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뿔 도토리인문학 읽기 자료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를 기리며
**나 자신의 말을 하는 세계가 나에게서 소멸되어 버렸고, 나의 정신적 교향인 유럽이 자멸해 버린 뒤에, 내 인생을 다시 근본적으로 새롭게 일구기에는 이 나라만큼 호감이 가는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60 세가 지나 다시 한 번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특별한 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힘은 고향 없이 떠돌아다닌 오랜 세월 동안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제때에, 그리고 확고한 자세로 이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의 인생에서, 정신적인 작업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으며, 개인의 자유는 지상 최고의 재산이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서 중 일부분이다. 그가 말한 ‘이 나라’는 브라질을 가리킨다. 그곳에서 그는 마지막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그러나 그의 기록물 [어제의 세계] 속에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절망뿐만 아니라 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빼곡하다.
**사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이다.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어떠한 세대도 경험해 본 바 없는 그런 운명을 견뎌낸 우리 세대의 운명 말이다.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스트리아인, 유태인, 작가, 휴머니스트 또 평화주의자라는 더없이 두드러진 위치 때문에 이러한 지진이 가장 세차게 일어난 바로 그 장소에 서있었다. 이들 지진은 세 번에 걸쳐 나의 집과 생활을 뒤엎어버려 모든 지난날로부터 나를 떼어놓고는, 그 거센 힘으로 나를 허공 속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곧 그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 없는 텅 빈 공허감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한탄하지 않는다. 고향 없는 자야말로 새로운 의미에서 진정 자유로운 것이며, 또한 아무런 유대 관계도 갖고 있지 않는 자만이 새삼 아무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어도 모든 공정한 시대 서술에서 제일의 조건인 성실과 공평무사한 자세를 총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 후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견디다 못해 1934년 빈을 떠나 런던, 미국을 거쳐 1941년 브라질에 정착했다. 1942년 2월 22일 아내 로테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인한 미국의 참전을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츠바이크는 말한다. “2000년 동안이나 초국가적인 수도 빈에서 자라났으나 이 수도가 독일의 한 지방 도시로 전락해 버리기도 전에(1938년 3월 나치 독일에 합병된 빈) 그곳을 마치 범죄자처럼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내가 썼던 언어로 나온 나의 문학작품은, 수백만 독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던 바로 그 나라(독일)에서 분서(焚書)가 되어 재로 변해 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어떤 쪽에도 속해 있지 않다. 어디로 가나 이제 나는 이방인고, 좋게 말하면 손님이다.
**모든 시대의 연대기 중에서 가장 무서우리만치 이성이 패배하고 광포한 야만성이 승리하는 광경을 목도한 증인이 되었다... 나의 오늘은 어제의 어느 것하고도 너무나 다르며 또 나의 상승과 전락이 너무도 기막히기 때문에, 나는 다만 하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완전히 서로 이질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이따금 생각할 정도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지만, “나의 생활이란”하고 무심결에 말하고 나서는 “어떤 생활을 말하지?”하고 나도 모르게 자문해 보는 것이다. 세계 대전 전의 생활이란 말인가 아니면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생활이란 말인가...
**오늘날 60세의 나이를 먹고 아직도 상당한 세월을 남겨 놓고 있는 우리는, 도대체 보지 않았던 것이 있었는가?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한 모든 파국의 카탈로그 구석구석까지 파헤쳤다. 그런데도 아직 그 마지막 페이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인류가 겪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동시대인이며, 각기 다른 전선에서 전쟁을 직접 체험하기까지 했다. 처음 대전은 독일 전선에서 싸웠고 또 하나의 대전은 반독일 전선에서 말이다.
**전쟁 전에 나는 개인의 자유라는 것의 가장 높은 단계와 형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수백 년 이래의 가장 저속한 상태를 알게 되었다. 나는 축하도 받았고 멸시도 당했으며 자유스럽기도 했고 부자유스럽기도 했다. 부유한 적도 있었고 가난해지기도 했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창백한 말(馬)들 -혁명, 기근, 화폐의 하락, 테러, 전염병, 망명-이 나의 인생을 가로질러 몰려왔다. 나는 거대한 대중의 이데올로기가 내 눈 아래서 자라나 퍼져 가는 것을 보았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러시아의 볼세비즘,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최악의 흑사병, 즉 우리 유럽 문화의 만발(滿發)을 가로막고 마비시킨 국가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도망갈 수 있는 땅이라는 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사람이 사들일 수 있는 고요함이나 정적 같은 것은 더군다나 없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운명의 손이 우리를 잡아 쥐고는 그 끝날 줄 모르는 놀음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국가의 요청에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가장 어리석은 정치의 먹이가 되었고 가장 공상적인 변화에 적응해 가며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언제나 사람들은 공통의 문제라는 것들에 얽매이게 되었으며, 격분하면서 이에 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항할 수도 없을 만큼 사람들을 끌고 다녔던 것이다.
**1939년 9월(제2차세계대전 종전)에 우리 60세 된 인간들을 만들어 내고 길러낸 시대에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었다....만약 우리가 증언을 통해 붕괴되어 가는 시대 전체로부터 다만 한 조각의 진실이라도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한 일이 전혀 헛되기만 한 일을 아니다.
[그런 즉 이야기하라, 선택하라, 그대 회상들이여! 나의 회상 대신 말이다. 그리고 적어도 나의 인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전에 내 인생의 영상을 보여다오! ]
--『어제의 세계』 머리말에서
**그는 브라질에서 이 책을 집필할 때 거의 모든 내용을 기억에 의존해서 썼다고 한다. 먼먼 이국 땅 어느곳에서도 그의 완벽한 장서(그는 세계적 장서가로 정평이 나있었다) 자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문은 거의 모두 저자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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