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에 대하여
"성직자와 어린소녀들을 사랑하는 남자, 판타지와 지루한 수학교수, 몽환적인 이야기꾼과 논리학자... 이 정반대되는 성향이 어떻게 양립될 수 있었을까? 바로 이 인물들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지 않고서는 그 점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 장 가텐노, <루이스 캐럴의 세계>
루이스 캐럴, 본명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라는 이 호리호리하고 내성적인 이 빅토리아 시대의 수학 교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었으면 아마 역사 속으로 잊혀져 버렸을 것이다. 당대의 재능있는 수학자이긴 했지만 수학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업적을 세운 것은 아니고, 뛰어난 인물사진가이긴 했지만 아마 사진사 연구자들에게나 관심을 끌었을 테니까.
그러나 도지슨이 그의 꼬마친구 앨리스 리델에게 주려고 쓴 앨리스 2부작은 사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그는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을 써서 수학자이자 자연인인 도지슨과 동화작가로서의 루이스 캐럴을 엄격히 구별하려고 노력했지만, 앨리스 2부작과 그 뒤에 발표한 <실비와 브루노> 등의 작품 속에는 논리적 역설을 사랑하는 수학자의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복잡한 인물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별다른 굴곡이 없이 평온하고 유복했다. 그의 일생은(1832-1898) 흔치 않게도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기간(1837-1901)과 거의 일치한다.
국교회 사제의 아들로 형제들이 10남매나 되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안정된 어린시절을 보낸 그에게 평생의 직장이었던 옥스퍼드 대학은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재능있는 사람들, 지성인들, 기인들이 모여드는 쾌적한 분위기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다. 65세에 약한 기관기염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을 유지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였고 더할 나위없이 성실한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처럼 여왕을 존경하였고, 앨리스 리델의 아버지였던 헨리 리델 학장의 개혁적인 정책에 끈질기게 반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완고한 고집불통은 아니었다. 탁월한 유머감각의 소유자이며, 어린이, 특히 소녀들에게는 최고의 친구였고, 당대의 유명인사들과도 폭넓은 친분을 맺었다. 그의 고질적인 말더듬과 수줍음 타는 성격, 성적인 미성숙함(그는 연애다운 연애조차 한번도 못해보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등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면이다.
특히 예술에 대한 로맨틱한 감수성은 그의 보수적인 성격을 완화해 주었다. 그는 감상적이고 신비적인 라파엘 전파 회화에 매료되었으며 연극애호가이기도 해서,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나 연극배우 엘렌 테리 등 당시의 손꼽히는 예술인들과 교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애정을 쏟았던 친구들은 뭐니뭐니해도 어린이들, 특히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가 어린 소녀들과 맺은 우정은 지금까지 수많은 억측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그가 찍었던 소녀들의 누드 사진과 페도파일(아동 성애)을 연관시키는 경향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그의 보수적이고 소심한 성격과 극히 신중한 태도, 그리고 어린이 누드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관념 등을 지적하고 넘어가는 데서 그치기로 한다. 빅토리아 시기의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어린이의 누드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나 영감을 상징했다. 도지슨은 철저히 부모들의 허락과 감독 하에서만 사진을 찍었고, 그 소녀들이 자라났을 때 대부분의 누드사진들은 부모들에게 되돌려주거나 폐기되었다. 그가 찍은 누드 사진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단 네 점뿐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인물사진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이 점을 떠올릴 때는 당시만 해도 사진술은 아직 초기에 있었고 매우 복잡한 기술을 필요로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새로운 표현방식에 즉각 매료되어 많은 어린 소녀들이나 유명인사를 찍은 훌륭한 사진들을 많이 남겼다.
수학자로서의 도지슨은 탁월한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형식논리에 대한 그의 연구는 <상징적 논리Symbolic Logic>등의 저서를 통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틴 가드너에 따르면 그가 독보적으로 기여한 분야는 "수학 레크리에이션"이다. 그가 루이스 캐럴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 픽션과 운문들, 어린 소녀들에게 보낸 편지, 일기에서는 다양한 수학 게임, 퍼즐, 논리적 역설, 수수께끼, 말놀이, 게임의 규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수학 퍼즐들을 진정으로 즐겼으며 (어린이들이 좋아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수학 퍼즐 책도 발간했다.
그 자신은 매우 도덕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그가 꼬마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나 어린이들을 위해 쓴 동화들의 내용은 교훈이나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그런 동화는 매우 드물었으며, 루이스 캐럴의 작품은 당시의 교훈적이고 형식에 치우친 표현방식과 대조되어 아주 새롭고 기념비적인 것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아이들에 대한 그의 이해심 많은 사랑과 호감의 산물이었으리라.
거울 나라 속의 거울 이미지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 Glass)"는 거울의 대칭과 역전에 대한 농담으로 가득차 있는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삽화 속에 거울 나라의 비전이 드러나 있지 않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존 테니얼의 삽화는 종종 캐럴의 텍스트에 있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앨리스가 벽난로 위의 거울을 통과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테니얼은 이 장면을 앨리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광경과 거울 밖으로 나오는 광경으로 나누어 한 쌍의 삽화로 그렸다. 이 두 장의 삽화는 (앨리스를 제외하고) 서로 거의 완벽하게 대칭을 이룬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스탠다드 에디션에서는 대개 이 두 개의 삽화가 책 한 장의 앞 뒤에 오도록 배치되어 있다. (시공사판 앨리스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물리적인 책장이 바로 앨리스가 뚫고 들어가는 거울면이 된다.
테니얼은 우리가 거울 밖에서 볼 때는 가려져 보이지 않던 부분에 대해 만화가다운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벽난로 위에 거울을 등지고 놓인 시계와 화병이 거울 속에서는 왠지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이겠지? 그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벽난로 아치에 달린 장식 무늬도 두 번째 그림에서는 혀를 삐죽 내밀고 있다. 테니얼은 이 삽화의 거울 이미지에 어찌나 충실했던지 자기의 서명까지도 뒤집어 놓았다. (첫번째 그림에서는 좀 흐릿하게 보이지만 오른쪽 아래, 두 번째 그림에서는 왼쪽 아래에 있다.)
앨리스의 모습으로 말하자면, 이 그림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앨리스는 거울을 통과한 후에도 좌우가 뒤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주1] 둘째는, 이 삽화는 두 장으로 되어 있지만, 앨리스의 자세로 미루어 볼 때 시간적으로 같은 순간을 다른 시점에서 찍은 샷이라는 사실이다. 두 그림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앨리스를 하나는 뒤에서, 하나는 앞에서 보고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앨리스는 두께가 없는 거울면(혹은 책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3차원성을 갖는 피사체가 된다.
이와 비슷한 주제의 반복이 트위들덤과 트위들디가 등장하는 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쌍동이 트위들덤과 트위들디는 그 자체로 거울의 대칭을 나타내는 캐릭터들이다. 거울 대칭 놀이는 그들의 집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두 개의 표지판에서부터 시작된다.
TO TWEEDLEDUM"S HOUSE : TO THE HOUSE OF TWEEDLEDEE
앨리스는 이 표지판을 보고 얼마 가지 않아 트위들덤과 트위들디와 맞닥뜨린다.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나무 밑에 서 있었다. 한 남자의 옷깃에는 "덤"이라고 수놓아져 있고, 또 한 남자의 옷깃에는 "디"라고 수놓아져 있어서 앨리스는 금방 누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앨리스는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 등 쪽 옷깃에는 둘 다 "트위들"이라고 쓰여 있을 거야"
트위들덤과 트위들디가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는 삽화를 보면 마치 종이인형처럼 평면적이어서 반으로 접으면 딱 맞아들어갈 것 같다. 역시 서로가 서로의 거울 이미지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만약 테니얼이 여기에 좀더 세심함을 발휘했더라면 트위들덤의 왼쪽 옷깃에 수놓아진 "DUM"을 오른쪽으로 옮겨놓아 대칭을 맞추었을지도 모르겠다.
테니얼은 조금 뒤에서 트위들덤과 트위들디의 거울 이미지를 조금 은밀한 방식으로 한번 더 활용한다. 트위들덤과 트위들디가 서로 싸우려고 무장을 갖추는 장면의 삽화를 자세히 보면, 이 쌍동이 형제는 서로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하고 있다. (손가락 모양과 옷자락이 뒤로 끌린 모양에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둘 사이의 대칭면이 책의 지면에서 어슷하게 비껴져 있기 때문에 기계적 대칭이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두 피사체가 보다 입체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도는 고전 회화에서도 종종 발견되는데, 특히 수학적 구도와 양감을 중시한 르네상스 회화들 중에 많다. 라파엘로는 <갈라테아의 승리>에서 이러한 기법을 대가다운 능숙한 솜씨로 구사하였다. 하늘에서 갈라테아를 겨누고 있는 세 명의 아기 천사 중 좌우의 두 명은 서로 대칭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시선의 방향이 화살의 방향을 따라 자연스럽게 중앙의 갈라테아로 연결되기 때문에 이 점은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그림 양 옆 끝에서 뿔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들의 동작도 서로 비스듬한 대칭관계에 있지만 이 역시 금방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 그림은 얼핏 봐서는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주변 인물들은 이렇게 전후, 좌우로 서로 대응관계에 있으면서, 서로의 동작을 모방하고 변주하며 전체의 구도에 이바지하고 있다.
얘기가 샌 김에 한 발 더 나가 보자. 이러한 수법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림이 그보다 한 세대 앞서 그려진 그림인 폴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찬의 순교>이다. 이 그림에서 성 세바스찬을 겨눈 여섯 명의 궁수들은 척 보기에도 둘 씩 세 쌍이 동작의 짝을 이루고 있다. 뒤쪽 두 명, 앞쪽 양 끝으로 두 명, 그리고 앞쪽에 수그리고 있는 두 명. 엄밀히 보면 대칭은 아니고, 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인물을 다른 방향에서 보고 반복하여 그린 것이다. 실제로 조각가 출신이었던 이 화가의 작업실에는 활쏘는 모습을 한 작은 모형 조각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폭의 그림 안에서 한 피사체의 동작을 여러 시점에서 반복, 모방하는 수법은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적 느낌을 불어넣고, 대칭적 구도의 균형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서양 미술에서 대칭적 형상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즉 모든 대칭에서는 "중심"이 있으며, 대칭의 기준이 되는 위치에 있는 것은 항상 주변의 것보다 우위에 있다. (앞의 두 그림에서도 모든 대칭은 중앙의 인물들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다. 많은 종교화에서는 그 자리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차지했다.) 이것이 대칭이 내포하는 위계적 의미이다.
그런데 루이스 캐럴의 대칭에는 중심이 텅 비어 있다. 앨리스는 처음에 두께나 무게가 없이 하늘거리는 "중심"의 사이를 천막을 찢듯 뚫고 나온다. 앨리스는 정상과 역전 사이에서 어지러워하다 결국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 사이에서 여왕의 왕관을 쓰고 중심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칭의 균형을 깨부수어 버리고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믿거나 말거나... 정말이지, 나도 이 얘기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異常-,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영국의 수학자 겸 작가 L. 캐럴의 동화. 캐럴이 고전학자 H.G. 리델의 딸인 앨리스 리델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J. 테니얼의 삽화를 넣어 1865년 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어느 여름날 앨리스는 하얀 토끼를 따라 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땅 속에 있는 이상한 나라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는 먹는 음식에 따라 키가 커지거나 작아지고, 트럼프의 카드들이 재판을 하는 등 갖가지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앨리스는 이 이상한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꿈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이다.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으며 전세계의 환상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줄거리
앨리스라는 소녀가 꿈 속에서 토끼굴에 떨어져 이상한 나라로 여행하면서 겪는 신기한 일들을 그린 동화이다. 작가인 루이스 캐럴(1832~1898)은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수학교수를 지낸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아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했고 한쪽 귀도 들리지 않았으나 어린이를 좋아하고 어린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겨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어린 친구 앨리스와 앨리스의 자매 로리나, 이디스와 함께 강에 나가 놀던 중 소녀들이 졸라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앨리스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눈물의 연못에 빠지기도 하고 기묘한 동물들과 만나는 등 우습고 재미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담배 피우는 애벌레, 가발 쓴 두꺼비, 체셔고양이, 비둘기 같은 희한한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고 이상한 나라 재판에도 참석한다. 또 트럼프 나라에 가서 여왕과 함께 크로케경기도 하고, 안고 있던 아기가 돼지로 변하는 황당한 일도 겪는다. 이상한 나라에는 기쁨도 있고 눈물도 있으며, 터무니없는 오해에다 억울한 누명 등 전혀 반대되는 일들이 한없이 뒤죽박죽 얽혀 있다.
루이스 캐럴은 어린이를 어른에게 부속된 존재로 여기지 않고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였다. 풍부하고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인 이상한 나라는 어린이의 내면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상이다. 그는 어린이들이 그 새로운 세상에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쳐 또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읽고 느낀 점
앨리스의 이상한 여행은 한편의 백일몽의 변주일지 모른다. 앨리스의 경이로운 모험은 생물학적 성장을, 소녀에서 여성으로의 변신을 가리키는지 모른다. 불가사의한 현실과 논리의 무한순환이 결과한 비논리의 세계가 바로 앨리스의 경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트럼프들이 활보하며 만들어내는 게임의 세계. 정신착란자들이 만들어내는 질서. 인 더 루프에 여덟 명의 앨리스의 분신이 어른으로의 성장을 위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영원한 성장의 꿈을 꾸는 시각이미지체험자들.
이 전시의 리뷰를 쓰게 된 동기는 매우 희한하고도 우연한 만남의 결과일지 모른다. 우연의 연속이 필연의 운명을 만든다는 것처럼 이 글은 전적으로 우연한 만남과 필시 내가 타고난 어떤 불합리한 충동에 의할 것일지 모른다. 씁싸름하고 거무튀튀한 음료수를 마셔버리고는 이들 엘리스들의 여행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는지 모른다.
(2)
아시다시피 루이스 캐롤(Lewis Carrol)은 여성이 아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왠지 생물학적 성를 교란시킨다는 느낌이다. 숫자들의 세계. 논리의 세계. 게임의 세계에 깊이 빠져있던 루이스 캐럴은 조숙한 소녀를 사랑한 그저 평범한 수학자이기도 언어학자이기도 수수께기, 게임마니아이기도 하다. "그의 책은 특히 어린 소녀들을 즐겁게 해줄 갖가지 것들을 담고 있는데 기묘하고 이국적이며 찬란한 단어들과 재미있는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심층적인 즐거움은 의미와 무의미의 놀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얽힘일 것이다.(들뢰즈)"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이 사모한 소녀이고. 소녀 앨리스는 조숙한 소녀 로리타의 변신일지도 모른다. 앨리스가 앓고 있던 조숙하다는 비합리적 징후는 루이스 캐럴이 앓고 있던 몽상이라는 징후와 균형을 이루며 널뛰기를 한다. 오락가락하는 이 징후들의 운동. 징후와 은유와 게임이라는 운동. 이 운동을 타고 무의미와 역설과 우스꽝스런 말들이 춤을 춘다.
왜 하필 토끼일까? 왜 토끼가 세계들을 넘나드는 열쇠일까? 몇 년전 본 우디 알렌의 "섹스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는 하얀 토끼 수 십 마리가 서로 뒤척이며 웅성대며 번잡거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토끼는 성징(性徵)이 아닐까? 소녀 엘리스는 토끼를 따라 새로운 성적 환영의 세계를 엿본 것은 아닐까? 토끼는 물을 마시면 죽는 존재인데, 이것은 또 어떤 상상을 유발할까. 끊임 없이 토끼굴로 떨어지는 앨리스. 목이 길어진 앨리스. 커졌다 작아졌다하는 앨리스.
작은 병에 든 이름모를 액체를 마셔버리는 앨리스. 앨리스는 매번 중얼거린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군?" 작은 병 속의 액체를 마심으로써 죽음이라는 상징적 변신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아닐까? 액체는 물이며 바로 생명의 탄생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액체는 알코올일 수도 물일 수도 아니면 정액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불순한 연상들의 파도가 친다. 아, 정말 이상한 기분이군?
19세기를 살아가는 어린 소녀 앨리스, 혹 루이스 캐럴의 얼굴일지도 모르는 소녀의 백일몽은 현실에서는 맛볼 수 없는 기묘한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시작도 끝도 없는 미궁을 이룬다.
(3)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작은방" 구성원들이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서로 알게 되었다. 그곳은 괴리감이나 동경,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며 우리들은 그것들을 소통이나 통로의 문제, 또는 탈출, 모순과 같은 각자의 입장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작은방모임)"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조각과 "작은 방"팀 8명은 스스로 앨리스임을 자임하고는 8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진 이상한 체험의 공간, 경이의 방을 꾸민다. 그들의 "작은 방"은 왠지 루이즈 부르조아의 "The Cell"을 떠올리게 하는데, 우연일까?
이들 "작은 방"팀에게 각각의 방은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양육하는 공간이다. 방들의 문을 따고 들어가는 행위는 또한 방을 나서는 행위이다. 방은 실제 삶의 현실로부터 유리되어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과 끈을 잇고 있는 공간이다. 밖의 현실로부터 빛이 들어오면 방안의 이미지들은 그 빛에 반사되고 중첩되어 진동한다. 동요한다. 방은 이미 하나의 역설이다. 밖이며 동시에 안(內)인 역설.
방은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또한 무언가로부터 이탈하기 위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이공간과 저 공간을 가르는 것일지도, 어쩌면 경계를 가르며 분리하고 파열하는 운동 그 자체가 바로 방일지도 모른다. 방이란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닌 안식(安息)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각각의 분할된 공간들 사이로 반투명한 흰색의 섬유질이 늘어서 있다. 이 섬유질을 통해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비친다. 각각의 방은 사건들이 머무는 곳이며 또한 시간이 머무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마르께스의 "백년간의 고독"에 나오는 시간이 정지한, 시간이 머문 작업장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머무는 마술적인 효과는 현실의 한줄기 바람에 휙 날아가 버린다. 시간이 머문 곳의 모든 사물은 그렇게 날아가 버린 바람의 그림자로 남는다.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은 현실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앨리스는 알고 있었다."
(4)
경이와 역설적인 사건들은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시간에 쫓긴다. 무언가 실체를 알 수 없는 약속과 예정된 사건에 의해 항상 바쁘게 쫓겨다닌다. "작은 방"팀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사실 이렇게 쫓기듯 달아나는 사건들을 가두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갇혀버린 시간들과 8개의 임의적인 방들 사이로 현실의 재판관들이 배회하며 침입하려고 시도한다. 현실은 광기와 역설과 어뚱함과 정신분열을 통과해야 한다.
각각의 방들은 어떤 인과적·필연적 관계도 거부한 채 정지된 갇혀버린 사건으로 독립해 있다. 이 각각의 방에 8명의 앨리스들은 매우 자의적인 사건들을 구성하고 있는데, 각각의 앨리스들에게 발생한 백일몽과도 같은 사건들은 우리의 의식에 어떤 논리적 연상도 일으키지 않는 채 단지 부유하는 표면으로만 존재한다.
인 더 루프에서 앨리스는 이렇게 탄성을 올렸다. "아, 나는 너무너무 신기한 꿈을 꾸었어!"
<앨리스> 시리즈의 매력
"나는 평원에 있는 한 마을에서 몇 푼의 루피와 성경 한 권을 주고 그것을 얻었지요. 그 사람은 이 책을 읽을 줄 몰랐어요... 그는 말하기를 자신의 책이 "모래의 책"이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책도 모래도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이라나요"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모래의 책>
북미 루이스 캐럴 학회지의 편집장이자 평생에 걸친 캐럴리안(루이스 캐럴 애호가)인 마크 버스타인이라는 사람이,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2부작을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에 비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래의 책"은 무한한 페이지 수를 가진 책으로, 보르헤스의 동명의 단편 속에 등장한다. 이 책의 첫 페이지와 끝 페이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페이지를 집어도 그 사이에는 다시 무한한 수의 페이지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페이지 번호가 무작위로 붙어 있으므로 한번 열어본 페이지를 다시 찾는다는 것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책은 사실 무한한 점들로 이루어진 실수 직선의 완벽한 재현이다. 수학자 캐럴이 들었으면 흥미있어 했을 이야기이다.
황당무계한 내용의 짧은 동화 두 편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길래 어린이, 어른, 심지어 점잔빼는 학자들까지 사로잡는 것일까? 아동문학 전문가들은 이 책이 교훈과 무관하게 오로지 순수하게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학자, 철학자, 자연과학자들은 이 동화가 현대적 물리 법칙이나 난해한 철학 논리를 비유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 이야기들에는 모두 어느 정도의 진실이 들어있다. 그러나, <모래의 책>이야말로 이 책이 지닌 비밀의 핵심이다. 그리고 내가 앨리스 이야기에 매료된 진짜 이유이다.[주1]
나는 개인적으로 앨리스 책을 "문이 많이 달린 책"이라고 부르곤 한다. 앨리스를 읽는 것은 양쪽으로 문이 끝없이 달린 무한히 긴 복도를 걷는 것과도 같은 경험이다. 각각의 문 뒤에는 서로 전혀 다른 다채로운 세계가 존재하지만,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열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초록색의 긴 복도 말이다. 그러나 이 복도가 멋진 것은 이 문들을 모두 다 열어 확인해 본다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중에 고작 몇 개의 문만 열어봤을 뿐인데, 앨리스 책의 매력은 항상 "아직 열어보지 못한 문" 뒤에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있을 뭔가를 기대하는 설레는 마음 속에 있다.[주2]
나는 앨리스 이야기라는 하나의 줄거리 배후에 무한한 이야기의 가지들이 비선형적으로 뻗어있다고 상상한다. 앨리스 이야기는 개연성이 결여된 순수하게 무작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주3], 마치 평행 우주와도 같이 무작위적인 다른 무한한 수의 이야기들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앨리스 이야기의 현기증 나는 비밀이다. 그 가지들은 또한 서사가 아닌 분석이나 해석으로도 뻗어져 있으며, 이미지나 소리, 심지어는 하나의 숫자나 공식이나 가장 하찮은 쓰레기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지난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서히 만들어져 온 이 가지 - 혹은 그물 - 의 구조는 웹의 비선형적인 구조에 잘 들어맞는다.
누구나 앨리스를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한다. 수학자인 마틴 가드너는 심리학이나 정치학 하는 사람들이 앨리스 이야기를 정신분석이나 정치 비평의 이상한 영역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불평했지만, 앨리스 책은 이미 창조자인 루이스 캐럴의 손에서 멀리 떠나버린 뒤였다. 심지어 약 하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마약을 했을 때 눈앞에 보이는 비전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런 소란들은 바로 이 책이 이미 걸작이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사이트를 통해서 내가 하려는 일은 앨리스 이야기라는 나무에서 뻗어나간 잔가지들을 탐색하는 일이다. 끝없는 복도에 늘어선 문 뒤를 살짝살짝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 모험은 우리를 어떤 황당한 장소로 데려다 놓을지 모른다. 앨리스를 읽는 것은 무작위성, 우연성, 애매모호함의 세계 속에서 벌이는 흥미진진한 모험이다.
카오스이론 [-理論, chaos theory]
원리적으로는 확정되어 있으나 장래 예측이 불가능한 현상. 그리스어 khaos에서 유래하였다. <혼돈>을 뜻하며 매우 불안정한 현상을 가리킨다. 카오스의 연구목적은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상 속에 숨어 있는 정연한 질서를 끄집어 내어 새로운 사고방식이나 이해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과학이 어떤 하나의 법칙에서 하나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 비하여 카오스는 몇가지 효과가 서로 작용하여 질서나 무질서 상태가 된다는 점을 다룬다. 난류는 가장 뚜렷한 카오스의 예로, 물을 처음 가열할 때는 매우 질서 있게 움직이다가 가열이 심해지면 대류의 흐트러짐이 생기고 차츰 무질서한 상태가 된다. 해류의 흐름이나 대기의 흐름 등 자연계의 흐름 대부분이 난류이며, 이곳에서 카오스가 발생한다. 이 밖에도 나뭇잎의 낙하운동, 조혈작용 등의 생체현상, 전력의 흔들림, 지진발생 메커니즘 등과 우주에 대해서는 시공의 구조와 블랙홀 부근의 별의 운동 등에서 카오스적인 현상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카오스 연구는 수학·물리학·기상학·생물학·의학·천문학·경제학 등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코스모스 [cosmos]
정연한 질서로서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 그리스어인 kosmos에서 유래하였다. 대응하는 말은 세계 생성 이전의 혼돈을 나타내는 카오스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가치적인 관점과 융합한 또는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근대 이전의 세계상을 가리킨다. 이 말은 원래 <정돈> <장식> <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성이 복장이나 화장에 몰두하는 상태나 군대나 사회의 규율·질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뒤에 자연계의 질서가 잡힌 양상을 나타내는 데 전용되어 결국 <세계의 질서> 또는 질서가 관철된 <세계>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루이자 메이 올콧 (Louisa May Alcott) - 1832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시작한 학교와 이상주의적 공동체가 실패하자 올컷의 가족들은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십대 중반에 이르러 그녀는 가족의 생활비를 보조하기 위해 잡지와 신문에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남북 전쟁의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1862년 올컷은 간호사로 일하기 위해 조지타운으로 간다. 그녀는 거기서 장티푸스와 폐렴에 걸려 건강이 나빠지지만, 그때의 풍부한 경험을 살려 1863년 <병원 스케치>를 출간함으로써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힌다. 또한 1868년 처음 발표한 세계 고전문학의 하나인 <작은 아씨들>은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의 청소년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녀는 작품 소재를 주로 자신의 가족과 어린 시절에서 찾았는데 <작은 아씨들>과 그 속편인 <좋은 아내들>이 그 결과이다. <작은 신사들>, <활짝 핀 장미>, <조의 아이들>도 잇달아 나왔다.
작은 아씨들 - Bestseller Worldbook 26 / 루이자 메이 올콧
물론 맨 첨 작은아씨들을 읽었을 때 본 책은 유아용의 다른 출판사 것이었다.
아, 작은 아씨들! 얼마나 열심히 읽어댔던가. 또 비록 어메리칸,청교도 냄새 팔팔 난다 해서 어린애들에게 순영향을 미치는 이 소설의 교육적 공로를 깎아내릴 순 없다.
나중에, 원본 구해서 자세히 샅샅이 읽어볼 날이, 정녕 올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죠오는 깊이 생각해 볼만한 캐릭터. 미국에도 이런 극단적인 성질머리 여자가 있군. (오, 신기신기;)
제일 좋아하는 장면: 어느 낙엽 쌓인 숲길에서 머리핀 다 떨어뜨리며 요란하게 뛰어가는 죠오(자기 작품 완성이 거의 보여서 매우 기뻐했던 것 같음) 를 로리가 멀찍이 뒤따라가면서 그 핀들 다 주워주던 것.
권장 소비자 : 정말 좋아하는데 성격차로 헤어진 애인이 그 후로도 사이좋은 친구로 지내는 것에 분통 안터뜨릴 사람;
1.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1868년)과 《비밀의 화원 The Secret Garden》(1911년)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출판되어 오랫동안 대중의 인기를 누려 온 작품이다. 우리 나라에도 ‘세계 명작’으로 소개된 이래 꾸준히 사랑을 받아 왔고, 최근 완역본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2) 두 작품은 모두 매력 있는 여주인공을 낳았는데, 사실 나와 같은 세대의 여자들한테는 지금도 머릿속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야 깨닫는 거지만, 그 여주인공들은 자신들이 갖춘 자질을 마음껏 발휘하며 인생을 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여자였기 때문이다.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과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은 당대의 성 역할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뛰어난 자질을 지닌 여주인공들의 운명을 당시 사회가 허용한 테두리 밖으로 넓히지 못했다.
살아있는 한 사람을 백 마디 말로도 정의할 수 없겠지만 한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여자’ 아니면 ‘남자’가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성은 개인의 특성과 운명을 크게 좌우한다. 한 사람을 남자 또는 여자로 특징짓게 되는 사고, 태도, 가치, 행동 양식 같은 개인의 특성을 가리켜 성 역할이라고 한다. 흔히 ‘여자답다’거나 ‘남자답다’는 말을 하는데, 거기에는 우리 사회가 여자나 남자에게 기대하는 특성과 역할에 대한 관념이 들어 있다. 사람은 평생 동안 성 역할을 학습하게 되는데 특히 어린이들은 부모를 비롯한 성인들의 행동을 보고 성 역할을 배우며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그 역할을 적용하며 익힌다.
성 역할은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에 작용하며 문학 작품에도 반영되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영향을 준다. 프로이트를 선두로 융, 베텔하임 같은 학자는 동화가 사람의 무의식에 작용하여 아동기의 성 역할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3) 또 문학 작품에서 구체적인 이야기와 문제는 구체적 인물에 의해 이미지로서 부각되며, 그 이미지는 구체적 남녀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동화는 어린이의 성 역할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4) 이런 점에서 어린이 문학 작품이 성 역할의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또 어떻게 새로운 성 역할을 개척해 왔을까 하는 문제는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다.
루이자 올콧과 프랜시스 버넷이 활동하던 19세기, 20세기 초에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 종속되었을 뿐 아니라 남성과는 아주 다른 존재로 생각되었다. 남성은 창조자, 발견자, 행동하는 사람으로 사회에 나아가 공적 영역에서 삶을 적극 개척했고, 반대로 여성은 사적 영역을 지키며 남성을 위안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성의 주된 역할은 어머니이자 아내였고, 이상적인 여성상은 여성의 영역을 지키는 ‘가정의 천사’였다. 가정의 천사인 여성은 본성이 순결하고 착하며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여성은 독립된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자아 말살, 의무, 희생을 통해서만 자신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5) 이러한 성 이데올로기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문학 작품에도 반영되었다. 남자아이들은 “소년의 모험 이야기”를 읽었는데 여자아이들에게는 그와 다른 이야기가 알맞다고 여겨졌다. 여자아이들은 행동하는 세상을 동경했지만, 그 세계에는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정숙한 여성의 폐쇄된 삶을 미화하거나 여성들의 세계를 실제보다 넓어 보이게 하며, 로맨스와 정신적인 성숙을 솜씨 있게 결합시킨 소설을 읽었다.
6) 이러한 소설을 가정 소설이라고 하는데 앞의 두 작품은 대표적인 가정 소설에 들어간다.
아래에서는 두 작품에서 작가의 성 역할 관념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고, 여자 주인공의 역할이 어떻게 제한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 그러면서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나 성 역할이 요즘 아이들의 성 역할 형성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2.
네 자매의 성장과 꿈, 가정사를 다룬 이 소설은 19세기 미국 가정 소설에 속하며 1868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은 아씨들’은 남자들이 군대에서 고생하는데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9쪽)고 가르치는 집안의 네 자매다. 네 자매는 성격이 저마다 달라서, 큰딸 메리는 허영기가 있지만 아름답고 정숙하며, 둘째 조는 활달하고 열정이 넘치며, 셋째 베스는 부끄럼이 많지만 단정하고 헌신적인 천사와 같고, 막내 에이미는 귀여운 백설공주형 소녀다. 네 자매는 그 시대 여자들에게 요구되던 미덕을 각자 나누어 가지고 있다.
소설의 중심에 있는 둘째 조는 상당히 남성적이며 장난기 그득하고 개성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남자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휘파람을 불며”(11쪽) 상스런 소리도 잘 한다. “메리가 선머슴 같은 행동 그만하고 좀 얌전하게 처신”하라고 하자 조는 “숙녀 따윈 난 싫어!”(12쪽) 하고 외친다.
“난 나이가 차서 미스 마치라고 불리는 것도 싫고, 기다란 드레스를 입는 것도 싫어.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얌전한 척하는 것도 싫어. 노는 거든 일하는 거든 남자들 생활 방식을 좋아하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게 참을 수가 없어. 게다가 지금은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원망스러워. 마음은 온통 아빠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싶은 생각뿐인데 집구석에 틀어박혀 할머니처럼 뜨개질이나 해야 하다니.”(12쪽)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조도 “엄마의 착한 딸들이 되고, 자기 책임을 성실히 실천하고, 내부의 적과 용감하게 맞서고,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작은 아씨들에 대해 더 큰 애정과 자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대하고서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겠다(19~20쪽)고 다짐한다. 여기서 조에게 맡겨진 일이란 당연하게도 그 시대가 여성에게 요구한 책무, 그러니까 가정에서 조신하게 집안일을 돕는 것을 말한다.
《작은 아씨들》은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Louisa May Alcott, 1832∼1888)의 자전적 소설로서 올콧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브론슨 올콧은 고전과 철학, 사회 개혁과 교육 개혁 문제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대신 경제적인 면에서는 무능했기에 집안 형편은 어려웠고, 그것이 작품에서 마치네가 생활고를 겪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루이자 메이 올콧은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아버지의 철학과 이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아버지의 철학과 고결한 정신적 이상을 작품의 한결같은 바탕으로 삼고 있다.
조를 비롯한 딸들은 자상하고 헌신적인 어머니와 집을 떠나 있지만 딸들에게 도덕적인 행동 지침과 교훈을 주는 아버지를 통하여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규범을 익힌다. 생활에 불만을 터트릴 때도 있지만 엄마의 충고를 듣고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엄마의 충고를 들은 자매들은 엄마가 《천로 역정》에 나오는 천사처럼 절망의 수렁에서 자신들을 건져 주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엄마의 말씀대로 하자.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되려는 건 또 다른 천로 역정 놀이일 뿐이야.…… 우리가 아무리 착해지고 싶어도 너무 힘들거나 그래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고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될 때마다 천로 역정 이야기가 도움이 될 거야.”(22쪽)
브론슨 올콧은 자녀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 《천로 역정》에 묘사된 것처럼 행동하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었는데 ‘작은 아씨들’도 《천로 역정》의 교훈을 익히려고 노력한다. ‘베스, 미의 궁전을 발견하다.’, ‘에이미, 굴욕의 계곡에 굴러 떨어지다.’, ‘조, 마왕을 만나다.’, ‘메그, 허영의 시장에 가다.’와 같은 소제목은 작가가 《천로 역정》에서 따 온 것이기도 하였다. 그 각 장에서는 《천로 역정》의 순례자들이 고난의 언덕을 두려움이나 의심 없이 사자(死者) 곁을 통과하여 극복하는 것처럼, 네 자매가 작은 고난을 겪지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베스는 고난을 통해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용기를, 에이미는 잘난 척하지 않는 겸손을, 조는 열정과 급한 성미를 극복하고 자기 부정과 절제의 달콤함(117쪽)을 배우며, 메그는 사치와 허영을 극복하는 미덕을 배운다. 이렇게 자매들은 인내와 절제를 통해 가정을 잘 지킬 수 있는 여성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던 어머니 마치 부인은 그 시대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던 바람직한 여성의 전형으로서 딸들에게 언제나 상냥하게 교훈을 들려 주며 모범이 된다.
“난 내 딸들이 아름답고, 교양 있고, 훌륭한 여성으로 자라나길 바란단다. 다른 이들로부터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받길 바라며, 행복하게 잘 지내다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해 행복하게 살면서 근심과 슬픔이 없는 보람되고 즐거운 삶을 누리길 바란단다.…… 난 내 딸들이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되길 진정으로 바라요.…… 그 때를 기다리면서 네 자신을 잘 준비해 두면,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네게 맡겨질 의무들을 기꺼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단다.”(138쪽)
딸들은 “사랑하는 얼굴에서 묻어 나는 인내와 겸손은 그 어떤 현명한 훈계나 통렬한 비난보다도 훌륭한 어머니의 교훈”(113쪽)을 받아들여 ‘내부의 적’을 조심하고, 정숙한 숙녀가 되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네 자매는 때때로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에 지쳐 힘들어하고 쉬고 싶어한다. 그래서 여름 휴가를 맞아 일 주일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휴식만을 취하는 실험을 하겠다고 한다. 어머니는 놀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 깨닫게 하기 위해 그 실험을 허락한다. 당연하게도 집안은 엉망이 되고 자매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할 경우 얼마나 불편을 겪게 되는지 깨닫는다. 어머니는 음식을 망친 조에게 ‘여자라면 알고 있어야 할 요리법을 배우라’고 말하고(164쪽) ‘권태와 나쁜 유혹에서 지켜 주고, 육체와 정신에도 좋은 일’(165쪽)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런데 이렇게 딸들에게 교훈을 들려 주는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어린 딸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먼저 모범을 보이며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 주신 분”(115쪽)은 아버지다. 이야기 내내 아버지는 부재 상태지만 아버지의 철학과 도덕은 굳건하게 이야기의 바탕에 깔려 있으며 어머니의 입으로 들려 주는 교훈도 결국 아버지의 지휘 아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천로 역정》의 순례자와 같이 딸들이 씩씩하게 이겨 냈다며 만족스러워한다. 허영심이 있던 “메그의 손바닥에 (바느질을 하다-인용자 주) 바늘로 찔린 자국이 선명하며, 딱딱해져” 있는 것을 본 아버지는 “하얀 손이나 뛰어난 재능보다도 가정을 행복하게 해 주는 여자의 손길이 훨씬 더 중요하다.”(300쪽)고 말한다. 그리고 조에게 말한다.
“머리는 저렇게 짧게 잘랐지만, 내가 일 년 전에 두고 떠난 ‘아들 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구나. 대신 깃을 똑바로 세우고 구두끈을 단정하게 묶은 젊은 아가씨가 있을 뿐이지. 이젠 예전처럼 휘파람을 불지도 않고, 점잖지 못한 소리를 하지도 않고, 양탄자에 벌렁 드러눕지도 않고 말이다.―중략―목소리도 낮아진데다, 뛰어다니는 대신 조용조용 움직이고, 어떤 꼬마를 엄마처럼 돌보다니 아빤 정말 기쁘다.”(300쪽)
아버지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딸들은 《천로 역정》의 ‘크리스천과 호프풀이 온갖 역경을 겪고 나서 일 년 내내 백합이 핀 어느 상쾌한 초원에 도착하여 행복한 휴식을 취하는 것’(302쪽)과 같은 기분이 된다. 드디어 아버지의 인정 아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숙녀가 된 것이다.
당당하고 적극적인 조도 그 시대에 맞지 않는 자신의 남성적이고 열정적인 기질을 결점으로 여기며 갈등하지만 부모의 도움으로 착하고 순종하며 헌신적인 조로 변신함으로써 결국 그 시대에 적합한 숙녀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며 그에 만족하게 된다. 어느 날 할아버지와 다툰 테디가 조에게 몰래 빠져나가서 어디로든 여행을 가자고 말하자 조는 ‘답답한 생활이 지겨웠고 변화가 그리웠으며 자유에 대한 매력’ 때문에 무모한 계획에 마음이 흔들린다. 하지만 자신의 낡은 집에 시선이 닿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한다.
“내가 남자라면 너랑 같이 도망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지만 난 여자야.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난 얌전히 집에 있어야 돼. 그러니까 날 유혹하지 마.”(287쪽)
결국 남성 지향적인 조는 슬프지만 여자기에 가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였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갖지 못한 것이다.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도 조처럼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을 타고났지만 아버지가 요구한 전통적 여성의 미덕을 지켰으며 평생토록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자기를 희생하였다. 올콧의 분신인 조도 남성적 역할을 추구하지만 숙녀로서 자질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열정을 가라앉히며,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안도한다. 어쩌면 작가 올콧은 자신이나 조가 아무리 남성적인 역할을 추구하여도 그 시대의 성 이데올로기로 인해 좌절하고 말 것을 미리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작가가 아버지를 배반하고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독립적이며 진취적인 삶을 살았다면 어떠했을지 궁금해진다. 좀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조도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열정과 기질을 당당하게 발현시킬 수 있었다면 더 멋있지 않았을까?
루이자 메이 올콧은 이 작품 이후 매우 진보적이고 여성 해방론적인 글들을 썼다. 하지만 《작은 아씨들》에서는 시대가 요구한 여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네 자매를 그려 놓았다. 결국 네 자매는 집안에서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에 만족하는 순종적인 여성상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은 분명 우리 시대에 적합한 역할은 아니다.