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강별학의 비밀 강별학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제가 헌원 선생께 요구한 일은 헌원 선생께서 이미 이행하셨 소! 헌원 선생께선 진 조건을 완전히 치루었는데 왜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헌원삼광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잠시 동안 머뭇거리더니 엉거 주춤 하게 입을 열었다. "당......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것이오?" "패하는 자는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다는 것이 우리의 내기가 아 니었오? 내가 헌원 선생께 주는 벌은 바로 그 한 잔의 술을 마시 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헌원 선생께서 이미 그 술을 마셨으니 우 리의 약속도 끝나지 않았소?" 헌원삼광은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있더니 조용히 뇌이었다. "나를 죽인다면 강호의 사람들이 필시 당신을 존경할 것이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나에게 강호의 희물을 구해오라 해도 나는 구 해올 수밖에 없었는데, 하지만......." 헌원삼광은 길게 한숨을 토해낸 후 쓰디쓰게 미소를 지으며 다 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벌칙이 기껏해야 한 잔의 술을 마시게 하 는 것이라니......." "내가 돈만 많았다면 더욱 많은 술을 권할 텐데......." 헌원삼광은 술병을 들어 단숨에 모두 마셔 버린 후 입을 닦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앙천대소했다. "좋소! 과연 강 대협 답군요! 나 헌원삼광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굴복하거나 누구를 존경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만 큼은 강 대협에게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소!" 말을 마치자 그는 소어아의 앞으로 걸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 다. "이 녀석아, 이젠 네 일에 더 이상 참견할 수가 없구나. 그러나 강 대협께서 이곳에 계시니 저 녀석들이 감히 너를 더 이상 괴롭 히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야겠다...... 잘 있거 라!" 그의 입에서 '잘 있거라'라는 말이 떨어질 즈음엔 그의 몸은 이 미 창문밖으로 나가 있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이때 달은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창문 밖에서는 차가운 밤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강별학은 헌원삼광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중얼거렸다. "과연 사내 대장부다운 인물이로구나!" 옥면신판 소자춘이 웃음 띤 얼굴로 한 걸음 나섰다. "저 사람은 십대악인에 속하는 사람인데 강형께서 왜 이 기회에 그를 없애지 않았습니까? 이 기회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는 강별학을 형이라고 불렀지만 표정은 제자가 스승을 대하는 것보다 더욱 공손했다. 강별학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토록 영웅다운 인물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소? 소형께서는 어찌 함부로 없애 버린다는 말을 하시오! 더군다나 그 사람은 도 박을 즐기는 것 외에는 별로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지 않소?" 소자춘은 이러한 핀잔 섞인 말을 듣자 즉시 고개를 숙이며 얼굴 을 붉혔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또한 그런 내기에 지고도 깨끗이 승복하는 그런 성미가 이 세 상에 몇이나 있겠소?" 이 때 소어아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헌원삼광이 당신의 말을 듣지 못 한 것이 매우 애석하군. 만약 그가 그 말을 들었다면 감격하여 눈물마저 흘렸을 것이오." 강별학은 이 말을 듣고는 그에게 눈길을 돌려 위아래로 훑어보 더니 불쑥 물었다. "공자도 나의 이 못된 자식의 친구요?" "친구라는 말이 실로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렵군요." "나의 자식이 너무 못돼먹었으니 공자께서 많이 보살펴 주셨으 리라고 생각하오."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의 그 못됐다고 하는 자식을 보살펴 주기는 커녕 당 신의 그 못됐다고 하는 자식이 도리어 저를 너무나도 잘 보살펴 주어서 죽을 지경이오. 만약 제가 명이 길지 않았다면 당신의 그 못됐다고 하는 자식 덕분에 목이 벌써 달아났을 것이오." 강별학은 강옥랑에게 눈길을 돌려 험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네가 또 무슨 되지 못 한 짓이라도 했단 말이냐?" "제가 어찌 허튼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떨고 있었다. 강별학은 여전히 대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 얼굴을 보니 이미 좋지 않은 짓을 범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번에 집에 돌아가면 오랫동안 근신하도록 해라. 잘못을 저질렀다 고 생각되면 기꺼이 그 벌을 받는 것이 사내 대장부로서 행해야 하는 도리다. 알겠느냐!" 강옥랑은 고개를 더욱 더 낮게 숙이고 또한 더욱 더 떨리는 음 성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소어아는 보라는 듯이 수갑을 찬 손을 쳐들며 입을 열었다. "그가 반성을 하는 동안 나도 반성을 좀 해야 되겠소." 이때 강별학의 눈길이 그들 손에 차고 있는 정쇄(情鎖:수갑)에 머물렀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까짓 사파(邪派)의 물건쯤은 내가 충분히 열 자신이 있으니 나를 따라 오너라......." "저도 당신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이곳에 계신 분 들이 모두 저의 생명을 노리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강별학은 잔뜩 눈썹을 찌푸렸다. "누가 너의 생명을 노리고 있단 말이냐?" "여기있는 강호에 이름을 날리는 영웅호걸들이지요. 칠팔 명이 나 되는 영웅들이 나 하나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저에게 이보다 더욱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강별학은 사방을 두루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소자춘, 이적 등은 심지어 귀 밑까지 빨갛게 붉히고 있었 다. 강별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내가 보충해 주마." 이때 창 밖 먼 곳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곡조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강 대협은 수단이 높아 사탕 속에 독약을 넣네. 먹을 때는 달 콤하기 짝이 없지만 뱃속에 들어가면 불 같이 타오르니 이 보다 더욱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그에게 속고 있으니......." 이적이 대노하여 외쳤다. "누구냐? 감히 강 대협을 모욕하다니. 빨리 추격합시다......." 강별학은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고 다만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 를 말렸다. "사람이 유명해지면 욕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오. 불행하게도 내가 유명해졌으니 욕을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그러니 굳이 우리가 쫓아 갈 필요조차 없지 않겠소?" "나 소어아는 누구에게도 탄복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만큼은 당 신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강별학이 살고 있는 곳은 너무 초라해서 친히 방문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믿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집은 귀산(龜山) 아래 자리잡고 있는 매우 큰 장원이었다. 그러나 그 장원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듯이 보였다. 강별학은 바로 그 속에 있는 한 낡아빠진 집을 자기의 거처로 삼고 있었다. 집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장식품은 아무 것도 없었 다. 심지어 표국에서 심부름 하는 심부름꾼의 집도 이것보다는 나 을 정도였다. 집안의 하인도 단지 한 명 뿐으로 귀도 먹고 말도 못 하는 벙어 리 늙은이가 고작이었다. 장원에 들어서자 소어아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별학은 그의 놀라는 표정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 다. "이 집은 원래 나의 친구인 제갈운(諸葛雲)이란 사람의 것이었 는데 그가 다른 곳에 이사를 가면서 이 집을 나에게 넘겨 주었지. 애석하게도 내가 이 집의 옛모습을 유지하지 못 하고 있으니 친구 를 대할 면목이 없는 걸." "하지만 당신의 명성과 지위면 충분히 이 장원을 더욱 빛낼 수 있지 않겠소?" "강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개 돈벌이를 할 줄 모른다. 나 도 그 예를 깨뜨리지 못 했지. 만약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명예 롭지 않은 뇌물을 받는다면 지하에 계신 부모님을 대할 면목이 없 지 않겠나?" "그러나 강 대협의 친구들이......." "물론 친구들 중에서 이 집을 꾸며 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유 없이 남의 호의를 받을 수 없기에 사양했지. 더군다나 나는 이 미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이것을 도리어 낙이라고 생각하고 있 다." 소어아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친 강남 대협이 이토록 검약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 당신 만큼 이름을 떨친 사람들 중에서 이토록 검소한 생 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무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 오." 강별학은 고개를 돌리며 정색을 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검약한 생활에서 낭비하는 생활로 빠지기는 쉬워도, 낭비하는 생활에서 검약한 생활로 들어 가기는 힘들다고 했지! 나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잊은 적이 없 어." "당신은 실로 진실한 군자이군요." 잠시 후 밥상이 올라왔다. 그것 또한 반찬이 서너 가지 밖에 되 지 않는 초라한 밥상이었다. 밥상을 올리고 밥을 담는 것도 모두 강남무림을 영도하는 맹주인 강별학이 친히 하는 일이었다. 이러 한 생활과 그의 높은 명성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식사를 하던 중 강별학은 눈빛을 반짝이며 소어아를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보면 볼수록 고인이 된 나의 은형 한 분과 매우 닮 았다고 생각되는구나." "그분은 누구입니까?" 강별학은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옛날의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는 강호 역사상 가장 친절하고 품위가 있으며 또한 매력이 있다고 소문난 미남자였지. 내가 내 아들의 이름을 '옥랑'이라고 지어준 것도 바로 그 분을 기념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어." "강 대협은 제가 친절하고 품위가 있고 또한 매력있는 미남자로 보입니까? 만약 당신 눈에 제가 그렇게 보인다면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전부 친절하고 품위가 있는 미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 오." "너는 친절하지도 않고 고귀한 품위도 없을런지 몰라. 그러나 너에겐 확실히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만은 틀림 었는 사실이다. 특히 네가 웃을 때 그 미소를 보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소녀는 없을 것이야."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나도 제발 당신이 말한 것처럼 미남이고 매력있는 남자이길 바 라오. 또 당신이 말한 그 사람의 아들이였었으면 얼마나 좋았겠 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의 아버님은 저 처럼 총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절대로 미남자라고는 할 수 없소. 더구 나 그는 지금쯤 의자에 앉아 담배나 피우며 졸고 있을 것이오." 식사를 마치자 강별학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입을 열 었다. "피곤할 테니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그리고 곧 강철 을 나무처럼 벨 수 있는 보검을 구해 너희 정쇄를 풀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거라." 강옥랑과 소어아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일어서서 나왔다. 소어아와 강옥랑이 복도를 걷자 곧 내려앉을 것처럼 삐그덕거리 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창 밖에서는 나무잎사귀를 스 치는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와 음침하고 황폐한 장원의 분위기 를 더욱 고조시켰다. 소어아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제아무리 배짱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살게 된다면 미치 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군." 강옥랑이 말했다. "걱정마! 너는 이곳에서 십 년을 살 필요가 없으니까." 소어아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말을 할 줄 아는군. 아버지 앞에선 한마디도 않더니. 나는 네 가 갑자기 벙어리가 된 줄 알았지." "우리 아버지 앞에서 너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안 될 것이다." 소어아는 어두컴컴한 뒷뜰을 바라보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너는 뒷뜰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한 번 있었지." "이곳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살았는데 단 한 번 밖에 들어가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 곳엔 귀신도 들어갈 용기가 안 날 걸." 강옥랑은 복도 끝의 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밝혔다. 소어아는 사방을 한 번 둘러본 후 말했다. "이것이 너의 침실이냐?" 방에는 작은 의자 두어 개와 침대 하나가 있을 뿐 간소했고 벽 에도 별 장식품 없이 몇 가지 무기가 걸려 있었을 뿐이었다. 강옥랑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 년 동안이나 떠나 있다가 다시 이 침대를 보니 감회가 새로 워지는군." 소어아는 웃으며 말했다. "너의 그 친구들을 보아서는 네가 이 침대 위에 점잖게 누워 있 을 수 있다고 믿을 수가 없는 걸. 네가 정말로 이런 쓸쓸함을 견 딜 수 있단 말이냐?" 강옥랑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야밤에 도망나가면 될 게 아니오?" "명성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대개가 야밤에 도망가는 버릇이 있 지. 하지만 너의 아버지는 남과 틀려. 네가 어떻게 너의 아버지를 속인단 말이냐?" 강옥랑은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너는 내가 왜 이 방을 택했는지 아느냐?" "글쎄." "그 이유는 이 방이 나의 아버지의 침실과 거리가 가장 멀기 때 문이야. 또한 창문도 많고...... 이곳은 원래 일하는 사람들이 쓰 는 방인데 내가 먼저 차지했지." 침실에 들어온 후 소어아와 강옥랑은 피곤했는지 자리에 눕자마 자 골아 떨어졌다. 그들은 이제 서로 감시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너무 고단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자국 소리는 문앞에 멈추어 잠시 동안 망서리는 듯하더니 이 윽고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은 가만 히 문을 열고 잠시 동안 안을 살피더니 다시 문을 닫았다. 그 발 자국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 그 황막한 뒷뜰로 사라져갔다. 그때 소어아는 갑자기 눈을 뜨더니 머리카락 사이에서 가느다란 구리철사를 꺼냈다. 그는 그 구리철사를 정쇠의 자그마한 구멍 속 에 집어 넣고 좌우로 가볍게 돌렸다. '철커덕'하는 소리가 들렸 다. 소어아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웃음이 번져나왔다. 그는 오랫동 안 자유를 잃었던 손을 잠시 흔들더니 갑자기 강옥랑의 수혈(睡 穴)을 점했다. 강옥랑은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소어아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속삭이듯 중얼 거렸다. "너는 네 자신이 매우 총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더없는 바 보다. 너는 줄곧 내가 이 정쇠를 풀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흥! 내가 어디서 자랐는데 이까짓 정쇠 하나를 못 푼단 말이냐?" 악인곡(惡人谷)에는 가장 뛰어난 강도가 있는 것처럼 당연히 가 장 뛰어난 절도 전문가도 있었다. 가장 뛰어난 절도 전문가에게는 이 세상에서 열지 못 하는 자물쇠가 없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 다. 소어아는 여덟 살 때부터 이미 이 탁월한 선배로부터 모든 자 물쇠를 여는 재주를 배웠다. 그는 창문으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그 귀신마저 가기 두려워한다는 뒷뜰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가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하늘에는 별빛이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아름답다기 보다는 도리어 이 뒷뜰을 더욱 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싸이게 했다. 바람이 불었으나 소어아의 등에서는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 다. 바람을 타고 썩은 냄새가 풍겨왔다. 이 뒷뜰은 마치 늪지 같은 비릿한 죽음의 냄새가 가득차 있었다. 소어아는 숨소리를 죽이고 몸을 낮게 하여 뜰의 구석구석을 뒤 졌다. 그러나 뒤뜰은 단지 썩은 나무와 황폐한 정자만 있을 뿐이 었다. 한 차례의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그는 등골이 오싹해져 옴을 금치 못 했고 갑자기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건지 혹은 무 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잊게 되었다. 바로 그때 십여 장쯤 거리에 있는 건물의 창문 안에서 불빛이 밝혀지며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소어아는 급히 땅바닥에 엎드려 몸을 숨겼다. 소어아는 땅바닥 에 엎드린 채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 했다. 그 사람은 손에 등불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놀랍게도 그는 다름 아닌 강별학이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문을 잠그고 뜰밖으로 나갔다. 불빛이 사라지자 뜰은 다시 어둠과 고요한 정적으로 뒤덮였다. 소어아는 잠시 동안 기다려 봤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자 살며시 일어나 그 건물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불빛이 밝혀졌던 방문 앞에 도착하자 그는 비로소 그 방이 꽃을 기르는 화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전에는 이 방에 필시 많은 꽃이 만발했었겠지만 소어아가 지금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꽃향기가 아니라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썩은 냄새뿐이었다. 소어아는 구리철사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선 후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방을 밝혔다. 방 안에는 거미줄이 가득차 있었고, 구석마다 깨진 화분과 마른 잎사귀 그리고 숯이 쌓여 있을 뿐 그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강별학은 이렇게 음산한 야밤에 아무 것도 없는 이 방에 무엇때 문에 왔단 말인가?) 밤바람이 찢겨진 문풍지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 바람은 마치 귀 신의 차디찬 손이 소어아의 등을 매만지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소어아는 빨리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이상한 호기 심이 그의 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곳이라면 비밀을 숨기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그는 다시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방 안은 온통 먼지로 덮혀있어 마치 오랫동안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던 곳 같았다. 그러나 강별학이 조금 전에 분명히 이곳에 들어왔지 않았 는가! 그렇다면 먼지 위에 어떤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왜 아 무런 흔적도 없을까? 소어아는 즉시 바닥의 먼지를 만져보았다. 놀랍게도 그 먼지는 정교한 인조였고 바닥에 단단히 접착되어 있었다. 소어아는 곧 이 방 안에 어떤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이상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실망한 나머지 위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한 거미줄은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 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그 거미줄을 잡아 당겼다. 놀랍게도 그 거 미줄은 철사로 만든 것이었다! '끼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마루의 일부분이 열리며 불빛에 계 단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소어아는 많은 교묘한 비밀기관의 장치를 보아왔지만 이토록 신 비스럽고도 교묘한 장치는 처음보았다. 그가 더욱 예상하지 못한 점은 그 아래 있는 것이 비밀통로가 아니고 하나의 서재였다는 점 이다. 창문이 없을 뿐 그곳은 매우 평범한 서재였다. 서재의 좌우에는 책이 가득 찬 책장이 놓여 있었고 가운데는 돌로 만든 큰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문방사우와 등잔이 갖춰져 있었다. 소어아는 우선 자세히 책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고 그 책 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강별학이 이곳에 온 목적은 물론 책을 보자는 것은 아닐 것이 다. 그렇다면 책 위에 먼지가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이곳에...... 바로 이곳에 깨끗한 책 한 권이 놓여 있군.) 그는 책을 뽑아들자 책 한 가운데가 조금 패여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책을 펼치자 속의 빈 부분에 인피가면(人皮假面) 몇 장과 작은 병이 서너 개 들어 있었다. 변장할 때 쓰는 도구였다. 잠시 후 그는 또다른 책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 속에는 몇 개 의 작은 나무병이 들어 있었는데, 병 속에 든 것은 놀랍게도 매우 구하기 힘든 진귀한 독약이었다. 다음에 그가 발견한 것은 액수가 엄청난 장부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매우 긴 명단이었다. 그는 그 명단을 일일이 읽기가 귀찮아 그저 이름 아래 가로로 적은 글자만 훑어보았다. 가로로 써있는 글자는 소림(小林), 무당(武當) 등 무림 명문정파(名門正派)의 이 름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씌여진 이름들이 바로 강별학이 각 문파 (門派)에 보낸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이때 그는 책상 옆에 작은 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상 위 에는 각양각색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는 뭔가 원하는 것을 알아냈다는 듯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우 며 그 상 위에서 한 뭉치의 종이를 줏어들었다. 그 종이가 비록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가 찾고자 하는 물건이 었던 것이다. 그 종이는 매우 얇고 가벼운 반면 매우 질긴 것이었 다. 그런 종이는 특수한 것이라 소어아도 단 한 번 밖에 본적이 없었다. 그는 그 종이의 냄새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와 똑 같은 종이를 먹은 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 한 뭉치의 종이는 바로 그가 철심난에게 얻은 '연남천 장보 도(燕南天藏寶圖)'와 같은 종이었다. 때문에 그는 죽어도 잊을 리 가 없었다. 그는 손에 먼지를 묻혀 가볍게 그 맨 윗장의 종이에다 문질러봤 다. 이에 따라 종이 위에는 그림의 흔적이 나타났다. 과연 그 보 물이 숨긴 장소를 가리키는 지도였다. 그 보물지도는 진짜 같이 보이기 위하여 석판으로 그려졌기 때 문에 윗장에 그려진 그림이 아래장까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강별 학이 그 마지막 보물지도를 그린 후 다시 그 종이를 쓴 적이 없었 기 때문에 소어아가 만지자 즉시 그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소어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예상대로 보물지도를 위조한 자는 바로 그였구나! 천하의 영웅 들을 서로 죽이고 죽는 처지에 놓이게 한 자가 바로 그였다니! 그 러나 나는 벌써부터 당신이 무서운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토록 인자스럽고 의리있는 척 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당신은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모두 속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자는 계책으 로 모조리 죽이려고...... 아! 아! 참으로 악독하구나!) 그는 다시 모든 물건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중얼 거렸다. "당신이 만약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무얼하든 내가 참 견하지 않았겠지. 왜 하필이면 나를 속여가지고 지금까지 이 고생 을 시키냔 말이다! 내가 너의 버릇을 고쳐주지 않는다면 내 자신 을 대할 면목이 없지!"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등불을 끈 후 서재에서 나와 모든 장치를 원상복귀시켰다. 소어아는 또다시 창문을 이용하여 강옥랑의 침실로 살며시 들어 갔다. 강옥랑은 머리를 베개 속에 파묻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소어아는 살며시 침대에 올라가서 다시 정쇠를 자기 손에다 채 운 후 편안히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가 눈을 완전히 감기도 전에 갑자기 방 안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깜짝 놀란 소어아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 다. 한 사람이 웃음띤 얼굴로 침대 옆에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 다. 번쩍거리는 불빛이 그의 창백하고도 음침한 웃음띤 얼굴을 더 욱 음산하게 보이게 했다. 그런데 소어아가 더욱 놀란 것은 그 사 람이 다름아닌 강옥랑이었던 까닭이다. 분명히 강옥랑은 그의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침대 옆에 서있게 된 것일까? 소어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침대에 누운 사람을 바라보았 다. 침대에 누운 사람도 고개를 들며 웃음띤 얼굴로 소어아를 바 라보았다. 그는 바로 그 귀먹은 벙어리 늙은이었다. 소어아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있다가 갑작스레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나는 분명히 강별학이 보통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 면서도 어찌 그를 얕봤단 말이냐?" 강옥랑은 차디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웃음이 나오느냐? 내가 보기엔 너는 지금 통곡해야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 같은데......." "울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질 않으니 웃을 수밖에 없지." 이때 강별학이 밖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웃음띤 얼굴 로 소어아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그토록 중대한 비밀을 발견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빨 리 도망가야 할 것이 원칙인데, 아무 소리없이 다시 돌아오다니 너의 배짱도 알아주어야 되겠구나!" "분명히 내가 당신의 비밀을 발견할 줄 알면서도 아무소리 없이 내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내가 내 자신의 손을 다시 정쇠에 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당신도 확실히 보통은 넘는군요!" "이토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속일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대담하게도 내 비밀마저 캐낼 수 있었으니 실로 감탄하지 아니 할 수 없구나!" "당신은 천하의 사람들을 모두 당신이 자비스럽고도 의리있는 영웅이라고 믿게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존경할 수 있게 하다니 참으로 일대의 호걸이라 아니할 수 없군 요!" 강별학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의 재능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너는 왜 하필이면 나와 맞서려고 한단 말이냐? 네가 오늘 그 비밀을 알았으니 설사 너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 해도 절대로 살려두지는 못 하겠어!" 소어아도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나도 당신의 재능에 매우 탄복하고 당신의 대사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왜 하필이면 그 쓸데없는 보물지도를 만들어서 나 를 골탕 먹인단 말이오?" 강별학은 표정이 갑자기 돌변하며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 보물지도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을 알았느냐?" "만약 그 보물지도만 없었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고, 또 무엇 때문에 고생해서 당신의 비밀을 캐내려고 한단 말이오? 당신이 나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 비밀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 단 말이오!" 강별학은 강옥랑을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소어아에게 물었다. "넌 언제부터 그 보물지도가 나와 관계가 있다고 느꼈느냐?" 소어아는 빙그레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의 그 못됐다는 자식 몸에도 보물지도가 있는 것을 발 견하자 즉시 어디서 얻은 것이냐고 물었죠. 그가 말하기를 당신의 서재에서 훔쳤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나는 이미 당신을 의심하 기 시작했죠! 그 원인은 그토록 중요한 지도를 함부로 서재에 두 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매우 옳은 판단이구나." "나는 그후 이 못됐다는 자식의 부친이 대협객이란 말을 들었 죠.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죠. 용(龍)은 용을 낳고 호랑이는 절대로 개새끼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이오. 일대의 대협객께서 어찌 이런 비굴하고 염치가 었는 아들을 낳을까 하고 재삼 의심했죠." 강별학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욕 한 번 잘 하는구나. 죽기 전에 실컷 해두어라." "그후 내가 당신이 이러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과 자신이 밥상 을 올리는 것, 일하는 사람이라고는 벙어리이면서도 귀먹은 노인 한 명밖에 없는 것을 봤을 때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했소. 이 사람 은 성인이 아니면 필시 내가 난생 처음으로 본 간사스럽고도 악독 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이오. 그 원인은 그 두 가지 종류의 사람 외에는 절대로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까 닭이오." 강별학은 여전히 웃음띤 얼굴을 했다. "나는 당연히 성인이 되지 못 하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비밀을 캐내기로 작정했었소." "너는 정말 너무나도 총명하구나. 그러나 그 총명한 것이 너로 서는 더없는 불행이야......." 소어아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천생이 총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오?" 강별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야. 그 점은 내가 매우 동정하는 바이다." "내가 만약 조금만 모자랐다면 아마 바보인 척을 했을 것이오." "이미 너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지." 소어아는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내 생각엔 당신이 나를 죽일 시각이 다가왔다고 느껴지는데 요." 강별학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일 정도로 잔인하지는 못 해." "그래요? 그렇다면 다른 더욱 악랄한 방법이 있는 모양이지요?" 강별학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또 웃었다. "오늘밤에 나를 해치고자 하는 사람은 너 하나만이 아니다." "또 누가 당신을 해치려고 하오?" "어젯밤 내 침실에 몰래 들어온 자가 있었다. 그는 방에다 마취 향기를 뿌리고 창문을 열고 들어왔지. 그의 목적은 분명히 나를 죽이려는 것이었어.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젯밤 나는 그 방에서 자 지를 않았지." "어젯밤 당신은 나와 함께 신탄구에 있는 여관에서 자고 있었 소......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알아냈소?" "내가 오늘 돌아오자 그 방에는 아직도 마취 향기가 남아 있었 고 창가에는 발자국의 흔적이 있었지. 이로 보면 어제 나를 살해 하고자 했던 사람은 살인에 능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만약 살인의 능수라면 오늘밤 절대로 오지는 않을 것인 데......." "그렇지. 하지만 그는 살인의 능수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분명 히 다시 올 것이다." "당신은 나를 당신의 방에서 자게하여 대신 죽게 할 작정이군 요. 이 기회에 나를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마저 잡을 수 있겠죠. 또 그를 죽일 때 나를 위하여 복수한다는 명분도 세울 수 있고, 게다가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당신의 인덕을 칭찬할 테니 당신으로서는 일거양득이 아니라 일거다득이 군요." 강별학은 껄껄 웃었다. "너같이 총명한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 참으로 간단해서 좋구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있으니 말이 다." 소어아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첫댓글 즐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