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콘서트
- 오산(川)을 품다
-들어가는 시
-청소를 하면서
-은행나무
-징검다리
-오산천
강사 약력
전북 장수 출신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태일 문학상 수상
중봉 조헌문학상 수상
아산문학상 수상
시집<편안한 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눔도서) 선정
청소를 하면서/박수봉
환하게 핀 봄날 도주한 청년의 방을 닦는다
창문을 열고 침구류를 걷어내자
푹 익은 살 냄새가 날개를 단다
바닥에 버리고 간 각종 고지서에서 그의
무수한 불면의 밤들이 쏟아진다
벽지에 써 놓은 욕설을 지우다가 그것이
문지를수록 번지는 그의 상처임을 알았다
어떤 세제로도 지워지지 않는
세상에 긁힌 마음을 조심조심 문지르며 나는
그 절망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매일 아침 변기에 앉아 상상하던 미래를
가래침처럼 뱉어버리고 도주한 청년
욕실 구석구석에 곰팡이 꽃이 피어있다
생각에 찌든 변기를 닦아놓고 고여 있던
슬픔의 성분을 꾹 눌러버렸다
주방에는 양은냄비가 퉁퉁 불은 허기를 물고 있다
청년실업수당으로 면발을 불린 라면에
노랗게 허기가 부풀어 있다
도주세대 곳곳에 청년이 남기고 간
가래침과 절망 그리고 성난 목소리를 거두어
종량제 봉투에 담아 묶으면서
그가 지녔던 어둠의 총량을 가늠해본다
찢어진 달력이 걸려있는 원룸에서 나는
청년이 버리고 간 난감한 문장들을 뒤적이고 있다
멀리서 보면 꽃 피는 세상이 화려하게 보여도
꽃그늘에 서 보면 우울한 꽃의 눈물도 있다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
젊은이가 앓던 자리, 그 멍든 자국을
나는 걸레를 새로 빨아 자꾸만 닦는다
은행나무
궐리사 언덕에 전설처럼 우거진 나무가 있다
수백 년 묵은 사유가 줄기마다 익어서
그늘까지 노랗게 밝혀 놓았다
말씀이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던
양현재*의 강독을 훔쳐 들으며 나이테를 키워온
거대한 사색의 탑
마을을 품고 앉은 노거수의 그늘에는
세상이 껴안지 못한 슬픔으로 빼곡하다
백발의 지친 길을 이끌고 와서
지팡이를 기대어 놓은, 때 묻은 잠과
은행나무 가지에 그리움을 걸어놓고
해질녘을 서성이던 통화음이 흩어져 있다
요양원 남자의 손톱을 깎아주고
나무그늘을 뒤집어 쓴 채 한나절을 울었다는
마을 소식이 수시로 피고 지는 그늘
제 몸 깊숙이 품은 서러움들이 삭을 때까지
나무는 오래오래 제 그늘을 다독인다
은행나무 아래서 한두 마디씩 툭툭 던져주는
말씀을 주워 생의 빈 갈피를 채우다 보면
어느새 생각이 노랗게 익어
돌돌 말려 있던 마음그늘도 팔랑팔랑 가벼워진다
새파랗던 감정을 곰곰 눌러주는
묵상의 체온이 깊어지는 계절
가을의 층계에 선 은행나무가 세상을 향해
노란 우산을 펼쳐들고 있다
징검다리
찬 물에 엎드려 식어버린 침묵이
물안개를 자욱이 피워내고 있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물소리에 갇힌
차고 습한 몸뚱어리가
물 그늘에 제 슬픔을 감추고 있다
한때는 산맥의 줄기를 이루던 등뼈가
부서지고 깨어져 방향도 없이 떠돌다가
여기 도막난 길이 되었다
가슴에 돌처럼 박힌 한 사람을 기억하며
나는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다
돌다리가 잠기면 성난 황토 빛 갈기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던 사내
구릿빛 등 위에서 내발은 언제나 뽀송했다
물에 박힌 돌처럼 온몸이 굳어 가면서
가족의 길을 덧대느라 사내의 등은 늘 젖어 있었다
오랜 침묵으로 다져진 돌이어서
물컹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등뼈를 밟으면 아직도 신음소리 새어나오는 듯하다
강물에 손을 씻으며 사내처럼 마른 징검다리의
등을 씻는다 얼마나 많은 위태로운 걸음들을
업어 건넸는지 우둘두둘 만져지는 등뼈,
두 손으로 등목을 하듯 물을 끼얹는다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을 열어주는 징검다리
나는 다리의 등에 업혀
도막난 길의 숨결을, 스며있는 울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있다
오산천
부르튼 발로 험한 산길을 돌아
너는 참 멀리도 흘러왔구나
너른 들판 어린 벼들의 뿌리를 적시고
무성한 버드나무 머리채도 감겨주면서
운암 뜰 가득히 오산천이 흐른다
운동장의 푸른 함성과 갈대밭에 앉았던
속삭임까지 넉넉하게 싣고서
만나고 헤어졌던 무수한 입맞춤을 바람에 건넨다
물의 관절이 툭툭 꺾이면서 쏟아내는
물소리에 하얗게 거품이 인다
한때 부풀었다 꺼지는 물거품 뒤로
잔반처럼 남겨지는 그리움도 있어서
흰머리 듬성한 이가 수심 깊은 곳에
빈손을 자꾸 던진다
실패한 사랑의 대본을
오리 떼가 물고 갈대숲으로 달아난다
천변을 도는 어린 웃음들이 반짝거리고
깡동거리는 강아지의 꼬리에서 햇살이 부서진다
더러운 곳을 지나왔는지 갈래천이 시커먼 땟물을
울컥울컥 쏟는데 괜찮다 괜찮다고 몸을 섞어주면서
오산천은 문화원 곁을 지나고 있다
왜가리의 기다림이 길게 그림자를 늘이면
기다리는 저녁이 오고
도시의 슬픈 눈시울에 불이 켜진다
기름 냄새가 욱신거리는 저녁, 어스름을 딛고
도시의 끝자락을 오산천이 떠난다
입술을 달싹이며 오산을 흘러간다
출렁이는 슬픔
비 내리는 연못에 앉아 나는
한 사람을 지우고 있다
연잎은 고인 물을 차르르 쏟아내며
스스로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다
연잎에 고이는 빗물처럼
마음을 파고 앉은 슬픔을 들여다보면
눈자위 붉게 번지는 사람이 있다
연잎처럼 시원하게 쏟아버리지 못하고
나는 그 사람을 퍼내느라 늙어버렸다
울어도 젖지 않는 마음 곁에서
꽃이 진 자리를 아프게 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