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산책 1 / 김붕래
고조선 자료1)
1. 역사의 아침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명언이 우리의 상고문화사를 들출 때마다 실감으로 떠오릅니다. 모든 민족이 '천지창조신화'나 '건국 신화'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삼국유사>의 단군 이야기는 건국 신화에 속하겠지만 <제왕운기>나 <동국통감> 같은 국내 서적이나 사마천의 <사기> 같은 중국 역사서에서도 <조선열전>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고조선’이란 나라와 ‘단군왕검’이란 인물의 실존은 역사적 사실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책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햇빛에 바랬는지 월광에 물들었는지 불투명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고조선 역사는 주로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의 내용이 다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삼국유사>에는 '요 임금 50년'으로 나왔는데 이것은 <동국통감>에 의하여 '요임금 25년(BC2333년)'으로 바로잡아 집니다. 일연 스님은 모두(冒頭)에서2) 태초의 이야기는 전부 신비스럽고 기이한데서 출발했으니 괴력난신은 결코 기이한 것이 아니라면서, 권일(券一) ‘기이편’을 수록했고 제일 먼저 고조선을 이야기 했습니다. 아사달이나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장단경으로 천도했다는 등등의 사실이 역사에 가깝다면, 곰이 웅녀가 되어 단군을 출생했다는 이야기는 상징이거나 신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삼국유사>는 그 기록 자체가 본격적인 역사서와는 다른 면모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신화적인 요소들은 <동국통감>에 와서 제자리를 잡습니다. 서거정 등이 “요 즉위 원년은 갑진년(기원전 2357년)이고, 단군 즉위는 25년 무진년(기원전 2333년)”3)이라고 삼국유사의 잘못 인용된 연대를 바로잡아 오늘에 전한 것은 역사의 진화입니다.
단군의 출생에 대해서도 기록마다 다릅니다. <삼국유사>에는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지만, <제왕운기>에서는 단웅천왕(환웅)의 손녀와 단수신(檀樹神)이 결혼하여 단군이 태어납니다. <삼국유사>로부터 200여 년 후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동방에는 최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는데. 이분이 단군'이라고 천손하강형의 형식으로 단군의 탄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을 우리의 역사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함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국유사>라는 기록물이 없었다면 우리의 2000년 고대문화사는 그대로 어둠 속에 묻혀 더 이상 연구할 자료를 잃었으리란 사실입니다. “중국의 요 임금 때 단군이 조선을 세워 1908년을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구절일 것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긍지가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정부에서는 이 <동국통감>에서 확정한 연대를 이어받아 서기 1948년이 아닌 ‘단기 4281’이라는 연호로 새 나라의 문을 열었습니다.4)이것은 위대한 역사의 승계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국사 교과서에서는 단군 역사를 뚜렷하게 단정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6년 국사 교과서까지는“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BC2333).”5)라고 소개하다가, 2007년에 와서야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기술했습니다. 즉 ‘건국되었다고 한다.’의 막연한 발언에서 ‘건국하였다’는 주체적인 표현으로 바뀐 것입니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지 4340년만의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라의 경축일인 개천절은 성탄절이나, 부처님 오신 날처럼 풍성하지 못합니다. 해마다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도 썰렁한 국경일이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겠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해결해야할 과제물의 하나일 것입니다.
고조선의 존속 기간이 애매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유사>는 고조선이 190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인데 <동국통감>에 의하면 1048년의 역사밖에 안 돼 근 1000년의 차이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고려사> ‘지리지’의 ‘삼조선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고조선(BC 2333) 다음에 기자조선(BC 1122)이 있었고 그 다음에 위만조선(BC 195)이 계승하였다는 방식의 역사적 이해입니다.
윤내현6)에 의하면 이승휴나 서거정 같은 유학자들은 <고려사>의 내용대로 기자조선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된 것으로 본데 반하여, 일연 스님은 기자국(기자조선)은 고조선 서쪽 변방에 존재하고, 고조선은 그 동쪽 대륙에 건재한 것으로 본 역사관의 차이로 설명됩니다. 즉 상(은)나라 유민이었던 기자는 주나라를 피해 연나라 변방인 하북성 갈석산 주변, 난하 유역에 <기자국>을 세워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기원 전 2세기 진·한(秦·漢) 교체기 때 위만이 기자국을 빼앗아 그 영역에 위만조선을 세웠고, 동진하여 세력을 넓히다가 108년 한 무제에게 멸망합니다. 한 무제는 위만의 영토에 한사군을 세웠으나 고조선은 그 동쪽에 건재했다고 윤내현은 사료를 들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편 현행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자조선이란 명칭이 사라진지 꽤 오래 되고, 위만이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애매한 표현을 통해 고조선이 기원 전 108년 한나라 무제에 의해 멸망된 것으로만 보고 있습니다.7)이렇게 아직도 통일되지 못한 채 산발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역사적 내용들을 정리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것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국사 교과서의 정비입니다. 국가관을 뚜렷이 반영하는 국사 교과서가 되기 위해서는 현행 검인정 교과서 체제로는 그 사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아직도 정리되어야 할 많은 부분은 국정 교과서 체제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연구 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19세기 소설가들(쥘 베른, HG 웰스)은 대포알을 타고 달나라에 가는 상상을 했고 20세기 과학자는 인공위성을 만들어 이것을 현실화시켰습니다. 신화가 역사의 또 다른 이름이라면 <삼국유사>에 담긴 우리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이론화 시켜야 할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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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2)김원중역.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년. 33-35쪽
3)서거정 등. <동국통감>.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43쪽에서 재인용
4)1962년에 서기 연호로 고쳐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음
5)국사편찬위원회 . <고등학교 국사>(상). 2000년
6)윤내현.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 지식산업사. 2007. 31쪽
7)오창훈 외 <고등학교 한국사> 지학사. 2014. 20쪽
중국의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으로 들어온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어 위만왕조를 열었다.(기원전 194)(중략)
그러나 고조선의 성장에 불안을 느낀 한무제의 침략과 지배층의 내분으로 위만 왕조는 멸망하였다.(기원 전 108)
첫댓글 몸이 불펺해 잠시 카페를 떠나 있었습니다.
처서가 지나 날씨가 많이 누그러지니 조금 견딜만 합니다.
하루하루가 보람된다면 나머지 인생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열정을 다해 사는 카페 가족 모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오랜만에 글을 뵈어 반갑습니다 더위도 가시고 9월이 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역사가
새롭게 쓰여져야 되겠네요 선생님
나즈막히 풀벌레 소리도 들리고-
찔끔거리는 빗소리에 가을이 다가섭니다.
마지막까지 손에 잡고 싶은 책 몇권 중
<삼국유사>는 저나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참으로 소중한 책입니다.
삼국유사는 승려 一然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로,
주로 신라와 불교에 관한 내용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는 정도로 간단하게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읽고 나니 새삼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삼국사기가 正史라면 삼국유사는 野史에 해당하는데, 이는 승려 일연이 삼국사기를 正史라고 존중하면서
삼국사기에 채 실리지 못한 단군조선, 가야, 이서국 등의 기록과 수많은 불교 설화 및 향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배웠습니다.
선생님의 염려와는 다르게, MB 때부터 역사 과목을 등한시 하는 분위기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점점 멀어져 가는 듯 안타까움도 가지게 됩니다.
큰 공부가 되는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