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그레이스
✿1999년 6월 30일
씨랜드수련원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새벽, 화염에 휩싸인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1999년 6월 30일 경기도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3층 컨테이너 숙소에서 화재가 발생, 서울 문정동 소망유치원생 18명과 부천 이월드외국어학원 유치원생1명 등 어린이 19명과 마도초등학교 김영재 교사 등 어른 4명이 숨졌다.
불은 어린이들이 자고 있던 수련원 3층 301호실에서 시작돼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순식간에3층 건물 전체로 옮겨 붙었다. 불이 처음 난301호에 있던 소망 유치원생 18명은 문을 열지 못해 모두 사망했다.
불이 난 뒤 화재신고가 늦게 이루어진 데다 소방서가 현장에서 70km나 떨어져 있어 소방차 출동마저 늦어 인명피해가 크게 늘었다. 검찰은 씨랜드 화재 원인에 대해 301호실에 놓인 모기향불이 주변의 옷과 종이 등 가연성 물질에 접촉하면서 발화된 것으로 최종 발표했다.
▶2015년 미국 최고 발레단에
첫 흑인 수석무용수 탄생
미국 최고의 발레단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에서 75년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수석무용수가 탄생했다. 미스티 코프랜드(Copeland·32)가 주인공이다. ABT 는 홈페이지를 통해 솔리스트(단독으로 춤출 수 있는 무용수)인 코프랜드를 수석무용수로 승급한다고 지난 30일(현지시각) 밝혔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75년 장벽을 깨고 코프랜드가 역사를 썼다”고 보도했다.
미주리주(州) 캔자스시티 출신인 코프랜드는 13세 때 캘리포니아 산페드로 발레단에서 발레를 시작했다. 17세이던 2000년 ABT 발레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뒤, 1년 만에 군무(群舞)를 추는 무용수로 ABT 정식 멤버가 됐다. 2007년 흑인 최초로 솔리스트 자리를 꿰차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에서 주역을 맡아 무대를 빛냈다.
코프랜드는 인종 문제에 대한 거침없는 발언으로 무대 밖에서도 주목받았다고 NYT는 전했다. 백인 주류인 미국 무용계에서 활약하는 코프랜드는 2015년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꼽혔다. 코프랜드는 공식 발표가 있기 전인 26일 발레 ‘백조의 호수’ 오프닝 공연 겸 리셉션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면서 수석무용수가 될 거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이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CBS는 전했다.
▶2009년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슈 별세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슈(Bausch·68)가 2009년 6월 30일 독일에서 별세했다. 바우슈는 무용에 연극을 접목해 ‘탄츠테어터(Tanztheater)’라는 장르를 개척한 현대 무용계의 거장이다. 1973년 직접 창설한 독일 부퍼탈 무용극장을 중심으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 등에서 활동하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각광을 받았다.
바우슈의 안무작 중에는 1986년 이탈리아 로마를 담은 작품 ‘빅토르’로 출발한 ‘도시·국가 시리즈’가 특히 유명하다. 스페인 마드리드, 홍콩, 헝가리 부다페스트, 포르투갈, 일본 등에 이어 2005년에는 13번째 작품으로 한국이 소재인 ‘러프컷(Rough Cut)’을 만들었다.
바우슈는 ‘러프컷’에서 김장을 담그듯 무용수의 몸에 배춧잎을 덮어주는 장면, 걸레질하고 이부자리 펴는 모습, 배를 쓰다듬으며 자장가 부르는 풍경, 어지럽게 질주하는 사람들, 등목 등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표현했다.
▶2009년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화성시 안녕동의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
조선왕릉이 2009년 6월 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 전체 42기 가운데 북한에 위치한 2기를 제외한 40기가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 27명의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망라한 것으로, 한 왕조의 무덤이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조선왕릉은 당시 조선왕조의 세계관·종교관·자연관을 바탕으로 타 유교문화권 왕릉과 다른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5백년이상 지속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이다. 또한, 매년 200만명의 시민이 찾고, 기일에 맞춰 왕릉제례가 이뤄지는 등 살아있는 역사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2004년 오르가니스트 한지윤씨
독일 뉘른베르크 콩쿠르서 1위
▶2002년 브라질 월드컵축구 사상
5번째 우승-2002한일월드컵 폐막
브라질이 2002년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경기장서 열린 제17회 2002 FIFA 한·일 월드컵축구 결승에서 호나우두가 혼자 두 골을 터뜨리는 활약에 힘입어 독일을 2대0으로 꺾고 FIFA컵에 입맞춤했다.
1958·1962·1970·1994년에 이어 통산 다섯 번째 우승이었다. 21세기 처음이자,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린 월드컵의 패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것도 대회 1회전부터 결승까지 7전 전승이라는 완벽한 성적으로 거둔 영예였다. 1930년 1회 대회 이후 72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과 벌인 월드컵 맞대결에서 승리하는 기쁨도 누렸다. 대회 8골을 넣은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득점왕에게 주어지는 `골든 슈`를 차지했다.
15억명 이상이 TV로 시청한 결승전은 FIFA랭킹 2위 브라질의 화려한 공격과 11위 독일의 수비가 충돌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주도권은 3대회 연속 결승에 오른 강호 브라질이 쥐었다. 결승골은 후반 22분 터졌다. 히바우두가 상대진영 왼쪽에서 강하게 때린 중거리슛을 독일 골키퍼 올리버 칸이 잡다 놓치자 호나우두가 달려들며 가볍게 차 넣었다. 호나우두는 12분 뒤 클레베르손의 패스를 받아 페널티지역 정면에서 땅볼슛, 쐐기골을 성공시켰다.
한편 5월 31일 개막되어 한 달간 전세계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월드컵도 결승전과 함께 폐막됐다. 이번 대회는 우려했던 축구장 난동꾼(훌리건) 관련 사고가 한 건도 없었고, 금지약물 복용 케이스도 나오지 않았으며, 경기 배분, 선수단과 관중의 이동, 교통, 숙박, 미디어 서비스 등 공동개최에 따른 문제점들도 거의 불거지지 않아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기력 측면에선 한국이 4강, 일본이 16강까지 오르면서 아시아축구의 약진을 주도했으며, 터키·세네갈·미국 등도 선전해 `축구 평준화`에 이바지했다.
▶2001년 탈북한 장길수군 일가족 7명,
서울 도착
2001년 6월 30일 오후 중국에서 망명을 요청한 장길수 가족 7명이 제3국을 경유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마중나온 보도진과 환영인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험난했던 4년 3개월여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들의 탈북은 지난 1997년 3월 외할머니가 두만강을 넘은 것을 시작으로, 1999년 8월까지 차례로 이뤄졌다. 탈북할 당시의 길수군 가족과 친척은 모두 4가족 15명이었으나, 길수군 어머니 등 5명은 중국 공안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송환돼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고, 나머지 가족의 소재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길수군과 형 한길(20)씨의 존재가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난 1999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NGO 대회에 북한의 실상을 폭로한 그들의 그림이 뉴스위크, 영국 TV 등을 통해 처음 소개되면서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들의 서울 도착은 6월 26일 목숨을 걸고 중국 베이징 시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진입하면서 시작됐다. 중국 라오닝성(遼寧省) 다렌(大連)에 은신해 있다가 UNHCR 사무소에 진입한 길수군 가족은 "자신들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하고, 한국으로 보내주지 않을 경우 자결하겠다"는 비장한 의지를 UNHCR에 전달했다.
결국 UNHCR과 한·중간의 막후협상으로 이들은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거쳐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지만,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우리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을 바라보는 세계의 비상한 관심과 올림픽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정치적 부담 등 대외환경에 의해 사건이 해결됐기 때문이다. 탈북자의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나쁜 선례를 남긴 것도 외교적 악수로 지적됐다.
▶1996년 작곡가 박시춘씨 별세
`신라의 달밤`의 작곡가 박시춘씨(83)가 숙환으로 1996년 6월 30일 별세했다. 박씨는 1926년 밀양보전을 졸업하고 1931년 `OK레코드`에 전속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모두 2천여곡의 작품을 작곡했다.
일제말기 무명가수였던 남인수가 불러 인기를 모았던 `애수의 소야곡`은 당시 이동 연예단의 악사였던 박씨의 손에서 나왔고 해방직후 나온 `가거라 38선`은 38선의 비극을 노래로 엮어낸 첫 작품이었다. 박씨는 또 1947년 가수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을 비롯 `고향만리` `럭키서울` `비내리는 고모령`과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전우여 잘있거라` 등 주옥같은 멜로디로 한국 가요계를 이끌었다.
본명이 순동인 박씨는 밀양서 권번을 하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당시 명창 손만갑-이동백-이화중선-김창용의 소리를 듣고 자랐다. 읍내에 있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축음기의 신식노래에 도취하여 11세에 그 카페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간 것이 그의 가요인생의 시발이었다. 6.25 때 국방부 정훈국에서 `승리의 용사` 등 국군 장병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고인은 5.16후 10년 동안 한국연예인협회이사장을 맡았으며 예총부회장 작가동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씨는 한국대중가요계를 이끈 공로로 보관문화훈장과 문공부장관상을 받았다.
▶1994년 하타다 다카시 교수 별세
▶1992년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
피델 라모스가 1992년 6월 30일 제12대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했다. 지난 5월 11일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 피델 라모스 전 국방장관은 아키노 대통령의 6년 재임기간 중 군합참의장과 국방장관직을 차례로 맡았었다. 라모스는 1986년 2월 그의 사촌형인 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항한 군부반란을 주도하면서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당시 군부반란은 피플스 파워로 대변되는 국민들의 대규모 민주시위를 촉발, 마르코스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어 후임 대통령에 오른 아키노 정권하에서는 7차례나 군부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아키노 대통령의 신망을 공고히 했다. 이를 계기로 마르코스 정권에서 탄압의 주체였던 그의 이미지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탈바꿈됐다.
그는 1928년 3월 18일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1백76㎞ 떨어진 링가옌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마르시소 라모스는 외무장관 및 대만대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여동생 레티시아 샤하니는 현재 필리핀 상원의원이다. 1950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1년 뒤 미 일리노이대에서 건축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필리핀군 소대장과 중대장 계급으로 공산게릴라 토벌작전에 참여했으며 한국동란에도 참전, 필리핀군 정찰소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81년에는 군부에서 일단 퇴임했으나 마르코스 대통령이 그의 임기를 연장, 군의 다른 주요 장성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그는 1986년 대선 때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후안 폰세 엔릴레에 합세해 군부반란을 주도, 마르코스 정권에 종지부를 찍는데 일조했다.
▶1992년 경부고속전철 기공
▶1989년 전대협 대표 임수경 방북
1989년 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외국어대 불어과 4년)양이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단신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전대협은 정부가 평양축전에 참가하지 못하게하자 극비리에 임수경 대표를 제3국을 통해 평양축전에 파견했다고 밝혔다.
평양에 도착한 임 양은 북한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평양축전에 참가하는 동안 북한학생위원회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조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8개항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백두산을 출발, 한라산을 향해 국토를 종단하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축전이 끝난 후 임 양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임수경양.
▶1984년 볼리비아 쿠데타 진압
▶1984년 서울~대전 고속도로 4차선
신설 확정
▶1983년 소련,
원격조정 통한 인공위성도킹 성공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시작
그해 여름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의 `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1983년 6월 30일부터 방송이 시작돼 장장 138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생방송 장면. 뒤쪽으로 이 프로의 진행자 김동건 아나운서가 보인다.
처음 방송할 때 만해도 90분 길이 단발성 특집이었다.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 1000명이 넘게 몰려왔다. 방송도중 방송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쏟아졌다. 진행을 맡은 유철종 이미연씨는 이날 새벽 3시까지 연장방송을 해야했다. 방송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 결국 138일간 계속됐다. 진행자로 김동건 신은경 황인용 강부자씨 등이 합세했고 잠도 잊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방송과는 별도로 여의도 KBS 본관 벽과 그 앞 광장에는 이산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들이 붙인 벽보가 어지러이 등장했다. 한국전쟁후 생사를 모른채 33년을 애태우던 남북이산가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방송이벤트였다. 방송중 1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참여해 애탄 절규를 했고 1만189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맛보았다. 독일의 공영 ZDF를 비롯, 일본 NHK, 미국 CBS 등 해외 미디어 취재도 뜨거웠다.
▶1983년 여천 LNG기지 준공(단일
기지로 세계최대규모 저장용량 15만
2000t)
▶1981년 중국, 실용주의 체제 선언
▶1981년 경희대국토종합개발연,
국내최초로 전국토지이용현황을 그린
컴퓨터지도 작성 공개
▶1980년 국회, 이택돈,예춘호,손주항
,김녹영 의원직 사퇴
▶1980년 모스크바서 서독,
소련 정상회담
▶1980년 에너지관리공단 발족
▶1980년 성산대교(길이 1410m, 한강12번째 다리) 개통
한강의 12번째 다리인 성산대교가 1980년 6월 30일 준공, 개통됐다. 마포구 망원동과 강건너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이 다리는 길이 1410m, 폭 21.6m의 6차선으로 양쪽에 보도(2.7m씩)를 갖추었다. 다리의 색깔은 안쪽은 회색, 바깥쪽은 주황색이다.
서울시가 1977년 4월에 착공, 2백57억9천만원을 들여 3년3개월 만에 완공한 이 다리는 1979년 개통한 성수대교에 이어 두 번째로 철재트러스 공법을 연결, 조립한 것이어서 교각사이가 120m씩으로 다른 한강다리보다 2배나 길다. 때문에 다리모습이 날렵해 보이는데다 교각과 교각사이에 반달형 아치를 세워 곡선미가 가미되어 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중앙청∼사직터널∼금화터널∼연세대앞∼사천고가교∼성산대교∼경인고속도로 입구를 잇는 11.7km의 성산대로건설이 마무리됐다. 다리 양쪽입구에는 각각 입체교차로가 설치돼 차량이 각방향으로 논스톱으로 달리게 돼 있어, 김포공항을 오가는 차량들의 경우 시내중심까지의 주행시간이 종전40분대에서 20분대로 절반이나 단축됐다.
https://youtu.be/xEuURFf-rLM
▶1978년 현대아파트 사건 발표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7년 동남아조약기구
(SEATO) 해체
▶1975년 전투예비군 부대 편성
▶1971년 UN군사령부방송,
21년 만에 폐쇄
▶1969년 오늘,
중남미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축구 때문에 국교를 단절을 했다.
1969년 중미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축구 전쟁을 벌였다. 표면적 이유는 월드컵 중남미 예선에서의 양국 응원단의 충돌이다. 하지만 국경 분쟁에다 무역 갈등, 그리고 온두라스에 거주하던 30만~50만 명에 달하는 엘살바도르 이민자에 대한 강제퇴거 조치 등이 축구장 충돌을 계기로 국교 단절과 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1968년 김종필, 모든 공직서 사퇴
▶1968년 프랑스 총선거에서
드골파 압승
▶1966년 태릉선수촌 개관
▶1961년 제3대 대법원장에
조진만 임명
▶1960년 콩고민주공화국 독립
검은 아프리카에 독립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이었다. 콩고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콩고 중 먼저 독립한 곳은 벨기에령인 ‘레오폴드빌 콩고(콩고민주공화국)’였다. 이곳이 1960년 6월 먼저 독립했고 프랑스령 ‘브라자빌 콩고(콩고공화국)’는 같은 해 8월 독립했다. 하지만 벨기에령 콩고민주공화국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폭동, 유혈, 내란으로 얼룩져 또다시 죽음의 땅이 되었다.
1958년 10월 급진적인 청년 파트리스 루뭄바(1925~1961)가 콩고 최초의 전국 규모 정당인 ‘콩고국민운동당’을 창당하고, 훗날 대통령이 될 조세프 카사부부가 바콩고족을 중심으로 ‘아바코당’을 결성하자 이 정당들을 중심으로 독립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벨기에 정부가 독립을 허용하겠다고 해놓고도 시기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아 폭동이 그치질 않았다. 결국 1960년대 초 벨기에는 콩고의 장래를 결정하기 위한 브뤼셀 회의를 소집했다. 카사부부와 루뭄바도 참석한 브뤼셀 회의에서 ‘5월 총선, 6월 30일 독립’이라는 독립 일정이 확정되었다.
총선 결과 루뭄바의 콩고국민운동당은 제1당, 카사부부의 아바코당은 제2당이 되어 루뭄바와 카사부부는 각각 연립 정부의 총리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연립 정부는 루뭄바를 지지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카사부부를 지지하는 지방분리주의 세력으로 나뉘어 분쟁이 일어났다.
한편 이들과 세력 균형을 이루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광물 자원이 풍부한 카탕가주의 모이세 촘베였다. 촘베는 벨기에의 지원을 받아 부족과 지역 이해를 우선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방 국가를 구성하기로 카사부부와 합의했다. 하지만 루뭄바는 촘베와 카사부부의 분리주의를 반대하며 강력한 중앙정부를 추구했다.
이 같은 정세 속에서 1960년 6월 30일 콩고민주공화국이 독립했으나 곧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1차 붕괴위기를 맞았다. 살인과 강간, 방화 사건들이 유럽과 미국 신문들의 머리기사를 장식하자 벨기에 군대가 잔류 벨기에인과 유럽인들을 구하기 위해 콩고로 공수되었다.
▶1954년 소련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가동시작
▶1952년 민중자결단,
국회의사당 포위 80여 의원
▶1951년 리지웨이, 원산만
덴마크 함상에서의 휴전회담 제의
1년 이상 계속되어 오던 한국전쟁이 1951년 6월 27일 마리크 주 유엔 소련대사의 정전회담 제의로 휴정협상에 대한 논의가 공식화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도 소련의 제의에 동의하자 이틀 뒤인 6월 2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교섭을 지시했다.
다음날인 30일 리지웨이는 공산군측에 원산 앞바다의 덴마크 군함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하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는 7월 1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이에따라 휴전예비회담이 7월 8일, 본회담이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개최됐다. 회담장소는 약 3개월 뒤인 10월 7일 안전상의 이유로 판문점으로 변경됐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발발 1년 15일 만에 휴전협상을 시작했으나 남한정부와 국민들의 휴전반대 데모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년 17일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에 협정이 조인됐다
▶1949년 하버드대,
최초로 흑인교수 임명
▶1949년 조선노동당 탄생
김일성이 아무리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입북했다 하더라도 국내 토착공산주의자들은 바지저고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새파란 젊은이가 세력을 확대하고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주장하는 등 분란을 일으키자 참다못한 박헌영 등은 서울에 엄연히 당중앙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분파행동이라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결국 김일성과 박헌영이 마주앉았다. 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서울의 중앙당에 속하는 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는 것. 분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련 공산당의 1국 1당 원칙 때문이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된 것은 1945년 10월 10일부터 나흘간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열성대회`에서였다. 김일성은 이때 분국의 책임비서가 되지 않았다.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는 소련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서였다. 대신 소련은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를 평양에서 여는 등 그의 얼굴 알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김일성은 2개월 뒤에 당 이름을 바꾼 북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북조선공산당은 1946년 8월에 조선신민당을 통합한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한차례 변신한 뒤, 1949년 6월 30일에는 기세가 완전히 꺽인 남로당마저 흡수한 조선노동당으로 탈바꿈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북한의 당 창건일은 북조선분국이 설립된 10월 10일이다.
휴전협정서에 서명하는 김일성.
1953년 7월 27일 오후 2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과 조선노동당 중앙위 서기 박정애가 둘러선 가운데 김일성이 휴전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8년 트랜지스터 개발 발표
1948년 6월 30일, 20세기 기술혁명의 단초가 된 트랜지스터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브래튼 등 3명의 연구원이 6개월 전에 이미 개발을 끝냈지만 특허획득을 위해 함구해오던 미국 벨연구소가 이날 그 실체를 공개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진공관을 220분의 1 크기로 줄였다는 기자회견 발표를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50년에 최초의 개량형 트랜지스터를 들고 나오자 이 신개발품이 가져올 혁명적 변화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소비가 적고 수명도 몇 배나 길며 덩치도 작은 트랜지스터의 등장은 진공관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고, 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도 현역에서 퇴장시켰다.
개발은 미국이 했지만 정작 재미를 본 것은 일본이었다. 1955년에 소니사가 세계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TR-55`를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1942년 프랑스 작가 레옹 도데 사망
▶1937년 오늘,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긴급 통화 전화 #999서비스 시작되다.
▶1936년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간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1936년 6월 30일 처음 출판됐다. 신문사기자였던 작가 마가렛 미첼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옛 남부의 분위기와 남북전쟁의 일화에 기초해 10년 동안의 조사와 집필 끝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들고 있는 마가렛 미첼.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바람`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종래의 연애소설 여주인공과 전혀 다른 당당한 캐릭터로 불황에 빠져있던 사람들의 공감을 샀고, 금새 베스트셀러가 됐다.
작가 마가렛 미첼이 1037쪽 분량의 이 소설에 붙이려 했던 제목은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른다`였다. 이것은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라고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타라 농장에서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외치는 마지막 대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맥밀런 출판사의 종용에 따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결정됐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기였고 이에 미국인들은 황량한 마음을 달래줄 소설을 원했다. 이 소설은 당시 뉴욕타임즈지의 서평란에서 `미국작가에 의해 쓰여진 최초로 주목할만한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미첼은 이 소설로 193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클라크 케이블, 비비안 리 주연의 상영시간 3시간 40분짜리 영화로 제작되어 1년 간 관객 2500만명을 동원했고, 1989년까지 관람 총인원 12억 이상을 돌파했다.
▶1930년 오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장진홍(1895년~1930년 ) 대구 형무소에서 자결했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을 주도했다. 아호는 창여(滄旅). 경북 칠곡 출생.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면서 황실 경호 명목으로 남겨놓은 조선보병대에서 복무했고, 1916년 조선보병대에서 제대한 뒤 동향 선배인 이내성의 소개로 비밀 결사인 광복단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했다가 이국필과 함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독립군 부대의 군사 훈련을 시도한 바 있으며, 1919년 3·1 운동 때는 가산을 팔아 전국을 다니면서 일제의 3·1 운동 탄압 과정을 조사, 기록한 뒤 미군으로 복무 중인 김상철에게 전달하여 번역본을 배포해 달라고 부탁하는 등 효과적인 독립 운동을 위해 노력하였고, 3·1 운동 이후 국내의 독립 운동이 위축되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던 중, 광복단 동지인 이내성의 소개로 전문가에게 폭탄 제조법을 배우게 된 것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폭탄을 직접 제조할 수 있게 된 장진홍은 경상북도 도지사와 경상북도 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지금의 하나은행 대구기업금융센터지점 자리),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등의 목표물을 정해 단독 거사를 계획했다. 1927년 10월 16일 칠곡의 집에서 폭탄을 제조하여 대구까지 운반한 뒤, 이를 선물 상자로 위장한 채 심부름꾼을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했다. 은행원이 눈치를 채고 경찰을 부르면서 바깥에 옮겨둔 폭탄 상자가 폭발하여 경찰 4명을 포함한 6명이 부상을 입었고, 장진홍은 무사히 달아났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친척인 장용희에게 안동의 주요 시설을 폭파할 수 있도록 폭탄을 제조하여 전달했으며, 친구 김사실과 함께 영천에서의 거사를 위한 폭탄도 제조했다. 이 두번의 후속 폭탄 테러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지 않아 미수에 그쳤다.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조여오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오사카의 동생 집에 은신해 있다가 최석현 등을 앞세운 일경의 끈질긴 추적 끝에 1929년 체포되었다. 이듬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최종심에서도 사형이 확정된 뒤 #장진홍(1895년~1930년 ) 대구 형무소에서 자결했다.
▶1923년 윤심덕,
한기춘의 성악회 열림
▶1913년 콜롬비아의 대통령
(1974-78 재임) 로페스 미첼센 출생
▶1910년 대한제국의 관료. 을사조약, 정미7조약, 기유각서,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트리플 #매국노 #이완용이 두 번째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경술국적!
https://m.blog.naver.com/culturecre/221360383743
▶1909년 각의,
사법권양도 및 군부폐지 결의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지역 원시림에서 운석이 폭발한 `퉁구스카 대폭발 사건` 발생
커다란 #운석 또는 #혜성의 공기 파열로 인한 거대한 불 덩어리가 러시아 역사적인 예니세스크의 스토니 #퉁스카강 (Stony Tunguska River) 근처의 8천만 그루의 나무들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1906년 미국식품의약국(FDA) 제정
▶1905년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원리 완성
1905년 6월 30일 스위스 베른에서 약관 26세의 특허국 심사관이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최대의 업적으로 된 논문을 완성했다. 이른바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소개로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연이어 논문을 발표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알버트 아인슈타인
3월에는 광양자(光量子)에 관한 논문, 5월에는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 게다가 이날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이 논문이 9월에 물리학연보지에 발표되자 일부 전문가들은 격찬했지만 대부분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불평을 샀다. 1915년 이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발전했고 그 실용성은 40년 후에 원자에너지로 현실화됐다.
▶1899년 독일, 스페인으로부터 마리아나, 카로린 군도를 획득
▶1893년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의 최고실력자 울브리히트 출생
▶1882년 한국 독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1649년 프랑스의 화가 시몬 부에 사망
▶1470년 프랑스의 왕(1480-98) 샤를 8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