서 지금 네가 햇빛촌 회원이 된다고 해도 교내 여론이 시끄러울 거야. " 까맣고 윤기 나는 긴 생머리를 가진 은영 언니는 머리칼만큼 까만 눈동자로 나를 응시한다. " 그런 건 상관없어요. " 후 하는 소리와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른 선배들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은영 언니. 다른 선배들에게 물음을 구하는 듯 하다. 왜 은영 언니가 악역을 떠맡고 있는 지는 잘 안다. 소위 "햇빛촌의 중앙" 이라고 불리는 선배들 중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을 빼고 나면 남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 그 때, 계속 다른 곳만 응시하던 태윤 선배가 천천히 나를 바라보고 난 애써 침착하게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약간 거친 동작으로 서준후의 손에 쥐어진 종이 한 장을 빼내든 태윤 선배. " 이 건 햇빛촌 최종 합격자 명단이야. 이번 1학년은 한 명 부족하다는 거 알지? 나머지 그 한 명이 정연이었어. 그러니 아예 자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래서……. " 또박또박 알아듣기 쉽도록 끊어지는 태윤 선배의 목소리는 왠지 차갑다. 그렇다고 얼음 같은 살벌함은 아니었지만 초가을 저녁 내리는 비처럼 서늘하다. " 과반수 이상 찬성이면 중간 입회하는 걸로 하자. " 2/3 찬성이 아닌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라면 좋은 조건인데 왜 이렇게 서운한 건지. 전혀 웃지 않는 태윤 선배의 얼굴이 낯설어서 그런가. 현빈이와 세진이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오물오물 잘 될 거라고 말해준다. 여기 모인 사람이 서른명쯤 되어 보이니 적어도 15표는 나와야 한다는 소리. 찬반 투표를 거수로 정하기로 하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1학년은 세진이와 현빈이가 어떻게 구슬린 건지 찬성에 손을 들고 대부분의 선배들은 반대에 손을 들었다. 하지만 예외로 현우 오빠와 태윤 선배는 찬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은영 언니가 숫자를 세어보고 화이트 보드에 써내려 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 뭐야 이거. 15대 15잖아. " 은영 언니는 자신이 손을 들지 않은 줄 알고 다시 투표를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서준후는 찬성에도 반대에도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가부동수(可否同數)일 경우 국회에서는 부결된 것으로 보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도 없다. 충분히 고민을 하고 있을 서준후를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 왜 고민이 안 되겠어. 내가 소리 언니를 괴롭히는 게 될 수도 있는데 네가 왜 고민을 안 하겠어. " 준후 오빠 왜 손 안 들어요? " 세진이가 작은 목소리지만 또렷이 말하자 일제히 서준후에게로 쏠리는 시선. 아주 살짝 찡그리는 듯, 어떻게 보면 웃는 듯 보이기도 하는 얼굴로 서준후가 일어서고 동시에 소리 언니와 나는 서준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 어떻게 할거야 서준후? " 은영 언니의 재촉에 서준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렵게 입을 연다. " 찬성이야. 환영한다. 은정연. " 기묘한 엇갈림. 고개를 돌려버리는 소리 언니와 두 손을 꼭 쥐고 발끝을 쳐다보는 나. 옆에서 요란스럽게 하이 파이브를 해대는 세진이와 현빈이가 보인다. 미안해서 주는 기회. 내가 아닌 소리 언니를 위해 주는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기회. 이상하리만큼 침착한 서준후의 눈동자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네가 아닌 윤소리를 위한 기회라고. " 정말 잘됐다∼꺄∼ 다 내 덕분인 줄 알아! " 하교 길. 오랜만에 세진이와 현빈이와 같이 걸어가는 널따란 운동장. 현빈이는 서연고 역사상 최초 햇빛촌 중간 입성이라는 대형사고(?)를 친 것이 뭐 그리 유쾌한지 계속 기분이 좋다.『come up』……true & fact - by. 잘나가는주스. " 오빠. 여기 현빈이라고 현우 오빠 동생이야∼ " 현빈이와 세진이에게 한 턱 내기 위해 양손에 잔뜩 먹을 것을 사들고 온 우리 집. 은재연은 부스스한 새집 머리를 하고선 멀뚱히 서 있다. " 현우랑 빼다 박았다는 말은 욕처럼 들리겠지? " 이쯤하면 가만히 있을 현빈이가 아닌데 이상하게 조용하다. " 꺄∼ 가까이서 보니까 더 멋있네요 오빠! " 그럼 그렇지. 역시 현빈이다. 처음 보는 우리 오빠 옆에 붙어서 재잘재잘 한시도 쉬지 않는 무적 현빈이. 세진이와 나는 킥킥대며 저녁을 준비한다. [ 오빠 여자친구 있어요? ] [ 없어도 있게 할거야! ] [ 당장 그 여자 갖다버려요. ] [ 나 머리 안 감았어. 가…가까이 오지마! ] [ 머리 따위 겁나지 않아요! ] 오호라. 저런 것이 천생연분이라고 하는 것이군! 닭도리탕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데 설탕이 조금 모자란 것 같다. 싱크대 구석구석을 뒤졌건만 보이지 않는 하야디 하얀 나의 설탕. " 세진아, 나 설탕 좀 사올게∼ " 썰어놓은 파와 양파를 조심스럽게 냄비 속으로 집어넣던 세진이가 다녀오란 손짓을 한다. 현관문을 나서니 어느새 바깥이 어둑해져 있다. 요란하고 말 많았던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나는 땀 때문에 꼬질꼬질 해진 천 원짜리로 설탕 값을 내고 편의점을 나선다.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난 잠시 내 방 창가 쪽을 바라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 거의 마무리된 닭도리탕을 식탁에 올려놓고 다정히 둘러앉은 우리 네 사람. 현빈이는 우리 오빠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오빠는 내가 햇빛촌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조금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보글보글. 풍성하게 거품을 내고 지금은 그릇을 닦고 있는 중. 내 옆에서는 현빈이가 세찬 물로 끊임없이 물방울을 튀겨가며 그릇을 헹구고 있다. 쉴새없이 오빠 얘기만 물어보던 현빈이가 잠시 그릇을 헹구는 것을 멈추고 목소리를 낮춘다. " 너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봐라. 응? 둘 중에 누구니? " " 뭔 말이야? " " 시치미 떼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거야? " 현빈이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보여서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무엇을 묻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 서준후랑 정태윤이랑 둘 중에 누구냐구. 이제 두 사람 다 수없이 볼텐데 어쩔 거야? " 서준후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와주지 않는다. 가슴이 갑갑하다. 왜 난 쉽게 그 이름을 말할 수가 없는 건지. " 너 이제 웬만하면 교통정리 좀 해라. 답답하게 굴지말고. " 교통정리. 누군가에게는 빨간 불을. 누군가에게는 파란 불을. 하지만… 핸들을 꺾으면 바로 유턴 되는 자동차처럼 내 마음이 쉽게 돌아서지를 않아. 돌아서서도 자꾸 다음 신호를 기다리게 돼……. 거실 TV 앞에서 재연 오빠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세진이를 바라본다.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한결같았던 내 친구. 비밀을 갖기로 했던 시간을 지나 이렇게 우리 함께 있는데…… 난 여전히 비밀이 많아 그렇지 세진아……. " 나 잠시만∼ " 짐짓 유쾌하게 말하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뒤진다. 여전히 내 서랍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태윤 선배의 베이지 색 니트. 고집스럽게 나는 시치미를 떼고 선배의 니트를 돌려주지 않았다. 마치 내게 없는 냥. 아직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각. 현빈이와 세진이를 보내기 위해 나는 버스정류장에 서있다. 현빈이는 우리 오빠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계속 우리 집을 쳐다보고 나는 다른 이유로 우리 집, 정확히 내 방 창가 쪽을 바라본다. 날 믿어달라고. 너를 서운하게 만들었던 시간. 이젠 다시 되돌려야 하겠지? " 세진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내 말이 끝나자마자 현빈이와 세진이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던 현빈이는 대충 알겠다는 듯 헛기침을 해대며 딴 곳을 바라보고. " 응? 무슨 말인데? " 바람결에 흩날리는 긴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세진이가 투명한 목소리로 묻는다. " 나 태윤 선배 좋아했었어. 그래서 너한테 말하지 못한 일들이 많아. " 나는 아주 짧게 웃었다. 머리칼을 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는 세진이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웃지 않으면 울 것 같아서 그 애의 눈을 바라보며 난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34. " 나 괘씸하지. 네 맘 다 알면서……. " 아예 고개를 돌리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 현빈이의 등만 말없이 주시하는 세진이. 희미한 불빛만으로는 세진이의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다. " 지금 내 쇼핑백에 들려있는 거 선배 옷이야. 그리고 지난번에 선배가 집으로 나 찾아왔을 때……. " " 나 알아. 다 알고 있어. " 현빈이가 몸을 돌려 놀란 눈으로 세진이를 빤히 바라본다. 세진이는 그런 현빈이를 바라보며 여전히 말갛고 투명한 목소리로 다 알고 있었어, 라고 말한다. " 내가 왜 몰라……. 정연아, 왜 내가 너를 몰라. " 세진이의 눈동자는 파랗게 젖어있다. 터질 듯한 심장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는 내 앞에 가까이 와 세진이는 내 어깨를 두드린다. " 저번에 우리 까페에서 마주쳤던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빠가 다 얘기했었어. " 소나기라도 내려줬으면 좋겠어. 너무 창피해서 나 울 수도 없는데 비라도 내려줬으면 좋겠어. " 내가 아니면 너도 오빠도 그렇게 마음 고생 안 했을 텐데. " 세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게 와서 내 어깨를 안는다. " 괜히 나 서운해서 너 피했었어. " 세진이는 조금전의 나처럼 짧게 웃고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언제부턴가 학교를 갈 때도 돌아올 때도 먼저 가버렸던 이유가 거기에 있던 거였구나. 조금 달라 보이던 네 모습 그런 이유였구나. 얼마나 미안하다고 말해야 내 마음이 전해질까. 너한테 들릴까. " 내가 없었다면 너 어쩌면 준후 오빠가 아니라 태윤 오빠 선택했을지도 몰라……. " 거짓말처럼 그 순간 세진이의 눈에 투명하게 고여있던 눈물이 떨어진다. 끝내 세진이를 울도록 한 내가 미워 나는 그 애와 눈을 맞출 수도 없다. …세진아. 너랑 나는 참 닮았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비슷해서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그랬잖아. 그래도 후회 안 하지? 이렇게 아프지만 우리 닮아버린 거 후회 안 하는 거지? 그러지 마. 우리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눈을 찡그리고 바보같이 헤헤거리며 웃는다. 밤 공기가 아직은 기분 좋을 만큼 시원하다. 세진이도 나와 똑같이 눈을 잔뜩 찡그리고 애써 웃는다. " 둘이서 아주 쇼를 해라 쇼를! " 괜히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현빈이가 우리 둘을 차도 쪽으로 밀어버린다. 밀려나지 않으려 비틀비틀 손을 내젓다가 동시에 웃어 버리는 우리 세 사람. 잠시 뒤 버스가 도착하고. 세진이는 버스에 올라타면서 나를 힐끔 바라본다. "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 아주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고 돌아서는 세진이의 표정이 환하다. 조금씩 작아져 가는 세진이의 얼굴. 다른 사람들 모두가 날 다그치고 내게 화낼 때 단 하나 변함 없던 얼굴. 오늘, 날 대신해 먼저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해주던 세진이의 얼굴이 점점 더 작아진다. 나는 내 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을 잠시 바라보고 핸드폰을 꺼낸다. 교통정리. 누군가에게는 빨간 불을 누군가에게는 파란 불을. 조금 어렵더라도 완전히 돌아가자. 이미 파란 불일 때 다른 곳으로 건너가 놓고서 다음 신호를 기다릴 필요는 이제 없잖아. 5분. 10분. 15분을 조금 넘게 기다렸을 때 내 앞으로 흰색 EF 소나타 한 대가 멈춰 선다. 그리고 운전석 쪽의 창문이 소리 없이 내려가고. " 와 줘서 고마워요. " 내 목소리는 마음과 다르게 메마르게 서걱거린다. 선배는 대답 대신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귀엽고 작은 곰 인형 하나. 상표가 적힌 티슈 한 통. 연꽃이 달린 염주. 선배의 차안은 지극히 평범하고 깨끗하다. 승용차에서만 맡을 수 있는 희미한 가죽 냄새. " 선배, 무면허 운전 아니에요? " 선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피식 웃는다. " 미국에서 운전했었어. " 옆에서 보는 선배의 얼굴은 선이 곧고 단정하다. 그 단정한 선이 만드는 미소는 가끔 서글퍼 보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따뜻한 웃음이었다. " 이거 돌려 드리려구요. " 선배는 물끄러미 내 손에 들려있는 니트를 바라보고 짧게 한숨을 내쉰다. 잠시 선배의 손이 내 손바닥을 스친다. 이제 그 베이지 색 니트는 선배의 무릎 위에 놓여있다. " 마음대로 사라졌다가 마음대로 나타나고. " 그건 힐책하는 말투도 비난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슬퍼 보일 뿐. " 이제 햇빛촌 활동하면서 수도 없이 마주칠텐데 우리 잘 지내요. " 나는 손톱으로 손바닥에 빨갛게 자국이 생기도록 세게 눌러댄다. 빨갛게 부풀고 있는 곳은 손바닥인데 심장이 아프다. 심장이 자리하는 곳이 부풀어오르는 듯 저려온다. " 네가 원하는 게, 나한테 바라는 게 그거야? " 핸들 쪽으로 몸을 숙이며 선배는 느릿하게 말했다. 마치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잡담을 나누듯 반쯤은 맥이 풀려버린 목소리였다. 나는 또 한 번 손톱으로 손등까지 생채기를 내놓고 그렇다고, 짧게 대답한다. " 너는 아주 조금도 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지 않는구나. " 다시 몸을 일으켜 선배는 나를 바라보았다. 선배. 선배. 선배. 왜 내가 선배에게만 오빠라 부르지 못하는지 아세요. 세진이가 선배를 오빠라고 불러요. 선배 하나만 보고 있는 내 친구가. 그래서 난 그렇게 부를 수가 없어요. 그럴 수가 없어요. " 선배가 친절해서 나도 모르게 기대고 의지했나 봐요. 미안해요. " 날 밀어내지 않고 안아주던 선배가 고마워서 그 날 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고. 그저 고마운 마음만 가지려 나는 밤새 내 마음과 싸워야 했다고. 고집스럽게 돌려주지 않은 선배의 옷처럼 내 마음이 거기 있는 거라고.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얼마나 하기 싫었는지. 그동안 미안했다고. 모든 게 다 고마웠다고.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까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한여름, 어울리지 않게 얼어버린 내 볼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와 닿는다. " 너 미안할 거 없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마. 그럴 거 없어……. " 희미하게 비누 향이 남아있던 손가락으로, 내 곡을 연주해주던 그 손가락으로 차가워져버린 내 눈 주위를 가볍게 눌러주고는 그저 힘겹게 웃는 이 사람. 말갛게 고여가던 눈물이 선배의 손가락 때문에 흐르지 않고 다시 내 심장을 타고 좀 더 깊고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 조심히 들어가. 잘 자고. 내일부터는 웃으면서 보자. " 단정하고 선이 고운 선배의 손가락이 내게서 멀어져 다시 베이지 색 니트 위로 돌아가고 익숙한 동작으로 시동을 건다. 선배는 자신의 손가락 끝이 파랗게 물들었다는 걸 알까. 내 눈에서 배어 나온 건 눈물이 아니라 선배가 주었던 따뜻한 파란색이었다는 걸 알까. 댐을 부수고 터져 버리듯이 서준후에게 쏟아지던 내 마음과 달리 메말라버린 스펀지가 젖어가듯 천천히 차 오르는 내 마음을 알까. 나는 느린 동작으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선배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은 어쩐지 세진이와 닮았다. 잘 할게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모두가 아프지 않게 태양이 떠오를 거예요.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아 마무리 되어가겠죠. 꼭 지켜봐 줘요. 꼭. 35. 은영 언니가 예고했던 대로 학교는 시끄러웠다. 재연 오빠의 이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귀에 들려왔고 내가 만든 피아노 곡이 표절이라는 둥 내가 서준후의 여자친구다, 아니다 정태윤의 여자친구다. 나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교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사이 교무실에도 불려가 선생님들께 두 번, 세 번 사정을 말씀드려야 했다. " 얼른 이 자료 다 준비해야 하는데, 아우 힘들다. 힘들어∼ " 햇빛촌 써클룸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을 두드려 대며 현빈이가 큰 목소리로 말한다. 1학년 전체 발표 모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각자 분담한 만큼의 과제를 안고 고민을 하는 햇빛촌 동기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햇빛촌 써클 룸에서 햇빛촌에서 해야 할 일을 준비하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소원하던 일이었으니까. " 청소 좀 해 놓으라고 했더니. 이것들이! " 벌컥 열린 문 사이로 짧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운 듯 비명을 질러대는 현우 오빠. 그에 질세라 현빈이는 테이블 위 종이 뭉치들을 더 어질러 놓는다. 점점 얼굴이 붉어져 가는 현우 오빠 뒤로 무언가를 양손에 들고 서 있던 다른 선배들이 들어온다. " 와― 감사합니다. " 동기들의 함성소리에 파묻히며 요란하게 등장한 흰 봉지 속에는 갖가지 음료와 과자들이 수북하다. 빙그레 웃으며 봉투를 내려놓은 2, 3학년 선배들의 얼굴 속에서 준후의 얼굴도, 태윤 선배의 얼굴도 보인다. " 방학하면 가까운 섬으로 봉사활동을 갈까 해. " 요 근래 들어 가장 활기차게 느껴지는 서준후의 목소리였다. 벌써 여름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야흐로 여름도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나 할까……. " 박현빈, 이거 책임지고 다 치워놔. 알았지!!! " 조금 전의 복수를 하려는 듯 현우 오빠가 소리를 지르자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현빈이. 세진이와 나는 킥킥대며 웃다가 현빈이에게 손등을 꼬집혔다. " 이세진, 은정연. 니들은 이거 다 도와주고 가! "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이건 현빈이의 목소리다. 서준후는 몇몇 다른 선배들과 써클룸 안 쪽에 있는 회의실에 들어가 버리고 현우 오빠와 태윤 선배는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멋지게 퇴장한다. 나는 현빈이에게 눈짓을 하고 얼른 현우 오빠를 따라 나선다. " 현우 오빠,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잠시 멈춰선 현우 오빠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 뭔데? " " 혹시 최성우 전화번호 아세요? " 현우 오빠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날 빤히 바라본다. " 최성우? 서진공고 최성우 말하는 거야? " " 네. 맞아요. " 현우 오빠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계속 날 빤히 쳐다본다. " 알면 좀 가르쳐 주지 그래? " 조금 떨어져 있던 태윤 선배가 현우 오빠의 어깨를 툭 치며 가볍게 말하자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우 오빠. " 아니, 가르쳐 주는 거야 쉬운데 정연이 네가 성우 전화번호가 왜 필요해? " " 꼭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오빠. " 어렵사리(?) 번호를 알아냈건만 최성우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내가 왜 최성우를 만나려 하는지에 대해서는 현빈이도 조금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이야기의 서론에 해당하는 대략적인 것만 알려줬을 뿐 더 이상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현빈이는 지은초의 기일이 9월 즈음이라고 했다. 현우 오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시간은 9월 전까지다. 아마도 9월이 다가오면 서준후와 윤소리 사이의 상처는 더 심하게 곪아갈 테니.『come up』……true & fact - by. 잘나가는주스. 여름이 깊어지면서 장마가 시작되었다. 오후 5시 밖에 되질 않았는데 세찬 빗줄기가 햇빛까지 가려버려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따라오겠다던 현빈이를 돌려보내고 난 혼자 서진공고 앞에 서 있다. 지나가는 아이들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하지만 그 많은 아이들의 얼굴 속에서 최성우의 얼굴은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제일 아끼는 데님 소재의 운동화가 비 때문에 눅눅하게 젖어갈 무렵 저 멀리서 하나 같이 교복 타이를 하지 않은 몇 명의 패거리가 나타난다. 나는 갑자기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날. 죽은 듯이 엎드려 발길질을 받아내던 서준후가 떠오른다. 섬뜩하도록 빨간 피를 토해내던 서준후. 왠지 오싹한 기분이다……. 예전처럼 삐죽삐죽 머리를 세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난 다행히 최성우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쪽도 마찬가지인 듯 최성우도 천천히 내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그 때부터 빗줄기는 한층 거세져 온 도시를 부술 듯 맹렬하게 쏟아 붓기 시작한다. 36. " 여기는 왜 왔냐? " 최성우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젖어 어쩐지 나른하게 들린다. 그 뒤로 몇 명의 최성우 패거리들이 움직이지도 않고 나를 쏘아본다.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은초 언니 얘기를 하고 싶어. " 최성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그리고 나는 그런 최성우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그 뒤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여자를 보았다. 소리 언니의 친구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최성우의 표정만 내 시야에 더 크게 들어왔다. 이제 내 운동화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젖어간다. " 잊어버려. 더 이상 들추어내려고 하지마. 우리 이제 잊어야 해. 다 잊어야 한다고. " 잊어야 한다고? 이제 잊어야 한다고? " 다시는 이런 얘기 입 밖으로 꺼내지 마. 특히… " " 특히……? " 곤란한 듯 두 눈을 지그시 내려 감다가 다시 뜨는 최성우. " 아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텐데 그만 가라. " 최성우는 더 이상 내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사라진다. 그리고 최성우와 같이 서 있던 사람들도. 최성우가 사라진 길을 따라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본다. 돌아가는 길은 여기로 올 때보다 훨씬 더 멀어 보인다. 왜 이렇게 이 길은 멀기만 할까. 나는 일부러 정공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을 하는 편법을 선택하였다. 때로 당사자들이 제 3자보다 어리석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물에 빠진 사람이 그 물의 수심을 알 수 없듯이. 하지만 최성우도 말해줄 수 없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길은 이렇게 멀고 주어진 시간은 짧기만 한데.『come up』……true & fact - by. 잘나가는주스. " 지은석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갈팡질팡 아직도 방법을 몰라 고민만 늘어가던 7월의 어느 날. 우리 반에는 하나의 전학생이 등장하였다. 피부가 까맣고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가진 한 남자아이가. 그 아이를 보고서야 이젠 다 잊어야 한다는 최성우의 말을 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37. " 도대체 쟤 뭐야? " 현빈이는 내 옆에 앉아 턱을 괴고 은석이를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연신 의아한 표정을 짓는 현빈이.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이 전학 온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소리 언니와 현우 오빠. 그리고 서준후까지 이 녀석에게 인사를 하러 왔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유리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은석이는 대충 고개만 끄덕일 뿐 그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딱 한 번. 서준후가 찾아왔을 때 형, 잘 지냈어? 라고 작게 읊조렸을 뿐. 5교시 음악시간. 은석이는 음악 책을 펴들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음악실 알아? 같이 갈까? " 다분히 귀찮아하는 기미가 역력한 은석이는 말을 건넨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공중에서 마주친 두 개의 시선은 곧 격렬하게 얽혀든다. " 이런 제기랄……. " 잠시 내 시선을 담아내며 말갛게 개여 가던 은석이의 눈동자는 곧 다시 커튼을 내려버린 어두컴컴한 방처럼 닫혀지고. " 비켜. " 그 때까지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나를 은석이는 가볍게 밀친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지은석이라는 존재는 묘하게 나를 불편하게 한다. 왜 이곳에 온 걸까. 나라면 이 곳으로 전학오지 않았을 텐데……. 어렵게 어렵게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 프링글스를 사오라는 오빠의 전화를 받고 편의점에 들어가 보니 낯익은 뒤통수가 보인다. 이렇게 동네에서 마주치는 것은 처음 인 것 같다. " 뭐 사러 오셨어요? " 교복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던 사람이 고개를 돌린다. 난 그가 눈을 찡그릴 것을 대비해 나도 똑같이 눈을 찡그려 주었다.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서준후. "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눈을 찡그린단 말이지? " 내 목소리를 듣고 벌써 짐작을 했던 것인지 서준후는 별다른 표정이 없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병 두 통을 꺼내더니 계산대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서준후. 그를 놓칠 새라 나는 프링글스 한 통과 씨리얼 하나, 우유 한 통을 사들고 따라나간다. 내가 따라오는 것을 알면서도 빠른 보폭을 줄이지 않는 서준후가 밉다. " 선배님,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 대답 대신 서준후는 걸음을 멈춘다. " 은석이 왜 여기로 전학 온 거예요? " " 너, 은석이 알아? " " 네. 알아요. " 서준후의 눈동자가 일순간 아득해 지면서 내게서 멀어진다.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벅저벅. 내 앞에선 멈춰선 서준후의 표정이 진지하다. " 어떻게 알았어? " 그러고 보니 서준후에게 고백을 한 후 처음으로 둘만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때 분명 NO 라는 대답을 들었지만 아직 가슴이 아프지 않다. 앞으로 가슴 아플 일은 많이 남았다. 지금부터 아파하면 그 때에는 아예 무너져 버릴 지도 모른다. " 저도 거울이 있거든요. " 다른 생각을 하느라 늦어버린 내 대답이 조금 이상한지 서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 은석이와 저, 닮았다구요. 피부색만 빼고. " 흐음, 하는 소리를 내뱉고서 아무런 말이 없는 서준후.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어렵게 입을 연다. " 은석이네 작년에 시골로 다 내려갔다가 은석이만 이번에 올라왔어. 공부 때문에. 다른 학 교로 가고 싶어도 승…아니, 친척집이 이 근처에 있어서 이리로 온 거야. " 알겠다는 듯 눈을 깜박이는 나를 보고서 낮은 목소리로 서준후가 다시 말을 잇는다. " 은석이. 아직도 많이 예민해. 날이 파랗게 서있어. 괜한 일 들추지 마. " 그것은 예언이었을까. 내가 그 아이의 칼날에 베어버릴 거란 걸 서준후는 알고 있었던 걸까. 유독 길게 이어지는 이번 장마는 왠지 힘들 것만 같다. 38. 나는 되도록 은석이 곁에 가지 않고 멀리서만 지켜보았다. 멀리서 보는 그 애는, 어떤 혈관에서 슬픔이 흐르고 있는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늘 침착했다. 무척 조용한 아이였다. 꼭 대답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또 공부 못해서 한이 맺혔는지 그 애는 학교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책상에서 보냈다. 그런 그 애가 유일하게 움직이고, 말을 할 때는 서준후와 있을 때 뿐인 것 같았다. 역시 신은 잔혹하다……. 똑똑. 내가 햇빛촌에서 곧 다가올 여름방학을 대비해 봉사활동 계획서를 짜고 있을 때 딱딱한 노크소리와 함께 은석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책상 모서리 끝에 앉아 있던 소리 언니가 스프링 튀어 오르듯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다. " 은석아. " " 여기 준후 형 없어? " 소리 언니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심술궂은 운명은 또 다시 소리 언니를 괴롭히고 있다. 가장 사랑했던 친구를 가장 아프게 했던 사람이 서준후라 생각하고 있는 언니에게 서준후만 찾고 있는 은석이의 존재는 아마도 상처가 될 것이다. " 준후는 왜? " " 내가 형 만나는 것도 이제는 이유가 있어야 되나보군. " 은석이는 모질게 소리 언니의 마음을 끊어내고는 그대로 문을 닫아버린다. 나도 모르게 훔쳐본 소리 언니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있다. " 야, 지은석. 야! " 이렇게 짧은 거리를 두고 내 목소리가 안 들릴 리가 없다. 나는 더 크게 불러볼까 하다 그냥 관두고 뛰어가서 그 애의 팔을 잡는다. " 나 준후 오빠 어디서 일하는지 알아. 데려다 줄게. " 파랗게 칼날이 선 사람이란 걸 잠시 잊고 바보처럼 그 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먹장이 쳐진 네 방에는 얼마나 오래 햇빛이 들어오지 않은 건지 네 눈동자는 색깔조차 없구나. 태양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색도 보여질 수 없듯이 네 누나가 죽으면서 너의 태양도 죽어버렸구나. " 너도 걸레냐? " 누군가 내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 하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은석이는 배를 잡고 키득키득 웃어대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다시 말을 뱉어낸다. " 너도 걸레냐고.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우리 누나랑 하는 짓까지 닮았냐고. 그래서 이 남자 저 남자 기웃 대냐? " …왜. 어째서. 뭐 때문에. 너는…… 은초 언니의 동생이잖아.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지은석……. 난생 처음 들은 끔찍한 폭언.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손톱이 파고들어 아플 만큼 주먹을 쥔다. " 처음부터 이 학교로 전학 오는 게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 뚜벅뚜벅. 멀어지는 발소리. 잔뜩 독기가 오른 사람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베어내고 네 칼날이 더 날카로워 진다면 난 그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 네 누나가 죽은 빌어먹을 이 학교에 오니까 기분이 어때 지은석? " 39. 쾅― 둔탁한 충격. 등에 와 닿는 벽의 느낌이 서늘하다. 여기서 은석이가 힘을 더 주면 나는 은석이 팔에 매달려 공중으로 솟아 버릴 것 같다. " 지은석. 죽은 네 누나 모독하지마. " 은석이의 팔에 더 힘이 들어간다. 이제는 말도 못할 만큼 목이 졸려온다. " 네가 뭘 알아!! " 이 순간 나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내가 원망스럽다. 어쩌자고 내 눈, 코, 입은 이렇게 생겨먹어서 묻혀져 있던 일을 불러내고 이 애를 자극하고 또 아프게 하는 것일까. 정말 인연이 끈의 형태로 생긴 것이라면 그 인연의 끈을 잘라낼 수 있는 가위는 어디에 있는 거야. 신이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가위 따위 만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구질구질 얽혀버린 인연은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 거야. " 누나를 모독한 것이 아니라 난 사실을 말한 거야. 더러워.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 조금씩 목이 편안해 진다. 은석이는 내 목을 쥐고 있던 팔을 풀고 두 손으로 힘겹게 얼굴 감싸쥔다. " 그건 사고라고 하는 거야. 더러운 게 아니라. " 빨갛게 부풀어오른 목이 너무나 아프다. 아마도 내 목에는 은석이의 손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은석이는 얼굴을 감싸쥐고 있던 손을 내리고 아주 오랫동안 내 눈을 응시한다. " 사고? 혼자서 깨끗한 척, 순결한 척 다 하다가 남들 뒤통수 때리고 죽은 게 사고냐? " 인연의 빨간 끈이 달린 네 발가락을 끊기 전에는 벗어날 수 없어. 네 발을 잘라. 소중한 것을 버려. 그래야 너는 자유로워져. 은정연. 은석이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걷는다. 위태위태해 보이는 걸음걸이. 어쩌면 은석이도 울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먼저 시작한 이 길, 도저히 끝낼 방법이 없어. 결국 나는 걸을 수밖에 없어. 서준후를…… 잘라낼 수 없으니까. " 은석아.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명씩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아기들이 죽어…….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소리 언니와 심하게 다투던 날, 햇빛촌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나오던 날, 그 날 이후로 나는 내내 생각만 할 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살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야. 은초 언니는 살고 싶어서 선택했는데, 이렇게 지금 우리 곁에 없으니 사고야. 그건 사고잖아. " 은석아 울지마. 울면 안 돼. 아직도 모르겠니. 은초 언니가 부른 거란 말이야. 너무나 억울해서 언니를 닮은 나를 부르고 이 세상 하나뿐인 핏줄, 너를 부른 거란 말이야. " 네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네 누나가 아니라 네 누나의 몸에 차가운 메스를 대게끔 한 사 람. 팔다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아기를 산산조각으로 부수도록 언니에게 시킨 사람이야. 언니와 아기를 버린 사람. 그 사람이란 말이야……. " ……은석아 울지마. 아직도 울 일이 많이 남았어. 울지마 울지마 제발. 끝나지 않았어.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은석아. 40. 어지럽다. 현기증이 난다. 더워서, 더워서… 더워서 견딜 수가 없다. " 방학 알차게 보내고 중간 소집 일은 모두 빠지지 말고 참석하도록. 이상이다. "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이들이 가방을 챙기고 소란스레 교실을 벗어난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맞는 여름 방학. 모두가 들떠 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은석이와 나는 제외하고서. 햇빛촌 써클룸도 우리 반 교실과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한 분위기다. 오랜만에 많은 회원이 모여 있다. 방학 중 "달래섬" 이라는 곳에서의 봉사활동 때문이다. 나는 일정표를 읽어가다가 남의 속도 모른 채 파고드는 햇살이 야속해 창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야속한 햇살에 반사되어 더욱더 환해 보이는 태윤 선배와 그에 어울리는, 구김살 하나 없는 표정의 세진이를 본다. 소리 언니의 반대편으로 달리느라 두고 온 내 따뜻한 푸른색. 이제 두 번 다시 선배를 안을 수는 없겠지. 내 안에서 탁하게 흐려져 사라질… 선배를 원하지 않아……. " 오늘 저녁 내가 쏜다∼ 다들 뭐 먹고 싶어? " 현우 오빠의 말에 햇빛촌 써클룸이 한층 더 시끄러워 진다. 햄버거니, 피자니 부대찌개니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 삼겹살! " 역시 햇빛촌은 박현빈의 독재 하에 굴러간다.『come up』……true & fact - by. 잘나가는주스. 삼겹살 집 치고 인테리어가 꽤 근사하다. 고기 또한 와인 삼겹살이니, 대나무 삼겹살이니 이름이 독특하다. 우리는 창가 쪽에 테이블을 여러 개 붙이고 둘러앉았다.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가지만 나는 영 입맛이 없다. 내 옆에 앉은 소리 언니도 별로 먹지를 않는다. 나는 고기 한 점을 집어 언니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언니는 잠시 나를 보다가 빙그레 웃는다. 마음이 아프다. 이제야 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된 것인지 벌써 바깥에는 어스름이 깔려있다. 창 밖으로는 승용차며 버스들이 쉴새 없이 지나다니고 그 차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그 속,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걷는 사람이 있어 유심히 보니…은석이다.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은석이를 보고서 일어난 것을 알고 그러는지 아니면 그저 내가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자 그러는지 소리 언니가 내 팔을 잡는다. 처음 보았던 그 슬픈 눈을 하고서.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소리 언니의 손을 잠시 잡아주고서 밑으로 내려갔다. " 은석아. " 아까 볼 때는 혼자 있는 것 같더니 은석이의 옆에는 누군가 있다. 남색 교복. 서진공고다. " 여기서 뭐 해. " 단조롭지만 꾸밈이 없는 억양이다. 은석이는 이제 날 상처 내려 하지 않는다. " 그냥 햇빛촌 동기들이랑 선배들이랑 밥 먹고 있었어. " 설마 설마 했는데. 서진공고 교복이지만 설마 했는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은석이가 입을 연다. " 우리형이야. 사촌 형. " 그 때까지 날 본 척도 하지 않고 있던 그가 씨익 웃는다. 결코 그 웃음이 예뻐 보일 리 없다. 강승재의 웃음이 결코 반가울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