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기쁨으로 만들어가는 교회.
1. 이스라엘이 신앙을 회복하고 언약 안에 다시 서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막 건설을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기 마음에 감동이 되어 성막 건설에 필요한 재료들을 “가지고 나와” 여호와 앞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각자 솜씨를 동원해서, 정교하고 아름다운 성막 건설에 참여합니다. 애굽을 떠나 온 이후 처음으로, 깊은 공동체 의식을 느끼면서 성막 건설을 하였을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합쳐서 성막 건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립니다(1~19). 제일 먼저 전한 말은 안식일 규정입니다(2~3). 안식일 규정을 왜 이토록 반복하시면서 강조하실까요?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제 성막을 짓는 거룩한 일을 함에 있어서도 이들이 안식일을 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점점 안식일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전한 것은 성막을 지을 준비, 곧 성막의 재료들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4~19).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들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열거하고 그것들을 백성들이 자원하여 가져오도록 명하였습니다. 본문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20~29).
4. 하나님께 예물(헌금)을 드리는 원칙이 제시됩니다. 마음의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21,22,26,29)입니다. 억지로나 떠밀려서 혹은 분위기 때문에 내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드리는 태도는 즐거운 마음입니다(29). 마음의 즐거운 감동과 자원함, 이것이 헌금의 원리요, 태도입니다. 드림의 대상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21,22,24,29). 교회에 드리는 모든 헌금은 교회나, 특정한 기관이나,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잊는다면 헌금의 진정한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30~35).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자원한다 해도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30). 소명과 자원하는 마음은 구별해야 합니다. 소명은 교회와 지도자들에 의해서 검증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지명하여 부르신 자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31, 35).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해주셨고 지혜로운 마음을 충만하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6. 안식일을 지켜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사는 것은 언약 백성의 삶입니다. 이들이 성막을 짓고 유지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였듯이, 이 시대의 예배자도 자신의 애정과 정성과 물질과 시간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헌금의 원칙입니다. 헌금은 자원함(마음)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소명을 주셔서 사람(지도자)을 세우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원함으로 일을 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모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드림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성도가 함께 할 때, 교회는 경건하고 든든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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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성막 건립은 물론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자체마저 폐지될 뻔하였던 일대의 위기였던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이 일단락된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막 건립 명령을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전적으로 화답하여 헌물을 넘치도록 바침으로써 성막 건립 준비가 진행되었던 일련의 과정이 잘 나타난 본문입니다.
명령에 따라 드려야 하는 예물들(1-19)
(1-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1절은 2절과 3절에 언급한 하나님 명하신 안식일 규례를 명령하기 전 이것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추가하여 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있는 사실 그대로 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안식일에 대한 설명은 이 날이 여호와를 위한 날이기에 인간을 위해 일하지 말고 철저하고 완벽하게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3절은 불도 피우지 말라 하시며 강력한 금지의 명령을 전하고 있습니다. 불을 지피는 일은 식사 준비 등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상생활을 위한 어떠한 노동도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는 싹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매우 강력한 조처를 내리셨습니다. 이 구절들을 잘못 인용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유도 없이 불편하게 하시려 우리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면 휴식 없는 삶은 결국 파멸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처벌과 강력한 규제 같은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과 안위를 위함이지 결코 노예화 혹은 불편한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인지해야 합니다.
(4-9)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4절에는 모세가 다시 한번 자신이 전하는 말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임을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5절에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를 조금 더 원어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해 보면 ‘너희 소유 중에서 가장 아끼는 소중한 것을’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쓰고 남은 물건이나 별로 소용되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탐났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아름다운 헌신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그것보다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절 후반부부터 9절까지 나온 여호와께 드린 물품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소중한 물건들을 내놓았습니다. 성막을 만드는 물품으로 하나님께서 세상과 구별되는 물품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들로 성막을 만드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이 땅의 교회를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성막을 건축하는 일에 소수의 유력자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참여하여야 했음을 본 절에서는 밝힙니다. 주님의 나라와 역사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비범한 일을 해 나가는 일임을 본문은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0-19)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 곧 성막과 천막과 그 덮개와 그 갈고리와 그 널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그 받침과 증거궤와 그 채와 속죄소와 그 가리는 휘장과 상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불 켜는 등잔대와 그 기구와 그 등잔과 등유와 분향단과 그 채와 관유와 분향할 향품과 성막 문의 휘장과 번제단과 그 놋 그물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뜰의 포장과 그 기둥과 그 받침과 뜰 문의 휘장과 장막 말뚝과 뜰의 말뚝과 그 줄과 성소에서 섬기기 위하여 정교하게 만든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니라
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혜로운 자는 세상적 지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영적인 지혜 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지혜 등을 의미합니다.
10절부터 19절까지 나열된 성막의 구성 요소들을 보면, 자칫 하나님께서 실수로 다시 쓰신 것은 아닐까 하는 지루함도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10절부터 19절을 한 단락으로 묶어서 읽어보면서 왜 하셨던 이야기를 다시 하셨을까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변치 않으시고, 동일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분량의 부분을 다시 정확하게 요구하시며 베푸시는 은혜를 감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의 배신자들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더 많은 요구 조건을 붙이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다시금, 동일한 헌신과 헌물을 요구하시며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혼 후 살아갈 집에 대한 모든 계획들과 보증을 받았음에도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더 큰 무거운 짐을 그들에게 부과하지 않으시고 다시금 그들이 하나님과 소통할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남을 너그럽게 용서하지 못하는 제 개인의 성향으로 방금 읽은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더 깊게 와닿습니다.
성막에 들어가는 많은 요소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과의 친교 및 그분과 함께 거하는 생활의 의미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분향단은 겉을 정금으로 씌운 특수한 소형 제단으로서 성소의 가장 외진 구석 지성소로 통하는 휘장 바로 전면에 위치합니다. 바깥 성막 뜰에 있는 놋 제단과는 달리 분향단은 짐승 제물을 태우지 않고 오직 향을 불살랐습니다. 이 제단의 으뜸가는 기능은 향기로운 향을 불사르는 것이었습니다. 향연과 향기는 내실과 외실 뿐 아니라 성막 전체를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평범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활에서는 땀 냄새와 짐승을 사육해야 하는 육체 노동에서 오는 불쾌한 냄새가 항상 베어 있었을 것입니다. 분향단에서 나는 향의 냄새는 쾌적한 향기와 분위기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 가까이 초대하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의 백성을 아끼시는지를 알 수 있는 단편적인 대목입니다.
16절에 물두멍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번제 드릴 때 손이나 몸에 묻은 희생 짐승의 피나 기타 오물들을 깨끗이 씻기 위해 마련된 성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두멍은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위치하였습니다. 이처럼 제사장들이 성소로 출입하기에 앞서 물두멍에서 손과 발들을 씻은 이유는 일차적으로 손과 발에 묻은 짐승의 피를 씻어 정결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런 정결 의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에 덮개와 휘장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어떤 서열과 계급에 대한 중요성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깊은 경외심을 가지며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의 거룩함을 감히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11절에서 19절을 종합적으로 보면 성막을 짓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도 다양한 재능이 활용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재능이 크고 작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재능을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사용할 때, 그 모습을 받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본문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드리는 이들(20-29)
(20-2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본 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막 건축을 위하여 예물을 바치되 남녀와 족장과 평민 모두가 예물을 드렸음을 증거합니다. 이 또한, 앞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어떤 모습의 재능도 사용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녀 노소, 신분의 차이가 없이 모든 사람이 함께 한마음 한뜻이 되어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은 특정 계층, 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헌신을 기뻐하시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기준에 상관없이 모두를 같은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 공의에 따라서 공정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에 나타난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는 별개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수행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열심을 갖고 자원하여 예물을 드리고 참여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2절에서 나열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는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한 물건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앞선 출애굽기 32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자손과 비교하여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23-26) 무릇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모든 자가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모든 자는 가져왔으며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본 단락 또한 사람들이 아낌없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자신이 귀중하게 여겼던 물건들을 드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25절에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손재주가 있는 여인’으로 번역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자신의 손재주나 세상 지식을 가지고 봉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5절과 26절에서도 표현하듯이, 필요한 실들은 손으로 직접 방적하여 가지고 오기까지 그들이 해야 하는 특별한 수고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7-29)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왔으니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족장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값이 더 나가는 보석을 드렸는데, 이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솔선수범을 보인 것과 동시에 이러한 행동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9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 즐거움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재산을 불리기를 원하고 이를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살아가는 데 충분한 재산을 소유했다고 평가를 받는 사람도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와 반대로, 마음이 감동된 자들이 자기 재산이 줄어듦에도 기뻐하는 모습은 더 많이 가져야만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의아함과 궁금증을 남깁니다.
본문은 성막 건축을 위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헌신이 어떠했는지 묘사한 구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로부터 예물을 드리라는 명령을 듣고 즉각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아낌없이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본문을 읽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본을 받아야 하는 모습이라는 의견에는 너무도 동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나는 드리며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더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와 은혜의 불감증에 빠진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눠주고 기뻐하며 만족하는 삶이 없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질문을 남깁니다. ‘얼마나 더 가져야 행복할 것인가?’ 더 높은 계급과 서열, 그리고 더 강한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물으실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고 있니 아니면 내가 너를 따라 가야 하니?’
성막 일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설계도 전하는 일을 마치셨습니다. 마침내 성막 만드는 일이 시작되자 마음에 자원하는 백성은 남녀 누구나 필요한 물품과 자원을 드리며, 성막 제조에 동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막 만드는 지도자로 선택하신 사람들과 그들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30절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자손인 브살렐을 부르셨는데 그를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전합니다.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고,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름은 곧 한 사람의 전인격을 대표하기도 하고, 그의 품성과 지위, 그의 전 인생을 대변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브살렐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공개적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성막을 제조하도록 책임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브살렐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성경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막 제조를 위해 특별히 세움을 입은 사실을 통해 그가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브살렐에게 주어진 소명은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입니다(32~33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막 제조에 대한 설계도가 있어도 그 말씀하신 대로 일을 시행할 때에는 기술과 정교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술과 정교함을 하나님께서 친히 브살렐에게 부어주셨습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브살렐이 지닌 뛰어난 재주와 지식이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았다고 전합니다. 브살렐이 세상의 지식과 재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진행하였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내게 있는 기술과 재주, 지식과 능력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매일 매 순간 잊지 않고 살아갈 때에 주님의 일을 하고 나서 허탈하고, 허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심을 다해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으나 일을 마치고 난 후에 공허하고 허무한 느낌을 경험했다면 어디서부터 주님을 잃어버렸는지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34절입니다.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브살렐과 함께 단 지파의 자손 오홀리압도 성막 건축의 책임자로 세우셨습니다. 오홀리압의 소명은 성막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일입니다. 성막 건축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기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소요소에 배치받은 후에 교육을 받고 각자에게 맡겨진 소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어떤 마음을 주셨는지 35절이 전합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로 수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지혜’라는 단어가 7번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마음이 지혜롭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4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 뿐만 아니라 성막 건축에 참여한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인 성막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면 제대로 건축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가 없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식이라는 선물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지혜’로 그 지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나를 망치고 타인을 망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예라는 선물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지혜’로 나의 명예를 사용하지 않으면 내게있는 명예가 나를 망치고, 타인을 망치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많은 재물을 관리하게 하셨는데 ‘하나님의 지혜’로 그 재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나도 망가지고 타인도 망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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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성막을 건조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나옵니다. 하지만 주지의 사실대로 성막을 건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독대를 하고 있을 때,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다가 그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간구(출 32:13)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을 거두시고 다시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 증거로 모세가 깎은 새로운 두 돌판에 당신의 언약의 말씀을 손수 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본문 35장부터는, 여호와의 임재를 준비하기 위한 본격적인 성막 건설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대한 말씀을 꺼내시기 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먼저 하시면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제가 새번역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렛날은 당신들에게 거룩한 날, 곧 주님께 바친 완전히 쉬는 안식일이므로,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안식일에는 당신들이 사는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안식일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아니, 고개 정도가 아니라, 숨쉬기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대면하고 돌아오는 모세의 빛이 나는 얼굴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사실 때문에 마음이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더불어 그분 앞에서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매 순간 힘겹고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허락하신 하나님과의 언약과 다시 부여받은 성막 건축에 대한 비전에 그들이 얼마나 감격해하면서 강한 의욕을 보였을지는,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정말로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순간에, 성막을 만드는 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려하거나 힘을 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막을 만드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요, 덧붙여 만일 이 안식일을 어길 때에는 죽을 것이다 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안식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통해 많은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숙자반에서 십계명을 공부할 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두 가지 의미를 배웠습니다. 그중 두 번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바로 예배의 사람이 된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죽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결국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사는 자만이 거룩한 성막을 만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예배의 사람으로 사셨습니까? 얼마나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주님 안에서 죽는 훈련을 하시면서 몸부림치셨습니까? 만일 지금껏 우리들의 삶이 그리하지 못 했다 하신다면, 앞으로는 진정한 예배의 사람으로 사셔야 합니다. 진정한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지내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 자신을 주님 안에서 바르게 회복시키셔야 합니다.
왜냐면 주님 안에서 나를 부인하고, 진정으로 죽은 자만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 무엇도 숨기거나 감추지 않는, 주님의 투명한 쇼윈도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이 거하실 성막을 준비시키시며, 실질적으로 일을 시키시기보다는 먼저 예배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격적으로 성막 건조를 위한 준비를 시키십니다. 필요한 재료를 마음으로 헌납하도록 지시하시고 그 품목을 말씀하시고, 특히 그 일을 할 기술자들을 부르셔서 이제부터 만들 회막의 기구들을 하나하나 열거해 주십니다. 그러자 마음에 감동이 온 모든 사람들과 마음에 바람이 있는 사람, 타고난 재주가 있는 사람과 스스로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계십니다. 29절 말씀을 제가 새번역성경으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 바치고 싶어 하는 모든 남녀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려고, 기쁜 마음으로 물품을 가져다가 주님께 바쳤다.
섬김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탁을 받아서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순서가 돌아와서 섬겨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기는 싫은데 남들의 이목 때문에, 체면 때문에 섬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드리고 싶은 마음을 주님과 사람을 위해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외압이나 명령이 아닌, 은혜 받은 자로서 내 스스로 하나님 앞에 거저 드리는 순전한 마음인 것입니다.
<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쁨이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힘과 자원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섬긴다고 하지만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일할 뿐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 외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14)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꼭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 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드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쁨으로 드리는 '자원하는 마음'은 제가 하나님께 기여할 수 있는 부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안에 이 자원하는 마음을 얻으시기 위해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서 저를 인도하고 계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서 자원하는 마음을 얻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은혜를 내려 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오늘 하루, 단 한 번만이라도, 우리 안에 있는 자원하는 마음을 드려보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드릴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자원하는 마음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하루 되었으면 합니다. 왜냐면, 우리를 사랑하사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진정한 예배자의 마음으로 사시면서, 우리 안에 있는 자원하는 마음을 주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 누군가에게는 우리라는 작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귀하게 전해지는 통로 되시길 바랍니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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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5장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 백성을 불러 모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들을 알리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단락은 1절부터 3절까지로서 안식일에 관한 것이며, 둘째 단락은 4절부터 35절까지로서 성막의 제조와 관련된 것 입니다.
◉ 첫째 단락(1절 - 3절)
먼저 첫째 단락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 3절)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백성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1절 下)고 하면서 가장 먼저 ‘안식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왜 다른 계명을 두고 모세는 십계명의 제 4계명을 가장 먼저 말한 것일까요? 아니 왜 하나님께서는 많은 명령 중에 가장 최우선적으로‘안식일’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십계명 중 왜 유독 안식일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도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2절 下 - 3절)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향한 것과 하나님을 향한 두 가지 의미를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십계명이 등장하고 있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이 각각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는 출애굽기 20장 11절인데, 이는“사람을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 출애굽기 20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계십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뒤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시 121:4)께서 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쉼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입니다.
작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아빠는, 엄마는 자주 멈춰섭니다. 그리고 쉬었다 다시 갑니다. 왜 입니까? 힘들어 할 아이에게 맞춰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잊은 채 수많은 세부조항으로 사람들을 오히려 옭아매었습니다. 속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수많은 논쟁을 무릅쓰고 안식일 규정을 어기심으로써 종교적인 속박과 폐해에 대해 분노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 우리말 성경)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짐이 아니라, 복이요. 속박이 아니라, 자유요, 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안식일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통해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넓어지고, 깊어지고,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안식일을 명하신 첫 번째의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신명기 5장 15절인데, 이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 신명기 5장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유를 또 다르게 밝히고 계십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명령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줌으로써 구체적으로 안식의 삶을 주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삶의 궁극적 쉼이 누구에게서부터 기인되었는지를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현대인들은 참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벌려고 합니다. 그래서 노동시간도 늘어나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도 질병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몸에도 당연히 무리가 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이 시간에 우리 몸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좀 쉬세요~”, “제발, 좀 천천히 하세요~”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는 강박관념과 그에 따른 보편적 피로 속에서 도저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멈출 수 있고, 쉴 수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쉬라고 명령하신 그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평일에 만나를 더 거두어도 벌레가 생겨 쌓아두지 못하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안식일 전날 평일보다 2배를 더 거두게 하심으로써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때 그때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지키시고,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일하던 손을 놓을 수 있습니다. 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라”그리고 “네 하나님을 생각해라”그것이 바로 고단한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 참 안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둘째 단락(4절 - 35절)
둘째 단락은 4절부터 35절까지로서 성막의 제조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핵심은 반복되는 단어 속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5절, 21절, 22절, 26절, 29절 등에 반복되는 ‘마음에 자원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자원하는 사람’라는 표현은 또한 구체적으로 30절 이하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게 된 사람’(31절), 혹은 ‘마음에 감동된 사람’(34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하시는 분들을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일하게 열심히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분들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때로 몇몇 사람에게 과부하가 결려서 지쳐가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거나, 원망과 시비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오직 자원하는 맘으로, 또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즐겁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감동되어 기꺼이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일요일, 이 주일까지 내가 교회에서 일해야 되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내게 궁극적인 안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사람은 마음에 감동함을 갖게 됩니다. 자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인해 맡기신 사람들을 섬겨가게 됩니다. 맡기신 그 일을 묵묵히 수행해 가게 됩니다.
오늘은 유태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토요일 아침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진정 생각하고 배려하는 토요일로 가꾸어 가십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안식을 허락하신 분이 누구이신지 그 주인을 기억하는 하루로 만들어 가십시다. 그리하여 함께 하게 하신 사람들과 더불어 안식을 누리게 하신 그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주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자원하는 맘으로 즐거이 섬기는 참 사명자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