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배삼익에 대하여
배삼익은 조선 중종 29년(1534, 嘉靖 13년) 8월 3일 안동부 서쪽 단지촌(丹地村) 외가에서 태어났다. 25세 이후 안동 예안면 도목리에 거주했는데, 나중에 안동시 임하면 도목리로 행정 소속이 바뀌었으며, 지금은 안동댐 수몰 지역이 되었고, 그의 재실 임연재는 현재 안동시 송천동으로 이건했다. 배삼익의 본관은 흥해(興海), 자(字)는 여우(汝友)이며 호는 임연재(臨淵齋)다. 고려 말에 그의 선조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가 안동 서후(西後)의 금계촌(金溪村)으로 입향하여 그의 후손이 풍기, 봉화 등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이후 그의 부친 배천석(裵天錫)이 당시 안동 예안면 도목리에 새로 터전을 잡았고, 배삼익 자신과 그의 아들 금역당(琴易堂) 배용길을 거치면서 그 지역의 문벌로 인정받게 되었다.
배삼익의 고조부 배임(裵衽)은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고, 증조부 배이순(裵以純)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그의 조부 배헌(裵巘)은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부친 배천석은 병절교위(秉節校尉)와 충좌위(忠佐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그의 모친은 정부인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처사 정세호(鄭世豪)의 딸이다.
배삼익은 5세에 가숙(家塾)에서 처음 공부를 시작하여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11세에 부친이 경성에서 관리 생활을 할 때 따라갔다가 13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4세에 모친 영일정씨의 상을 당했다. 21세에 영양남씨(英陽南氏) 처사 남신신(南藎臣)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25세에 그의 부친을 따라 비로소 도목촌(桃木村)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했다. 27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로 나아가 심경(心經)과 시전(詩傳)을 공부했다. 28세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31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32세 8월에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가 되었다가, 같은 해 9월 밀양교수(密陽敎授) 종사랑(從事郎)에 임명되었으며, 또 10월에 승사랑(承仕郞)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에 남명 조식을 배알했다.
선조 1년 3월 35세 배삼익은 《주자연보(朱子年譜)》를 개간(改刊)하여 스승 이황에게 보냈고, 7월에 조목(趙穆), 금난수(琴蘭秀) 등 동문들과 스승 이황을 뵙고 고산에 놀러 갔으며, 12월에 봉상시(奉常寺) 부봉사(副奉事)가 되었다. 36세에 임연대(臨淵臺)를 짓자, 스승 이황이 ‘도목촌임연재(桃木村臨淵齋)’이라는 글씨를 내려줬고, 이로써 임연재(臨淵齋)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37세에 도산에서 학문을 강구하다가 12월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나서 장례를 치렀다. 38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郎)에 임명되었다. 40세에 부친상을 당했다. 42세에 풍기군수에 임명되었다. 47세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8세에 안동현감(安東縣監)이 되었으나 고향 동네라서 사양했고, 여름에 양양부사(襄陽府使)가 되었다.
50세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51세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역임하고, 이 해에 〈시무십조소(時務十條疏)〉를 올렸다. 52세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를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53세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했다. 선조 20년(1587년) 54세에 진사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대명회전》 개정판 정고(正槁)를 등사하여 옴으로써 종계변무에 큰 공을 세웠고, 이에 선조로부터 내구마(內廏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이해 10월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어 백성 구제에 힘쓰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귀환하던 도중 해주(海州) 청단역(靑丹驛)에서 세상을 떠났다. 철종 6년(1855년) 9대손 배한주(裵翰周)가 목판본으로 그의 문집을 간행했다.
배삼익은 영남 사림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한편으로 학문을 닦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벼슬길로 나아가 국가에 충성을 바쳤다. 특히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대명회전》 개정판 정고를 등사하여 온 일은 조선 왕실의 입장에서는 대대로 내려온 종계변무 해결에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순직했으니 백성을 위해 헌신한 관리의 귀감이라고 할 만하다.
《국역 배삼익 조천록》 p19~21, 김영문(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위원)
첫댓글 25세 이후 안동 예안면 도목리에 거주했는데, 나중에 안동시 임하면 도목리로 행정 소속이 바뀌었으며,
- > 행정 구역과 명칭이 조금 이상합니다. 이 당시 안동부와 예안현은 별도의 행정단위였고, '면'이 법적인 행정단위 명칭으로 쓰였는지도 의문입니다.
37세에 도산에서 학문을 강구하다가 12월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나서 장례를 치렀다.
-> 퇴계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마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었던 것으로 연보에 나옵니다.
36세에 임연대(臨淵臺)를 짓자 -> 임연대는 건물 이름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임연선조께서는 시경에 나오는 이 구절을 생각하면서, 검암 위를 임연대라 하고, 자신의 호를 '임연재'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戰戰兢兢]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한 것같이 하고[如臨深淵], 살얼음 밟듯이 해야 하네[如履薄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