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화가들을 시대별(조선시대/현대)로 나누어 생각해 볼까요?
과연 어떤 분들이 있을까요?
1. 조선시대
안견(安堅)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대표작 : 몽유도원도 | 안견(安堅)은 조선 초기에 활동한 화원으로, 호는 현동자(玄洞子), 본관은 지곡(池谷)이며 한국적 산수화풍을 창출한 조선 시대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부터 조선 중기 이후까지 조선 시대 화원 대부분이 그의 화풍을 이어받았을 정도로 우리나라 회화사상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이다. 신분이 낮은 화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어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기록들에서 잠깐 언급되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전부이다. 전해 오는 그림 역시 매우 적으며, 그의 작품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의 작품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것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유일한데, 조선 초기는 물론, 조선 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그림 중 하나로 꼽힌다. 그 밖에 안견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산수도(山水圖)〉,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 등이 있다. |
〈몽유도원도〉 덴리 대학 부속 덴리 도서관 |
안중식(安中植) * 출생 : 1861년(철종 12) * 사망 : 1919년 * 대표작 : 「산수도」, 「성재수간도」, 「도원문진도」 등 | 호는 심전(心田). 조선말과 근대 초기에 걸쳐 활동했다. 조석진과 함께 전통시대의 화법을 근대에 전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뛰어난 기량과 분방한 필치를 바탕으로 중국화를 주로 모방했던 장승업에게 그림을 배워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881년 조석진과 함께 영선사의 제도사(製圖士)로 뽑혀 1년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견문을 넓혔고, 1902년 고종과 순종의 어진제작에 참여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교수로 있으면서 이상범·노수현·김은호 등을 가르쳤고 서화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작품은 스승인 장승업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중국화를 모방한 관념적 청록산수(靑綠山水)나 고사인물도가 주류를 이루었고 〈도원문진도 桃源問津圖〉와 같은 관념산수에서는 과장된 산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강렬한 청록의 색채를 사용하는 등의 특징을 드러냈다. 후기에는 드물게 〈백악춘효도 白岳春曉圖〉(1915)나 〈영광풍경〉과 같은 실경산수를 남겼고 특히 〈백악춘효도〉에서는 부분적으로 투시원근법이나 명암법을 적용하여 조형관의 변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산수도」(1909년), 간송미술관 소장의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1911년), 삼성미술관 소장의 「도원문진도(桃源問津圖)」(1913년)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등이 있다. |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 1911년, 간송미술관 |
변상벽(卞相璧)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대표작 : 「묘작도」, 「계자도」, 「윤급초상」 등 | 본관은 밀양. 자는 완보, 호는 화재. 화원으로 현감을 지냈으며 영모·동물·인물을 잘 그렸다. 〈진휘속고 震彙續攷〉에 의하면 특히 닭과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계(卞鷄)·변고양(卞古羊)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초상화 솜씨도 뛰어나 국수라고 일컬어졌다 한다. 1763, 1773년 영조의 어진을 그렸다. 윤급(尹汲)의 반신상이 전하지만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표작인 <묘작도>(국립중앙박물관)는 고양이 2마리가 나무를 오르내리며 참새를 놀래주는 장면을 섬세한 필치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밖에 〈계자도 鷄子圖〉(국립중앙박물관)·〈웅자계장추도 雄雌鷄將雛圖〉(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
‘묘작도(猫雀圖)’, 18세기 조선 ,93.9×43.0cm, 국립중앙박물관 | 자웅자추(雌雄將雛), 30.0×46.0cm, 간송미술관 |
최경(崔涇)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대표작 : 전하는 작품이 없다. | 본관은 탐진. 자는 사청·여청, 호는 근재. 안산군에서 염부의 아들로 태어나 뛰어난 그림솜씨로 인해 화원으로 발탁되어 도화서별제에 올랐다. 산수·인물을 잘 그렸고, 특히 초상에 뛰어나 1472년(성종 3) 안귀생·배련 등과 함께 소헌왕후·세조·예종·의경왕(덕종)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공으로 1484년 성종에 의해 화원으로서는 최초로 당상관에 제수되는 파격적 대우를 받았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보면 북송의 이공린(李公麟)과 남송의 유송년 등의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전하는 작품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
최북(崔北) * 출생 : 1712년 * 사망 : 1786년 * 대표작 : 〈미법산수도 米法山水圖〉, 〈사시팔경도화첩 四時八景圖畵帖〉, 〈한강조어도 寒江釣魚圖〉, 〈공산무인도 空山無人圖〉·〈풍설야귀도 風雪夜歸圖〉 | 강세황과 더불어 심사정·정선 다음의 대가로 손꼽혔다. 그의 유작들은 산수·화조·초충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당시 사람들은 '최메추라기'라고 불렀다고도 하나 산수화에 가장 능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심사정과 강세황의 남종화풍을 토대로 보다 치졸한 듯하면서 소박하고 정감어린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키가 몹시 작았던 그는 매섭고 괴팍한 성격과 오만하고 기이한 행동 때문에 광생으로까지 지목을 받으며 많은 일화를 남긴 화가로도 유명하다. 만년에는 거칠고 분방한 기질과 상통되는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개성을 이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미법산수도 米法山水圖〉와 〈사시팔경도화첩 四時八景圖畵帖〉, 개인 소장의 〈한강조어도 寒江釣魚圖〉와 〈공산무인도 空山無人圖〉·〈풍설야귀도 風雪夜歸圖〉 등이 있다. |
<풍설야귀인>,종이에 연한 색, 66.3×42.9cm, 개인소장 | <공산무인도>, 비단에 담채, 31×36.1㎝, 개인소장 |
최수성(崔壽峸) * 출생 : 1487 * 사망 : 1521 * 대표작 : 전하는 작품은 없다 |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 치운(致雲)의 증손자로 생원 세효(世孝)의 아들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배출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 학자로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교유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친구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아예 포기하고 술과 여행, 시서화(詩書畫), 음악으로 일생을 보냈다. 1521년 35세 때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남탄현(南炭峴)에 집을 마련해서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며 원정이라는 아호는 그 것에서 연유하였다. 젊어서부터 세속을 멀리하여 명산승경을 유람하며 술과 거문고, 시를 즐겼고 뜻이 맞는 교우들과는 만남에서 화흥(畫興)을 폈다. 문장·시·서화·음률이 모두 뛰어난 절세의 기재(奇才)로 평가되었으나 유작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종 때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강릉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水澤魚龍國 山林鳥獸家 孤舟明月在 何處是生涯 수택어룡국 산림조수가 고주명월재 하처시생애 못은 어룡의 나라 숲은 새 짐승의 집. 외로운 배에 달 밝은데 어느 곳에서 한평생을. (直譯) 물(水) 못은(澤) 고기와(魚) 용의(龍) 나라요(國) 산(山) 숲은(林) 새와(鳥) 짐승의(獸) 집이라(家). 외로운(孤) 배엔(舟) 밝은(明) 달이(月) 있는데(在) 어느(何) 곳에서(處) 한 평생(生) 끝까지(涯) 다스릴꼬(是). - 원정 최수성 시 |
어몽룡(魚夢龍) * 출생 : 1566(명종 21) * 사망 : 미상 * 대표작 : <월매도(月梅圖)>(국립중앙박물관)와 〈묵매 墨梅〉 등 | 본관은 함종. 자는 견보, 호는 설곡·설천. 할아버지는 판서 계선이고, 아버지는 군수 운해(雲海)이다. 1604년(선조 37)에 진천현감이 되었다. 묵매를 잘 그려서 이정(李霆)의 묵죽, 황집중(黃執中)의 묵포도와 함께 삼절로 일컬어졌다. 그의 묵매는 부러진 굵은 가지와 새로 돋아난 곧고 가는 어린 가지들을 대조시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며, 매화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 있는 구도와 부러진 굵은 가지를 비백으로 처리한 단촐한 형태, 가지 주변에 크고 작은 짙은 점을 찍어 강조한 점 및 고담한 분위기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 초기 묵매의 전통을 토대로 형성된 것으로, 이후 조속(趙涑)·허목(許穆)·오달제(吳達濟)·조지운 등에게 이어져 조선 중기 묵매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현재 <월매도(月梅圖)>(국립중앙박물관)와 〈묵매 墨梅〉 등이 전한다. |
비단 바탕에 수묵으로 그린 〈월매도〉, 119.4×53.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월매도(月梅圖)’, 지본수묵, 44.4 x 28.3 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
강희안(姜希顔) * 출생 : * 사망 : * 대표작 : 〈고사관수도〉, 〈교두연수도〉, 〈산수인물도〉, 〈고사도교도〉, 〈강호한거도〉 등 | 본관은 진주.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 이조판서를 지낸 석덕(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 희맹(希孟)의 형이다.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4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서주부(司贍署主簿)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돈녕부주부·이조정랑·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1445년 최항(崔恒) 등과 더불어〈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주해했다. 또한 1444년 신숙주(申叔舟) 등과 같이 〈고금운회 古今韻會〉를 번역했으며, 1447년에는 신숙주·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동국정운 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사헌부장령·지사간원사 등을 두루 거치고 1454년(단종 2)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이해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팔도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1456년에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그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성삼문의 진술로 화를 면했다. 이어 146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 養花小錄〉이 있으며, 그림으로는〈고사관수도〉·〈교두연수도 橋頭烟樹圖〉·〈산수인물도〉·〈고사도교도 高士渡橋圖〉·〈강호한거도 江湖閑居圖〉 등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강지돈녕석덕묘표 姜知敦寧碩德墓表〉와〈윤공간공형묘비 尹恭簡公炯墓碑〉가 전한다. |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15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23.4 x 15.7cm 국립중앙박물관 | 산수도(山水圖) 15세기 중엽 족자비단에 담채 96.5 x 52.5 cm 도교국립박물관 |
강희맹(姜希孟) * 출생 : 1424년(세종 6) * 사망 : 1483년(성종 14) * 대표작 : 현재 일본의 오쿠라 문화재단에 <독조도>가 남아 있다.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편찬했다. 저서로는 농업에 관한 <금양잡록>, 해학을 모은 <촌담해이> 등이 전하고 있다.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형이 인순부윤(仁順府尹)이자 화가 강희안(姜希顔)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 사대부로서의 관인적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농촌 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했다.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은 생활 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農政)의 실상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강희맹의 시 중에서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했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서례』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는 강희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 아버지와 강지돈(姜知敦)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을 썼다. 저서로는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 이외에 『금양잡록(衿陽雜錄)』·『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
'독조도' 가로 86cm, 세로 132cm, 족자 비단에 그린 담채, 도쿄박물관에 소장 | 병여음성(病餘吟成) 南窓終日坐忘機(남창종일좌망기) 庭院無人鳥學飛(정원무인조학비) 細草暗香難覓處(세초암향난멱처) 淡煙殘照雨霏霏(담연잔조우비비) 창에 종일토록 앉아 세상 생각을 잊으니 정원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새만 날기를 배우네. 가는 풀 그윽한 향기 찾기 어려운 곳에는 엷은 연기와 지는 햇살에 비가 보슬보슬 내리네. |
강세황(姜世晃) * 출생 : 1713(숙종 39) * 사망 : 1791(정조 15) * 대표작 : 현정승집도, 지상편도, 송도기행첩, 풍악장유첩, 난죽도, 자화상, 표암유고, 표옹자지 등 | 시·서·화 삼절로 불렸고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박암(樸菴), 의산자(宜山子), 견암(蠒菴), 노죽(露竹), 표암(豹菴), 표옹(豹翁), 해산정(海山亭), 무한경루(無限景樓), 홍엽상서(紅葉尙書). 서울에서 강현(姜鋧)의 3남 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생모는 광주이씨이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 소생인 강인(姜亻寅), 강흔(姜俒), 강관(姜亻寬), 강빈(姜儐)과 나주나씨(羅州羅氏) 소생의 강신(姜信)이 있다. 강신과 그의 아들 강이오(姜彛五), 강흔의 손자 강진(姜晉)이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지상편도(池上篇圖)」, 「방동현재산수도(倣董玄宰山水圖)」,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표현연합첩(豹玄聯合帖)』, 『표암첩(豹菴帖)』,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약즙산수(藥汁山水)」, 「삼청도(三淸圖)」, 『풍악장유첩(楓岳壯遊帖)』, 「피금정도(披襟亭圖)」, 「난죽도(蘭竹圖)」, 「묵죽팔폭병풍(墨竹八幅屛風)」, 「사군자병풍(四君子屛風)」, 『임왕서첩(臨王書帖)』, 「동기창임전인명적발(董其昌臨前人名迹跋)」, 「제의병(祭儀屛)」 및 중국 사행시 제작한 『수역은파첩(壽域恩波帖)』,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 등 다수가 전한다. 54세 때 쓴 자서전 『정춘루첩(靜春樓帖)』에 「표옹자지(豹翁自誌)」와 함께 수록된 2폭의 자화상, 70세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여 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
<산수도>, 『국조서법(國朝書法)』 제10책 배면화(背面畵) 7ㆍ8면 중 8면 1737년, 종이에 수묵, 24.9×13.8cm, 개인 소장 | <매화도>, 『국조서법(國朝書法)』 제10책 배면화(背面畵) 9ㆍ10면,1737년, 종이에 수묵, 24.9×13.8cm, 개인 소장 |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종이에 담채, 30.5×35.8cm, 개인 소장 | <도산도(陶山圖)> 부분 1751년, 종이에 담채, 26.5×138.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허난설헌(許蘭雪軒) * 출생 : 1563(명종 18) * 사망 : 1589(선조 22) * 대표작 : <홍길동전> 등 |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나. 본관은 양천, 본명은 초희,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으로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시재를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해 동생 허균에 의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발간되면서 문명을 떨쳤다.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고까지 했다.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는 못했다. 시댁과의 불화, 자녀의 죽음, 동생 허균의 귀양 등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시 213수가 전하는데, 도가사상의 신선시와 삶의 고민을 드러낸 작품으로 나뉜다. 살아 있을 때 난설헌의 명성은 이미 익히 알려졌으나, 선비들 사이에서는 시댁과의 갈등과 남편과의 불화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사후 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후대에 이르러 난설헌의 시재가 사대부 사이에 인정받으면서 뒤늦게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의 시 168편을 수록하여 1612년 중국에서 펴낸 <취사원창(聚沙元倡)>이 발굴되어 전해진다.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안동김씨 묘역에 있다. |
묵조도 | 양간비금도 |
황집중(黃執中) * 출생 : 1533년(중종 28) * 사망 : 미상 * 대표작 : 「묵포도도」 |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시망(時望), 호는 영곡(影谷)·비목당(卑牧堂). 군수 인(璘)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벼슬은 경력(經歷)을 지냈다. 묵포도(墨葡萄)를 특히 잘 그려 이정(李霆)의 묵죽(墨竹)과 어몽룡(魚夢龍)의 묵매(墨梅)와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유존작품은 극히 희소한 편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폭의 「묵포도도」 1점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 송이의 포도와 거기에서 파생된 두 줄기를 X자형으로 포치한 이 그림은 농도를 달리하는 여러 먹색을 서로 대비시킴으로써 변화감을 자아낸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와 소재처리방식과 더불어 그의 뛰어난 격조와 기량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화법은 같은 시대의 이우(李瑀)·이계호(李繼祜)·홍수주(洪壽疇) 등에게 얼마간의 차이를 드러내며 이어져 조선 중기 묵포도 전통의 근간을 이루었다. |
묵포도도. 화원별집, 16세기, 저본수묵, 27 x 22.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묵포도도, 견본수묵, 32 x 32cm, 북한 평양 조선미술관 소장. |
장한종(張漢宗) * 출생 : 1768 * 사망 : 1815 * 대표작 : 「어해도」, 「송사리」, 「이어도」 등 |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광수(廣叟), 호는 옥산(玉山), 열청재(閱淸齋). 인동장씨 화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화원으로 1795년(정조 19)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제작에 김득신(金得臣), 이인문(李寅文)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관직은 수원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어해화(魚蟹畵)를 특히 잘 그려 이 분야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어해도」 8폭 병풍과 『어해화첩』을 비롯하여 「송사리」(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어도(鯉魚圖)」(개인 소장), 「어해도」(개인 소장) 등이 있다. 화원으로서 독특하게 직접 지은 『열청재어수신화(閱淸齋禦睡新話)』라는 재담집을 남기고 있다. 해학적이고 골계적 성격의 이야기 130여 개가 담긴 이 책은 조선후기 사회의 다양한 생활상을 담고 있다. |
장한종, 「책가도」, 종이에 채색, 195×361cm, 경기도박물관 소장 | 어해도, 지본담채, 102.4-47.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장승업(張承業) * 출생 : 1843년 * 사망 : 1897년 * 대표작 : 방황학산초추강도(仿黃鶴山樵秋江圖)(서울대박물관), 삼인문년도 (三人問年圖), 산수도, 귀거래도(歸去來圖), 기명절지도(이상 간송미술관), 홍백매십곡병(紅白梅十曲屛), 호취도(豪鷲圖),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이상 삼성미술관 리움) | 본관은 대원(大元),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 취명거사(醉瞑居士) 또는 문수산인(文峀山人)이다. 혜원, 단원과 함께 3원으로 불리는 조선 후기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삼인문년도>와 <산수도>와 <귀거래도>. 호는 오원으로 머슴살이 출인이나 서울에 정착한 후 어깨너머로 글공부와 원·명 이래의 명적들을 접하고 스스로 익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화리를 터득하고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날로 높아지자 왕실에서는 그를 대령화원으로 불러들여 그림병풍을 제작하게 했으며, 이때 감찰이라는 정6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받기도 했다. 역관 중인계층과 문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산수·인물·그릇·사군자 등 여러 소재를 뛰어난 기량으로 그렸다. 그의 작풍은 이후 안중식, 조석진 등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화단에 계승되었다. 그의 화풍은 조선 말기의 회화를 마지막으로 꽃피우면서 그를 사사한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에게 전하여져 우리나라 근대 회화의 토대를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30대 기년작인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근역화휘(槿域畫彙)』에 포함되어 있는 「방황학산초추강도(仿黃鶴山樵秋江圖)」(1879년), 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산수도」, 「귀거래도 歸去來圖」, 「기명절지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홍백매십곡병(紅白梅十曲屛)』, 「호취도(豪鷲圖)」,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등이 있다. |
<백물도권> 기명절지화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청동기, 주전자, 연적, 난초, 화분, 무, 인삼, 밤, 조개, 게 등을 생동감 있게 표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기명절지도, 년도미상 |
정선(鄭敾) * 출생 : 1676년(숙종 2) * 사망 : 1759년(영조 35) * 대표작 :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통천문암도」 등 |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아버지는 시익(時翊)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현 광주광역시)·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 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평가정선은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 화법(謙齋派畫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최북(崔北)·김응환(金應煥)·김홍도(金弘道)·정수영(鄭遂榮)·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 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은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畫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또한 초년기의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화가로서의 생애를 전부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 |
인왕제색도, 1751년작. 국보(1984.08.06 지정).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 세로 79.2㎝, 가로 138.2㎝. 리움미술관 소장. 〈금강전도〉 정선, 1734년, 종이에 수묵, 94.5x130.8cm, 삼성미술관 리움 | <시화환상간>, 비단에 연한 색, 26.4×29.5cm, 간송미술관 |
김홍도(金弘道) * 출생 : 1745(영조 21) * 사망 : 1806년경(?) * 대표작 : 〈무동〉, 〈씨름〉, 〈서당〉, 〈금강산도 8첩병풍〉 등 | 김홍도는 1745년생으로,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이다. 그의 집안은 중인 계층으로, 증조부 대까지 하급 무반을 지냈으나 조부와 아버지 대에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단원이라는 호는 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檀園) 이유방(李琉芳)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김홍도는 신윤복, 김득신과 함께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꼽히며, 서민들의 생활상을 익살과 해학, 풍자를 섞어 향토적인 정취로 담아낸 화가이다. 우리에게 〈무동〉, 〈씨름〉, 〈서당〉 등의 풍속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밖에도 산수화,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으며, 도화서 화원으로서 영조, 정조의 어진과 다양한 의궤를 그렸다. |
무동(舞童),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畵帖)에서 종이에담채, 27cm x 22.7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 <군선도> (1776년), 국보 제139호, 호암미술관 소장 |
김정희(金正喜) * 출생 : 1786년(정조 10) * 사망 : 1856년(철종 7) * 대표작 :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부작란도(不作蘭圖)」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등 |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정조 10년 1786년 조선 충청도 예산 출생 ~ 철종 7년 1856년 조선 경기도 과천에서 별세.)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조선국 승문원 검교 등을 지냈다. 김정희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다. 신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민태호, 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 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서예, 도서·시문, 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 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 있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다.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이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업적에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 역시도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8세기에 싹튼 풍속화와 진경 산수화를 낮게 평가했다. 평소 불교의 교와 선에 깊은 안목과 수증을 바탕으로 지내었으며 말년에 불법에 귀의하고 과천에서 은거하였다. |
세한도, 국보(1974.12.31 지정).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23cm, 가로 6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신사임당(申師任堂) * 출생 : 1504년(연산군 10) * 사망 : 1551년(명종 6) * 대표작 : 「자리도」, 「초충도」, 「노안도」 등 |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시·그림·글씨에 능했던 예술가이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
초충도 8폭중 '수박과 들쥐', 국립중앙박물관 | 초충도 8폭중 '양귀비와 도마뱀' 32.8 * 28.0cm, 국립중앙박물관 |
신윤복(申潤福) * 출생 : 1758년 * 사망 : 1814년 경(?) * 대표작 : 〈춘야밀회〉, 〈단오풍정〉, 〈미인도〉, 〈전모를 쓴 여인〉 등 | 신윤복(申潤福)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또한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 여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그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父), 덕여(德如)이고, 아명(兒名)은 신가권(申可權), 호는 혜원(蕙園)이다. 대표작은 미인도(美人圖)·단오도(端午圖) 등이 있다. 그는 조선 전기 시대의 문신 겸 학자였던 신말주의 후손이고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미인도(美人圖)》 등이 있다. 주로 남녀간의 사랑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여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 또한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이러한 그림들은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풍속화첩》에는 〈단오도(端午圖)〉, 〈연당(蓮塘)의 여인(女人)〉,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이 있고, 《미인도》와 《풍속화첩》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여속도첩 중 거문고줄 고르는 여인. 견본채색, 27.5 x 2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계명곡암도. 지본담채, 59.4 x 47.7cm, 간송미술관 소장. |
윤두서(尹斗緖) * 출생 : 1668(현종 9) * 사망 : 1715(숙종 41) * 대표작 : <선차도>, <팔준도>, <자화상> 등 |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또는 종애(鐘崖)이며 공재 윤선도의 증손이고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로 불린다. 윤선도의 증손이며, 윤이후의 넷째아들이다. 숙종 때(26세) 진사에 급제하였다. 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산수·인물·영모·초충·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으며 특히 인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윤덕희, 손자 윤용에 의해 계승되었다. 작품으로는 「자화상」, 「채애도」, 「선차도」, 「백마도(白馬圖)」 등이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에 전하고 있다. 이 화첩은 산수(山水), 산수인물(山水人物), 영모(翎毛), 화조(花鳥), 초충(草蟲), 도석 인물(道釋人物), 화훼도(花卉圖) 등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져 있다. 「노승도(老僧圖)」, 「심득경초상(沈得經肖像)」, 「출렵도(出獵圖)」, 「우마도권(牛馬圖卷)」,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 『십이성현화상첩(十二聖賢畵像帖)』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에 전주이씨 병와공파 중종에서 소장한 유가의 다섯 성인을 그린 「오성도(五聖圖)」, 새롭게 알려진 『가물첩(家物帖)』 등이 있다. 저서로는 『기졸(記拙)』과 『화단(畵斷)』이 있다. |
강안처사도, 견본담채, 개인소장 | 무송간수도, 견본수묵, 개인소장 |
2. 현대
나혜석(Na Hye seok , 羅蕙錫) * 출생 : 1896년 * 사망 : 1946년경 * 대표작 : <자화상>, <스페인 해수욕장> 등 | 나혜석(羅蕙錫)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주요 작품은 <농부>와 <자화상>과 <스페인 해수욕장>. 호는 정월이고 서울 경기에서 태어나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시작했으며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다.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면서 야수파 형식의 그림을 그렸고 귀국 후에는 사회에 저항하는 글을 썼지만 무시당했다. 생활고에 시달려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24년 판넬에 제작한 〈만주 봉천 풍경〉은 안정된 구도에 색채의 표현이 부드럽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 서양화 도입 초기의 사실주의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럽 여행을 통해서는 활달한 필치와 과감한 표현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자화상〉(1928)에서는 강한 색채의 대비적 효과를 살린 표현기법으로, 〈스페인 해수욕장〉(1928경)·〈불란서 마을 풍경〉에서는 거침없는 필치에 자유분방한 기법으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31년 이혼 이후 생활과 정신의 불안정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생동감과 활발함이 사라졌으며 작품창작도 거의 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 그의 글을 모아 〈날아간 청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이 발간되었다. |
스페인해수욕장, 캔버스에 유채, 32.5*43, 개인소장 | 무희, 캔버스에 유채, 41*32, 국립현대미술관소장 |
김환기(金煥基) * 출생 : 1913년 * 사망 : 1974년 * 대표작 : 〈론도〉, 〈항아리와 여인들〉, 〈나무와 달〉, 〈항아리와 매화〉, 〈피난열차〉, 〈09-05-74〉 등 |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화가로 주요 작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도쿄 일본대학 미술부에서 공부했였고 큐비즘적 시각을 받아들이면서 순수조형을 탐구하는 추상적인 방향을 추구했다. 이는 고전적인 화풍이 자리잡고 있었던 한국 화단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이후 추상미술 그룹인 신사실파를 조직해 한국 현대미술의 초기를 장식했다. 이후 선과 점에 질서를 표현하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을 그렸다.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코튼에 유채 | 항아리와 매화, 1954년, 46*53cm, 환기미술관 소장 |
이중섭(李仲燮) * 출생 : 1916년 * 사망 : 1956년 * 대표작 : 싸우는 소, 흰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투계,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등 | 이중섭(李仲燮)은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서양화가로 호는 대향(大鄕), 본관은 장수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로 국내 근대미술을 대표하며 주요 작품은 <흰소>와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호는 대향이며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학교 졸업 후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았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들에 있는 소를 관찰하면서 스케치에 열중했고, 이후 일본 문화학원에서 모더니즘 미술을 공부했다. 야수파에 속하는 감정이 실린 격렬한 필치와 색감, 선으로 이뤄진 독특한 조형세계를 선보였으며 이로 인해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힌다. 초기의 민족의식을 주제로 한 향토적 그림부터 피난시절, 이별 등을 소재로 한 은박지 그림으로 시대와 개인의 아픔을 드러냈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닭.어린이.가족 등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향토적 요소와 동화적이고 자전적인 요소가 주로 담겼다는 것이 소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싸우는 소》, 《흰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투계》등은 향토성이 진하게 밴 대표적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과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들은 동화적이고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
1955년 35.5 x 52cm 종이에 유채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 세사람 1945년경, 종이에 연필 18.2-28- 개인소장 암울한 시대상황 1945년 서울 해방기념 미술전 출품작 |
바닷가의 아이들 1952-53년 종이에 연필 유채 금성문화재단 소장 | 욕지도 풍경, 1953년 종이에 유채, 39.6 x 27.6cm 개인소장 |
박생광(朴生光) * 출생 : 1904년 * 사망 : 1985년 * 대표작 : 「무당」, 「청담대종사」, 「토함산해돋이」, 「명성황후」, 「전봉준」 등 | 박생광(朴生光)은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동양화가이다. 호는 내고(乃故)이다. 경상남도 진주 출신이다. 일본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미술원(日本美術院) 메이로 미술가연맹(明郞美術家聯盟)에 가입, 활약하였고 일본미술원의 회우(會友)이기도 하다. 귀국 후 홍익대학교에서 강사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1] 그의 작품은 한국의 전통적인 동양화의 입장에서 보면 몹시 이단시되는 독특한 표현양식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동양화의 재료로서 일본이나 서구(西歐)의 현대적인 조형방식을 채택하여 폭넓은 전위적인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작품으로 〈조양(朝陽)〉 등이 있다. 오랜 후원자였던 김이환이 건립한 이영미술관에서 박생광의 작품 다수를 살펴볼 수 있다. |
무당 12 Shaman 12, 종이에 수묵채색, 136×139cm, 1984 대구미술관 | 토함산 해돋이, 종이에 수묵채색, 74.5×76cm, 1980년대, 대구미술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