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보의 일두 고택 사진을 보고 생각해 낸 에피소트
명보 김영술 친구가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을 방문하고 촬영해 온 사진을 내 카페에 탑재해 놓았다.
실물보다 더 실감나게 찍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2018년의 일이 떠올랐다.
2018년은 우리 동기들(4회)이 진주 교육대학교를 졸업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한빛 김성기 회원의 주선으로 함양 인산가에서 5월 17일부터 5월 18일까지 1박 2일 동안 행사를 했다.
이튿날 두레 와인동굴 ‘하미앙’과 일두 고택 방문이 계획되어 있었다.
개평마을 일두 고택에 들어서니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우리 일행 33명을 안내하는 해설사의 해설도 명쾌했다.
솟을대문을 비롯하여, 행랑채, 사랑채, 안채, 곳간, 별당, 사당 등의 사료적 가치를 인문적 측면과 관련지어 소상하게 안내했다.
그리고 벼슬길에 나아갈 때 임금님이 내린 벼슬은 사양하고 과거를 통해 공정한 경쟁으로 등용된 점을 높이 평가하는 해설을 깃들기도 했다.
또 동방의 오현 중 한사람에 들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해설을 했다.
해설을 듣고 있던 서울에 사는 여자동기 한 사람이 해설 사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 수많은 업적을 지닌 인물들을 보아왔다. 그런데 정여창 선생은 대표적으로 내세울만한 저서도 부족하고, 벼슬 지위도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고, 백성들을 두드러지게 잘 구휼(救恤)한 업적도 없는 것 같은데 동방 오현에 속한다는데 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그 질문에 해설 사는 보충해서 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동방 오현에 속하는 인물임을 되풀이해서 강조만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해설 사에게 다가가서 “해설 사님, 제가 질문에 보충해서 설명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했더니
“좋습니다.” 라고 했다.
내가 마이크를 받아 들고 이렇게 보충해서 설명을 했다.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영역의 기저에는 ‘성리학’이 근원을 이루었다.
성리학을 일명 정주학, 정학, 주자학이라도 한다.
우리나라 성리학은 고려 말 안향이 도입하여 전수했는데 정몽주, 이색, 양촌, 권근, 정도전, 하륜, 길재 등 많은 학자들이 성리학을 공부했다.
성리학에는 두 가지의 큰 강령이 있다.
하나는 忠臣不事二君(충신불사이군)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또 하나는 烈女不更二夫(열녀불경이부) :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고려조에서 벼슬했던 사람이 조선조에서도 벼슬한 사람은 두 임금을 섬긴 셈이 된다. 이는 강령을 어긴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진정한 성리학자로 보기에는 미흡한 것이다.
이들과는 달리 정몽주는 지조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정몽주를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 : 동방 성리학의 원조라 했다.
야은 길재는 정몽주의 제자로서 조선 조정으로부터 태상박사의 벼슬을 받았지만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면서 이를 거절하고 금오산으로 은둔하여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 이 때에 소년 김숙자(金叔滋)가 야은 길재의 제자가 되어 경서를 배우고 후일에 그것을 아들 점필자 김종직(金宗直)에게 전수한다.
성리학의 법통을 설명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리학의 도통 계보를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이어진 후 이언적 이황으로 계승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일두 정여창 선생은 높은 벼슬로서 현달한 분이 아니고 성리학의 법통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하여 학문의 발전을 꾀한 대학자로서 존경을 받은 것이다.
그런 업적이 높이 평가되어 동방 오현으로 칭송되고, 또 대성전 문묘(文廟)에 배향된 18현(賢)에 속하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보충해서 설명을 했더니 해설사도, 동기들도 박수로서 화답했던 기억이 떠올라 여기에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