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호하심.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합니다(3). 야곱은 라반 모르게 도주하게 되고, 라반은 그를 추격합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언약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몰래 도망하기로 결정합니다. 삼촌 라반이 열 번이나 임금을 속여 온데다, 자신의 두 딸을 데리고 간다고 하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도망칠 때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선악 간에 따지지 말라고 명하심으로써 라반으로부터 야곱을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29).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거짓과 술수와 간교함으로 얼룩진 야곱의 생애에도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자비로운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듣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의 강국들 사이에 위치하였고 그들의 앞날이 매우 불투명하지만,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신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으로부터 하나님의 귀향 명령을 전해들은 레아와 라헬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신 것을 들은 아내들은 이전에 “리브가”가 직면했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고서, 믿음으로 생면부지의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하여 떠났던 바로 그 땅으로, 아비의 집을 떠날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처럼, 이들도 리브가와 동일한 믿음으로 약속의 땅, 약속의 나라로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 집에는 더 이상 우리의 분깃이나 유업이 없다(14절)는 말은 우리의 진정한 유업은 남편 야곱의 집에 있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세속의 때가 많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이들의 영적인 본질은 리브가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도주하는 와중에 라헬은 자기 아버지의 신상인 드라빔을 훔쳤습니다(19). 야곱의 가정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속이고 속는 세속의 틀과 습관을 완전히 벗지 못하였습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숨기고, 야곱은 삼촌에게 떠나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이렇게 도저히 칭찬할 수 없는 야곱의 성품과 삶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주장하신 일임을 라반의 입을 통하여 확인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은혜는 현재의 은혜와 장래의 은혜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미성숙하고 부족한 야곱을 그토록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앞으로 이끄실 것을, 앞으로도 보호하실 것을, 이 모양으로 사는 나일지라도 기어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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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탈출을 감행하다(1-3)
앞선 30장에서는 31장으로부터 6년 전에 야곱과 라반이 야곱의 품삯을 정했던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반과 야곱은 양 떼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 검은 것, 염소 떼 중에서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서 야곱의 소유로 삼기로 결정했고, 이후 6년 동안 야곱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31장에서는 부자가 된 야곱과 이를 지켜보던 라반 일가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고, 야곱이 라반을 떠나게 되는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지난 6년 동안 엄청난 재산을 모은 것이 자기 아버지의 소유를 빼앗은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야곱이 아내의 몸값으로 처음 14년을 종살이 하면서도 한 푼도 모을 수 없었던 지난날과 품삯을 여러 차례 삭감했던 자기 아버지의 저열함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그동안 야곱과 함께하셨던 하나님 덕분에 자신들이 야곱 곁에서 누렸던 번성의 복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하나님의 주권적 결과로 부자가 된 야곱을 시기하기 바빴습니다.
사실 라반의 아들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6년 전에 라반이 야곱과 품삯을 두고 계약을 할 때, 모든 점과 줄무늬가 있는 짐승들을 골라 자기의 아들들에게 맡기고 야곱이 맡은 짐승 떼와 3일 거리를 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야곱의 소유가 많아질 것을 대비하기 위해 라반 스스로 안전장치를 충분히 걸었던 계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 성찰해보아야 하지, 벌어진 결과만을 두고 야곱을 시기한다는 것을 옳지 못합니다. 이런 결과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겉으로는 야곱이 라반 곁에 있으며 재산을 축적한 것 같지만 라반이 그동안 누렸던 번성의 복은 오히려 라반이 야곱을 곁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라반과 그 아들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원래 그들이 주어야 할 몫을 제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저 불편함만 느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사람의 타락한 본성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자기 주변을 둘러싼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읽으려 하며,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가가 성숙함의 척도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신앙인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 주변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건강함을 지켜가야 합니다. 살다보면 인간 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긋남 이면에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다보니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과 같이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신뢰하고 살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없어야 하겠습니다.
라반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야곱을 바라보는 라반의 눈도 변했습니다. 야곱이 느끼기에 라반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전과 달랐습니다. 라반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았다는 2절을 직역하면, “라반의 얼굴이 야곱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같이 있을 마음이 없어져 적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3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시는 말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과 정확하게 대조됩니다.
(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라반의 얼굴은 야곱과 더 이상 함께하지 않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시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이제 그가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 회피했던 현실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이 내가 네게 보여줄 땅, 곧 미지의 땅이었던 데 반해 손자 야곱에게는 조상의 땅이 되었다는 것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계획을 야곱에게까지 착실히 이루실 계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속이는 자였던 야곱은 지난 20년을 라반과 함께 지내며 많이, 지긋지긋하게 속았습니다. 14년은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는 지참금 대신에 일했다고 치고,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꾼 기간은 마지막 6년에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말이 좋아 바꿨다는 것이지 삭감했을 것입니다. 밧단아람으로 오기 전까지 야곱의 인생에 인간관계에서 이토록 큰 시련이 있었겠습니까? 라반은 정말 지독하게 야곱을 이용했습니다. 이 세월이 무조건 나빴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이 시간을 통해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뉘우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소통하되 무조건 불신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부족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나를 변화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이들과도 함께함을 믿으며, 신의로 대하며 목적으로 대하되 지나치게 기대거나 과도한 기대를 품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인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2장 24절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으시고, 늘 신실하시며 자기 뜻을 한결같이 이루시는 하나님만이 의지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라반을 떠나기로 작정한 야곱이 그 첫발을 내딛습니다.
레아와 라헬을 설득하다(4-16)
야곱이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아내들, 레아와 라헬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충성스러운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야했던 것처럼 레아와 라헬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작정해야 야곱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있는 들로 레아와 라헬을 부릅니다.
(5-9)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야곱의 말은 스스로를 피해자 내지는 희생 당한 사람으로, 라반을 가해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0년의 시간 동안에 한두 마디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별별 어려움을 다 겪었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라반을 막으셨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야곱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그가 라반 때문에 속앓이했던 그 수많은 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처지를 신원해주시기를 간절히 부르짖었지 않겠습니까? 너와 함께하겠다 약속해주셨는데 야곱의 부르짖음을 못본 체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처럼 비열한 라반으로부터 가축을 강탈하여 야곱의 소유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와 가진 자의 횡포로부터 약한 이들을 지키시고, 그들의 설움 섞인 기도에 응답하시며, 모든 것을 바르게 되돌려놓으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라반이 공정하게 야곱을 대하고 그에 상응하는 품삯을 지급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라반의 재산을 강탈하여 야곱에게 주는 오늘과 같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던 말씀을 야곱에게까지 이루셨습니다. 라반은 조카였던 야곱을 실질적으로 저주하다시피 대하여 그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우리에게도 함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 위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인생을 살아갈 때, 이 은혜가 함께합니다.
지금 야곱이 자기 아내들을 설득하는 대목에서도 야곱의 이야기가 많이 치우쳤다거나 까닭없이 아버지를 음해하는 내용이었다면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지난날을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고, 그동안 라반의 횡포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왔기 때문에, 라헬과 레아는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임에도 야곱의 말이 맞다고 동의하고 있습니다.
(14-16)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라헬과 레아도 야곱보다 더 긴 세월을 아버지와 함께하면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겪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야곱이 결혼을 위해 지불했던 지참금을 딸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는커녕 모두 자신이 챙겼습니다. 당시에는 신랑이 신부집에 지급했던 지참금의 일부를 신부의 몫으로 남겨두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죽고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 딸이 혼자서 살아갈 최소한의 방편을 마련하도록 돕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습니다. 라반은 그마저도 모두 자신이 챙겼던, 딸조차 자기 재산을 불리는 데 물건처럼 사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딸들은 결혼 전에 목동으로 일했었지만 거기에 대한 몫도 챙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헬과 레아는 아버지를 떠나 남편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에 동의합니다.
야곱으로서는 새롭게 시작하는 길이 무척 두려웠을 것입니다. 에서와의 해묵은 감정도 해결해야 하고, 그보다 앞서 자기를 죽이려고 들지 모르는 라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리하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으므로, 하나님을 유일한 위로이자 힘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혼자서 혈혈단신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들에서 잠을 청할 때, 자신을 찾아오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해주신 곳이 벧엘이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함과 동시에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벧엘은 어디입니까? 내 인생 가운데 벧엘은 어떤 시점이었습니까? 내 인생 가운데서, 수렁에서 건져 올리셨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망을 주셨던 때가 언제입니까? 그냥저냥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경험했던 그 때를 기억하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며, 우리와 함께하셔서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함께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는 복된 하루 보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의 귀향 vs. 라반의 추격(17-24절)
오늘 본문은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는 야곱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라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야곱은 20년 만에 고향 가나안 땅,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향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야곱은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설렜을 것입니다.
(17-18)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그 모은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일어나다’는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서 굳은 결단을 하고 행동에 옮기다의 의미입니다. 야곱은 아내들의 동의를 얻자마자 가나안으로 향하는 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18절의 ‘이끌다’는 ‘강압적으로 내몰다’, ‘재촉하여 끌고 가다’의 의미입니다. 야곱은 마음이 굉장히 다급하여서 급하게 움직였던 것입니다.
야곱이 왜 그렇게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또 그때 라헬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19-20)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라반은 양털을 깎으러 나갔고,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서 야곱의 가족은 몰래 도망을 갔습니다.
당시 양털은 겨울이 지난 뒤 기온이 올라가는 봄에 깎았고, 목축을 하는 사람에게 양털 깎기는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추수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양털을 깎는 일에는 모든 가족이 동원되는 것은 물론 사람을 사기도 했고, 보통 3일 동안 이어졌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21-22)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야곱이 도망한 지 3일 만에 그 소식이 라반에게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라반이 야곱과 계약을 맺으며 두 사람 사이가 사흘 길이 되도록 했기 때문이었습니다(30:36). 즉 누군가가, 라반이 심어놓은 사람이 야곱이 도망가자마자 라반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전했던 것이었습니다.
(23)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라반이 그의 형제(일가친척)들을 동원해서 야곱을 7일 동안 추격해서 야곱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10일 동안 도망간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떠난 밧단아람과 도착한 길르앗은 약 480km 정도라고 합니다. 야곱은 매일 48km씩 도망을 간 것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가 약 400km가 됩니다.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려고 하면 2주일(보름) 정도 걸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매일 25-30km씩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10일 만에 480km를 도망갔습니다. 그것도 청장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이부터 노년까지의 사람이 다 있었고, 가축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도망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반은 하루에 약 70km씩 쫓아갔습니다. 라반이 복수의 칼날을 깊이 갈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걸어서는 그렇게 갈 수 없고, 말이나 낙타를 타고 추격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 일행이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단 추격을 멈추었습니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내일 또 쫓아가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간’의 문자적인 의미는 ‘선으로부터 악까지’입니다. 즉 야곱이 너에게 ‘가장 잘한 일부터 가장 못한 일까지’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라반의 추궁(25-35)
25-35절은 라반이 야곱을 추궁하는 내용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25-26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마침내 라반은 야곱을 따라잡고서, 그 곁에다 장막을 쳤습니다. 라반의 추궁내용은 몰래 도망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내 딸들’을 끌고 갔다며 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라반의 딸들을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아내들과 함께 갔던 것입니다. 라반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라반은 자기 딸들이 야곱과 결혼한 것을 사랑의 결실로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 일꾼이 하나 늘어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결혼했음에도 아들에게 집착하여 아들을 남자로 어머니와 이에 반발하는 며느리 사이의 갈등을 그린 ‘올가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의 유명한 카피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내 아들에게 사준 장난감에 불과해.”
라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내 딸들에게 붙여준 머슴에 불과해.” 라반에게 야곱은 사위로 보이지 않고 자기 집의 머슴이나 일꾼 정도로만 보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자기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다”라고 했습니다다. 그 말의 문자적인 뜻은 ‘전쟁에서 패한 포로를 끌고 가듯이 갔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라반의 억지였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딸과 결혼한 것은 14년간의 노동의 대가였습니다. 그러나 라반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14-16절을 보면, 딸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길, “우리는 아버지에게 받을 유산도 없고, 아버지는 우리를 팔아먹었고, 우리에게 줄 돈도 가로챘다”라며 자발적으로 따라나섰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라반은 나에게 미리 말했다면, 악단도 불러서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는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미리 말했다면 잔치는커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두려고 했을 것이고, 착취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라반이 도망가는 야곱을 또 그렇게 먼 거리까지 악착같이 추격한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그것은 야곱이 라반의 드라빔을 몰래 도둑질하여 갖고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모하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수척하다’, ‘창백하다’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고향으로 몹시 돌아가고 싶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라빔’은 가문의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우상이었습니다. 드라빔은 나무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은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라헬은 왜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쳤을까”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드라빔은 점을 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라헬은 이미 아버지에 대한 신뢰는 없었습니다. 자신과 남편이 도망을 가는데 드라빔이 자기네들의 도망가는 길을 아버지에게 알려주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 상당히 가격이 나가는 우상이었습니다. 자기 남편 야곱이 아버지에게 착취당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 가지고 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출발한 밧단아람에서 가려는 가나안까지는 약 800km나 되었습니다. 그 먼 거리를 가는데 라헬은 두려웠을 것이고, 드라빔이 자신과 가족들을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이 드라빔을 갖고 왔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것을 찾으면 그 사람은 살지 못할 것(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단언해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의 수색이 시작되었습니다.
(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라반의 수색 순서는 야곱, 레아, 두 여종(실바, 빌하) 그리고 라헬이었습니다. 이 순서는 의심이 많이 가는 사람에서 적게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반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헬은 갖고 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라반은 라헬이 자기와 똑같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라반은 야곱 가족의 장막 속을 다 뒤졌지만, 드라빔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이러하였습니다.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라헬은 드라빔을 낙타 안장 아래에 숨겼습니다. 오토바이 안장 아래에 상당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에 여러 물건을 둘 뿐만 아니라, 헬멧도 둘 수 있습니다. ‘낙타 안장’은 낙타를 탈 때, 위에 두고 앉는 광주리나 요람과 같은 형태의 공간이 있는 안장이었었습니다. 그 안장 위에 카펫을 깔고서 앉았습니다. 그래서 안장 아래에 드라빔 정도는 충분히 감출 수 있었습니다.
(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라반은 낙타 안장 아래는 찾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생리 중인 여성과 접촉하면 부정하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여성이 잡은 물건도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안장을 수색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것은 그것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빔을 깔고 앉아 있습니다. 드라빔에게 신적인 능력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고, 신적인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믿지 못할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깔고 앉기도 하고 믿기도 합니다. 모순입니다.
야곱의 항변(36-42절)
야곱은 드라빔을 찾지 못한 라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왜 나를 급히(불길처럼) 달려드십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외삼촌의 집에서는 아무것도(숟가락 하나도) 갖고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38)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암염소나 암양을 낙태하지 않았다는 것은 양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돌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숫양은 젖과 새끼를 제공하는 암양보다 경제적인 가치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숫양은 목자가 제사나 손님 접대를 위해서 임의로 한 마리씩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사실도 있었습니다.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당시 맹수가 와서 가축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은 목자가 책임지지 않는다고 계약서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맹수에게 물려 찢겨 죽은 것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서 배상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둑맞은 물어내야 했습니다. 라반이 청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반은 가축들이 손해가 있을 때마다, 야곱의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도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야곱은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와 싸우며 눈붙일 시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밧단 아람은 아라비아 사막의 북쪽 끝에 위치했기 때문에 40도가 넘는 일교차는 야곱을 긴장을 풀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야곱의 삶에도 불구하고 라반은 야곱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았습니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품삯을 10번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10이라고 하는 히브리 숫자는 만수(滿數)입니다. 10번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10번일 수도 있지만, 자주, 여러 번,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42절의 고백은 지금까지의 야곱의 생애 중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은 자신의 재산축적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참 귀한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용기이자 소망입니다. 그 주님을 향해서 눈을 드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 베르사유 조약,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 역사적인 평화 조약들이 있습니다. 이 조약들은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를 가져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가 간에 평화가 유지되게 하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 땅의 전쟁과 평화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도 인간관계 속에서 평화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와 갈등을 맺을 수도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지만, 어떻게 잘 화해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이 그 사이에 계심을 기억하고 평화를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그 사이에서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바랐던 라반과 야곱의 언약에 대해 말씀합니다. 도망갔던 야곱 일행을 뒤쫓아 만남으로 라반과 야곱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서로의 안전을 위해 언약, 곧 불가침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라반과 야곱의 언약(43-49절)
(43-44)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라반은 야곱이 가진 모든 것과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이 모두 자기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폈습니다. 그는 아마도 야곱의 부와 번영이 자기 집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논리를 펼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자신을 떠나겠다고 말했다면 절대 그냥 보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 전 꿈에 나타난 하나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곱 일행을 보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난날이 어찌 됐든 이제는 좋은 추억만 가지고 헤어지자는 취지로 계약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라반이 언약을 세우고자 했던 목적은 첫째, 재산 상속권의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고, 둘째, 훗날 야곱이 강성해진 후에 지금까지 자신이 행했던 악행에 대해 보복할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야곱이 도망간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림으로써 야곱을 박대하여 도망하게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구체적인 조약 체결의 방법이 등장합니다.
(45-46)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라반의 제안에 야곱은 흔쾌히 인정하고 돌을 가져와 기둥을 세웠습니다. 당시 두 집안이나 두 국가 사이에 언약을 체결할 때는 돌을 세워 놓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대표 기둥을 먼저 세우고 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가져다가 쌓도록 했습니다. 당시 증인은 사람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돌기둥 또는 돌무더기 등도 증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두 사람의 언약에 하나님이 개입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47-49)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라반은 여갈사하두다라고 불렀고,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갈사하두다는 성경에서 최초로 쓰인 아람어 단어이며,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갈르엣은 히브리어로 역시 ‘증인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스바는 ‘자세히 관찰하다’라는 단어 ‘차파’와 장소, 수단을 가리키는 단어 ‘미’가 결합된 ‘망루’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라반과 야곱이 헤어진 후에 서로 맺은 언약에 대해 얼마나 성실히 이행하는가를 하나님께서 망대에서 살펴보는 파수꾼처럼 감찰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미스바는 훗날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회개 운동을 일으키던 중요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라반은 다시금 하나님이 증인 되어 주시기를 바라며 야곱에게 진지한 당부의 말을 합니다.
증인되시는 하나님(50-55절)
(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두 사람만의 약속,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증인 되시는 언약임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라반은 조카 야곱이 자신의 딸들을 박대해서는 안 되고, 또한 두 딸 외에 다른 아내를 맞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강조합니다. 이 약속대로 야곱은 앞으로 다른 아내를 구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어서 서로 그곳을 넘어 침범하지 말자는 내용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51-52)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증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돌기둥과 돌무더기가 두 사람 간의 언약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든 한쪽이 먼저 침범하게 되면, 평화는 이내 깨지게 되고 곧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평화 조약은 잘 마무리가 됩니다.
(53-54)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음식을 먹는 것은 쌍방이 계약을 체결하고 맹세했던 신들 앞에서 언약을 잘 이행할 것을 확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두 사람은 언약 체결 후에 함께 먹고 마시고 화해하며 기쁨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평화 조약으로 인해 두 가문은 좋은 관계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라반은 비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꿈속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움과 또한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바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개입하시고 역사하셔서 믿음의 사람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 삶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체험을 통해 깨닫고 고백헐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겸손히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어서 라반의 인사와 축복으로 본문은 마무리가 됩니다.
(55)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라반은 일이 잘 해결된 것에 기뻐하며 딸들과 손자들에게 입맞춤의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축복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라반은 지난 20여 년 동안 야곱을 이용했습니다. 야곱 역시 당하고만 있지 않고 외삼촌 라반을 향해 복수하듯 결과적으로 그를 이용했으며, 그 근본은 자신의 욕심이었고, 욕망이었습니다. 그런 연약함과 죄성을 가진 야곱이었음에도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아 주시고, 믿음의 혈통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봅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며 은혜의 언약입니다. 이 은혜의 언약을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라반과 야곱 사이에 계셨던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을 십자가로 허물어 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사역을 늘 기억하며 감사하며, 우리 역시 이 땅에서 평화의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1202년에 중병을 앓은 후로 일생을 오직 가난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자신은 평생을 걸인처럼 살면서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어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밤 누군가가 프란치스코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초라한 걸인이 비에 온몸이 젖어 추위에 떨며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그를 안으로 데리고 간 프란치스코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한센병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 배가 고프다며 저녁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고름이 흐르고 썩은 냄새가 나는 환자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개의치 않고 음식을 대접하고, 옷을 갈아입힌 후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막 잠들려고 할 때, 그 걸인이 다가와 너무 춥다며 같이 잘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결국 그 한센병 걸인과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걸인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고름과 진물, 썩은 악취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지만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그 걸인을 자신의 두 팔로 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녹여 주었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이 되어 프란치스코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옆자리에 누워 자던 걸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 이상하다 싶어 다시 잠자리를 살펴보았는데 그 사람과 같이 잔 흔적 자체가 없었고, 오히려 방안은 깨끗하고 빛이 나며, 냄새마저 향기로웠습니다. 그 순간 프란치스코는 상황을 깨닫고,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주님께 그의 침상에서 영혼으로 부르짖으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유명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밟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하기를 바라며, 일평생 우리 역시 그런 평화의 도구로 드려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하나 됨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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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약은 자입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계산이 빠른 자 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도 빼앗고, 아버지의 이삭의 축복도 교활하게 가로챈 약빠리입니다. 그 약은꾀와 교활한 계산으로 하여금 야곱은 세상 어디를 가도 떵떵거리며 잘 살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도리어 야곱은 자기보다 더 한, 강호의 고수(?)를 만나 험한 삶을 삽니다.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챈 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야곱은 거기서 자신보다 더 한, 한 수 위인 라반의 약은꾀와 속임에 20년을 넘게 고생고생을 합니다(창29-30장). 여기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과연 야곱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더 한 외삼촌의 약음과 속임에 여러 번 당하고 치이면서, 많은 밤을 한숨을 뱉고 눈물을 삼켜가면서, 야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보다 더 한 놈이 있네, 내가 좀 더 분발해야겠어. 이래가지고 남 속여 먹겠어.' 했겠습니까? 아니면, "아이고, 세상 징글징글하다. 이렇게 악한 세상에 나처럼 순수하게 약은 사람은 어떻게 빌어먹고 살겠어. 어휴." 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야곱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았겠습니까? "아, 내 약은 수로 안 되는구나. 내 약음과 꾀, 그 악착같음으로 한계와 절망만 있구나. 내 힘과 내 약은 수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며 오해이며, 무지 이구나.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스스로는 안 되네요." 분명히 그리 고백하고도 남았습니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야곱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지난 시간 살펴봤던 '점 있는 것과 얼룩무늬 양떼 품삯 사건(30장)'로 인해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에 대해 적개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아 떼어먹었다(1절)" 하는 것입니다. 하긴 최근 라반 역시도 야곱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같지는 않았습니다(2절). 야곱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과 못마땅한 표정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야곱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이제 더 이상 라반의 집에 있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는 결정, 고민도 깊고 밤도 깊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야곱아, 이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절)."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두 번째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20여 년 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는 야곱을 벧엘에서 첫 번째 만나주셨고, 오늘 이 위기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두 번째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악착같이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했던 야곱은 오늘 또 다시 하니님을 만나며 확인하는게 있습니다. 절절히 배워 가는 게 있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이 일 하시는구나.' '점 있는 것과 얼룩무늬 양떼 품삯 사건도 내 지혜와 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개입해주셨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챙겨주신 거구나(7-9절). 악착같은 내 몸부림과 애씀이 나를 살리고 나를 지킨다고 여겼건만, 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셨고, 막아주셨고, 살리셨구나(7절).'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 꿈과 내 그리움이 나를 고향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벧엘에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뤄 가시며 내 인생을 이끌고 가시는 거구나(13절).' '아,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내 약은 수와 꾀와 계산이 일하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이 내 삶에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절절히 배워가고 확인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본문에서 야곱이 라헬과 레아에게 고백하는 장면에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신앙을 배워갑니다.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기억하십시다. 기독교 신앙은 사이다의 톡 쏘는 맛의 체험으로 배워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토록 원하는 내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기적을 경험하며 배워가는 것도 아닙니다. 밤에 자다가 환상을 보는 신비로 배워가는 것도 아니고, 탁월한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매일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는 하찮고 값없고 보잘 것 없는, 때로는 지루하고 비루한 삶의 현실 속에서 부대끼고 씨름해 가면서, - 이것이 정직한 우리의 실존이요 삶의 자리입니다 - 그 질퍽한 삶의 현실 가운데 최선을 다해 살아내면서, '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살아 주시는구나,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구나'를 조금씩 알아가며 눈떠 가는 것입니다.
무지한 나를 설득하고 계시고, 귀먹고 눈먼 나에게 끊임없이 말 걸어 주시는 하나님을 확인해 가는 것입니다. 참 우리는 못 알아듣고 열심히 살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끝내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가르쳐 내십시다. 알게 하십니다. 믿어가게 하십니다. '아, 나는 아닙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 하나를 우리의 만만치 않는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내면서, 알아가고 배워가고 익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혹독한 야곱의 삶의 자리에 개입하여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듯 말입니다. 자기의 약은 수로 ‘충분히 해볼 만 하다’ 착각하는 야곱이 당면한 그 고통과 쓰라림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빚어가시듯이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야곱이 고되다고 탄식했던 그 혹독한 자리는 하나님의 일터였던 셈입니다.
오늘 하루의 시련을, 하루의 시험을, 하루의 고단함과 힘겨움을, 하루의 인내를, 묵묵히 그리고 소중히 감당해 내십시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수많은 삶의 정황 들을 몸부림으로 살아내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배워가고 신뢰해가며 고백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의 정황은 하나님의 일터이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기적의 자리이고,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가는 은혜의 자리임을 기억하십시다.
20년을 함께 살며 동고동락 했을찌라도 헤어져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20년 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았던 야곱이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바라보는 시선을 예전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 또한 외삼촌 라반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라반의 딸이면서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 역시 라반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습니다. 한 때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던 사이였으나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편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20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날 때, 야곱은 가만히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20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야곱이 가만히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어제 살펴보았던 7절에 나옵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20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외삼촌 라반의 집을 가만히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외삼촌 라반이 지난 20년 동안 품삯을 열 번이나 자기 맘대로 변경했으며, 심지어 야곱을 해치려고 까지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외삼촌 라반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 결과 라반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라반이 부자가 되는데 큰 공을 세운 야곱에게는 아무런 품삯도 주지 않았고 오히려 해하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야곱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야곱에게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 14년은 두 아내를 얻기 위해 일했습니다. 사실 7년이면 자신이 원했던 사랑하는 라헬을 얻을 수 있었지만, 라반의 속임수 때문에 14년이나 일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아내를 둘이나 얻은 후, 야곱은 6년 동안 더 외삼촌 라반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위해 20년을 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20년을 일한 야곱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아내 두 명 뿐입니다.
한 곳에서 20년을 일했으면, 그 직장은 그 사람에게는 인생 전체를 바친 곳입니다. 그것도 가장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젊은 시절의 20년은, 인생의 황금기나 다름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바쳐 일한 곳이라면, 그 직장의 주인은 그 일꾼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라반은 20년이나 일한 야곱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야곱이 라반에게 자신의 몫을 요구했을 때, 비로소 라반은 마지못해 허락합니다. 그것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양 중의 검은 것만을 야곱의 것으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평생을 목축업에 종사했던 라반의 입장에서 야곱에게 허락한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며, 라반에게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년을 일한 야곱에게, 남도 아닌 조카면서 사위에게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라반은 세상적인 사람이었으며,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자신만 알고 자기 욕심만을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일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이나 3000년 전이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상대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몫을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 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 욕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인권은 맘대로 짓밟아도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서 자신이 받아야 할 권리를 박탈당할 때,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지 잠시라도 생각해 보았더라면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일을 생각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를 20년 동안 지켜본 야곱은 라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습니다. 라반은 삼 일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즉시 라반은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쫒아가 야곱을 따라잡았습니다. 이대로 붙잡히면 라반 앞에 야곱은 고양이 앞에 쥐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저녁에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24절입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는 의미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라반의 입장이 있고, 야곱의 입장이 있습니다. 라반 입장에서 볼 때 야곱은 라반의 소유를 몰래 훔쳐 야반도주한 도둑놈입니다. 20년 전 갈 곳 없고 의지할 것 하나 없는 떠돌이에 불과했던 불쌍한 야곱을 받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어엿한 가정까지 이루며 살게 해 주었더니 감사한 마음도 없이 몰래 도망가 버린 인간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야곱 입장에서 보면, 라반은 축사 주인처럼 20년 동안 노예로 부려먹으면서 일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은 악덕 기업주입니다. 누구의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라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라반 같은 인간입니까? 야곱 같은 인간입니까? 내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나의 소유를 몰래 훔쳐 야반도주한 배은망덕한 도둑놈이 있습니까? 아니면 일한 댓가를 제때 지불하지 않은 악덕 기업주가 있습니까? 그게 아니면 바로 내가 남의 소유를 몰래 훔쳐 야반도주한 배은망덕한 자입니까? 아니면 일한 댓가를 제때 지불하지 않은 악덕 기업주입니까?
이 시간 말씀의 거울 앞에 나를 비추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손해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내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십시다. 그리하여 이 땅에 ‘축사노예’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도 없고, 또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일도 없는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야곱과 함께 하심으로 야곱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야곱의 인생을 빈손으로 이끌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고난과 수고를 보시고 결코 짧지 않은 여호와의 손길로 이끌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야곱과 라반의 언약에 대한 말씀입니다. 43절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야곱의 말에 외삼촌 라반이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라반의 대답은 야곱의 모든 소유가 다 자기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라반은 야곱의 모든 소유를 야곱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라반의 생각과 심리상태를 엿보게 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모든 소유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을 위해 20년간 일하고 얻은 야곱의 것입니다.
사람이 지닌 속성 중 하나는 잘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 인정해야 하는 것임에도 잘 인정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부정하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특히 선에 대해, 진리에 대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병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있는 부패한 죄의 속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은 마땅히 인정받아야 하고, 진리는 시대를 초월해 인정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44-46절입니다.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그리고 이어 라반은 자신과 야곱 사이에 언약을 맺고 돌로 기둥을 세워 둘 사이 언약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다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고 한 것은 라반과 야곱 사이의 언약에 대한 증인으로 세운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돌은 약속과 증거와 관련해 상징적으로 많이 사용된 광물질입니다. 창세기 28장의 야곱, 여호수아 4장의 여호수아, 사무엘상 7장의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고대 사회에서는 돌에 역사적 사건이나 기록을 새기고 증거를 삼은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잘 변하지 않는 돌의 특성을 이용해 언약과 증거의 영원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44절의 ‘언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베리트’인데 ‘자르다, 죽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언약이란 생명을 담보로 한 엄숙한 약속임을 가르쳐 줍니다. 마치 돌에 새긴 글씨처럼 결코 파기되어서는 안 되는 쌍방 간의 약속이 언약입니다. 기분이나 감정, 상황의 변화에 따라 쉽게 파기되거나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신뢰와 책임에 기반을 둔 서로간의 약속이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피를 흘려 맺으신 피의 언약, 생명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47절에서 50절입니다.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여갈사하두다’와 ‘갈르엣’은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둘 다 ‘증거의 무더기’란 뜻입니다. 라반과 야곱은 각각 자신들의 언어로 돌무더기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또한 그 돌무더기를 ‘미스바’라고 불렀는데 ‘미스바’의 뜻은 ‘망루’라는 뜻으로 파숫군이 높은 망대에서 살펴보듯 하나님께서 라반과 야곱 사이에 언약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살펴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계약 사회입니다. 모든 것이 다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약서를 정확하게 작성하는 것이 중요하고, 계약은 성실하게 이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기에 불신과 의심의 풍조가 확산대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아닌 두렵고 외롭고 고립된 무인도와 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약을 맺기 전에 잘 판단하고 계약을 맺었다면 성실하게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 계약은 억압과 무거운 짐의 노예계약이 아니라 주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은혜의 계약, 생명의 계약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 백성 된 자로 말씀에 성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피의 계약에 참여한 자가 지켜야 하는 삶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걸린 계약서를 귀중히 여기듯 매일 말씀을 귀히 여기고 즐거워하며 말씀이 명하는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51절에서 55절입니다.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선물은 내적 기쁨입니다. 친밀한 연대이며 영적 연합니다. 궁극적으로 본향을 향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본향을 향한 소망을 품고, 친밀한 연대감 속에서 위로를 얻고, 하늘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성실히 말씀의 삶을 이행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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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형 에서를 두려워하여 부모님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약2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창31:41). 20년동안 야곱이 아내와 자식들을 얻게 되는 기쁨도 있었지만 외삼촌 밑에서 독립하지 못하면서 겪었던 고생과 아픔도 있었습니다. 타향살이 막바지 어느 시점에서 야곱이 막내아들 요셉을 라헬로부터 얻게 되자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외삼촌 라반에게 귀향을 요청합니다. 요청할 때 일한 대가로 얻었던 아내들과 자식들을 함께 데려 가길 희망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요구이지만 외삼촌 라반의 좋지 못한 성격을 알았던 야곱은 조심스럽게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때 라반은 야곱에게 떠나는 것을 만류하고 품삯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라반의 이러한 발언은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고 야곱이 떠난다고 하니 마지못해 했던 말이었습니다.
만약에 생질을 사랑하는 외삼촌이었다면 벌써 독립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떠나는 것을 만류하면서 그동안 지불하지 못했던 품삯을 주려는 진정한 의도가 있었더라면 본인이 그 품삯의 규모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반은 품삯 정하는 것을 야곱에게 넘겼습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화적 차이는 있겠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겪었던 외삼촌의 행동으로 보아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한다고 해서 쉽게 받아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본문 7절에도 야곱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7절 상반절은 야곱이 그의 아내들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입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열 번은 단순히 수치가 아니라 ‘언제나’, ‘항상’ 그랬다는 의미로 자주 품삯을 변경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만류하면서 품삯을 정하라고 말하자 욕심많은 외삼촌의 본성을 알고 특이한 제안을 합니다. 양 떼 중에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을 자신의 품삯으로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양의 무늬로 각기 다른 소유자의 재산을 구분하는 것은 같은 지역에서 방목할 때에는 아주 기발한 생각으로 보여집니다. 양을 구분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주 기발한 생각이었으나 문제는 개체수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양은 흰색이 우성이고 검은 것이나 무늬가 있거나 얼룩진 것은 열성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양 떼에서 흰색이 대다수이고 얼룩진 것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야곱이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자신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라반에게 재산분할권을 요청하자 탐욕스러운 라반은 얼른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야곱은 자기 나름대로 전략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외삼촌에게 그러한 제안을 했을 경우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고, 또한 자신의 양치기 경험으로 충분히 얼룩진 것의 개체수를 증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야곱과 라반사이의 재산분할방식의 적용시기와 조건이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라반은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인 직후 자신의 아들들에게 한 명령을 내립니다. 양 떼 중에 얼룩지고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은 전부 분리하여 야곱이 일하는 양 떼가 있는 지역으로부터 3일 길이 떨어진 곳으로 보내버립니다. 여기서도 라반의 탐욕을 보게 됩니다. 얼마 되지 않은 얼룩진 것들을 그냥 주어도 될 것인데 그것마저도 모두 제거해 버림으로써 야곱의 재산증식을 원천봉쇄해 버립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것은 라반의 착각에 불과했지만 외삼촌으로서 할 도리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물질에 눈이 어두우면 형제도 없고, 부모 자식도 없습니다.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베품과 배려의 정신이 사라져 가는 오늘날에 라반과 같은 자들이 많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끊임없이 노동을 착취하고, 임금을 바꾸고, 권력으로 아랫사람을 짓누르는 일들은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야곱처럼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일들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선악간의 심판을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이와 유사한 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적절한 때에 갚아주실 것입니다.
야곱 역시 하나님의 도움으로 보상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재산을 증식시켜 주셨습니다. 양들이 새끼를 낳을 때마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을 많이 낳도록 하셨습니다. 12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하여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는 자의 행한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너무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방법으로 도와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야곱은 꾀가 많은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꾀가 많던 그가 라반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했는데 그것을 만회해 보려고 아마도 무척 애를 썼을 것입니다. 양 떼를 구분하여 재산을 분할해보려는 시도 역시 그러한 노력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이용해서 얼룩진 종들을 많이 생산해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창30장 37절 이후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야곱의 꾀는 튼튼한 양이 교미를 할 때는 그 가지들을 옆에 두었고 약한 양이 교미를 할 때는 그 가지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행동은 오늘날 상식으로 보면 상당히 엉뚱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미신적 또는 주술적 행동으로 보여집니다.
야곱은 양들이 알록달록한 가지들을 보면서 교미를 하면 얼룩진 새끼를 출산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약에 야곱이 시도했던 그 방법이 옳다면 생물학적으로 같은 포유류에 속한 사람 역시 아들 딸의 선택적 출산이 아주 단순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야곱이 꾀를 내어 선택한 이러한 방식의 결과로 야곱의 재산이 증식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30:43에는 야곱이 번창하여 양 떼가 많아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재산증식이 야곱의 엉뚱한 방식을 통해서 이룬 결과가 아닙니다. 야곱 스스로도 그것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자신의 꾀로 가축이 늘어난 것이 아님을 아내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 방식으로, 나의 오래된 경험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착각하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값없이 주십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이 결코 아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그의 아내들에게 꿈에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본 내용을 고백합니다. 12절 상반절입니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양들이 교미할 때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10절과 같은 내용인데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하나님께서 도움이 되셔서 얼룩진 양들을 낳게 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획득한 얼룩진 양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룩지게 하는 열성인자를 가진 흰색 숫양들이 많이 교미하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꿈으로 이것을 보여주시면서 야곱이 은혜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야곱이 받은 복이 단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보상의 대가로 온 것이 아닙니다. 창28장을 보면 야곱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오기 전에 ‘루스’라는 곳에 머물러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잘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2가지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는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입니다. 전자는 야곱에게만 말씀하신 약속이 아니라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했던 약속의 재확인이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가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약속은 네가 형 에서를 피하여 라반의 집으로 가지만 어디로 가든지 너를 이끌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고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이루기까지’ 즉,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식언치 않으시고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3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아내들에게 고백하기를 5절에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야곱은 자신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이루었고, 여기까지 왔고,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 중 내가 스스로 이룬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으로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고백하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남편을 붙들고 아내를 붙들고 혹은 자식을 붙들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역사의 한 부분을 써가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왜곡된 시선으로 볼 때가 많습니다. 섭섭함이 있고 상처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서로간의 관계를 더 망치기도 합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섭섭함과 상처가 사람들의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라반과 야곱의 어그러진 관계가 그렇습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섭섭함 속에서 이미 왜곡된 시선을 가지고 서로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 속에 긴장이 흐릅니다.
라반은 야곱의 품삯을 10번이나 바꾸었습니다. 그만큼 야곱을 속였던 것입니다. 속았던 야곱은 말로는 못하지만 섭섭함이 있습니다. 착취를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20년이나 같이 살았던 장인에게 인사도 없이 가족과 재산을 챙겨서 몰래 도망갑니다. 거기다가 야곱의 아내 라헬은 그냥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을 훔쳐서 갑니다. 훔친다는 것 이면에는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 이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과 라반 그리고 그 일가의 관계였습니다.
속고 속이는 어그러진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할 말이 많습니다. 관계가 이쯤 되면 자기 실수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만 보입니다. 라반도 할 말이 많고 야곱도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잘못이 명백해 보이는 라헬도 분명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떻게 했느냐? 아버지가 한 짓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왜 속으로라도 말 안하겠습니까? 피해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했던 것은 생각하지 않고 피해 받은 것만 생각합니다.
야곱이 도망갔다는 것을 라반이 3일 만에 듣게 됩니다. 늦게 알아채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30장36절을 보면 라반과 야곱이 거처했던 거리가 3일 길 거리였습니다. 라반이 이렇게 3일 길을 떨어뜨려 놓은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신뢰하지 않고 착취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야곱이 도망한 소식을 듣는데도 3일이나 걸리게 됩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 것입니다.
뒤늦게 서야 이 소식을 들은 라반은 자신이 야곱에게 잘못했던 것은 생각하지 않고 야곱을 괘씸하게 생각합니다. 자기를 속였다는 생각에 분노로 가득차서 자기 형제들을 데리고 야곱을 잡으러 갑니다. 라반이 얼마나 분노 했는지를 따라잡은 날짜에서 알 수 있습니다. 7일 만에 따라잡습니다. 23절입니다.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7일 만에 야곱 일행을 따라 잡았다는 이야기는 라반이 분노로 가득 차서 밤낮으로 달렸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질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7일 만에 따라 잡는 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만히 계산해 보면 압니다.
야곱도 도망가는 길인지라 당연히 발걸음을 서둘렀을 것입니다. 라반이 소식을 들은 것이 3일 걸렸다고 했으니 라반이 도주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야곱은 이미 3일 길을 더 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리상으로 이미 6일 길이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족이 있어서 조금 늦다하더라도 이미 6일 거리가 나 있는 것을 불과 일 주일 만에 잡는다는 것은 초유의 일입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안자고 살기등등해서 미친 듯이 분노의 질주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입니까? 아니잖아요. 왜 이런 일이 친족간에, 장인과 사위 간에 벌어지는 것입니까?
이미 6일 길이 벌어져 있는 거리를 7일만에 따라 잡는다는 것은 야곱을 뒤쫓는 라반의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최종병기 활'의 류승룡 같았습니다.
이런 추격전은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수들 간에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이렇게 뒤틀리고 어그러진 관계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무엇이 딸들이 아버지를 마음으로 배척하며 아버지의 것을 훔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섭섭함과 상처를 드러내게 했습니까? 욕심이 묻어 있는 왜곡된 시선으로 20년 세월을 서로에게 쏘아댔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도 원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장인과 사위도, 아버지와 딸도, 남편과 아내도 그렇게 쫓고 쫓기는 관계로 살 수 있습니다.
24절입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야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상황가운데 개입하셨습니다. 야곱이 절대적으로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못했든 잘했든 상관없이 위기에 부딪히면 자녀의 일에 개입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고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기를 막아 주시는 것이 우리들이 훌륭하고 매사에 옳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수 없는 위기의 순간마다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파국을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뭐 하나 잘하면 꼭 그것을 드러내고 공치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중에 라반에게 들어서 상황이 진정되고 마무리 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개입하셨구나 알게 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자라는 인간들인지라 다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을 다 알지 못합니다. 뭔가 내 인생이 안 풀리고 피할 길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길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의 심장은 진작 적장의 화살에 뚫렸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자칫 장인의 활에 사위의 심장이 뚫릴 이 위기의 순간이 어떻게 해결 됩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해결됩니다. 가족이 서로 죽이려는 이 파멸의 순간에 하나님 개입하시지 않습니까? 20년간 뒤틀린 관계입니다. 인간이 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게 오늘 라반과 야곱의 추격전입니다. 7일 만에 따라잡는 무서운 추격전입니다. 라반의 눈빛, 야곱의 눈빛...죽이겠다는 분노의 눈빛, 살고 싶다는 절박한 눈빛...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풀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푸십니다. 개입하십니다.
하나님 개입하시되, 둘 사이를 홍해를 가르듯 그렇게 갈라놓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 광야를 돌리시듯 라반의 눈을 어둡게 하여 야곱을 못보게 하고 빙빙 돌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개입하셔서 하시는 말씀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라반에게 다른 것을 말씀 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하고 붙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 다 서로 간에 관계가 이미 뒤틀려 있습니다. 왜곡된 시선 가지고 시시비비 가리려고 해봐야 감정만 상하고 분노만 더 한다는 뜻일 겁니다. 악화된다는 뜻일 겁니다. 또 야곱의 선악이 아니라 너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뜻도 들어 있을 겁니다.
'너는 삼가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이 한 문장을 오늘 우리의 마음에 품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선악을 가릴 만큼 내 시선이 왜곡되어 있지 않고 바른지, 내가 정말 모든 것을 바르게 다 알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선악간에 가리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마땅한 방법이겠는지도 생각하면서 서로간의 관계들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다 라반이고 야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개입해주시는 은혜요, 우리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자가 아니라 그저 은혜의 수혜자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일이 풀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족들 간에 시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이것이 잘못했고, 니가 전에 그랬기 때문에 내가 그랬고, 너한테 무슨 무슨 문제가 있었고...이러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왜곡된 시선을 풀지 못하고 그 시선으로 상대를 묶으려 하면 오히려 자신이 그 시선에 묶인 채 쫓기는 인생을 삽니다. 평생 묶인 채 화살에 쫓기며 살아야 합니다.
잘 보십시오. 성경에 자세히 기술되지 않았지만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앞가림에 능한 사람 아닙니까? 그 기질이 어디 갑니까? 형을 피해 삼촌의 집에 왔다고 사람이 이전과 확 달라졌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형 속이고, 아버지 속이고, 머리 굴리는 것, 아마 모르긴 몰라도 삼촌 집에서도 똑같이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치보고 있다가 적응될만하면 자기 기질 나타납니다. 아마 삼촌 라반이 보기에도 얄미운 행동했을 것입니다. 얍삽하게 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라반이 할 말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야곱이 어떤 인간인지 아시잖아요. 지 피붙이 애비나 형한테 했던 것 보십시오. 여기 와가지고 똑같이 했어요. 근본이 틀려먹은 인간이에요. 야곱은... 나도 그동안 봐준거 많다구요.'
야곱이 100% 옳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라반에게도 자신의 사위와 딸에게 해를 가하는 씻을 수 없는 악을 제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개입하시지 않으시고 분노대로 상황이 흘러갔다면 야곱, 라반 둘 다 망하는 것입니다. 라반이 훗날 죽음을 앞두었을 때 자기 딸들 인생 망친 애비로 가족들의 상처와 원망 속에서 쓸쓸히 눈 감지 않았겠습니까?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원하십니까? 자꾸 옛날에 했던 일, 과거 끄집어내서 시비 가리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회복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묻어 두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알면서도 모른 채 하고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라는 말 이면에는 라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심판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라반에게 개입하시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라반, 야곱 둘 다 자격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것 있을 때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묻어 두고 덮어 두라. 그냥 품으라. 받은 상처 계산하지 말고 용납하고 베풀라. 내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도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고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지만 모른 채 우리에게 속아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많은 망가진 관계들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왜곡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지내왔기에 풀기 어려울 정도로 뒤틀려져 버린 관계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해와 용납을 말씀하실 때 그것이 내가 억울하게 손해 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임을 알고 순종하시 바랍니다. 그러면 모두가 회복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사모함으로 나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헝클어진 관계들이 풀리고 회복되는 복된 한 날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43-44절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도망치듯 자신의 집을 떠난 야곱을 뒤쫓아 온 라반은 야곱과 약속을 세웁니다. 라반은 야곱의 모든 소유가 다 자기 것이라고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자기가 자기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며 자신을 미화시키며 자신의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라반이 그렇게 한 것은 지난 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흥분되고 긴장된 상황의 라반과 야곱 사이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치 않은 경우는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시면 우리 삶의 문제를 풀 길이 없기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의 걱정, 근심, 상처, 분노, 두려움, 궁극적으로 죄와 심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 존재와 삶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말씀해주시고, 성령으로 일깨워 주시며, 약속을 주셔야 합니다. 그 때 삶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존재가 바뀌고 내면과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부정적이며 불만족스러운 상실의 삶을 반복합니다.
45절에서 53절은 라반과 야곱의 언약식의 말씀입니다. 야곱과 라반은 돌기둥과 돌무더기를 세우고 둘 사이의 언약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라반은 그 증거의 돌무더기를 아람말로 ‘여갈사하두다’라 명명했고, 야곱은 히브리말로 ‘갈르엣’이라 명명했습니다. 둘 다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또한 ‘미스바’라 명했는데 ‘미스바’는 ‘지켜보는 자, 망대’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둘 사이의 언약의 증인이시라는 의미로 그리 한 것입니다.
고대 시대 돌에 글자를 새기거나 돌로 언약의 증거를 삼은 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 돌의 특성과 관련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약속이나 언약은 깨져서는 안 되고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돌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약속은 존중되어야 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작은 약속이든 큰 약속이든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켜져야 합니다. 시간약속, 전화약속, 계약, 결혼 언약 등등은 철저하게 존중 되어야 합니다. 약속이 존중되지 않고 지켜지지 않을 때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가정, 사회, 국가의 기반이 점점 약해지며 공동체의 해체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약속이나 언약에 신중해야 합니다. 작은 약속이라도 신중하게 하고, 중요한 약속은 더더욱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걸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위로가 되고 소망을 줍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약속, 생명의 약속, 천국의 약속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구약, 신약입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다 들어 있습니다. 구원과 생명, 살아가며 필요한 모든 약속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라반과 언약을 맺은 뒤 야곱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라반은 아침에 자녀들을 축복하고 길을 떠납니다. 54-55절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예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일깨워주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시켜줍니다. 예배의 축복과 비밀입니다. 이 새벽도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다시 일깨움 받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약속위에 우리 자신을 견고히 세우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사람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약속의 사람은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변함없이 존재를 사랑합니다. 내게 주신 인생의 동행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을 위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라반과 야곱의 언약이 라반과 야곱 모두를 위한 언약이듯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과 묶어주고, 사람을 통해 행하시고 이루시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망도 없고, 삶이 불만족스러우며, 일그러진 삶을 사는 것은 인생 속에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없기에 물질적이며 이기적이고 공허하고 외로운 인생을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자들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그 약속에 대한 신뢰 안에서 기다림의 인내와 소망,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며 사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