榮山作別四十年-영산포를 작별한지 어언 40여년 榮山江楓每日變-단풍잎 그림자에 물든 영산강 하루가 다르겠지 三鶴頂上雲平浮-구름은 삼학도위를 담담하게 흐르고. 生前再相榮山橋-숨 쉴 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옛 영산강 다리 今河溝堰水满满-이제는 하구언(河溝堰)에 물이 가득차서 多侍鳗鱼尾巴吧-다시면(多侍面) 뱀장어 다시 꼬리 치겠지 一別握手榮山橋-그 옛날 작별할 때 영산교에서 악수하고 昨夜夢中無表情-어제 저녁 꿈속에서 표정 없이 만났네!! 농월(弄月)
꿈에 본 전라도 생활 6년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
필자는 전라도 사람들과 인연(因緣)이 있는 것 같다. 군복무시절 모 사단사령부 부관부인사과 상벌계에 근무했는데 그 시절에는 군 부대에서도 상장이나 표창장등을 붓글씨로 썼다.(한자(漢字)를 넣어서)
필자 선임병장이 전남광주 사람이었는데 붓글씨를 한자는 못쓰도 한글은 정말 잘 썼다. 선임병장이 제대 할 때까지 필자에게 친절히 잘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붓으로 한글을 쓸 때는 그때 배운 글체를 쓸 때가 있다.
1975년부터 1981년 6년까지 전남 광주 회사지점 책임자로 근무하였다. 그 시절 초만 해도 고속도로가 없을 때였다. 서울은 대도시고 부산을 비롯한 대구나 대전 전주 광주등은 완전 시골로 구분될 때였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 도매가격이 서울이 1000원할 때 지방은 1300원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대기업 회사들이 전국 도(道)단위 대도시에 지점(支店)을 개설한 것이다.
회사의 광주지점에 화재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것을 수습해야 되는데 아무도 갈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광주를 가느니 회사를 사퇴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대전지점 책임자로 있는 필자가 광주로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발로 뛰는 시절이었다. 시장 개척을 위해 전라남북도 군(郡)이상은 전부 직접 찾아가서 사람을 만나 영업거래처를 만들어야 했다. 산간벽지(山間僻地)인 진안 무주 장수는 물론이고 진도(珍島) 완도(莞島) 섬까지 소륵도도--
단 한군데 못가본곳이 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세연정(洗然亭)이 있는 보길도(甫吉島)다. 그 섬은 영업거래처가 아니라 고산의 정원(庭園) 유적지(遺蹟地) 답사였다. 멋있는 현판 글씨 세연정(洗然亭)을 보기 위해서다. 완도나 목포에서 배를 타면 되는데 “아끼다 똥 된다”는 말처럼 오늘 간다 내일간다 하다가 그만 못가고 말았다.
그때 광주를 중심으로 전주 대전 목포에만 국도(國道) 2차선 버스도로가 포장되어있었다 군(郡)소재지로 가는 길은 전부 비포장도로였다. 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이야기다. 그때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그때 호남이나 광주 사람들은 “경상도는 박정희가 있기 때문에 군(郡) 도로(道路)가 전부 포장되었다” 고 하였는데 잘못 알고 있는 말이었다. 필자가 대구 부근 진주부근 함양 산청 까지 갔는데 호남과 똑 같은 비포장도로였다.
필자 광주생활 6년은 총알이 오고가는 5.18광주사태를 눈앞에서 겪었다. 시작과 끝을 광주시내 한 중심에서 총소리와 연기 속에서 겪기도 하였다. 평생 기억에 남아있는 추억의 기간이다.
필자가 개척한 거래처가 약 100여개가 있었는데 한 결같이 관계가 좋았다. 임기가 다되어 떠날 때 그래처에 수금(收金)하지 못한 외상값이 많았다. 그때 금액으로 수십 수백만원이면 큰돈이다.
거래처 사장님들이 신임 지점장과 인수인계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하여 돈이 아니면 물건을 반품하여 업무에 지장없게하여 그동안 잘 지내왔던 관계에 누가 되지 않겠다고 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서 6년간 그 복잡한 영업을 마감하는데 결손(缺損)없이 깨끗이 정리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꿈같이 감사한 일이다.
영업을 떠나서 특별히 잘 지내던 사이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영산포 거래처다(오래되어 상호를 잊었음) 영산포에서 농기계를 취급하는 사람이었다. 필자보다 나이 훨씬 많은 분이었다. 아주머니가 더 반갑게 대해주었다. 필자 나이 30대 초반이라 만나면 “데령님(도련님)”이라 했다.
영산포는 특히 홍어(洪魚)가 유명하다. 홍어(洪魚)를 삭히기 위해 홍어(洪魚)를 독가니에 넣고 그 안에 볏짚을 같이 넣는다. 그리고 며칠 후 독을 열면 톡싸는 독한 홍어냄새에 눈물이 나고 코를 막고 돌아선다.
이 홍어회(洪魚膾)와 막걸리는 아주 궁합이 잘맞다. 거기다가 아주머니가 일부러 필자 때문에 나주(羅州)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오기도 했다 해남. 강진. 혹은 목포. 함평. 영광 .무안. 남평. 나주 등을 출장 시에는 마지막에 영산포에 들린다. 홍어회와 막걸리 한잔하기 위해서다.
전라도에는 명승고적이 많다. 특히 정자(亭子) 누정(樓亭)이 많다.
영산강 주변에는 누정(樓亭)의 보고(寶庫)다. 영산강을 따라 다시면(多侍面) 무안 방향의 하류에는 많은 작은 정자(亭子)와 누정(樓亭)과 마주친다. 그중 함평의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洗心亭)이 멋있다.
이렇게 정자가 많은 것은 영산강의 빼어난 절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자(亭子) 누정(樓亭)은 영남보다 호남이 많은 것 같다(확인은 못했지만) 사실 필자는 영남지방은 호남처럼 많이 다녀 보지 못했다. 필자 개인 생각이지만 호남(湖南)을 예향(藝鄕)이라 하는 것은 이런 정자(亭子) 유산이 많은 것도 원인이 아닐까
華構臨江闊-넓은 영산강가에 화려한 정자(亭子)에서 新詩倚醉題-취한 술기운에 새로운 시(詩)를 지어보네. 亭外炎署隔-정자(亭子) 밖에는 무더위가 타는 듯하고 簾外水雲低-주렴 밖에 물구름은 나직이 떠도네 임서(林㥠)
호남은 역사 속에 빼어난 학자들도 많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기대승(奇大升). 사암 박순(思庵 朴淳). 면앙 송순(俛仰 宋純).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풍암 임복(楓岩 林復). 연파 박개(烟波 朴漑). 백호 임제(白湖 林悌)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당대의 학자들이다.
인진왜란 금산전투에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장군은 학자요 장군이었다. 아들 셋과 목숨을 바치면서 막내아들과 가족을 안동 하회마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의집으로 피난 보낸 것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고경명(高敬命) 가족은 유성룡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유성룡 아들과 고경명 손자가 유성룡 집에서 과거에 같이 급제를 하였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화(동양화)의 남종화(南宗畵)를 개척한 추사 김정희 제자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이다.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나 소치삼절(小痴三絶)로 불린 국보적 존재다. 현재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의 옛 주인이다.
소치(小痴)의 남종화(南宗畵) 개척이 없었으면 오늘날 한국화(韓國畵)는 중국화(동양화)의 아류(亞流)에 머물렀을 것이다. 한국화와 중국화가 어떻게 다른가?
간단히 말해 한국화는 사실(寫實) 산수화(山水畵)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라고도 한다. 겸재(謙齋) 정선(鄭歚)이 대표적인 화가다.
한국화에 비해 중국화는 상상속의 신선화(神仙畵)같은 판타지(Phantasy) 그림이라 볼 수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꿈을 그렸다는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영상하면 된다.(현재 일본소유다)
필자가 원체 호남 전 지역을 돌아다니니까 주위사람들이 하는 말이 “당신은 전라도 사람보다 전라도를 더 잘 아니까 본적만 바꾸면 전라도 사람” 이란 말까지 하였다.
어제 저녁에 영산포 꿈을 꿨다. 꼭 43년 전 어느 날 생시 같았다. 그 “영산포 농기계 점포” 아주머니를 어젯밤 꿈에 만났다.
데령님 오셨어라 ! 저기 대청에 한심 주무시시오~~ 마룻바닥이 엄청 시원한 게 내 한 사장한테는 싸게 연락할것이니께~~
옛 시인이 말하기를 思念以夢想出現이라 ! 그리움은 꿈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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