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새댁의 눈물
늦은 오후, 앳된 여인이 쭈뼛거리며 찾아왔다. 신랑 한사람만 보고서 한국 땅으로 시집 온 베트남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이었다.
여인은 어눌한 말투로 속상해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여인이 들려 준 사연은 이러했다.
지적장애를 가진 남편과 함께 마을 뒤편 산비탈 밭에다 고추농사를 지었던 여인은 농사와 관련된 지식이 별로 없었지만 이웃들의 지도아래 얼마간의 고추를 수확했다.
그리고 수확한 고추를 건조시킨 후 창고에 보관하면서 간혹 목포에서 들어오는 장사치에게 판매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으로 품을 팔러 나갔는데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니 창고 문이 빠끔히 열려져 있고 방 안에서는 지폐뭉치가 놓여있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집에 남아있던 지적장애인 남편에게 자초지정을 물었더니만 떠돌이 장사치에게 팔아 치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인이 나름대로 계산을 해보니 시세에는 영 미치지 못하는 액수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지적장애인 남편은 자신에게는 단 한마디의 의논도 없이 덜렁 판매를 해버렸던 것이다.
추측컨대 장사치의 감언이설과 적극적인 구매 요청에 판단력이 부족한 남편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사천리로 거래가 성사되었고 남편 입장에서는 자신의 판매 행동이 품앗이 나간 아내에게 당연히 칭찬을 받을 줄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아내가 미주알고주알 캐묻고 또 핀잔까지 섞어가며 잔소리를 해대니 주눅이 들어서 아예 말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누군가는 본의 아니게 장사치의 꼬드김에 넘어간 남편이 가엾다고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여인은 여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께 격으로 설마 남편이 자신도 모르게 직접 거래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시방 한 해 동안 애써 지은 수확물을 제값도 받지 못하고 헐값이 팔아버린 것이 너무나도 속상했다. 더구나 잠시만 상대해 보면 지적 수준을 알 수도 있었을 텐데 단돈 몇 푼만 던져주고서 덜렁 가져간 장사치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여인은 좀처럼 억울함을 삭히지 못했고 장사치를 고발해서라도 거래를 취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사치는 이미 목포로 떠난 상황이고 연락처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파출소에 신고해서 장사지의 연락처를 알이 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장사치는 의외로 큰 소리를 쳤다. 가격은 현재 보편적으로 거래되는 시세였고 지극히 정상적인 거래였다고 주장했다. 판매 당사자가 지적장애인이라고 해도 고추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태라며 정 억울하다면 법대로 처리하라며 당당하게 나왔다. 파출소에서 장사치와 직접 통화를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실제 법에 의하면 지적장애인처럼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과의 거래는 한정치산자의 착오에 의한 거래라고 해서 당연히 취소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사치는 ‘배 째라.’는 식이었다.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간 후 다시 찾아온 여인은 담담하면서 평온함을 되찾고 있었다.
단돈 몇 푼을 더 받겠다고 날고뛰는 장사치와 옥신각신 다투기가 번거롭고 개인적인 일을 갖고서 주변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신경을 쓰게 하는 것 같아서 소송을 포기하기로 했다며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로 여인은 농사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농사지식이 부족한 자신과 같은 사람은 노력하고 투자한 만큼 수입을 거둘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대신 남의 집에 품을 팔러 다녔다. 일당 육~칠만 원 하는 품팔이가 수입적 측면에서 더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처지가 비슷한 이주여성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며 농작물 작업에 품을 팔았다. 그런데 이런 품팔이도 한 철 뿐이었다. 농번기가 지나면 한동안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인을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공공근로사업에도 곧잘 참가시켜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것도 경쟁률이 있고 또 매년 연속해서 참석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여인은 육지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지금은 지적장애인 남편과 함께 육지로 이주를 해서 각각 직장생활을 하며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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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복통
장산면사무소에서 복지전담공무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수도권에서 갓 시집온 아내는 목포의 신혼집을 비워두고서 나를 뒷바라지 한답시고 장산도까지 뒤따라와 관사에서 생활했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하여 돌아왔더니 아내는 아랫배를 움켜잡은 채 방바닥을 뒹굴며 연신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괜찮아질 거라 여기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의 신음소리는 좀처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나머지 보건지소로 연락을 했더니만 당직 간호사가 버선발로 뛰어왔고 간호사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한시 바삐 목포의 큰 병원으로 나가보는 수밖에 없다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시간상 저녁 무렵이고 목포로 나가는 정기여객선이 이미 끊긴 상태라 난감했다. 요즘에는 [닥터 헬기]라는 제도가 있어서 긴박한 상황에는 시간에 관계없이 전화 한통으로 금방이라도 닥터 헬기가 출동을 하겠지만 당시는 이런 제도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면사무소로 되돌아가서 아직까지 퇴근하지 않은 동료들에게 아내의 증상에 대해 자초지정 설명했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약 1시간 후쯤에 목포로 나가는 특별 운구선이 도착할 거라고 귀띔했다.
사연인즉슨 갯마을에서 생을 비관한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시신을 목포의 병원으로 싣고 갈 특별 운구선이 선착장에 도착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곧바로 관사로 되돌아가서 신음 중인 아내를 채근하여 특별 운구선이 온다는 선착장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니다 다를까 선착장에는 운구선 이마빡에 해양경찰 마크가 선명한 운구선이 대기하고 있었고 시신운반용이라는 것이었다. 배웅 차 따라 나온 동료가 운구선의 책임자에게 여차여차 설명하며 목포까지의 동승을 간청했더니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운행 규정상 관련자 이 외에는 그 누구도 승선시킬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목포의 병원으로 시신을 운반해 가는 입장이면서 시방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촌음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운구선 한쪽 구석에 살짝 동승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니 기가 막혔다.
그 때 동료 직원이 현직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밝히자 책임자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렇게도 승선이 불가능하다며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던 책임자는 운구선 아래 쪽 작은 공간으로 빨리 타라며 승선을 허락했다. 그렇게 해서 운구선 아래 구석에 간신히 얻어 탈 수가 있었는데 잠시 뒤 위쪽 갑판위로 인기척과 함께 시신이 실려졌는지 운구선은 목포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출발한 지 30분 남짓 흘렀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랫배를 부여잡고서 신음소리를 토해내던 아내가 서서히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신음소리도 점점 잦아들더니만 마침내 조용해졌다. 아내는 이상하게도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운구선이 목포로 달리는 동안 운구선의 해병들이 수시로 주변을 들락거리는 이 마당에 승선요청 시 애걸복걸하던 것과는 달리 갑자기 신음소리를 멈추고 평온한 모습을 보인다면 민망할 것 같았다. 승선할 때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호들갑을 떨다가 마치 거짓말처럼 잠잠해진다면 혹시 꾀병이라고 오해 할 수도 있을까 봐 염려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통증 여부와 관계없이 해병들이 주변을 들락거릴 때는 일부러라도 신음소리를 토해내라며 눈짓으로 강요했다. 그리하여 아내는 해병들이 지나칠 때마다 보란 듯이 신음소리를 토해냈고 그와 동시에 나는 바로 곁에서 심각한 표정과 걱정스런 모습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이윽고 운구선이 목포 땅에 도착하자 운구선의 한 해병이 호출택시라도 대신 불러주겠다며 친절을 보이기에 우리 부부는 직접 해결하겠다고 극구 사양하고는 간신히 목포 땅을 밟았다. 목포 땅을 밟고 나니 아내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 멀쩡했다. 아내와 나는 운구선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목길에 들어선 후 마주보면서 웃었다.
통증도 사라지고 당장 다급하지 않으니 병원 행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합의했다.
물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에게 또다시 유사한 증상이 있었고 결국 맹장염으로 밝혀져 수술을 받았다. [끝]
프로필 [ 이 병 언 ]
- 2011년 신안문학제 문학공모전 산문부문 금상
- 2015년 공무원 문예대전 동시부문 동상
- 2018년 목포문학상(남도작가상) 동시부문 당선
- 2019년 신안군립도서관장 역임
- 주소 : 목포시 남악1로 16번길 43-14 옥암코아루천년가 103-401
첫댓글 관장님 맛깔난 수필 감동입니다 원고 감사합니다
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회비 입금도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꾸벅
박선우 회장님!
윤인자 선생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많이 아픕니다.
바깥 외출도 거의 없이 집안에서 칩거하다시피 지내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남악쪽으로 오시게 되면 먼저 전화주시고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들어 사람 냄새가 그립습니다.
이병언(010-5418-5148)
네 관장님
목요일쯤 시간 내서 박회장님하고 놀러갈께요 전화할께요
네. 그날(목) 오전에는 광주 병원 다녀와야 해서 오후 2시이후에 가능해요.
네 잘 다녀오세요 점심 먹고 차분히 갈께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