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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에서 브니엘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1. 라반이라는 큰 강적을 넘어선 야곱은 이제 또 한 사람의 강적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의 형인 에서입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큰 걸림돌입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정직하지 못한 행동에서 불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2. 이 위기를 풀어가는 야곱의 방법은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선물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의 해결은 사람의 계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서 시작될 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도 야곱은 자신의 계획과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요? 수십 년의 연단과 믿음이, 이제는 더욱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만도 하지만, 여전히 자기 생각과 계획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말입니다.
3.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는 경험은 놀랍습니다(1).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부르고 마하나임이라고 그 땅 이름을 지었습니다(2).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그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군대로서 맞은 것은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그를 보호하시며 그의 길을 인도하심을 의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귀환하는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뒤를 이을 상속자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는 소식에, 자기의 소유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7). 본문에서 보는 야곱의 믿음은 그의 교활한 술책들과 여전히 뒤섞여 있습니다. 비록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있지만, 두려움과 죄책감이 매 순간 그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을 매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20).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다리기보다는 자기 힘으로 위기를 해결해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5. 성도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수많은 위기와 갈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물리적인 방법, 또한 아무리 많은 돈도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삶의 순간을 이겨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떤 위험이 닥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6. 결국 모든 소유와 가족이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홀로 남은 야곱은, 그를 찾아온 어떤 사람과 씨름을 벌이게 됩니다(24).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육체적 씨름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천사를 만나 씨름을 벌였습니다. 여전히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하려는 인간적인 면모를 아주 강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의 본성이며 자기 힘으로 사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7. 그러나 야곱은 이 씨름에서 허벅지에 타격을 입고 골절을 당하게 됩니다. 야곱은 날이 새려 하고 천사가 떠나려고 하자 갑자기 축복을 요구합니다. 천사는 야곱이란 옛 이름 대신에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줍니다. 이것은 야곱의 본성의 변화를 상징하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싸우시다’라는 의미입니다.
8. 하나님께서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그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은 이러한 야곱의 패배,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루려고 하던 자기 신뢰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지고, 오히려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울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간구하는 믿음의 자세로 변화된 것을 전제로 한 선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얻어맞고 무너지고 나서야, 철저히 패배하고 나서야 그가 사모하던 축복을 얻었으며 승리자로 선언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세로 바뀐 야곱에게 은혜로 선언된 축복이었습니다.
9. 이제 얍복강의 씨름은 자기 힘으로 사는 야곱이 무너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사는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된 사건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근본적인 영적인 변화를 가리켜 다시는 야곱이라 불리지 않고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 이곳 이름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릅니다(30절).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난 장소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부패한 성품을 따라 하나님과 씨름하였다는 것은 다르게 보면 야곱이 스스로 자신의 죄악과 싸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악과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뜻이 깊습니다. 자신의 부패한 옛사람이 무너지는 영적인 전쟁터에서 하나님과 가장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가장 깊이 체험됩니다. 그러니 28장에서의 벧엘(하나님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브니엘(하나님의 얼굴)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브니엘로 가는데 20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20년이 걸린 것입니다. 벧엘에서 브니엘로 옮겨가면서, 그는 야곱(속이는 자)에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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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의 집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야곱은 끝내 잡히고야 말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제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 이삭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야곱의 일생일대 커다란 위기가 남아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쌍둥이 형 에서가 부하 400명을 이끌고 동생 야곱을 향해 나아오고 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400명은 적어도 야곱의 가족들을 호위하기 위한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에서를 향해 초조한 마음으로 행진하던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호의 표시를 주심 (1-2절)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란, 천사들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천사들을 보내어 야곱을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무언가를 잘했다거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서 천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심정이 형 에서로 인해 얼마나 불안한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이 요청하기도 전에 먼저 천사들을 보내어 주심으로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20여 년 전에도 벧엘에서 천사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천사를 만난 것에 이어 하나님의 언약을 듣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요약하면 “너에게 땅을 주겠다,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해 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입니다. 20년 만에 다시 천사를 만난 야곱은 벧엘에서의 언약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협적인 라반의 손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기인했음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협적인 에서와의 만남 속에서도 벧엘에서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실 하나님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험난했던 야곱의 인생 가운데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은 광야 같은 우리의 삶에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에서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 두려워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사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인생 가운데 벧엘 언약이 깊이 새겨진 만큼 우리의 삶에 먼저 찾아오셨던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천사들을 향해 하나님의 군대라고 말하며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마하나임은 ‘두 개의 진영’을 뜻하는데, 하나님의 진영과 야곱의 진영을 가리키며 한곳에 머무르는 진영이 아니라 움직이는 진영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이 향할 고향 땅까지 함께 움직이며 보호해 줄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자신의 진영을 신실하게 이끌어 가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야곱을 더욱 긴장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 사자들을 보내게 됩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사자를 보냄(3-6절)
(3-5)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야곱은 메시지를 통해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는데, 첫째는 야곱이 그 동안 에서의 뒷전에서 일을 꾸미고 있던 것이 아니라 라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니 결코 자신의 유산을 챙기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이 두 가지를 알리며 형의 적대감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기대와는 달리 사자로부터 의외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400명은 상당한 규모의 군대입니다. 성경은 에서가 그 많은 부하를 이끌고 온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결코 야곱이 듣기에는 희소식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서를 만나기 위한 야곱의 준비(7-12절)
(7-8)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소식을 들은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는 병력이며 그렇다고 라반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재산을 두 패로 나누었습니다. 에서가 한쪽을 치게 되면 남은 한쪽은 피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방법만을 취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껏 모진 풍파를 겪어온 야곱은 자신의 인생과 자신에게 속한 가속들을 자력으로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이 겪은 거센 풍파는 그토록 이 땅만 바라보았던 시선을 눈을 들어 하늘로 향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난이 그저 고난으로만 끝나면 너무나 허무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과정이 되었다면 인생의 보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고난들이 있습니다. 라반과 에서와 같은 자들이 우리의 인생을 가로막거나 위협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난에 좌절하기보다 담대히 직면하여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쓰디쓴 고난이 유익한 보약이 되어 우리의 삶을 성숙시킬 것입니다.
자신의 꾀와 경험만 의지했던 야곱이 인생의 보약을 삼킨 뒤 드디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9-10)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야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베푼 선하심을 먼저 언급한 다음,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떠났던 자신이 이제 “두 떼”나 소유한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주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작고 나약하며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야곱이 드린 기도 가운데 너무나 값지고 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힘겨운 인생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하나님께 받은 은총이 받을만해서 받게 되었다는 생각을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나올 때까지 모난 마음을 다듬으시고 잔뜩 힘이 들어간 고개를 숙이게 하시며 겸손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내 인생을 움켜쥐었던 손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야곱은 이제 절박한 마음으로 간구의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야곱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절박한 심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형 에서가 자신을 해할 뿐만 아니라 아내들과 자식들까지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할 뿐 아니라 한번 하신 말씀을 번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와의 만남을 앞둔 상황에서 야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이 상황을 직면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며 기도를 드린 야곱은 이전처럼 두려움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인해 안일하게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매몰되었다면 적어도 죽음을 면할 수 있는 하란으로 돌아가거나 약속의 땅을 포기하여 다른 길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봄과 동시에 침착하게 방법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서를 위한 야곱의 선물(13-20절)
(13-16)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야곱이 찾은 작전은 에서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혹자는 이 방법에 대해 순수하지 않다며 비난하기도 하지만 야곱에게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야곱이 에서에게 준 짐승의 숫자가 550마리에 달했다고 하는데, 단순히 짐승을 갖다 바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서에게 전달할 가축들을 떼로 나누고 각 떼마다 거리를 두게 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릴 적부터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자기보다 더한 라반을 만나 모진 고난을 겪었지만 그 경험을 통해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은 한층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짐승을 세 떼로 나누어 에서에게 전달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선물을 받게 되면 에서의 마음이 풀어지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이 선물들을 접수하는 에서의 행렬은 현저히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물로 에서의 마음을 돌리고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는 야곱의 치밀한 계획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선물을 전달할 종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담게 됩니다.
(17-20)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야곱은 자신의 종들이 에서를 만났을 때 받게 될 질문을 예상하여 그에 맞는 답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스스로를 에서의 종이라 표현하며 제물을 바치려 합니다. 이는 자신과 가속들의 생명을 지킬 수만 있다면 자신을 낮추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야곱의 인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해서 위기가 빗겨 가거나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19와 같은 고통스런 삶의 무게를 세상 사람들과 함께 견뎌야 합니다. 그럼에도 참 감사한 것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 매몰되지 않는 비결을 야곱의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벧엘에서 말씀하시고 마하나임에서 그 언약을 붙들게 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2천년 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십자가 희생과 죽음을 초월한 사랑의 언약을 오늘도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벧엘 언약을 기억하여 정신을 차린 야곱처럼,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며 통곡했던 베드로처럼 우리의 삶에 자리에서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일 것입니다. 지금 이 기도의 자리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놀라운 사랑의 언약을 붙들고 오늘도 하나님 사랑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자기 존재 유지와 구축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물론, 저마다 방법은 다릅니다. 어떤 자들은 돈과 명예를, 어떤 자들은 나눔과 희생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만 결국 나라는 존재 구축을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둘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이름부터가 “발꿈치를 움켜쥐다”라는 뜻입니다. 어머니 태에서부터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장자 에서의 발꿈치를 움켜쥐었기 때문에 갖게 된 이름입니다. 그는 복을 얻기 위해 에서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그의 장자권을 샀고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잘됨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동도 서슴지 않던 야곱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에서와의 재회입니다. 그는 에서가 자신을 죽일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어찌 해야 할지 걱정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야곱은 자신의 소유로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로 합니다.
그에 앞서 보내고(21-23)
(21-23)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자신이 힘겹게 모은 재산을 에서에게 선물로 줍니다. 재산도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22절, “밤에 일어나”라는 구절에는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그”라는 강조어가 “밤에 일어나” 앞에 붙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잠을 설치고 그날 밤에 다시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는 예물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내와 여종들 그리고 아들들까지도 에서에게 먼저 보냅니다. 어쩌면 에서가 그들을 공격하면 멀찍이서 지켜보다 얼른 도망가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에서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사용한 야곱은 얍복 강가에 빈털터리로 혼자 남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본문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창세기 32장 21절부터 창세기 33장 3절까지를 보면 샌드위치 구조로 돼 있습니다. 씨름 사건이 중간에 끼어있고 앞뒤로 야곱이 가족들을 배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1절부터 23절에는 야곱은 가족들을 본인보다 먼저 에서에게 가게 합니다. 하지만 씨름 사건 직후인 33장 1절부터 3절에는 본인이 가장 먼저 에서를 만나러 가고 가족들은 그 뒤를 따라오게 합니다. 정리하면, 21절부터 23절에서의 야곱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족마저 버리는 자였지만 33장에서의 야곱은 더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야곱이 이렇게 변화했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진짜 복(24-32)
(24-26)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고백을 통해 이 사람이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셨지만 그를 이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부족하셔서 야곱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에서와의 재회를 앞두고 야곱은 살고 싶다는 갈망이 극에 달해있었는데 살기 위해서라면 하나님마저 제압해서 복을 얻어내겠다는 마음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조차도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기복신앙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나의 잘됨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이용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어땠습니까?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결국 살기 위해 주를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고상한 척할 수 있지만 정말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터졌을 때 인간은 하나님을 죽여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목숨같이 여겼던 율법을 공격하시자 그렇게 신실하고 하나님 말씀을 사랑했던 자들이 예수를 죽이자고 합니다. 살인자를 살릴지언정 예수는 살려둘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다투어서라도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우리 마음에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25절에 보면, 그런 야곱의 허벅지를 하나님께서 치십니다. 여기서 허벅지라고 번역된 야렉이란 단어는 엉덩이, 둔부 등을 의미하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남성의 정자가 저장된 곳, 다시 말해 인간이 생명을 품고 있는 곳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그런 야렉을 하나님께서 치신다는 뜻은 야곱의 생명을 끊겠다는 뜻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야곱을 도리어 하나님께서 쳐서 죽이시려는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이렇게 진짜 하나님은 나를 죽이는 걸림돌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걸림돌은 모든 인간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데 그 이유는 선악과 먹은 인간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 돼 진짜 하나님과 다투는 존재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들었을 때 먼저 불편하고 거부감이 들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 또한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은 자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 실패와 죽음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은혜와 생명을 부어 주십니다. 마른 뼈와 같은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듯, 이 창조 원리를 통해 성도는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역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와 같은 그림이 할례, 태가 끊어진 후에야 아이를 낳는 사라, 에디오피아 내시 등입니다.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철저하게 3번 부인한 후 십자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게 모두 절대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자리에, 어떠한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그림입니다.
(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날 때부터 속이는 자, 살기 위해서라면 형제의 뒤꿈치도 서슴없이 움켜쥐는 자인 것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인물들은 이름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삽니다.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야곱의 옛 자아는 야곱이란 옛 이름과 함께 지워지고 새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을 주시는 것과 허벅지를 치시는 것은 사실 같은 그림입니다. 둘 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원리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물론,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고 나중에는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장자요 참 이스라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야곱이 새 이름을 받는 것은 단순히 어떠한 다른 이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받는 겁니다. 야곱이란 옛 자아는 죽고 하나님의 이름과 중첩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 이제 더이상 야곱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 이스라엘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씨름 사건이 있고 난 후에는 야곱이 가족들을 뒤로한 채 자신이 가장 먼저 에서를 맞이하러 나갑니다. 이미 죽고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야곱은 더는 자신의 생명 유지와 구축을 위해 애쓰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신약에서 교회로 발전합니다. 초대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재산을 교회를 위해 전부 기부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선 필수적인 재산을 교회를 위해, 타인을 위해 기부했다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교회는 이스라엘이 된 야곱처럼 더이상 자신의 생명 유지와 구축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도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하나님을 파악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삼고 싶어합니다. 새 이름을 받았다고 해서 옛 이름의 성향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옛 이름은 우리 몸에 계속 남아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는 않으시지만, 복은 주십니다.
그런데 이 복은 야곱이 생각했던 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에서를 물리칠 기가 막힌 전술을 가르쳐 주셔도 모자랄 판에 싸울 수도 없도록 다리를 절게 하십니다. 마치 여리고 점령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할례 하시는 것과 비슷한데 야곱의 전투력을 모두 상실시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이게 죽음이고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서 반드시 격발시켜 진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선한 죽음입니다. 꾹 참으며 말씀 조금 지켰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절름발이일 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진짜 자기 부인이고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아픕니다. 세상은 다리 저는 이들이 저주받았다고 비아냥거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자들은 무시합니다. 하지만 진짜 복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멋지게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업히지 않으면 걸을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자라는 우리의 옛 이름을 폭로하시며 우리 안에서 어떠한 의도 나올 수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처절한 자기 부인과 죽음을 통과한 자에게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이 주어지는 겁니다.
(30-32)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하나님을 보았는데도 자신의 생명이 보전됐다고 합니다. 사실, 야곱의 생명은 보전되지 않았습니다. 허벅지를 맞아 절름발이가 됐고 이름은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것이 진짜 산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절름발이가 된 그 장소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리신 장소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이 됩니다.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않으며 평생 하나님께서 야곱을 치신 이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믿는 자들이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의 옛 사람을 날마다 죽이시고 그 죽음의 자리에 새 생명을 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기 원합니다. 힘들고 아프지만, 오늘도 우리는 절름발이일 뿐이라고, 내 생명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할 수 있는 존재라고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덮으시는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고 주님이 주시는 새 이름 안에서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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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라는 인물은 태중에서부터 형 에서와 다투고, 출생할 때도 형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났고, 성장해서는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쟁취했고, 장자의 축복을 받기위해 거짓 분장을 하여 아버지를 속인 그야말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자라고 평가할 만한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먼저 찾아와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의아하기만 합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에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서 외조부가 거주하는 하란으로 도피하던 중 벧엘에서 잠 잘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시 돌아올 것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먼저 약속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반이 야곱을 해하려고 하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고, 야간도주한 야곱의 뒤를 쫓는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인 야곱은 마하나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나님의 사자들과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포기하고 싶었던 귀향길을 계속 갈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1-2절)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욕망이 가득한 야곱, 그가 바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하거나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야곱보다도 더 세상적인 욕망과 야욕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부인하다 못해 대적하고 있던 패역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야곱은 기약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 벧엘에서 돌로 베개를 삼아 자고 있는 처량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위 만사형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반의 집에서 과거 자신이 행했던 대로 되갚음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지 않는 일반인들과 달리 역경과 시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 똑같이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에 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믿기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역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귀향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야곱은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될까요?
느헤미야는 동생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처참한 현황을 들은 느헤미야가 첫 번째로 행한 행동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하되 마치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감나무 아래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지 않고, 그는 4개월간 예루살렘 성벽을 증수하는 데 필요한 제반사항과 어떻게 증수할 것인가를 치밀하게 계획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이처럼 준비가 되었을 때 받게 됩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4개월간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저 주문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만 기도했다면 4개월이 된 시점에 왕이 예루살렘 성벽을 증수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도 느헤미야처럼 단순히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행동들을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본문에서 취하는 야곱의 행동이야 말로 참으로 현명했다고 평가합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은 무엇보다도 에서의 자신을 향한 마음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자들을 보냈습니다. 에서를 만나고 온 사자들이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온다고 하자, 에서가 자신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바로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혹여 에서가 한 떼를 칠지라도 나머지 한 떼는 살아남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9-12절)
기도한 후 그는 또 다른 대비책을 세웁니다. 즉 자신을 향해 미움이 가득한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선별된 염소와 양과 낙타와 소와 나귀를 예물로 택하되 세 떼로 나누어 자신에 앞서 한 떼씩 가서 에서를 만나서 예물을 바치게 합니다.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16-20절)
에서에게 화해와 용서를 바라는 예물을 보낸 후에 그는 밤에 가족들과 소유들을 얍복강을 건너가게 하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본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4-25절)
24절에서 “씨름하다”로 해석된 원어 “아바크(abak)" 동사는 본문에서 '니팔 와우 연속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서 야곱이 어떤 사람에게 잡혀 땅에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격렬하게 씨름을 계속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가족과 무리를 다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야곱,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보내주셨고 나름대로 에서와의 만남에 대비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 문제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자신을 향한 증오로 돌진해오고 있는 에서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께 울며 간구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뜻밖에도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탈구시켜 이후 야곱은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탈구시키셨다는 것은 세상적인 욕망에 휩싸야 살아왔던 야곱의 인생관을 완전히 꺾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잘못된 인생관이 무너져 버린 그는 이제 오로지 자신이 의탁해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 한 분임을 깨닫고 떠나려는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6절)
지금까지 세상적인 욕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잡고 있던 그 손으로 이제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려 간구합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셨고, 그 물음에 야곱은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 외에도 “속이는 자”, “찬탈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에게 “너의 실상은 무엇이냐?” 물어보였고 이에 야곱은 자신의 실상이 “남을 속여서 남의 자리에 대신 앉은 죄인”이라고 자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실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고백이 없이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이 이처럼 쉽게 물러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찜통 안에 있는 것처럼 더웠던 날씨가 단 며칠 만에 선선하다 못해 싸늘하게 변한 자연현상 앞에서 인간의 미비함을 다시 한 번 절감하지 않았습니까!
야곱이 자신의 실상의 고백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시켜주셨습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8절)
이스라엘은 28절의 해석에 의해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긴 자"라고 이해되어 왔지만,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본은 이 구절을 '네가 하나님을 더불어 능력을 얻었으며, 그리고 네가 사람들 중에서('~와 함께'라는 뜻도 있지만) 강할 것임이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뜻하는 “엘”과 “능력을 가지다 (또는 싸우다)”을 의미하는 “사라”로 구성된 단어로 그 의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어 강하게 된 자'를 뜻합니다.
이후 야곱의 태도는 돌변합니다. 에서를 만난 야곱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식솔들을 뒤로 하고 탈구된 허벅지 관절로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가서 몸을 굽혀 일곱 번 절하며 에서에게 다가갔고, 헤어질 때만해도 정상적이었던 동생 야곱이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오면서 진심으로 자신에게 절하며 사죄하는 모습을 지켜본 에서는 달려가서 야곱을 맞아서 안고 입을 맞추고 울면서 평생 원수지간이었던 형제가 화해하게 됩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9-10절)
이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이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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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야곱’은 이름 그대로 움켜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야곱은 움켜쥐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대 근동을 비롯하여 유대사회에서 ‘장자’는 아버지의 대리인이었습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과 축복에 대한 합법적인 상속인이었습니다. 야곱은 간발의 차이로 ‘장자’가 아닌 ‘차자’로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야곱은 자신이 장자로 태어나야 그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태중에서부터 에서와 다투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차자였고, 장자가 누릴 수 있는 권한과 축복은 그에게 없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이 누구보다 ‘복’에 목말라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랬기에 야곱은 ‘복’을 움켜쥐기 위해서라면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외삼촌을 찾아갔지만 외삼촌 라반은 자신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20년간 라반을 위해 일하면서 야곱은 제대로 된 품삯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셨고,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겠다고 하자 라반은 품삯을 정하라고 제안합니다. 라반의 탐욕을 잘 알고 있었던 야곱은 자신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20년간 밤낮없이 일하면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야곱의 악착같은 모습에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가장 큰 부담은 역시 형 에서였습니다. 자신의 형이 자신을 어떻게 맞아줄지, 야곱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이렇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4절)
야곱의 소식을 들은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400명은 적어도 야곱의 가족들이 고향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그들을 에스코트하기 위한 인원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에서는 자신과 아버지를 속여 달아난 야곱에 대해 복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야곱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고, 머릿속은 복잡해졌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사람들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에서가 한 쪽을 치면 다른 한 쪽은 달아날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9절)
야곱의 기도는 어찌 보면 교묘하게 하나님과 협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야곱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며,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아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음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즉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난 것이 자신의 의지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10절)
야곱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진실하심’은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야곱은 언제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존재를 깊이 깨닫는 데서 비롯되는 고백이 아닙니다. 자신의 손으로 움켜쥐고 쟁취하는 것만이 복인 줄 알았던 야곱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은총은 여전히 낯설었고 쉬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기도에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야곱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구원의 당위성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후 야곱은 에서를 대면하기 위한 전략을 짭니다. 그 전략은 ‘예물’이었습니다.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13절)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20절)
야곱은 에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예물’을 동원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물은 잘못하면 분노한 사람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예물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는 말 한 마디, 사과 한 마디가 그 사람의 맺힌 마음을 풀어주는 법입니다.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사들였던 야곱이 이제는 에서의 분노도 예물로 돌이킬 수 있으리라 계산하고 있습니다.
많은 예물을 보냈지만 여전히 야곱은 불안했고 무서웠습니다. 어쩌면 야곱은 자신이 쌓아놓은 것들을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에서의 손에 자신과 가족들이 비참하게 몰살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염려와 두려움 속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얍복 시내에 도착한 야곱은 가족들을 모두 건너가게 한 후 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을 찾아온 낯선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했습니다. 씨름이 끝날 즈음 그 사람은 야곱의 환도뼈를 내리쳤고 그 일로 야곱은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깨닫게 된 건 그때였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 복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는 것임을 그때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떠나가려는 그 사람을 붙잡고 축복해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27절)
27절의 대화는 단순히 이름을 묻고 답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야곱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존재인가를 물었고, 야곱은 ‘야곱’, 즉 움켜쥐는 것이 전부인 줄로만 아는 사람이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지난 삶에 대한 야곱의 참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다리를 다친 야곱이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있었기에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 복은 나의 힘으로 움켜쥐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매달려있는 것임을,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 꼭 붙어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임을 야곱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렇게 당신께만 매달려있으라고 그를 이스라엘로 불러주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움켜쥐며 태어나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아니던가요? 손으로 쟁취하는 것만이 복임을 알던 야곱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니던가요? 이해되지 않아도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우리의 머리로 납득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십시다. 나의 복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복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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