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일으킨 중재기도
2001년 1월 5일,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빠르면 1개월, 길게 잡아도 6개월 미만이라는 이른바 ‘시한부생명’ 선고도 함께 받았다. 열흘 후 나의 병명은 ‘소장암’으로 정정되었고 이후 희귀 암 중에 희귀 암이라는 ‘GIST(위장관기저종양ㆍ肝전이 4기)’로 다시 정정되었다. 이렇듯 나의 병은 초기부터 진단조차 쉽지 않았고 병명이 정정될 때마다 생존 예측기간도 앞당겨졌다. 간암 4기라 해도 6개월 이내 사망률이 100%라는데 발견조차 어렵다는 소장암 말기로 진단되자 3개월 미만으로, 기스트(GIST)암으로 판명되자 의사는 아예 치료 자체를 포기하고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당시 국내 환자 수가 15명 내외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도 그 무렵에서야 연구를 시작했다는 생소한 희귀병 GIST암에 대하여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의사는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이렇듯 나의 병은 단 1퍼센트의 치유 가능성도 없는 불치병이었다. 4개월 동안 항암주사를 맞았지만 당초 예상했던 것처럼 전혀 효과가 없음을 확인하는데 그쳤으며 오히려 그 후유증으로 격리실에 수용,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최장기 생존예측기간인 6개월째로 접어들면서 이처럼 상태가 급박하게 악화되자 나의 이 절박한 상황은 MBC TV(01.5월)와 월간 여성조선(01.6월호)에 <시인 이호광 안락사 선언하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만큼 나의 죽음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2년 7개월이 지난 현재 살아 있다. 그냥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정상인과 다를 바 없는 건강한 몸으로 살아 있다. 3개월 전부터 본당 성령기도회에서 음악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으로 나의 건강상태를 대변하는 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오늘까지 살아 있는가가 이 글의 본론인데 이제부터 그것을 밝히려 한다.
이 시몬이 곧 죽게 됐다는 소문이 나돌자 본당 울뜨레아를 비롯 각 단체별로 나의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가 시작되었다. 본당에서 뿐만 아니다. 타 본당의 교우들과 수녀님, 생면부지의 치유안수 봉사자들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로 우리 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셈을 하자면 년인원 1,500명은 족히 된다.
나의 투병생활은 이처럼 교우들의 각별한 보살핌과 기도 속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다행으로, 또한 감사하게 느낀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친인척들이야 일종의 의무감으로 한 번 문병 오면 그것으로 그만인데 반해 교우들의 사랑과 봉사는 끊임없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그 각별한 사랑이 절망감과 고독감에 빠질 수도 있는 나를 구해주었다. 집필 예정인 투병기의 제목을 ‘행복한 암 투병’이라 정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말기 암 환자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는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건만, 따라서 투병생활이 행복했다니 말이 되느냐 하겠지만 실제로 나는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투병 중에 체험했다. 투병 중 내가 흘린 눈물의 대분은 통증이나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 애 쓰는 분들에 대한 감동에서 터뜨린 기쁨의 눈물인 것이다. 그래서 행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교우들에게 가슴 뭉쿨한 감사를 느끼면서도 그들의 기도가 나를 병마에서 구해 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나자로를 살리셨다는 성서에 근거한 그들의 믿음, 이른바 ‘주님께 기도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기적의 믿음을 부질없는 믿음이라 여겼다. 주님께 기도하여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어찌하여 매년 5만 여명이 암으로 사망한단 말인가? 이 의문을 해명해줄 논리적 물증이 현실 속에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예수의 치유능력에 대한 부정적 사고는 논리적 물증을 중시하는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적 산물일 수도 있고,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한 사도 토마처럼 내 신앙의 한계가 거기에 머물러 있는 탓일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 신앙이 비뚤어졌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신앙의 근간은 예수가 보여주고 실천한 ‘사랑’, 그 사랑을 본받음에 있지 예수를 통해 ‘기적’을 얻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적을 갈구하는 기도는 기복신앙의 산물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때문에 나의 기도는 ‘저의 병을 고쳐주세요’가 아니고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였으며 거기에 덧붙여 ‘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은총을...’이 전부였다.
이렇듯 나는 예수를 믿고 살면서도 예수의 치유능력만은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적을 갈망하는 신자들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구역 식구들은 9일기도를 연장해 나갔고 나경환 신부님은 만 2년 동안이나 매 미사 때마다 생미사로 주님께 간구하셨다. 지구 성령가족까지 합세한 본당 성령기도회의 극성스런 기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아내의 기도는 유별났다. 매일 미사와 54일 기도, 철야 성령기도회는 기본이고, 1년의 절반은 남양성지에서 기도를 바쳤는데 고통을 봉헌한다며 추운 겨울밤 맨발로, 더러는 20Kg이 넘는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십자가의 길을 돌기도 했다.
이처럼 신부님과 아내, 그리고 수많은 교우들의 간절한 기도가 계속되는데도 나는 예수의 치유능력만은 믿지 않았다. 다만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 너무 많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기쁘게 죽을 수 있다는 믿음만 굳어졌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가족을 비롯한 모든 분들을 자유롭게 해주자는 생각에서 빨리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나의 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신호였을까? 금년 1월 29일,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여 안산 고대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입원을 했다. 보름동안 영양제 주사로 버티었지만 회복의 기미가 없었다. 이럴 바엔 퇴원을 하겠다고 했더니 의사는 집에서 보다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편하다면서 퇴원을 만류했다. 죽음은 시간문제로 박두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농담으로 아내를 웃겼다. 웃으며 기쁘게 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날, 본당 신부님께서 병자성사를 주시러 오셨다. 신부님의 지극했던 사랑 때문에도 꼭 살아남아 은혜를 갚으리라 다짐도 했었다만 결국 이날 나는 신부님께 생애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고야 말았다. 신부님은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며 ‘이 시몬을 주님 뜻에 맡기고 갑니다’로 기도를 마쳤다.
그날 밤 나는 고열로 밤새 시달렸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물증이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몸이 게운 했다. 꺼질 듯 했던 쉰 목소리가 작지만 맑은 소리를 냈다. 복부가 허전하여 배를 쓰다듬자 간밤에까지만 해도 주먹만 하게 만져지든 암 덩어리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의사에게 알렸더니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날부터 나의 기력은 원상회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님께서는 분명 당신을 살려주신다. 그러나 구렁텅이까지 내몰았다가 막판에 건져주실 것이다. 교만하지 말라고.”
아내가 내게 버릇처럼 해온 말인데 딱 맞아떨어졌으니 이제 나는 주님의 치유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소장에 있는 종양이 방향만 틀어도 장파열로 급사할 수 있고, 간에 있는 8개의 종양 중 한개만 터져도 출혈로 즉사한다고 했던, 그럼에도 아무런 의학적 처방은 할 수 없었던 내가 오늘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 덕분으로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나의 기도가 부족했음에도 이러한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신부님과 교우들의 간절한 중재기도가 기적을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보지 않고 믿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눈으로 보고서야 믿게 되었음이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주님께 기도하여 청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
“중재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 *
천주교 수원교구 울뜨레아 회보 <순례자> 03.6월호 / 평신도 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