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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
-2015년 여름 중국 여행을 다녀와서
양미자
1. 출발 전 상황
아직 봄이 다 가기도 전이던 4월 어느날 향인이와 난 하얀 샌들을 한 켤레씩 샀다. 중국여행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꿈을 꾸고 현관을 오갈 때마다 걸린 신발을 보며 남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까 눈치만을 살폈다. 기어이 날을 잡은 어느날 남편의 입에선 황새와 뱁새가 날아다니고 단칼의 거절이었다. 다시 또 몇 날을 궁리하다 우연히 어머니를 모시고 가면 어떨까 했더니 급 부드러워진 표정과 말투가 좀 우습기는 했지만 첫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우여와 곡절을 몇 바퀴 돌다가 결국 남편의 여동생 딸인 민지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나고 있었다. 와우. 결혼 12년만에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었다.
사실 결혼 전 20대 중반부터 한 십여년 간 제법 여행을 다닌 편이었다. 서른 한 살에 안정된 직장이던 학교 사무직를 그만두고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찾아 들어간 입양기관(대한사회복지회)에서도 국외 연수의 기회가 자주 왔고 친구를 찾아 혼자 연변으로 날아갈 때는 정말이지 자유로웠다. 신랑 흉 보는 재미로 살던 언니들은 “결혼 하지 말고 너라도 핀안히 하고 싶은 거나 하고 살아라” 은근히 부추기던 터였다. 그랬었는데 결혼 후 때 되면 여권만 꼬박꼬박 갱신해 놓기를 두 번. 스템프 자국 하나 없는 흰 여백만 가득한 여권과 애써 받아놓은 십년간의 미국 비자도 2012년으로 지나가버리고 있던 터였으니 정말이지 기뻤다.
올핸 갑자기 맡게 된 통장일과 아이 학교 일들이 겹쳐 바쁜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여행이 주는 기대감과 그 유보된 좋은 일이 있었기에 거침없이 오는 일상의 버거움쯤이야 한 가닥씩 걷워가며 가리마를 탈 때는 묘한 쾌감도 있었다.
떠나기 전엔 모처럼 발동된 집 떠나기 전의 증세가 좀 괴롭혔다. 평소엔 무당집처럼 울긋불긋 걸쳐두고 살다가도 어딘가 갈 때면 수도승 방처럼 정갈히 치운 버릇이 있어 몸이 좀 고됐다. 이불 빨래며 카펫 하물며 소파 쿠션까지 다 빨아야 직성이 풀리니 무릎은 자꾸 부어 올랐다. 유서까지야 안 썼지만 아이 돌반지 모음이 어디 감춰져 있는지와 적금 내역까지 신랑헌테 말허고 나니 출발 완료.(이리 무사히 올 줄 알았으믄 비밀에 부치던 적금통장 한 개는 말 안 헐 걸 호호)
그렇게 떠났다. 내가 아는 편한 사람들과의 여행이다보니 그 어디 험산 준령이라도 상관 없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내 시원찮은 무릎 땜에 여러모로 민폐를 끼칠까 그것이었다.
2. 출발
여천역에서 만난 현우는 카톡상에서 보고 상상하던 현우와 많이 달랐다. 아주 샤프할 거라 생각했는데 동그만 얼굴에 여려보이는 몸짓과 웃으면 아래로 쳐지는 양쪽 눈꼬리는 어찌나 천진한지 스르륵 모든 방어를 풀게 해버리는 마법 같은 게 있었다. 서울가는 내내 어디만큼 왔다는 나긋나긋한 설명과 용산역부터 공항까지 가는 동안엔 마치 미리 답사라도 했던 양 그를 졸졸 따라가면 엘리베이터가 나왔고 에스컬레이터가 나오더니 드디어 경숙씨네가 민지와 함께 서있는 인천공항이었다. 아 만족스럽던 크라운게스트 하우스부터 이번여행 왠지 잘 풀릴거라는 확신이 딱 왔다.
반바지의 박사님은 특강때와는 이미지가 달랐다. 살도 좀 내리고 얼굴은 좀 타고 야구모자를 쓰시니 훨 젊어뵀다. 대기해둔 버스를 타고 개봉으로 향하면서 박사님의 친절한 설명이 시작됐다. 중국 중원에 해당되는 서안,낙양,개봉 이런지역은 중국의 고대 수도들이었고 우리의 경주와도 같은 곳이라 한다. 이번여행은 중원에서도 동쪽에서 서쪽을 향한 여행이 될거라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도 그쪽이 될거라고 하셨다. 도로는 잘 닦여 있고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풍경인데 굳이 찾자면 우린 멀리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간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사라지는 산들이 있는데 그곳엔 없었다. 군데군데 집단으로 서있던 키큰 미류나무들. 햇빛에 반짝이는 수만개의 잎들을 팔랑거리며 우릴 환영하고 있었고 늘씬한 몸 위에는 동요처럼 조각구름이 떠있는 듯 내속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미류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걸쳐놓고 도망갔대요.’
개봉시와 정주시에는 가로수로 플라타너스가 많았다. 더운 날씨이다 보니 잎 넓은 나무가 채택되고 그 밑의 사람들은 여유로와 보였다. 배를 디밀고 다니던 중년의 사내들도 나름대로 멋을 부린 자전거탄 아가씨들도 밑이 없는 바지를 입은 아기들의 유모차를 밀던 할아버지도 모두 제자리에서 충실히 제 몫의 삶들을 꾸리고 있는 듯 보였다.
(이쯤에서 밝하자면 여행 일정을 따라 상세한 설명은 앞의 세 학생이 충실히 해 놓았기에 나는 그때그때의 내 소회만 따라가 볼려고 한다)
지팡이를 가져오길 얼마나 잘했나. 홍석협 붉은 협곡을 보기위해 계단을 오르내릴 때 정말 요긴했다. 중간 중간 냉장고 속 같은 반 동굴들. 협곡을 지나와 먹었던 겉은 무화과처럼 생겼으나 맛은 달콤한 배였던 그 과일. 껍질에 이어 거의 깡탱이 까지 먹어버렸다. 우찌나 맛있던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박사님이 좀 안 돼 보이던 것이.
길게 늘어선 줄 서서 표 끊으랴, 안내하랴, 설명하랴, 화장실 간 거 기다리랴, 매끼 입에 맞을만한 식사 시키랴, 식사시간엔 맥주 따르랴, 자꾸 어딘가로 숨어버리는 기사분께 전화하랴, 모든 숫자는 맞는지 점검하랴(이건 나중에 선욱이 임무로 바뀜), 모든 사람들 상태 또한 괜찮은지 살피랴. .
미안한 맘이 들기 시작했고 그는 전생에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박사씩이나 돼 갖구선 우리의 수발을 들고 있으며 우린 그 반대로 누리고 있는지 참 아짐찮고도 송구스러웠다.
그날 밤 우린 준비해간 자료들을 토대로 세미나를 열었다.
다들 눈치챘겠지만 사실 그날 세미나 내내 난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느라 죽을 맛이었다. 전날 잠을 잘 못잤고 운대산행이 제법 걷는 길이어서 피곤했었다. 게다가 막 씻고 나왔으니 잠들기엔 최상의 조건이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조차 마치 꿈결인 듯 내가 무슨 말인가 하고 있기도 했는데 갑자기 잠이 달아난 건 현우 때문이었다. 그가 준비한 착실하고도 방대한 자료에 우선 놀랐는데 시간 안에(한 사람당 20분 가량) 그것을 해결 할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맘이 급허니 그 역시 잘 돌아가지 않은 발음으로 성심껏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저토록 진지허게 허는데 나이 살께나 먹은 내가 이리 졸믄 쓰까 싶어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여행할 곳을 미리 공부해보는 것은 정말이지 어디서나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더 잘 보이고 더 깊이 볼 수 있었고 거기에 박사님의 설명이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었다.
고생했다고 친히 선물까지 준비해온 박사님 진짜 감당 못허게 멋져부러.
갠적으로 가장 힘들 날은 소림사와 용문석굴 가던 날이었는데 소림사에서 힘을 넘 써버린 난기운이 없어 용문석굴 계단을 오르지 않을 요량으로 멀찍이 떨어져 걸었는데 마침 비가 와서 시원해지자 안정이 되었고 석굴 끄트머리에선 누군가의 묘를 보러 다들 올라갔는데 난 뒤로 처지다 포기하고 할머니 한 분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주위 대나무 잎에 비는 쏘록쏘록 내리고 머리칼은 회색이었지만 강단 있어 봬는 팔뚝을 가진 할머니가 뭐라고 말을 걸어왔다. 웃으며 워 스 한궈런 하자 크게 고갤 끄덕였고 조용히 앉아 쉬는 분위기가 좋았다. 그때서야 흰 종아리를 내놓고 단단히 조인 무릎보호대를 좀 풀어놓자 할머닌 부은 무릎을 보고 좀 놀라는 눈치였다. 큰 배낭을 메고 일어서는 할머니를 향해 짜이찌엔 하자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밤 일찍 쓰러져 잤으니 다음날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백마사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표정이 확실히 살아있다.
함곡관을 지나 서안으로 향하면서의 얘기는 두고두고 경숙씨와 현정씨 우리 셋만의 웃음 창고이다. 이글을 쓰는 지금도 큰 소리로 웃고 싶지만 모두가 자고 있고 핸폰 불빛에 의지해 쓰고 있으니 참고 있다. 우선 함곡관은 중국인들도 구경을 잘 안가는 좀 먼 곳에 있었고 그간 쌓인 피로에다 박사님도 함곡관은 첨인지라 상기돼 있었고 표를 파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정문은 가장 나중에 도달하도록 돼 있는 구조로 돼 있어 힛팅되기에 최상의 조건이었다. 더구나 깨알글씨로 인쇄된 입장표는 고도 근시자인 나두 안경을 벗어야 겨우 보일정도였으니 잠시 헤맬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저녁을 먹고 서안행 고속열차를 타기 까지의 시간도 넉넉치가 않아 맘이 부산했을 것이다. 급기야 기차를 타기 몇 분 전 향인이의 기차표가 안보여 순간 당황했고 무사히 기차에 탔을 때는 아마 그로기 상태였으리라.
우리의 참을 수 없는 웃음보 얘기는 지금부터인데 그날 세 명이 앉은 자리에 맨 안쪽 창가는 박사님 가운데 선욱이 그리고 나였다. 내 옆 통로 건너엔 정욱이와 경숙씨였다.
그때 선욱이가 박사님께 뭔가 말을 걸었던가 물어봤던가 했는데 피곤한 박사님은 나한테 잠깐 말 좀 시키지 마 했던가 내가 다 알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했던가 그랬다. 난 어찌나 그모습이 인간적이면서도 귀여운지 꾹 참고 있었는데 그때 잡지도 좀 보구 그래 허신 박사님 말을 듣고 선욱이가 먼저 잡지를 꺼내 초등학생마냥 양팔을 주욱 뻗은 채 한 장 한 장 넘기고 무료한 나두 똑 같이 그러고 있었다 책을 90도 각도로 세워 들고서 난 그림만 보면서 두 번을 훑었고 선욱인 그래도 뭔가 해득해볼라고 낑낑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경숙씨는 왜들 저러고 있다냐 궁금했다가 서안역에 도착해 그 내막을 얘기하자 터진 웃음이 그치질 않았고 우린 얼마나 웃었던지 그동안 온 몸에 쌓인 젖산은 모두 공중분해 돼 버렸다.
서안 호텔도 산뜻하고 좋았다. 내 육중한 무게를 친히 감당해준 윤국씨와의 자전거 하이킹.
혼자 기다려야 허나 걱정했다가 태워준 게 고마워 넘 열심히 페달을 밟았는지 다리가 뻐근했고 다른 사람을 제치고 나아갈 때의 스릴과 끝나고 먹은 샤베트 풍의 하드도 정말 짱이었다(고거이 내레 산거이 마아슴다이)
그 이후 병마용갱과 양귀비 목욕했다는 화청지 그리고 아. 화산.
병마용 보러가는 날 아침 속이 좀 쓰렸다. 전날 부은 무릎을 위해 자기 전에 먹은 진통 소염제 두 알이 안 녹았었는지 쎄 하더니 짠지 넣지 않고 좁쌀죽을 두 사발 먹었더니 금새 편해졌다. 다시 이동 중에 스물스물 올라오더니 넘 더워 사먹은 컵에 담긴 수박을 먹고나자 울렁거렸다. 좀체 체하지도 배탈도 안나는 체질인데 좀 묘했다. 맥주만 쉬고 그럭저럭 식사를 했고 저녁엔 다행히 교자 풀코스를 멀쩡한 상태로 먹어치웠다.
선욱이 친구가 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수줍어하면서도 크게 잘 웃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우린 같이 식사를 하며 대충 넘어가고 있는데 박사님은 친구 소개 예법을 다시 짚으며 예의 그 자상함을 또 한 번 발산시켰다.
식후엔 회족들의 거리인 야시장 구경은 활기찼다. 그들이 중국 땅에 남게 된 비화를 들으며 마치 해군들처럼 흰 모자를 쓰고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굽고 거대한 실타래 같은 엿을 돌려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만 년후에도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겠구나 생각했다. 10위안을 주고 사먹은 발효유도 정말 맛있었는데 도자기처럼 생긴 병을 가져올려구 했다가 할아버지 한분이 그 많은 인파를 뚫고 끈질기게 따라온 바람에 두 개 다 드려버렸다.
여행길에서 짐 많아지고 무거워지는 것 딱 질색인 이유도 있었다.
그날 밤 우리 어른들만의 소주 파티도 좋았다. 현정씨가 가져온 세 병의 미니 소주와 윤국씨가 꺼낸 고량주 한 병. 오메 난 요번에 확실히 알아부렀네. 잎새주는 술도 아니여. 참이슬이 진짜 소주등만요. 그날밤 역쉬나 박사님은 속알(?)머리 없으신채로 당당히 들어오셨구 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헐렁티셔츨 입으셨더구만유. 왜 그 있잖아요 우리가 어릴 때 나무 줄기 칠헐 때면 쓰는 크레용색깔 보담 조금 더 진헌 밤색, 우린 윤국씨가 몇차례 마무리발언을 허면서 각 자 방으로 갔으믄 싶어허는디도 꿋꿋이 버티며 얘기꽃을 피웠지요. 그날 밤 새 친구 온 기념으로다가 아이들도 한 방에서 춤을 추며 놀았다니 여행에서 이보담 더 즐거울 순 없는 거지요.
아무리 길어져도 화산 얘긴 꼭 하고 가야지요.
에누리 없는 장사 어딨냐고 입장료 떼먹으려는 여행사 기사양반에게 끝내 따져 에누리를 되찾아오신 박사님 아마도 우린 그 돈으로 짜장면 맛있게 사묵고 배 든든히 화산에 올랐지요.
무서워 옴마야를 연신 내지르는 경숙씨와 나의 괴성에 윤국씬 다른 사람보기 창피허다고 야단이었지만 우린 그때마다 더 큰 소리로 옴마야가 나와버렸으니 어이할꼬.
내 생애 언제 또 가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동 그 자체였는데 한 사람당 십만원이라는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더라고요. 윤국씨의 시 속에서 다들 느꼈겠지만 케이블카 속에서 깎아지른 흰 절벽들을 보면서 세계의 중심으로 떠 오르려는 저들의 야망이 느껴졌다면 넘 오버한 걸까.
하여튼 현우 말마따나 가장 하이라이트는 화산과 그날 저녁 식사였다. 좌변기 화장실이 딸린 품위있는 방에서 먹었던 고급진 음식들. 아 간이 잘 배고 육즙이 살아있던 수육같은 고기로 브로콜리를 둘둘 싸먹었던 그 맛과 따끈하면서도 속이 씨원했던 닭고기 국물..쩝쩝 다시 먹고 싶어라. 현정씬 아마도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맛본 음식들은 백가지나 될 듯허다고 한다.
3. 다시 돌아오며
마냥 아쉬웠다 여행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은 속속 점령당해가고 있었고 아쉬운 마음들은 어떻게 표출되고 있었을까. 귀국 수속을 밟느라 오래 기다려야했던 서안공항에서 이별을 핑계로 찐한 허그라도 했어야 하는데 사진을 보면 겨우 박사님 옷소매 끝만을 살짜기 붙잡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는 누구의 접근도 막는다는 듯 (학생들 제외) 의도적으로 팔을 빼거나 부러 방향을 틀어 살짝 떨어져 있다. 그를 순천골 샌님이라고 별명지어불까나.
그렇게 우린 돌아왔다. 여행은 전혀 피곤치가 않았다. 현정씨와 오는 도중 얘기했듯이 정말 럭셔리한 여행이었고 내 속 어딘가에서 헤집어지던 상처가 치유되고 허전했던 뭔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후유증은 좀 있었다. 몇 일은 책을 읽어도 운전을 해도 불쑥불쑥 누군가가 떠올랐고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이민숙샘도 도착하시면 바람을 한꺼번에 같이 빼자고 하셨지만 난 그 전에 바늘구멍이라도 좀 내야 숨을 쉴 수 있어 시나브로 흘려보냈더니 이제 좀 살 만하다. 분명 현정씬 또 몸을 젖히며 까르르 웃을테고 경숙씬 시로 승화시키랑께 하며 야단이겠지만 고거이 그리 쉽게 된당가이.
열두시 어간에 시작한 여행담이 벌써 세시에 가깝다. 인제 마무리.
여행을 하면서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 가족이 온 경숙씨네를 보면서 남편도 생각나고 또 빗살식구들 한명 한명도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얼마나 멋지고 재미날까. 미안한 맘 한켠에서 또 기대되는 것도 있다. 어미가 아이를 키우며 산고의 아픔을 잊어버리듯 박사님도 오늘의 고생을 망각해버리시길 바라며 우린(경숙,현정,나) 모정의 합의를 봤다. 한 오년 후쯤으로. .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 여행으로 난 어떤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을까.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걸까. 공부께나 하셔서 학위까지 받으신 분이 아무런 댓가 없이 근 열흘간의 시간을 비워두고 자비를 들여 친히 상머슴으로 고생하신 박사님처럼 사는 걸까. 자본과 물질이 우상이 된 시대에 전혀 그것들과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오히려 누군가 사랑받고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걸 기꺼이 나누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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