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라 여호와라.
1. 산에서 내려와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처리한 후,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로 돌판 둘을 새로 만들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1). 하나님께서 모세가 만들어온 그 판에 계명을 다시 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중보와 간청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앞으로 지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5~7).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6절) 이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온전하신 성품을 함께 드러내셨습니다. 날마다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이 드러나는 현장에서 급히 엎드려 경배했습니다(8).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드러나실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깊이 경험하고,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욱 바르고 합당하게 드려집니다. 모세는 이 백성이 목이 곧은 악한 백성이므로 죄를 사하시고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간구합니다(9).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우리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아주옵소서.”
4.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모세에게 응답하십니다(10~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모든 족속을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 땅에 거주하는 가나안 백성들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12~17). 가나안과 언약을 맺는다면 그것은 이중 언약이 되어 자동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될 것입니다(12,15).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임을 기억할 때, 이 세상과 언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약 4:4).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끝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땅에서 만나는 모든 우상을 찍어버려야 합니다.
5. 10절에서 28절은 32-34장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언급하시는 것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충성과 함께, 우상숭배를 경고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3대 절기(무교절 혹은 유월절, 칠칠절 혹은 초실절이나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 혹은 초막절)를 지키는 것입니다(18~20, 22, 23~24). 이렇게 매년 세 차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6. 그들이 집을 떠나 1년에 세 차례 절기를 지키러 올 때, 그들의 집과 땅을 탐내고 엿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24). 신앙으로 인하여 손해 보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분명하고 뚜렷한 약속입니다. 오히려 아무도 탐내지 못하도록 강한 팔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도리를 쉽게 포기하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7.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성경(모세오경)을 쓸 수 있도록 계시를 주셨고, “이 말들을 기록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27). 영원한 언약의 증거로 남기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다시 40일 40야를 하나님 앞에서 보냈습니다. 이때는 분명히 식음을 전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28).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낸 결과는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였습니다(28~35). 이 광채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함으로 인하여 생긴 광채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입니다.
8. 그러나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 자신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론과 온 백성은 모세의 광채를 보고 그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르신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전한 후에 수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만 수건을 벗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모세에게 집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얼굴에 수건을 가리고 있습니다.
9. 또한 첫 번째 모세가 하나님과 40일을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지만, 두 번째 모세가 40일을 하나님과 있었을 때는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주심으로, 결코 이스라엘이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에 대한 분명한 각인이 되고, 모세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10. 본문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십시오.
첫째, 예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면 알수록, 예배하지 않을 수 없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과의 언약을 배제합니다. 세상과 벗됨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우리가 성도로서 추구하고 살아야 할 가장 큰 가치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아는 은혜와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
출애굽기 34장은 출애굽기 32장부터 시작된 이야기의 흐름을 결론적으로 매듭지어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금송아지를 세운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이로 인한 언약의 파기를 보여 주고, 33장은 이러한 사건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모세의 중보 기도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 34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언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34장 1-17절은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언약 갱신을 준비시키시고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갱신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가 두 개의 돌판을 준비해서 시내 산으로 올라감(1-4절)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세에게 두 돌판을 처음 것과 똑같이 깎아 만들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모세가 깨뜨렸던 처음 것을 대체하기 위함입니다.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주셨으나, 두 번째 돌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지 않고 모세가 직접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깨뜨린 첫 번째 돌판이 언약의 단절을 상징한다면, 두 번째 돌판은 언약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언약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정말 그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들도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지게 되더라도 언제든 다시 시작 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눈을 들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더욱 굳게 붙잡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2-4)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아침이 되기 전에 두 개의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 꼭대기에 홀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아침까지 두개의 돌판을 깍아서 준비해 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의 밤을 새면서 준비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두 개의 돌판을 다듬고 준비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침에 오르라는 것은 모세가 세상 일로 방해받지 않고 오직 그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하는 시간은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든 짐승이든 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양떼나 소떼도 그 산 앞에서 풀을 뜯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돌 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시내 산을 올라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언약 갱신을 위해 시내 산에 다시 강림하심(5-9절)
(5-7)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 산에 오르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 속에 나타 나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은 그 앞을 지나가시면서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죄를 지은 자에게 ‘자손 삼사 대까지 벌을 주신다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고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삼사 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습니다. 보통 가족 구성원의 잘못, 특히 가장의 잘못은 가족들이 그 고통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되면서 고통을 자손 삼사 때까지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악의 파괴적인 영향이 그와 함께 살고 있는 후손에게까지 미침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즉, 한 사람의 잘못이 그가 속한 집단 전체에 어려움을 주게 된다는 겁니다.
(8-9)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모세는 하나님의 현현을 보았을 때 급하게 땅에 엎드려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과 백성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여호와께서 이미 허락하신 일을 다시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이 뻣뻣해서 주님의 뜻을 거역할지라도 그들을 용서 하시고 그들과 동행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너무나 두려워 경외하는 마음이 들었고 자신들의 한없는 약함을 깨달으며 의지할 분은 주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소유이자 기업으로 삼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들도 매일 매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더욱 겸손하고 진실되게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가나안 땅의 족속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규례(10-17절)
(10-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하나님은 언약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백성의 의무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 되고,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 관계를 맺으시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큰일을 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일은 일찍이 본 적도 없는 ‘두려운 일’, 곧 백성이 두려움에 싸일 만한 일입니다.
이런 일중 하나는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될 약속의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실 것이기에 이스라엘은 그 땅의 주민들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언약을 맺으면 그들과 깊이 교제하게 되고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섬기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3-14)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이제 이스라엘은 우상을 믿는 사람들과 사귀거나 동맹을 맺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우상을 없애기 위해 힘쓰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아세라’는 가나안의 3대 여신 중의 하나로, 바알의 아내이며 풍요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의 아세라 상을 포함해 모든 제단과 종교적 상징들을 파괴해야 된다고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질투하십니다. 이런 본성을 강조하시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질투’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언약을 맺거나 그들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 어떤 이유로 잘 포장하고 스스로 합리화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철저하게 끊어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15-17)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12절 말씀처럼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스라엘이 그 땅의 주민들과 언약을 맺었을 때 그들에게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며 경고하십니다.
먼저 가나안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제물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나눠 먹으면서 친해집니다. 두 번째는 서로 통혼하는 단계입니다.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과 결혼하더라도 가나안의 신을 계속해서 음란하게 섬기게 됩니다. 세 번째는 가나안의 딸들이 이스라엘 남편들로 그들의 신을 음란하게 섬기도록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결코 가나안 주민들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왜 그렇게 우상숭배에 대해 예민한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시각으로 보면 누가 그렇게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빠질까 이해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많은 경고가 우상숭배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우상숭배 때문에 망했습니다.
당시의 우상숭배는, 각종 영상과 노래와 춤으로 종합된 현대 대중문화와 비견될 만큼의 매력을 지닌 문화 복합 현상이었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이 대중문화와 격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상숭배의 문화는 이스라엘에게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매일 매일 세상 속에서의 스스로를 잘 살피며, 주님을 바르게 따라가기 위해 더욱 몸부림치며 노력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을 바르게 따라가며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언약이 위기를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시키고, 모세를 통해 새 민족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해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과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모세를 다시 시내 산으로 부르십니다.
(18-20)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 그 절기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절기와 그에 따른 의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절기가 다시 언급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께 절기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장 5-6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출 31:5-6, 새번역)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하고 선포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이처럼 당시에는 우상을 만들면 절기를 정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영원토록 지켜야 할 절기를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한편 무교절은 출애굽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로 유월절 다음 날부터 1주일간 누룩을 넣지 않은 빵, 즉 무교병을 먹으며 축제를 벌이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기념하는 무교절을 지키라고 다시 명령하신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첫 태생은 다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에 열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이스라엘의 첫 태생이 생명을 건진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과 그들의 모든 가축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또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양으로 대속하거나, 그 목을 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귀는 정결 규례에 의하면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양으로 대속하거나 목을 꺾어 죽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리기 위해 나아올 때는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의 자발적인 감사와 헌신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로서,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리 레위처럼 우리 각자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삶의 자리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므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21-22)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엿새 동안’은 7일을 단위로 하는 한 주 가운데 안식일을 제외한 날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이 엿새가 안식일과 별개의 날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날들은 안식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엿새 동안 일하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전제 조건이 됩니다. 따라서 엿새 동안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자만이 안식일의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또 주님께서 주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땀 흘리는 수고와 피곤한 노동을 감당해야만 그 소산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안식일에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들도 수고의 짐을 풀어놓고 쉬기를 원하셨습니다. 곧 안식일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고 준수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편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주일성수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에는 구별된 예배, 구별된 봉사, 구별된 친교, 구별된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또 진정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에서 비롯된 그 거룩함이 나머지 엿새 속에서도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주일성수를 명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칠칠절’은 밀의 첫 곡식을 드린다고 해서 ‘맥추절’이라 불리고, 또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행해진 절기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칠칠절’은 농작물의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이기에, 이날을 성회로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음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이며,’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 불립니다. 7일간 초막을 짓고 살면서 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는 것이 이 절기의 특징입니다. 이 절기가 ‘수장절’이라 불린 이유는 한 해의 끝에 모든 추수를 마치고 거둔 곡식을 저장하면서 지켰기 때문입니다.
(23-24)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세 번씩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두 차례나 강조하십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나 성전에 모여 감사의 절기로 지켜야 함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한 곳에서 드려질 것이며, 많은 사람이 먼 길을 떠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생길 것을 시사합니다. 둘째, 남자들이 한 곳에, 그것도 먼 곳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동안 주변의 적들이 쳐들어올 수 있고, 이런 경우에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세 번씩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방 나라들을 쫓아내실 것이고, 이스라엘의 지경을 넓히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절기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신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시간과 정성과 노력과 재물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마땅히 우리 삶도 책임져 주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디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신 주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5-26) 너는 내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두지 말지며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고, 유월절 제물에 대해 아침까지 계속 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성물이 더럽혀지거나 소홀하게 취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또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에 드리고, 염소의 새끼를 그 생명의 공급원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십니다.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모세에게 이 말들을 기록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여기서 ‘이 말들’이 가리키는 것은 1차적으로 시내 산에 모세가 올랐을 때 하나님과 맺은 언약(출 20-31장)입니다. 이로 볼 때 ‘이 말들의 뜻대로’라는 표현은 앞선 11~26절의 율례들이 앞에서 맺은 언약과 일치하며, 앞선 언약의 취지에 따라 주어진 언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에 다시 불러 그에게 주신 두 번째 언약도 금송아지 숭배 사건으로 결렬된 첫 번째 언약과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언약의 회복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라는 선언을 통해 언약을 맺은 대상을 ‘이스라엘’과 더불어 ‘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지만, 모세 역시 하나님 앞에 서는 언약의 당사자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세 자신에게도 적용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 말씀입니다.
(마 23:2-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목회자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오직 교우님들에게만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또 목회자인 우리가 정작 자신의 일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행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고,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다시 40일을 보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죄를 씻고 정결하게 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대표하여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해 이 기간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연단과 시험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의 40일은 연단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28절 마지막 문장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는 계약의 조문들인 십계명을 판에 기록했다’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흐름을 보면 본문은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역개정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처럼 하나님과 모세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중개했으며,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29-33)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40일을 보내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양손에 두 돌판을 들고 나타난 모세의 얼굴을 보고 두려워 떨며 숨었습니다. 모세의 얼굴 피부에서 광채가 났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였기에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광채가 묻어났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피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불러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자신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두려움은 계속되었고, 결국 모세는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는 그의 빛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 위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이 건축할 성막에 임할 것입니다. 이 중간 단계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얼굴에 담아 산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즉 모세는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자신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난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특별히 가깝다” 혹은 “나는 누구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라고 자부하는 사람 중에, 정말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애써 자신을 높이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먼저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영광의 광채가 그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누구보다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에게 임한 은총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34-35)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모세는 성막에서 하나님과 대화할 때는 항상 수건을 풀었습니다. 빛의 본체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굳이 수건을 두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막에 들어가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할 때를 제외하고는, 일상적으로 수건을 얼굴에 덮어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모세는 얼굴 피부에서 광채가 났기에 수건으로 얼굴 일부가 아닌 전체를 가려야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옆에서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한 걸음도 제대로 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기에, 자신에게 나아올 때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오라고 명령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모세 자신에게는 더 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불편한 생활을 감수한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자손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자신이 일상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3절 말씀입니다.
(고전 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처럼 성숙한 신앙인은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편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편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어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십니까? 바라기는 연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자신만의 수건을 갖고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발적 불편을 감수함으로 연약한 사람을 섬기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 기회를 금송아지 사건으로 허무하게 날려버린 그들에게는 과분한 은혜였습니다. 그 과정에 모세의 중보기도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과 다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지만, 모세 역시 언약의 당사자였습니다. 모세는 중재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하나님과 언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시내 산에서 40일을 보냈기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두려워할 정도의 광채였지만, 모세는 그들을 위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는 얼굴 피부의 광채를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연약한 이스라엘 자손을 배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첫 번째 가지가 제일 먼저 나왔다면 가장 윗자리를 차지함이 마땅함에도 언제나 맨 밑자리에 있습니다. 나무가 세월이 흐를수록 강풍에도 견디는 거목이 될 수 있는 것도 크고 강한 가지들이 밑자리에서 버텨주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삶은 우리에게 밑가지의 삶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적용하는 삶,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삶을 통해 밑가지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스스로 밑가지가 되려는 삶을 통해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만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한날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운동 경기에는 패자 부활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번 진 선수나 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가운데에도 이와 같은 패자 부활전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커다란 실패로 인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시며, 결코 짧지 않으신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모세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모세가 내려오는 것을 진중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커다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셔서 모세에게 시내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시고 새로운 돌판에 말씀을 써서 주셨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판 두 개를 준비하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구름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6절과 7절을 보면“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자비하심과 진노하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대까지 보응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은혜는 최대한 많이 베푸시고 벌은 최소한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악용하여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속이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는 분이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이런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에 얽매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헐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며 그들의 악한 문화에 물들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로서 세상의 악한 문화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즐기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것들을 배격하고 그 모든 것들을 사로잡아서 주님 아래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14절을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질투라는 감정은 서로 비슷한 수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강아지를 무척 사랑해 주는데 그 강아지 주인이 강아지가 주인을 그만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주인이 그 강아지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같은 위치에 있어야 질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절대로 동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낱 먼지와 진흙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 같으신 분입니다. 토기장이가 먼지와 진흙에 대해서 질투의 감정을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질투하신다는 것은 한낱 먼지와 진흙 같은 우리를 높여 주시고 동등한 위치로 바라보아 주시며 모든 사랑을 다 쏟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내버려 두시고 하나님은 멀리서 보고만 있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자녀 삼은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말씀의 길로,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상낙원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려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은 유혹을 늘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롭게 살면서 이 세상의 많은 것을 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신앙이 없다면 실상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이자 백성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를 질투하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내어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며 주님의 투명한 쇼윈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에게 속박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은총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도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심을 되새기면서 우리도 우리의 마음과 행동과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34장 1절부터 시작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 갱신에 관한 나머지 부분과 언약 체결 후 새로운 십계명 두 돌판을 받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에 관한 기록입니다.
먼저, 18절부터 26절은 이스라엘이 꼭 지켜야하는 3대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 수장절과 안식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먼저 무교절은 유월절과 관련된 절기로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가을 추수의 첫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로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수확물을 얻게 되었음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추수를 모두 마친 후에 지키는 절기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하는 절기입니다. 이 세 절기에 공통점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잊어버리는 특성을 지닌 인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망각’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큰 슬픔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기에 인간의 망각 능력이 때로 요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다릅니다. ‘망각’은 치명적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망각’은 더 더욱이나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망각은 모든 것이 나의 힘, 나의 능력으로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느덧 하나님 자리에 나를 올려놓는 교만함을 범하게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는 영적장치가 있는데 바로 절기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 또한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유대교의 절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기독교의 절기는 예수님의 탄생, 수난, 죽으심,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정수(精髓)’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절기 준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이 단순한 회상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절기 준수를 디딤돌로 오늘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절기를 지키며 다시 오실 주님을 떠 올리므로 삶의 투명성을 회복하는 영적 계기로 선용해야 합니다. 의례적인 절차가 아닌 마음을 다해 절기를 기억하며 지켜나가야 할 이유입니다.
한편으로 절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1년 단위로 생각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한다면 안식일, 곧 우리가 매 주일 지키는 주일은 1주일 단위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 된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주시고 자녀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를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재정립하게 합니다. 우리가 온 힘과 온 정성을 다해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우리는 절기와 주일을 지킨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절기와 주일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지켜주는 영적 방패요 버팀목이 됩니다. 우리가 절기 준수와 주일 성수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까닭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 속에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은 새롭게 체결됩니다. 27절에서 2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말씀을 마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언약체결의 징표로 모든 것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에 따라 모세는 거기 곧 시내 산에서 사십일 밤낮을 머무르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 말씀들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지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십계명만큼은 하나님께서 친히 또 돌판에 기록해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십계명만큼은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직접 써 주셨습니다. 그만큼 십계명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가기 직전, 모세는 모압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신명기 5장 1절에서 3절입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당시 어린아이였거나 태어나지도 않았던 광야 2세대를 말합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그런 그들과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언약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곧 십계명을 통해 언약을 맺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십계명의 유효성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단순히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켜나가야 할 하나님의 현재적인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체결이후 시내 산을 내려오는 모세의 모습에 대한 성경의 기록입니다. 본문 29절에서 30절입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사십 주야를 하나님 곁에 머물며 하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던 모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그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그가 40일 동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는 징표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16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자체가 이미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미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선택받은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빛나는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우리의 삶은 결코 숨기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빛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임은 빛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며 바른 행실을 통해 투명한 삶을 살아가며 주님의 투명한 쇼윈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진선미가 드러나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며,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십계명을 준수하는 투명한 삶으로, 하나님의 쇼윈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중요한 언약을 체결하는 신성한 기간 동안에 오히려 황금 송아지를 만들면서 추태를 부려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목이 뻣뻣한 백성(32:9)이라 하시면서 그들을 진멸해버리겠다고 서두르셨습니다.
이를 막아선 사람이 바로 언약의 중개자 모세였으며 하나님과 다시금 대화의 물꼬를 터 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오래 전 알아오던 친구처럼 하나님과 깊은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였고 이로 인해 두 번째 돌판을 받으러 다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은혜의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똑같이 다듬고 깎아서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세가 직접 돌판을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밤새도록 돌판을 깎아 만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모세는 급히 제작된 두 돌판을 들고서 아침 일찍 시내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판에다 모세가 깨뜨렸던 첫 돌판에 새겼던 동일한 언약 말씀을 똑같이 새겨주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중대 범죄를 저질러 진멸할 뻔한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 정상에까지 올라선 모세가 구름 가운데 휩싸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들은 하나님의 첫 메시지 또한 이것을 잘 뒷받침해줍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6-7절).
하나님께서 인자와 자비가 넘치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손 삼사 대까지 죄를 묻겠다 하신 것은 다름 아니라 황금 송아지 사건에 대해 가족의 살아있는 구성원 모두에게 공동체 개념으로 그 죄를 묻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죄에 대해 보응하실 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가기 위해서는 때로 징계도 서슴지 않으시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첫 언약이 맺어진 순간부터 가장 패역한 죄악으로 그 언약을 서슴없이 위반했건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와 더불어 새로운 언약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언약의 중개자요 기도의 중보자인 모세는 이번에 또 다시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목이 뻣뻣한 백성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산 정상에 올라가서 처음 성막 제작과 관련해 하나님의 세밀한 지침을 듣느라 40일간 체류하고 있는 와중에 하나님을 통해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는 진노하심을 눈으로 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비서 여호수아와 터벅터벅 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금 송아지 우상숭배 현장을 목격하고서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버렸습니다(32:19). 그러자 그 돌판이 산으로 내려가면서 돌과 돌끼리 부딪히며 깨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이 깨어진 것이 아니라 돌비가 깨어졌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하고 완악한지 죄를 지을 때 잘 압니다. 사람끼리 부딪히면 잘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는 얼토당토 않는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속한 이스라엘이 목이 뻣뻣한 공동체임을 고백합니다. 아니, 모세가 ‘목이 곧은 백성’이라 말하고 납작 엎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입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교만한 자는 한없이 낮추게 하시지만,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에게는 또한 한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다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맺으시면서 신신당부한 것은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나안 족속들과의 평화 협정은 나중에 가서 올무로 걸려 넘어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중 언약을 맺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유혹거리들에 노출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쉽사리 마음속에 도사린 죄된 속성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못 이기는 척 악하고 추잡한 것을 허용하고 눈감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건강한 상식을 넘어서서 과감히 세상의 가치를 쫓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 작은 머리와 가슴 속에, 생각 속에서 매일 치열한 전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고방식과의 싸움이요, 돈 때문에 사람의 인격을 파는 사업적인 마인드와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가나안 종교는 또한 성적인 즐거움을 주는 종교였습니다. ‘아세라’ 신상은 가슴을 내놓은 음란한 여신상이었고 성적인 타락을 오히려 정당하고 부추기는 문화생활로 꼬드기는 집단입니다. 오늘날 성의 남용으로 점점 더 음란해지고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경계선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중 언약을 경계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그것을 명심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하기에 늘 우리들 삶의 기쁨의 근원이 하늘에 둔 또 다른 질료들임을 깨닫고 누리며 사는 자이길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교회와 세상에서 늘 회색지대 근처에 주변 경계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극적인 해답이 되기에, 로마서에서의 권면처럼 의의 병기로 우리 자신을 드리려고 애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황금 송아지 사건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되면서 35장부터는 성막을 실제로 제작하는 데 놀라운 열성을 보여줄 정도로 바뀌어졌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하늘 양식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 우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재언약을 맺으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본질적으로 시내산에서 모세와 맺으셨던 첫 번째 언약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약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그들의 도움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는 그 땅에 있는 모든 이방신, 우상을 철저하게 없앨 것을 명령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가지의 절기인 무교절, 칠칠절, 수장절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언약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내용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중요한 한 가지의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계시며 그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며 그러므로 그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언약이 깨어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그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금송아지라는 자신들을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심과 탐심을 대변하는 형상에 불과합니다. 우상숭배의 밑바닥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과 인간의 탐욕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 예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들과 동일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언약백성으로서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만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특별히 매 주 드려지고 있는 예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안에서 우리도 영화롭게 되는 예배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예배가 나의 만족과 나의 감정을 채우며 나의 소망을 이뤄내는 장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저질렀던 죄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의 중심과 예배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나의 소망을 이루거나 나의 감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소원 성취에 초첨이 맞춰진 기복주의적인 설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배제된 인간의 감정만을 요동치게 하는 찬양, 한 인생을 통째로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진리가 아닌 인간의 지적인 만족만을 채우려는 무미건조한 예배,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아니, 더 나아가 이런 예배는 인간의 자아를 충족시키는 우상숭배의 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예배와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자리에서 우상을 섬기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 40일 동안 주야로 금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v.28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40이라는 수는 성경 속에서 여러 번 사용된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노아의 때에 홍수가 40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40일간 회개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광야를 유랑해야 했습니다. 이에 비추어보면 40이라는 수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드러내는 숫자입니다. 나아가 그 한계를 넘어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뜻 발견하고 완성하는데 필요한 시간, 숫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한계, 극한의 상황에 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또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받아들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 시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그저 형식적으로 사인을 주고받는 조약을 맺는 정도가 아닙니다.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며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이라 함은 단순히 언약적 형식을 따르고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언약의 당사자와 교제하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언약의 내용들을 지켜가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드러나는 결과는 무엇인가? 바로 광채이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이다. 성경은 모세가 증거의 두 판을 들고 산으로 내려올 때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있었던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마다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낼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경험하고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채로 우리의 얼굴이 빛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빛 이신 주님을 믿는 자들을 또한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의 빛,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며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저는 지금 흔히 말하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주지 못하는 개인적인 영성을 더 쌓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빛으로 느끼지 못하는 영성은 진정한 영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라면 그 빛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특별히 어두움에서 그 빛은 더욱 선명할 것입니다.
이아침, 우리 모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광채로 인해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두려워하며 우리로 인해서 주님을 알게 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